깜삐돌리오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
오영욱 지음 / 샘터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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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녀 온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찬란했던 그 곳에 대한 기억일까, 아니면 입 안 가득 넣고 오물거렸던 핫초콜릿의 쌉싸름함일까. 나 자신을 발견하고 돌아오는 과정. 여행에 관한 글을 읽으면 그들의 외로움이 먼저 들린다. 

아르노 강가에서 스케치북 하나 찢어달라는 외국인에게 오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엽서 크기의 종이 12장이 묶여 6유로가 나가는 종이를 찢어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어쩌면 종이의 값이 아니라 그릴 수 있는 그림 한 점이 통째로 달아나는 느낌이었을 테다. 그만큼 소중한 그림이 펼쳐져 있는 이 책을 들고 있으니 작가가 이 그림들을 그렸던 그 시간 모두를 내가 가진 느낌이다. 

여행은 내가 집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든지 모든 것을 가지고 떠나든지 다시 돌아왔을 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기억이라는 단 한가지. 찰칵! 소리가 나는 카메라 셔터소리를 대신해서 슥슥 소리가 나는 펜으로 여행지에서 본 것을 그림으로써 표현한다. 단지 나는 그림 한 점을 보는 것 뿐인데도 많은 것을 느낀다. 어떤 것을 찍을까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또 어떤 것을 이 종이 위에 그려넣을까 고민하는 작가의 시간과 감성, 그 모든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기억에 대한 집약. 작가가 끄적 거려놓은 짧은 메모는 한참동안 생각하게 만든다. 당신은 도대체 무얼 보고 어떤 것을 느낀 건가요, 라고 외치고 싶게끔. 공감이 일지 않는다고 말하기보다 작가가 느꼈을 감정을 이해하고 싶은 애틋함이 더 크게 느껴진다. 


p.71
지구가 잠시 자전을 멈춘 듯
세계는 어둠 속에 묻혀 고요하다.
그 침묵을 깨우는
방음시설이 형편없는 호스텔의
요란한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인류의 문명을 느끼게 해준다.

p.223
여행을 시작한 지 1년째 되는 날이다.
다만 지구는 작년 이날과 거의 비슷한 위치로 돌아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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