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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가지 색깔로 내리는 비
김미월 외 지음 / 열림원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서점에서 책을 보고 손길이 멈춘다. '비'라는 단어 앞에 그냥 내려 앉는다, 걸음이, 가슴이. 그럼에도 책을 열지 못하고 그저 쓰다듬기만 한다. 비가 뭐라고,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보다 제목이 눈에 띄는 건 비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이 무너져내리기 때문이라고 할까. 이토록 비 앞에서는 막무가내로 무너져 내리면서도 다른 책을 가슴에 품고 나오고 만것은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 흔, 들, 리, 겠, 구, 나, 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내게 왔다. 흔들리면 어떠하겠는가, 젖으면 어떠하겠는가, 이미 비는 내리기 시작한 것을.
일곱가지 색깔로 비가 내린다. 책을 읽는 동안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도 했고 빗소리에 잠을 깨기도 했고 비였으면 하고 바랬음에도 눈이 내리는 날도 있었으며 흐린 날보다는 맑은 날이 더 많았다. 그래서 비가 좋은 것일까? 쉬이 만날 수 없는 날씨지만 기대하지 않고 있으면 내리고야 말아주는 친절함, 혹은 톡!톡! 떨어지는 비가 주는 애달픔 그보다 더 큰 그리움 그리고 아릿함. 책을 읽기도 전에 난 표지 속 여자가 되어 비를 맞고야 만다. 책은 내게 어떤 비를 내려줄까? 첫 번째와 두 번째 비를 이야기 해 보자.
# 살랑 살랑, 봄비 - 티슈, 지붕, 그리고 하얀 구두 신은 고양이, 장은진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건 따뜻한 바람도, 조금은 낮아진 하늘도 아닌 봄비이다. 차가움에도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 따뜻한 봄비. 그 봄비가 차갑지 않은 것은 비 속에 담긴 봄의 생명력 때문일 것이다. 곧 새싹이 나올 것 같은 싱그러움, 연한 노란색과 초록색을 떠 올리게 하는 봄비. 그 비가 책의 첫 이야기에 담겨 있다.
세상에서 해야할 일이 이제 하나도 남기지 않은 것 같은 한 남자, 세상에서 이보다 더 큰 배신, 상처를 받은 사람은 없다고 말해도 될 것 같은 한 남자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저 침묵하고 그저 비를 맞고 그저 해바라기를 한다. 고양이와 함께. 그때 그 남자 위로 내려오는 티슈 하나. 그 티슈가 봄비처럼 보인다, 내게는. 그렇게 그 남자 모르게 혹은 티슈의 주인공도 모르게 구름에는 물방울이 모아지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상처에는 시간이 흐르면 새살이 돋는다, 새싹처럼. 곧 다 괜찮아질거야라고 말하는 봄비가 첫 이야기에서 내리고 있다.
# 잿빛 하늘에서 내리는 비 - 대기자들, 김숨
'철' 이란 소설을 통해 김숨을 알았고 '물'을 통해 김숨에게 스며들었다. 김숨이란 작가에게 빠져들었기에 읽기도 전에 기대감으로 가슴에 바람이 분다. 싱그러운 봄바람이 아닌 잿빛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전에 부는 청아하면서 깊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예쁘지도, 싱그럽지도 않은 비가 내린다. 그럼에도 비는 익숙하다. 우리 삶 속에서 가장 자주 내리는 비가 내린다. 향기도 색깔도 없지만 투박하게 비가 죽죽 내린다. 조금은 답답하게 조금은 삭막하게 하지만 비는 땅을 적시고 있다, 분명.
'대기자'들은 좋았다. 내가 잿빛 하늘을 좋아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굵은 빗속에서 축 처진 어깨와 어찌할 줄 모르는 불안한 떨림을 누군들 가져보지 않았을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어른인채로 살아가야하지 않는가. 대기자인채로.
책 속에서 더 만나게 되는 5개의 비. 그 비를 한 번을 읽었음에도 스며들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한번 더 만나봐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비를 만나고 또 비가 내게 스며들다 보면 작가의 독특한 시선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비'가 내렸다. 싱그럽기도, 비가 생각나는 것이 아닌 비가 내릴 때 길에 흐르는 검은 물만이 생각나는 비도 있었으며, 하늘에서 땅에 닿을 때까지의 비가 되어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리고...앞으로도 비는 내릴 것이다. 그 때마다 이 책의 누군가가 혹은 어떤 구절이 생각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