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에밀리 디킨슨 이야기를 꺼냈으니 결국 린 마굴리스 이야기도 해야 할 것 같다. 시인과 생물학자라는 직업상 영 무관해 보이는 두 사람의 만남은 1988년에 마굴리스가 매사추세츠 대학 애머스트 캠퍼스에 교수로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녀가 살게 된 집의 바로 옆집이 디킨슨의 생가 겸 박물관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마굴리스는 이웃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여 디킨슨의 시에 푹 빠져들었으며, 그로부터 10년 뒤에 간행한 <공생자 행성>에서는 각 장의 서두에 디킨슨의 시를 인용할 정도가 되었다. 사후에 간행된 기념 문집 <린 마굴리스>에도 "에밀리 디킨슨의 이웃"이라는 제목으로 테리 Y. 앨런의 회고가 수록되었을 정도다.


그런데 앨런의 증언에 따르면 마굴리스는 디킨슨에게 푹 빠진 나머지 갖가지 "이단적인" 주장까지도 기꺼이 포용하고 말았다. 즉 평생 독신이었던 저 여성 시인이 "주인님"이라 지칭한 남자에 대한 주장은 물론이고, 그녀의 시가 은밀한 성생활에 대한 암호화 기록이라는 주장까지도 옹호하며 출판까지 주선했던 것이다.


이렇게 파격을 좋아하다 못해 종종 무리수를 두는 것이야말로 린 마굴리스의 평소 성격이었는데, 대표적인 업적으로 간주되는 세포의 공생 발생 이론이라든지, (제임스 러브록과의 공동 연구로 탄생한) 가이아 이론 역시 오늘날에는 상식처럼 되었지만 처음에만 해도 상당한 논란을 일으킨 이단적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존의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심지어 에이즈 부정론이라든지 9/11 음모론에 대해서까지도 찬동했다는 (심지어 기념 문집에 유일하게 수록된 마굴리스 본인의 글 역시 일각의 9/11 음모론을 옹호하는 내용이다!) 것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념 문집에 나온 또 다른 지인의 증언처럼 남성성과 여성성과 페미니즘을 죄다 싫어했고, 쿠바의 카스트로는 칭찬해도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은 싫어했으며, 웬델 베리의 강연을 듣다 자리를 박차고 나갔지만 결국 서로 친해졌다는 등의 종잡을 수 없는 행적을 보면,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이 맞았던 것도 같다.


다만 만사를 편 가르는 데 익숙해진 지금의 관점에서 그녀의 행동은 마치 좌충우돌처럼, 또는 모두에게 미움받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치 작은 개체가 큰 덩어리를 이루어 생존한다는 점에서 공생의 좋은 사례라며 그녀가 사망 직전까지 각별히 애호했다는 큰빗이끼벌레가 한때 모두의 미움을 받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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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매장에 필요한 책이 하나 있어서 구입하려고 보니 배송비 내기가 아까웠다. 7,500원짜리 책을 더 고르면 되는데 아무리 뒤져도 관심 가는 것이 없기에 고민하다가 무려 22,600원이나 되는 비비안 마이어 도록을 함께 주문해 버렸다. 사실은 이것 자체만 해도 2만 원이 넘어 무료 배송이니 배보다 배꼽이 커진 격이다.


사진 찍는 메리 포핀스로 유명한 이 무명 사진가의 사진집이라면 <나는 카메라다>와 <셀프 포트레이트>를 이미 갖고 있었지만, 이런 책들과 달리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2022년 한국에서도 개최된 전시회 도록이라고 하니 또 무슨 내용일지 궁금했던 것이다. 수록된 해설 역시 기존 사진집에 수록된 것과는 달라 보였다.


노란색 종이 재질 하드커버로 이루어진 말끔한 도록을 받아서 훑어보니 기존 사진집에 수록된 것과 중복되는 작품도 일부 있었지만, 처음 보는 작품도 제법 있어서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괜찮았다. 사진 예술에 관한 논의에 치중한 해설보다는 가족의 기구한 사연을 발굴해 서술한 생애 부분이 흥미로웠다.


또 하나 특이했던 점은 뒤표지에 수록된 에밀리 디킨슨의 인용문이었다. 프랑스어로 작성되었기에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는데, 판권면에 "에밀리 디킨슨이 엘리자베스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 1856년 1월 20일, 네덜란드, 에밀리 디킨슨 아카이브"라고 나오기에, 구글링 끝에 그 편지의 영어 원문을 찾아 읽어보았다.


에밀리 디킨슨 박물관이라는 홈페이지에 올라온 원문인데, 텍스트 입력 과정에서 띄어쓰기 오류며 오타가 발생해 읽기에 편하지는 않았지만, 여하간 비비안 마이어 도록 뒤표지에 실린 인용문이 "나는 등불을 가지고 바깥에 나가서 나 자신을 찾고 있다"(I am out with laterns, looking for myself)임은 알 수 있었다.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며 '사람'을 찾는다고 말했다는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일화가 떠오르는데, 이 편지는 디킨슨이 지인인 엘리자베스 홀랜드(Elizabeth Holland)에게 보낸 것으로 나온다. 즉 판권면의 설명에서 "네덜란드"는 "엘리자베스"의 성 "홀랜드"(Holland)를 "홀란드(네덜란드)"로 오독한 결과물로 보인다.


이미 갖고 있는 디킨슨 편지 선집(EMILY DICKINSON: SELECTED LETTERS, ed. by Thomas H. Johnson. Cambridge, MA: The Belknap/Harvard University Press, 1958, 1971, 1986)을 보니 이 편지가 들어 있지 않기에 어째서인가 서문을 살펴보니, 이 책 출간 당시인 1958년까지 확인된 편지는 그게 전부였다고 한다.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그 사이에 민음사에서 디킨슨의 편지를 번역한 선집이 나온 모양인데, 혹시 그 책에는 위의 인용문의 출처인 편지도 수록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시 번역본도 그 사이에 여러 가지가 더 나온 듯한데, 지난번에 말했듯이 민음사와 파시클의 번역본은 오역이 없지 않으니 피하는 게 상책일 듯하다.


그나저나 왜 비비안 마이어의 도록에 에밀리 디킨슨의 인용문을 굳이 수록했을까? 어쩌면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작품을 세상에 거의 공개하지 않고 평생 혼자만 간직했다는 공통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울러 사후에 가서야 뒤늦게 세상에 알려져 큰 찬사와 명성을 얻게 되었다는 또 다른 공통점 때문일 수도 있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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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까마귀가 행인을 습격하는 일이 빈번해졌다는 뉴스가 나온다. 문득 <새>라는 소설과 영화가 떠오르며 결국 조류 아포칼립스로 가는가 싶어 무슨 맥락인지 살펴보니, 가로수에 둥지를 지어 놓은 까마귀가 경계 본능이 발동한 나머지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을 적으로 인식한 까닭이라 한다.


당장 환경 파괴, 지구 온난화, 명품백 수수, 고가 기내식 등이 구체적인 원인으로 제시되는 듯하지만, 일단은 자연에서보다 도시에서 먹이 구하고 천적 피하기가 쉬우니 까마귀도 머리를 쓴 결과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뾰족한 해결책이 없어서 행인에게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것만이 현재로선 최선이라니 답답하다.


일본 만화 <산적 다이어리>를 보면 수렵 면허를 가진 주인공이 농가의 의뢰를 받고 공기총으로 까마귀를 퇴치하러 나서는 일화가 나오는데, 이때에도 그 새는 워낙 똑똑하기 때문에 상당히 골치를 썩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영리해서 잘 적응한 놈이니 그 숫자며 영향력이 늘어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이치가 아닐까.


서울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까마귀 숫자가 늘어나서 소음과 오물과 미관(?) 피해가 적지 않다는 이야기를 꽤 오래 전부터 들었던 것 같은데, 딱히 천적도 없는 상황이라면 당분간은 까마귀가 득세하는 세상이 제법 오래 갈 것 같다. 적어도 까마귀가 정력 증진 효과가 있다는 연구 보고서가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까마귀의 영리함에 관해서는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가 <솔로몬 왕의 반지>에서 잘 설명했었다. 고기 조각을 손으로 집어서 먹이는 방식으로 까마귀를 길들였더니만, 한 번은 야외에서 소변을 보려고 지퍼를 내리고 자지를 꺼내자마자 까마귀가 '오, 고기!' 하고 날아와 쪼는 바람에 혼비백산했던 일화도 나온다.


까마귀의 영리함이 대략 이 정도이니, 당분간 도심 한복판의 가로수 근처를 지나갈 때에는 혹시 머리 위로 까마귀가 날아오는지 각별히 주의해야 하겠고, 혹시나 낌새가 이상하면 재빨리 피해야 하겠으며, 아울러 남성의 경우에는 설령 취중이라 하더라도 감히 노상방뇨를 시도해서는 절대로, 절대로 안 될 것만 같다.



[*] 글을 쓰다 보니 베른트 하인리히의 까마귀 책이며, 마츠바라 하지메의 까마귀 책이며, 아나 토렌트의 까마귀 영화 노래며 등등이 연이어 생각나는데, 지금으로선 딱히 끼워 넣을 곳이 없어 다음 기회로 미룬다. Porque te 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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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6월이면 서울국제도서전에 찾아가던 때도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딱 10년 전인 2014년에 다녀온 이후로는 영 가지 않게 되고 말았다. 나귀님 기억으로는 90년대 초부터 다닌 것 같으니, 대략 20년 넘게 거의 매년 찾아가던 행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외면하게 된 셈이다.


나귀님 같은 독자의 입장에서 도서전은 단지 책을 구경하고 싸게 구입하는 기회일 뿐만 아니라,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무료 배포하는 도서목록도 챙기고, 나아가 현장에 나와 있는 출판사 관계자에게 이런저런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고 답변을 얻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마지막 몇 번은 참가하는 출판사 숫자도 크게 줄었고, 부스마다 판매며 이벤트에 열중하다 보니 정작 책에 대해 물어볼 기회도 없어지면서, 이제는 굳이 입장료까지 내 가면서 갈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굳어지게 되었고, 그러면서 결국 자연스레 발걸음이 끊어지게 된 듯하다.


해외에서 도서전이라 하면 근간 및 신간 도서를 소개하고 판권을 교섭하는 출판인들만의 행사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책을 홍보하고 판매하는 전시회로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저 책을 전시하고 할인 판매하고 각종 이벤트까지 곁들이는 행사 정도로 인식된다.


그나마도 잘만 운영하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매년 각종 논란이 곁들여지곤 해서 문제다. 지난번에는 이전 정부 블랙리스트 작성 관여 인사가 주최측에 포함되었다고 해서 논란이 있었고, 이번에는 행사 수익금 처리 문제며 과도하게 비싼 참가비 등으로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이전부터 말이 많았던 도서전인데, 이번에는 정부와 대놓고 설전까지 벌이고 있으니, 이러다가는 머지않아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애초부터 성격이 애매한 행사였으니, 이번 기회에 차라리 싹 없애 버리고 대신 와우북처럼 책 할인 판매 행사를 벌이는 게 차라리 나을까.


그나저나 2024년 서울국제도서전의 주제는 무려 '후이늠'이라 하는데, 이건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나라에서 야만적인 인간 '야후'와 달리 이성을 갖춘 말들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도대체 왜 하필 '후이늠'일까 궁금해서 공식 홈페이지에 찾아가 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 2024 서울국제도서전 주제전시는 우리가 바라는 세상으로 가기 위한 지도를 그립니다. ‘후이늠’의 세계가 해법이 아니라면 어떤 방식으로 미래를 그려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 나눕니다. 막연한 낙관을 넘어서 기꺼이 환대할 현실을 모색합니다. 함께 '후이늠’을 키워드로 큐레이션된 400권의 도서를 통해 후이늠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세상의 비참’을 줄이고 ‘미래의 행복’을 사유하며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



또 이런 설명도 있다.



>>> 심술, 둔감, 무지, 변덕, 호색, 오만, 고집, 무례, 비겁, 야비, 잔인, 사악, 거만, 비굴, 추악, 교활과 같은 말은 인간의 어두운 면을 묘사할 때 쓰는 말이다. 이런 어두운 면들은 인간이 자기만 더 먹고, 더 갖겠다는 욕망을 만들고 서로의 이해에 따라 편을 가른다. 침략, 약탈, 살인과 전쟁은 어둠의 가장 비참한 결과이다. 걸리버는 여행에서 이런 면이 전혀 없는 종족, '후이늠'을 만난다. 이성적, 상식적으로 완벽한 ‘후이늠’의 세상을 만들면, 우리는 전쟁을 그칠 수 있을까? 유능한 인공지능은 우리 미래에 ‘후이늠’이 되어 줄 것인가? ‘후이늠’의 세계가 해법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미래를 그려야 할까?


우리는 배려, 민감, 지혜, 믿음, 사랑, 유연, 예의, 용기, 격조, 품위, 인정, 겸손, 아름다움, 정직 같은 말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2024 서울국제도서전은 독자들과 함께, 우리가 바라는 세상으로 가기 위한 지도를 그린다. 지난 300년간 지도를 그리기 위해서 길을 찾아 헤매었던 걸리버, 사람과 같은 법적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 중인 제돌이와 함께 출발했다. 95년 만에 저작권의 굴레에서 벗어난 미키 마우스에게도 길을 청했는데, 여전히 상표권에 매여 있어 뒤에 숨어 함께 간다. 함께 나선 독자들과, 뒤에 숨어 따르는 모든 이들이 걸리버의 발자취를 따라, 후이늠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세계의 비참’을 줄이고 ‘미래의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도서전 측의 설명만 보면 후이늠의 세계를 미래 사회의 한 가지 이상으로 삼겠다는 것 같은데, 하고많은 이상향의 사례 중에서 왜 하필 그것인지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실 풍자 문학인 <걸리버 여행기>에서 후이늠은 어디까지나 야후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장치일 뿐이니까.


아울러 스위프트의 소설에서도 후이늠이 하나부터 열까지 이상적인 존재로만 묘사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걸리버는 인간 사회의 온갖 문제점을 열거하며 후이늠 사회의 미덕을 예찬하지만, 정작 거기도 주인과 하인의 신분 차별이 있고 야후를 천시하는 편견이 있다.


급기야 후이늠은 걸리버가 말하는 야후로서 이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다른 야만적인 야후 떼를 선동하여 사회에 위협이 될까 우려하여 축출하기까지 했으니, 제아무리 이성적인 말대가리라 하더라도 불안이나 공포 같은 비이성적인 감정까지 억누르지는 못했던 셈이다.


즉 후이늠의 세계라고 완전무결까지는 아니니, 어떤 면에서 이번 도서전의 주제 설정은 지나친 의미부여 같기도 하다. 물론 2023년과 2022년과 2021년의 주제가 각각 '비인간'과 '반걸음'과 '긋닛'이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처럼 뜬금없어 보이는 전시 내용도 새로운 전통인가 싶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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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펀드에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이라는 것이 있기에 뭔가 궁금해 눌러 보니, 제목 그대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각종 밈들을 모아가지고 그 기원과 발전에 대해 설명하는 책인 모양이다. '밈'이라고 하면 도킨스의 책에 나오는 개념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각종 '짤방'을 일컫는 명칭이 되더니, 지금은 동영상도 가리키는 모양이다.


과거에도 이은집이니 서정범이니 하는 저자들이 고등학생과 대학생의 유행이며 유행어를 엮은 책이 있었다고 기억하니, 이제는 인터넷 밈을 엮은 책이 나오는 세상이 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을 법하다. 아직 나오지 않은 책의 샘플 페이지를 보니 '개죽이'처럼 나귀님의 눈에도 익은 것들이 보인다.(그나저나 '개벽이' 주인 양반은 알라딘에서도 활동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샘플 페이지에 나온 사진 가운데 이른바 "노동요"라는 유명한 인터넷 동영상의 화면을 캡쳐한 것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제목 그대로 일하면서 듣기 좋은(?) 중독성 높은 음악을 여러 곡 엮어놓은 동영상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번 책에서는 <세서미 스트리트>의 캐릭터인 머펫 엘모의 모습에 핵폭발 장면을 합성한 화면에 대한 분석이 주로 이루어지는 듯하다.


그런데 나귀님의 입장에서 각별히 흥미가 갔던 것은 그 제작자의 또 다른 유튜브 동영상 "이마트"였다. 이마트에서 사용하는 로고송 가운데 하나를 장시간 빨리 재생하는 것으로 "노동요" 못지않게 인기를 끌었다고 알고 있는데, 원곡 자체를 예전부터 좋아했던 나귀님으로선 지금 와서 대형 마트 로고송을 거쳐 인터넷밈으로까지 자리잡았다는 사실이 살짝 황당했다.


문제의 노래는 제임스 미치너의 연작 단편을 토대로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이 만든 유명한 뮤지컬 <남태평양>에 나오는 "해피 토크"인데, 적진 정찰 임무를 부여받고 최전선에 파견된 장교가 짬을 내서 원주민 마을에서 휴식을 즐길 때, 미군 부대 옆에서 장사를 하는 원주민 여성 블러디 메리의 딸인 예쁜 아가씨와 물에 들어가 헤엄을 치며 꽁냥꽁냥할 때에 나온다. 


블러디 메리는 장교에게 자기 딸과 결혼해 그냥 이곳에 눌러앉아 살라고 유혹하지만, 그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화를 내며 딸을 데리고 떠나 버린다. 이후 장교는 그 지역의 유지인 프랑스인 농장주의 안내를 받아 적진에 침투했다가 전사하고 만다. "해피 토크"라는 노래 자체는 경쾌하지만, 그 전후 맥락에는 살짝 어두운 느낌도 없지 않은 셈이다.


아마도 이마트에서 로고송으로 사용한 이유도 바로 그런 경쾌함 때문이겠지만, 그걸 또 한 번 더 비틀어서 인터넷 밈의 일종으로 만든 것은 상당히 괴이하다고 해야 할 법하다.(하나 덧붙이자면, 나귀님이 수년 전에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이마트에 다니던 시절에는 "해피 토크"를 이용한 로고송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대신 "아직도 B컵, 엄마는 D컵"은 자주 들었지만...)


소설가 제임스 미치너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태평양 전선에 배치되어 복무했는데, 한 번은 누벨칼레도니에 갔다가 훗날 프랑스인 농장주며 원주민 블러디 메리며 하는 인물들의 모델이 된 사람들을 만났다고 전한다. 이후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한 연작 단편집 <남태평양 이야기>가 1948년 퓰리처상을 받았고, 훗날 뮤지컬과 영화로도 각색되며 큰 인기를 누렸다.


전쟁이 끝나고 10년 뒤에는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젊은 곤충학자가 누벨칼레도니에 왔다가 바로 그 프랑스인 농장주의 집에 한동안 머물며 신세를 지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풍토병에 걸려 끙끙 앓는 바람에 원래 계획한 곤충 채집은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떠나 버렸는데, 그가 바로 세계적인 개미 연구자 겸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인 에드워드 O. 윌슨이다.


또 한 가지 묘한 점은 앞서 언급한 인터넷 밈 "노동요"와 "이마트" 모두에 사용된 사진에 등장하는 엘모와 관련이 있다. 나귀님이 예전에 2번으로 <세서미 스트리트>를 시청하던 시절에는 없었던 캐릭터라고 기억하는데, 지금 와서는 드라큘라, 길쭉이와 넓적이, 쓰레기통 괴물, 노란 새, 개구리 기자 같은 기존 캐릭터들을 밀어내고 일약 프로그램의 간판이 된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에는 트위터의 엘모 계정에 "어떻게들 지내?" 하는 안부 인사가 올라오자 수많은 팬들이 각자의 삶을 하소연하며 큰 반향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 캐릭터의 움직임과 목소리를 원래 담당하던 연기자는 수년 전에 성추행 혐의로 불명예 퇴진했다고 하니, 이 사실 역시 이 인터넷 밈에 아이러니를 한층 더해주는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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