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이번 크리스마스는 산나 아누카의 그림책 두 권과 함께 보냈다. <호두까기 인형>은 꽤 오래 전에 구입했고 지금도 여전히 판매 중이지만, <눈의 여왕>은 절판이어서 한동안 헌책이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지며 제법 희귀본 행세를 하더니만 몇 달 전쯤에 운 좋게 중고 매장에서 구입한 것이다.


책을 구입하고 나서야 출판사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깨달았다. <눈의 여왕>은 2019년 7월에 문학수첩에서 간행되었다가 절판되었고, <호두까기 인형>은 2019년 12월에 아르테에서 간행되어서 여전히 판매 중이다. 그런데 후자의 권말에는 같은 삽화가의 <전나무>와 <눈의 여왕>의 표지가 한 쪽씩 들어 있다.


이를 토대로 짐작컨대, 애초에는 <눈의 여왕>의 판권도 문학수첩에서 아르테로 넘어가서 <호두까기 인형>과 <전나무>와 함께 3부작으로 출간되려던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여러 해가 지나도록 아직도 간행되었다는 소식은 없는 것으로 보아, 무슨 이유에서인지 결국 출간이 불발되고 만 것으로 추정된다.


산나 아누카는 핀란드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삽화가인데, 모국의 토속적인 장식 문양을 토대로 삼은 독특한 그림을 그려서 유명한 모양이다. 따라서 <눈의 여왕>과 <호두까기 인형> 모두 눈이 즐거운 것만큼은 사실이지만, 막상 번역본에서는 바로 그런 디자인의 특성상 아쉬움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장식 머리글자로 시작되는 일부 페이지의 경우, 영어에서는 A, B, C처럼 알파벳 하나만 적어놔도 그만이지만, 우리말에서는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본문에서 "꽃으로, 아버지는, 마리는"으로 시작되는 페이지가 있다면, 거기에 어울리는 장식 머리글자는 "꽃, 아, 마"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번역본에서는 머리글자가 나올 부분에 자음 "ㄲ, ㅇ, ㅁ"만 나와 있고, 그 다음에 "꽃으로, 아버지는, 마리는"이란 어절이 또 등장해서 어색하기 짝이 없다. 이왕 한글로 장식 머리글자를 만들었다면, 달랑 자음만 만들 것이 아니라 "꽃, 아, 마"라고 완전한 음절을 만들었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어쩌면 저자가 알파벳 이외의 낯선 철자를 새로 디자인하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시했을 수도 있지만, 설령 그 와중에 시간이나 비용이 추가되더라도, 제대로 된 한글 장식 머리글자를 만들었다는 점이 오히려 홍보 수단이 되었을 터이고, 그로 인한 가격 상승도 어느 정도까지는 충분히 용인되었을지 모른다.


과거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 개봉 당시에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한글 제목을 직접 "그려" 주었을 정도로 한국 시장 공략에 정성을 들였던 사례도 있었으니, 산나 아누카의 책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조금만 더 정성을 들였더라면 진정한 명품 그림책으로 간행될 수 있지 않았겠느냐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이다.


그나저나 안데르센 원작인 <눈의 여왕>은 정말 오랜만에 다시 읽어서 그런지 낯선 느낌이 많이 들었다. 어쩐지 졸지에 가진 것 많은 연상녀에게 휘말린 소년을 구하기 위한 소녀의 여정이라는 줄거리만 놓고 보면, 최근 읽은 오카자키 교코의 <핑크>의 줄거리와도 유사한 데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런 창작 동화의 줄거리 자체도 이른바 원형에 해당하는 민담의 모티프를 여럿 담고 있는 전형적인 내용이긴 하다. 납치-수색-탈출로 이어지는 친숙한 줄거리는 조지프 캠벨이 정립한 영웅의 여정 도식에도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 소녀를 전형적인 영웅이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문득 '왜 여성은 영웅이 될 수 없냐'고 따진 여학생에 대한 캠벨의 회고가 생각난다. 여성은 영웅을 이끄는 여신이라고 설명해도 영 불만스러워 하더라나. 마치 영웅의 여정에도 유리 천장인지 천장 유리인지가 있는 듯 보일 수도 있지만, 기질상 누군가가 탱커보다 힐러로 더 유능하다 해서 잘못일 리야 없다.


미혼 여성이야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당연한 구분조차도 차별과 편견이라 느낄지 모르지만, 애엄마가 되고 보면 "개구리 + 달팽이 + 개꼬리 = 남자아이" 조합과 "설탕 + 향신료 + 좋은 것들 = 여자아이"라는 조합의 차이를 절감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후자는 파워퍼프걸의 제조 공식이기도 하다!


최근 파워퍼프걸 그림을 표지에 사용한 빼빼로가 편의점에 깔려 있기에 무슨 영문인가 했더니만, 지난번에 뉴진스와도 콜라보를 했던 것 때문인지 뜬금없이 유행을 타는 모양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예전에 부모님 댁에서 케이블만 틀면 나와서 "애니매니악"이니 "핑키와 브레인" 등과 함께 가끔 본 기억이 난다.


파워퍼프걸의 에피소드 가운데 최근에야 알게 된 것은 그 안티테제에 해당하는 3인조 악당 남자아이들을 물리쳤던 내용이다. 힘으로는 철저하게 압도당해 패배했지만, 여자로서의 무기를 사용하라는 왕언니(?)의 조언을 따라서 므흣한 표정으로 뽀뽀를 해주자, 남자아이들이 질겁한 나머지 폭발해 자멸하고 만다.


이 대목에서 새삼 여자가 남자를 두려워하는 것만큼 남자도 여자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캘빈과 홉스>에서 소년이 소녀에게 보인 적대적인 태도의 이면에는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 못지않게 두려움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십중팔구 공격성으로 표출되다 보니 오해만 사기 십상인 것이다.


애들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웃고 넘어갈 수 있는데, 최근에는 이런 태도를 성인이 되어서까지 유지하면서 마치 남녀가 서로를 혐오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선동을 일삼는 사람도 있으니 희한한 일이다. 오죽하면 인류의 미래를 위해 아둔한 유전자를 자연 도태시키려는 갸륵한 사람이라는 비아냥마저 나올까.


암수가 만나 짝짓기를 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고, 남녀를 함께 두면 화학 반응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제도니 종교니 인권이니 다양성이니 하는 온갖 이유를 갖다 대더라도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은 차이가 있게 마련이니, 문명은 인간의 장점이기는 해도 뚜렷이 한계가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산나 아누카의 <호두까기 인형>은 분량을 맞추기 위해서인지 호프만의 텍스트 가운데 전투에 관련된 세부 내용을 일부 덜어내는 각색을 거친 듯하다. 내용 가운데 생쥐 군대의 "기마병"이니 "포격"처럼 일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인터넷에 올라온 영역문이며 다른 번역서와 대조해 보니 그러했다.


애초에 호프만은 생쥐 군대가 도구를 사용하는 지적 존재인 것처럼 서술해 놓은 듯한데, 정작 산나 아누카의 삽화본은 물론이고 로베르토 이노센티의 삽화본에서도 생쥐 군대는 그냥 육탄으로 싸우는 모습으로만 묘사되었으니, 과연 누가 맞는 것인지는 나귀님도 잘 모르겠다. 저자의 착각일까 삽화가의 오독일까.


내가 가진 완역본은 이노센티의 삽화본에 실린 것뿐이라 오랜만에 꺼내 보니 텍스트에 오타도 많을 뿐더러, 그림도 정교하긴 하지만 딱히 매력적이라고 할 만한 정도까지는 아닌 듯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그냥 내다 버리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호두까기 인형>의 다른 텍스트를 구입하기로 작정했다. 


1844년에 나온 <눈의 여왕>이 민담의 모티프를 여럿 포함한 반면, 한 세대 먼저인 1816년에 나온 <호두까기 인형>은 오히려 전형성을 벗어난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물론 마법-저주-시련-구원이라는 모티프는 유사하지만, 후반부에 인형이 소녀를 환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대목은 다채롭다 못해 정신사납다.


또 하나 의아했던 대목은 호두까기 인형/사람의 작동 방식에 대한 작중 설명이었다. 저자는 인형/사람의 입을 벌리고 호두를 넣은 다음, 뒤통수에 매달린 "땋은 머리"를 잡아당겨서 껍질을 깬다고 말한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입에 문 호두를 깨려면 차라리 턱이나 뒤통수를 탁 쳐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유튜브에 올라온 호두까기 인형의 작동 방식을 보면, 위턱/몸통과 아래턱/망토가 교차하면서 마치 펜치처럼 호두를 무는 방식이었다. 즉 책에서 망토라고 묘사한 부분이 실제로는 펜치 손잡이처럼 등 뒤로 길게 튀어나와 있어서, 그걸 꾹 누르면 아래턱이 위로 닫히면서 호두를 눌러 박살내는 원리였다.


그렇다면 원작의 "땋은 머리"도 이처럼 아래턱이 위로 다물리게 하는 장치가 되어야 맞을 테니, "길게 땋은 머리"나 "머리채를 잡아당기면" 호두가 깨졌다는 묘사는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앞부분에서는 "나무로 만든 튼튼한 머리채"를 턱에 연결해서 잡아당겼다고도 나오는데, 도통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요즘은 껍질 깐 호두가 흔하니 껍질 달린 호두를 만져 본 지도 오래다. 호두까기라면 개인적으로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빗속의 방문객>이라는 영화에 나온 찰스 브론슨의 모습이다. 범죄자를 쫓아 프랑스로 건너온 이 미국인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호두를 창틀에 던져서 깨먹는 기묘한 습관을 갖고 있다.


범인을 마지막으로 본 (하지만 어떤 이유로 차마 신고할 수 없었던) 어떤 여자 주위를 맴돌던 이 콧수염 기른 추남은 뜻밖의 순간에 등장해서 마치 상대방을 갖고 노는 듯 능글거리면서도 제법 예리하게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여자를 보호하려 한 발 물러나는 신사다운 태도를 보인다. 


영화에서 호두는 그의 개성뿐 아니라 심경 변화도 나타내는 소품이다. 평소에는 백발백중 창틀에 명중해서 깔끔하게 박살난 호두였건만, 여자를 보내고 쓸쓸히 뒤에 남은 그가 간만에 하나 꺼내서 던지자 완전히 겨냥이 빗나가 유리창이 박살나 버리기 때문이다. 놀란 그의 허탈한 표정과 함께 영화가 끝난다.


1990년대 중반쯤에 TV에서 브론슨이 출연했던 프랑스 영화인 <빗속의 방문객>과 <아듀 라미> 두 편을 연이어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저 못생긴 남자의 매력에 빠졌었다. 두 편 모두 웃통을 벗고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만든 몸"과는 달라 보이는 단단한 근육이 인상적이었다.


생각해 보니 <아듀 라미>에서도 브론슨은 찰랑대는 물컵에 동전을 몇 개나 넣을 수 있느냐를 갖고 내기하는 버릇이 있는 것으로 나왔다. 표면 장력 때문에 의외로 동전이 많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매번 이겼지만, 궁지에 몰렸을 때에는 이조차도 뜻대로 안 되어 역시나 허탈해 하는 것이 결말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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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해 보니, 예전에 간행된 그의 자서전을 갖고 있었다는 기억이 머리를 스친다. 이것저것 앞에 쌓아 놓은 물건을 치우고 먼지 자욱하게 앉은 책장을 들여다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베켄바우어 자서전과 펠레 자서전, 그리고 축구에 관한 에세이 <피버 피치>가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축구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고, 당연히 선수 이름이나 구단 이름이나 경기 규칙이나 포지션에 대해서도 잘은 모르며, 가끔 손흥민이 골을 넣었다면 뒤늦게 동영상만 한 번 틀어 보는 정도로 "축알못"인 나귀님이지만, 헌책방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씩 나오는 관련 서적들을 호기심에 집어 들다 보니 결국에는 이런 책도 갖고 있게 되었다.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라면 지난 월드컵 당시에 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축구, 그 빛과 그림자>가 있다. 갖가지 일화를 정신없이 열거하는 저자 특유의 서술 방식에 걸맞게 축구 역사의 명장면을 짧게 소개한 내용인데, 때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결국 인터넷의 힘을 빌어 유튜브로 해당 경기 장면을 보고서야 알아듣곤 했었다.


베켄바우어에 대해서도 독일의 유명한 축구 선수이고 차범근의 친구라는 것 정도를 빼면 아는 바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심지어 그의 명성을 상기한 계기도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 나온 아디다스의 광고 때문이니까. "호세와 축구 선수 10명"이란 이 광고가 시작되면 허름한 동네에 사는 꼬마 호세와 페드로가 축구를 하려고 편을 짠다.


두 꼬마가 내키는 대로 지단과 베컴 같은 현역 최고 스타들의 이름을 부르자 놀랍게도 "본인 등판"이 줄줄이 이루어진다. 급기야 호세가 은퇴한 지 오래인 "베켄바우어"를 소환하자 페드로가 황당하다는 듯 웃는데, 곧이어 베켄바우어가 (물론 합성이다) 뛰어와서 합류하고 경기가 시작되며 "불가능은 없다"는 아디다스의 표어가 나온다.


내가 가진 자서전은 번역 제목부터 <프란츠 베켄바우어>(박정미 옮김, 베텔스만코리아, 1999)인데, 원제는 "나: 실제로는 어떠했는가"(Ich - Wie es wirklich war)이며 첫 번째도 아니고 무려 세 번째 저서에 해당한다. 따라서 본격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현역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사건을 회고하는 에세이에 가깝다.


목차를 보니 각 장의 제목이 "분데스리가와 나", "국가대표팀과 나", "월드컵과 나", "여자와 나", 심지어 "세무서와 나" 등으로 나온다. 전설의 골키퍼 야신을 비롯해 여러 선수며 명사를 만난 일화도 나오는데, 차범근에 대한 언급은 찾지 못했지만 1966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격파한 북한 선수 박두익에 대한 언급은 의외로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책은 알라딘에서 검색되지 않고, 구글링해 보아도 국립중앙도서관 외에는 기록이 거의 없다. 어쩌면 베텔스만코리아가 본격적으로 출판 시장에 뛰어들기 전, 즉 국내 진출 초기에 북클럽용으로 제작해서 배포한 책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 실제로 판권면에는 1999년 12월 1일에 간행된 북클럽 초판 1쇄로 나온다.


베텔스만코리아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업체가 철수한 지금에는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을 테지만, 독일의 유명한 이 미디어 대기업의 모태는 바로 출판업이었고, 그중에서도 주력 사업은 회원제로 운영하는 북클럽이었다. 아마 회비를 납부하면 북클럽에서 선정한 도서를 1년에 몇 권씩 회원에게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고 기억한다.


일단 북클럽에 선정된 책은 수천 부씩 판매가 보장되었지만, 출판사에서는 출고가를 낮춰 박리다매로 납품했기에, 자칫 북클럽에 납품한 도서가 서점으로 역류하는 현상을 막기 위해 북클럽용 판본을 별도로 제작했다. 그래서 내가 가진 베켄바우어 자서전에도 가격 표시는 있지만 ISBN은 없고, 판권에는 북클럽용이라 명시되어 있다.


문제는 한국 출판 시장이 워낙 작아서 북클럽 사업이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급기야 베텔스만코리아는 직접 출판사를 차렸지만, 설립 6년만인 2005년에 대교에 매각하며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다빈치 코드>라는 베스트셀러도 있었지만, 나머지 간행 도서는 두드러진 것이 없어서 대부분 헌책방에 악성 재고로 남아 있다.


여하간 베켄바우어의 자서전 중에서는 유일하게 우리말로 번역된 책이니, 이를 기억/소장할 만한 독자/팬도 있을 것 같은데 의외로 기록이 없으니 놀랍기만 하다. 나귀님이 가진 책은 무려 저자 서명본인데, 구글링으로 확인한 베켄바우어의 서명과도 일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뒷면에 배긴 볼펜 자국만 보아도 진짜임이 확실해 보인다.


베켄바우어는 1999년 12월 초에 내한하여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을 만나고 상암월드컵경기장 공사 현장을 둘러보았다고 하니, 아마도 베텔스만코리아에서는 이에 맞춰 자서전을 간행하고 사인회라도 개최했던 모양이다. 비록 서명된 유니폼이나 축구공까진 아니어도, 지금은 책 자체도 희귀해진 듯하니 수집 가치도 아주 없진 않을 듯하다.


베켄바우어가 평생 우상으로 여긴 펠레도 여러 차례 내한했었는데, 내가 가진 펠레 자서전 번역본에는 십중팔구 그때쯤 얻은 듯한 서명이 들어 있다. 이것 역시 유성 매직 자국이 뒷면에 배긴 것을 보면 진짜 사인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나저나 펠레와 베켄바우어 사인본조차 필요 없다며 선뜻 내다 버린 원래 주인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 자서전에서 베켄바우어는 서독 대표팀을 이끌고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해 체코와의 8강전에서 신승한 직후, 체력 고갈로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음에도 "또 한 번 멋진 경기를 펼쳐 보이려는 욕심에 무리를 했던"(193쪽) 클린스만을 힐책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회고한다. "클린스만, 자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자네는 펠레가 아니라 클린스만이고, 언제나 클린스만으로 남는다는 것을 모르나?"(193쪽)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면서부터 줄곧 무책임한 행보로 비판을 받는 클린스만에게 불만인 국내 축구 팬들에게는 어쩐지 "사이다"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대목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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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중고샵에 정암학당의 플라톤 전집 신판 가운데 하나인 <미노스 (외)>가 올라왔기에 주문해 보았다. 이제이북스에서 완간을 코앞에 두고 있다가 갑자기 아카넷으로 출판사를 옮겼는데, 표지 디자인은 물론이고 판형까지 신국판 소프트커버에서 사륙판 하드커버로 바꿔버린 것을 보고, 참 신의 없는 행동이구나 싶어서 한동안 외면하던 차였다.


<미노스 (외)>는 이제이북스에서 나왔던 구간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라서 구입했는데,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을 새롭게 펴내며"라는 두 번째 서문을 보면 이제이북스의 사정으로 출간을 중단하고 출판사를 옮기게 되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검색해 보니 이제이북스는 2018년 이후로 신간을 내놓지 않았으니 사실상 문을 닫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출판사를 옮긴 사정까지는 감안하더라도, 판형까지 싹 바꿔서 재간행하는 것은 괘씸할 수밖에 없다. 이제이북스 구판을 가진 독자의 입장에서는 무려 스무 권이나 모아 놓은 책들을 내버리고 다시 살 수도 없고, 막상 <미노스 (외)>처럼 원래 없던 책들만 구입해서 꽂아 놓으면 기존의 책들과 판형부터 다르니 "전집"이라기에는 영 꼴불견이다.


플라톤 전집의 구판과 신판 모두에는 후원회원인 개인과 단체의 명단이 서너 페이지에 걸쳐 나와 있는데, 거꾸로 보자면 졸지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구판을 떠안은 피해자 명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처음부터 참여한 후원회원이라면 지금쯤 구판 스무 권에 신판 스물세 권까지, 완간되지 않은 플라톤 전집을 무려 두 종이나 갖고 있지 않을까.


출판계에서 한 작가, 또는 한 작품을 여러 권으로 나누어 출간하다 중단한다든지, 아니면 중간에 디자인을 바꾸어 통일성을 깨트린다든지, 최악의 경우에 한동안 출간을 중단했다 재개하여 완간하면서 디자인 변경은 물론이고 박스 세트나 가격 할인이나 특전 부록 같은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꾸준히 구입한 독자를 농락하는 일은 그리 드물지도 않다.


반면 한 작가의 작품을 두 출판사가 간행하면서 협의를 통해 판형은 물론이고 디자인까지 똑같이 맞추는 경우도 없지 않으니, 북스피어와 모비딕에서 나눠서 간행하는 마츠모토 세이초 시리즈가 그렇다. 이런 선례를 감안할 때 출판사를 옮기더라도 외양의 연속성을 유지하지 못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배려 부족의 결과로 보인다.


<미노스 (외)>처럼 짧은 작품까지도 한 권으로 간행하는 것을 보면 아카넷의 플라톤 전집은 전30권 내외로 완간되지 않을까 짐작되는데, 그중 스무 권은 이제이북스에서 나왔던 것들이니, 권수로만 놓고 보면 60%가 중복 출판인 셈이다.(물론 분량으로는 전집의 4분의 1쯤을 차지할 법한 <국가>와 <법률>이 압도적이므로 그 비율도 더 떨어지겠지만).


물론 판형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책의 디자인은 읽기의 편의성과도 직결된다. 따라서 새로운 플라톤 전집을 굳이 작은 판형에 하드커버까지 씌워 가면서 만드는 것이 합리적인지는 충분히 의문을 제기할 만하다. 현재 판형으로 <국가>나 <법률>을 간행한다면 거뜬히 1,000페이지에 육박할 테니까.


역시나 아카넷에서 간행하는 대우고전총서 역시 처음에는 사륙판으로 제작되다가 <순수이성비판>에 이르자 뒤늦게야 실책을 깨달았는지 신국판으로 돌아와서 이후 칸트 전집을 신국판으로 내고 있는데, 플라톤 전집에서도 <국가>와 <법률>이 그 선례를 따른다면, 결국 시리즈의 통일성을 스스로 저버리는 꼴이 되어 버릴 터이니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여하간 정암학당이 출판사를 옮기고 뭐하는 와중에 "국내 최초 원전 번역 플라톤 전집" 완간의 영예는 엉뚱하게도 후발 주자인 천병희가 가져가고 말았으니,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하고 또 한편으로는 쌤통이라는 느낌도 없지 않다. 심지어 철학 전공자도 아니라며 무시당하던 천병희에게 뒤처졌으니 전공자 모임인 정암학당으로선 참 민망하지 않겠나.


우스운 것은 후발 주자였던 숲 출판사의 천병희 번역 플라톤 전집 역시 독자를 농락한 바 있다는 점이다. 즉 원래는 전집을 의도하지 않고 두세 편씩 쪼개서 조금씩 간행하다가, 뒤늦게 전집으로 명명하고 합본을 만들고 표지를 교체하여 나머지 두 권을 내서 완간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구입한 독자는 통일된 디자인의 전집을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이쯤 되면 정암학당/이제이북스나 천병희/숲 모두 플라톤 전집이라는 거창한 시도를 하면서도 장기적인 계획이나 전략 부족/부재로 독자를 농락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짧게는 십수 년, 길게는 이십 년 넘게 지속된 사업이 판형이나 표지 같은 기초적인 부분에서부터 일관성 없이 뒤바뀌면 과연 어떤 독자가 순순히 받아들이겠나.


개인적으로는 "국내 최초 원전 번역 플라톤 전집" 완간의 영예가 박종현에게 돌아갔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서광사의 <국가>가 1997년에 나왔으니 벌써 사반세기 전인데, 처음에는 플라톤의 주요 저서를 여러 전공자들이 나누어 번역하기로 했다가, 세월이 흐르며 공역자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 떨어져 나가서 사실상 박종현의 단독 번역이 되었다.


박종현도 처음부터 단독 완간을 목표로 매진했다면 충분히, 어쩌면 더 일찍 달성할 수 있었겠지만, 번역 후기 중 하나에서 동참을 약속한 동료 학자들을 믿는다며 당분간 본인의 저술에만 집중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런 신의가 보답을 얻지 못한 형국이어서, 박종현의 플라톤 전집은 맨 먼저 시작했지만 아직 진행 중인 상황이다.


물론 학술서 번역 출판은 올림픽도 월드컵도 아니니 누가 먼저고 나중이고를 따져보았자 별 의미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려 3파전으로 벌어진 플라톤 전집 완간 경쟁의 과정과 결과를 살펴보니 새삼스레 신의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어 한 마디 해본다. 부디 박종현 선생의 단독 번역이 무사히 완간되기를 빈다.(정암학당이야 뭐, 완간을 하든가 말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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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중에 <신을 죽인 여자들>이라는 소설이 있기에 뭔가 궁금해 들여다보니, "보르헤스 이후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아르헨티나의 대표 작가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의 작품이라고 나온다. 무려 보르헤스 다음가는 아르헨티나 작가라는데 어째서 나는 영 모르고 있었던가 자책하는 마음에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서 구글링을 하다 보니, 묘하게도 위의 선전 문구에서는 어째서인지 빠져 버린 또 다른 작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작가는 바로 기이하고 환상적인 단편 소설로 유명한 훌리오 코르타사르이다. 비록 생애의 후반기를 유럽에서 보냈고, 나중에는 프랑스 국적까지 정식으로 취득했다는 점에서 (예를 들어 가오싱젠처럼) 프랑스 작가라고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스페인어로 작품 활동을 하면서 보르헤스, 마르케스, 요사 같은 남아메리카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음을 감안하면 아르헨티나 작가로 분류하는 게 맞지 않나 싶기도 하다.


실제로 피녜이로의 책을 소개한 맨부커상 홈페이지에도 "보르헤스와 코르타사르에 이어 세 번째로 가장 많이 번역된 아르헨티나 작가"(the third most translated Argentinean author, after Borges and Cortázar)라고 단언했을 정도이니, 정작 번역본 소개글에서 그 이름만 쏙 빼놓은 것이 무슨 이유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홍보를 위해서라면 코르타사르 정도의 유명 작가에게 2위를 빼앗겼어도 딱히 나쁠 것은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그나저나 <신을 죽인 여자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그 어마어마한 리뷰 개수다. 오늘 기준으로 판매지수는 3,500대인데 리뷰는 70개가 넘기 때문이다. 2023년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는 <세이노의 가르침>만 해도 판매지수는 673,000대로 어마어마하지만 리뷰는 35개에 불과해서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피녜이로가 누군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이런 부조리한 현상만큼은 확실히 보르헤스나 코르타사르의 소설에 버금갈 만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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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눈치를 채기는 했는데, 수상쩍을 정도로 한 가지에 진심인 출판사들이 있다. 내놓는 책을 보면 특정 주제나 장르나 작가에 집중하는 듯 보이는데, 한편으로는 그런 진심이 반가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과연 유지는 되려나 걱정스럽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논의하자면 하나하나 따로 글을 써야 할 것도 같은데, 아직 실물을 구입하지도 않은 것이 대부분이고, 그나마 사다 놓은 것도 아직 읽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어서 번역이나 편집이나 등에 대해서 뭐라고 평가하기도 뭐한데, 여하간, 자꾸 미적거리지 말고 간만에 알라딘 들어온 김에 대강 생각나는 대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1. 혜움이음 - 수상쩍을 정도로 인디언 문학에 진심인 출판사


언제였나. 여기에서 새로 낸 소설을 보고 신기한 출판사다 싶었는데, 나중에 가서 그걸 알라딘에서 검색하려니 정확한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서 "사슴 머리 여자"로 검색했더니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사슴 대가리..."까지 쓰다가, 에이, 아니겠지 싶어서 신간 목록을 일일이 뒤지다 보니, 한참 뒤에야 "엘크 머리를 한 여자"라고 정확한 제목이 나온다. 이거... 제목이 헛갈린 이유는 표지에 나온 동물이 흔히 말하는 "엘크"보다는 오히려 "사슴"에 가까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괜히 한 번 시비나 걸어 볼까 싶어 구글링해 보니, "엘크"라는 명칭이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제각각이어서, 그중에는 말코손바닥사슴이라고 해서 넓데데한 뿔을 가진 동물도 있고, 이 책 표지에 나온 가느다란 뿔을 가진 동물도 있다고 해서, 오오, 그렇구나, 또 하나 배웠다 싶었다.


그나저나 혜움이음이란 낯선 출판사에서는 지금까지 모두 네 권을 간행했는데, 하나같이 번역서일 뿐만 아니라 무려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 문학에 해당하는 작품들이다. 과거 한길사의 세계문학전집으로 나왔다가 단행본으로도 재간행되었던 스콧 모머데이의 "여명으로 빚은 집"(한길사 시절에는 "모마데이"의 "새벽으로 만든 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을 첫 책으로 내놓은 것을 보고, 오, 뭔가 좀 아는 출판사로군, 싶었는데 이후로도 줄곧 인디언 혈통 작가들의 인디언 소재 작품들을 내놓는 것을 보니, 아예 작정하고 이쪽으로 파고 드는 것인가 싶어서, 앞서 말했듯이 기대 반, 걱정 반, 뭐,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아까 궁금해서 구글링해 보니, 솔 출판사의 SNS에 신간 홍보가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 그 계열사나 자회사 같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디언을 소재로 한 작품이야 적지 않겠지만, 추리소설가 토니 힐러먼의 경우처럼 (최근 그의 회고록이 중고샵에 있기에 구입했다. 그가 나바호족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는 참전 용사들의 정화 의식에 대한 내용은 자세히 실려 있지 않아서 아쉬웠는데, 그의 첫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그 의식이 조지프 캠벨이 연구/기록했다는 인디언 참전 용사들의 출정 의식과도 한 쌍이 아닐까 싶어서 살펴보고 싶었던 것인데, 그 내용은 캠벨의 첫 저서에 집약되었고 훗날 "창작 신화"인지 "원시 신화"인지에도 구체적으로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제로는 인디언 혈통이 아닌 외지인 작가가 쓴 것도 많을 터이니, 혜움이음에서 연이어 간행하는 것처럼 실제로 인디언 혈통 작가가 쓴 작품만 모아 놓은 시리즈는 상당히 이례적이다.




2. 고딕서가 - 수상쩍을 정도로 고딕 문학에 진심인 출판사


여기는 제목 그대로 고딕 문학을 집중적으로 내고 있어서, 지금까지 나온 다섯 권 모두가 딱 그 장르에 해당한다. 그중 두 권은 장편이고 (그중 하나는 무려 르파뉴의 작품이다!), 세 권은 개스켈, 올컷, 셸리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단편집이다. 번역자가 모두 같은 사람인 것으로 미루어 이른바 "덕업일치"의 경지에 이른 1인 출판사인지도 모르겠다.(비슷한 경우가 과거 SF만 열심히 간행하다가 결국 우주 저편으로 사라졌던 "불새" 출판사인데, 아쉽게도 1인 출판사로 기획부터 제작까지 도맡다 보니 번역이나 편집에서는 어설픈 부분이 적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나중에 한 번 문을 닫았을 때,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며 발행인이 소장하던 "사이보그 009"와 "초인 로크" 전권을 매각하겠다고 SNS에 올리는 "패기"를 보여주었던 것이 각별히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왜 하필 고딕 문학 시리즈인지 궁금하다. "오트란토 성"이나 "몽크" 정도를 제외하면 본격적인 고딕 문학에 해당하는 작품은 의외로 많이 소개되지 않았다고 기억하기 때문에 한층 더 궁금하고 신기하고, 뭐, 그렇다.(카포티와 오코너와 매컬러스로 대표되는 "남부 고딕"과는 또 느낌이 많이 다르지 않나 싶기도 하다. "고딕"의 정의를 뭐로 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도 있기는 한데, 게이먼의 "죽음"이나 애덤스의 "웬즈데이" 같은 "고스"와는 또 뭐가 다른지도 따져봐야 할 것 같으니, 이것도 본격적으로 파고 들어가 보면 제법 공부를 해야 될 것 같기도 하다). 일단 고딕서가의 책은 세 권쯤 이미 사다 놓았으니 조금 한가해질 때에 한 번 읽어보아야 하겠다.(하지만 현실은 아직 "자불어" 1권도 다 읽지 못하고 말았다! 그 다음에는 "태평광기" 완질이 기다리고 있고!)




3. 디다스칼리 - 수상쩍을 정도로 몰리에르 희곡에 진심인 출판사


여기는 얼마 전에 북펀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몰리에르 희곡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그렇잖아도 대부분의 번역서가 "몰리에르 작품집"이니 "몰리에르 희곡선"이니 하는 이름이다 보니, 이것저것 중복되는 작품이 많아서 좀 솎아내려고 하던 참이었다. 급기야 갖고 있는 번역서를 찾아내서 마루에 쌓아두고 차일피일하던 참이었는데, 희한하게도 몰리에르를 집중적으로 간행하는 출판사가 있다기에 자연히 호기심이 생겼다. 현재 세 권까지 나왔는데 분량에 비해 가격이 비싼 편으로 보인다. 몰리에르에 대한 관심은 작년엔가 재작년엔가 "돈 후안" 전설을 이용한 작품 예닐곱 종을 연이어 읽고, 비교적 최근에는 주디스 슈클라 책 때문에 덩달아 "타르튀프"까지 읽으면서 간만에 부활했는데, 그 와중에 이것저것 메모한 내용을 아직 다 정리하지는 못했다.


가만 보니 여기도 번역자가 같은 사람이다. 생각해 보니 울산대 출판부의 코르네유 희곡 선집도 전공자 한 명이 번역했는데, 결국 이런 종류의 책은 누군가 한 명이 작정하고 달려들어야만 뭔가 결과가 나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천하의 플라톤도 이제이북스/정암학당 전집은 완간되지 못하고 출판사를 옮기고 말았는데 (근데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꾸준히 사 모은 독자들을 엿먹이는 것 아닌가? 최소한 판형이나 디자인만큼은 구판과 맞춰주었어야지!) 과연 몰리에르 시리즈는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궁금한데... 어째서인지 맨 처음 나온 책은 이미 품절이어서 벌써부터 살짝 불안해지기도 한다.




4. 파시클 - 수상쩍을 정도로 에밀리 디킨슨에 진심인 출판사


이 출판사에서는 다른 책들도 내고 있지만 디킨슨 시 선집을 다섯 권이나 내놓았다. 역시나 분량에 비해 가격이 비싼 편인데, 특히 번역이 좋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생각된다. 디킨슨 시를 영어로 읽어보면 어떤 것은 쉬운 편이지만, 또 어떤 것은 단어가 끊기거나 도치되는 경우가 많아서 나귀님도 종종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난감할 때가 많은데, 기존 번역서 중에서는 그런 난점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예를 들어 "영혼은 제 무리를 스스로 선택한다"라는 시의 경우, 민음사의 강은교 번역본에 수록된 내용은 1980년대 구판부터 2010년대 최신판까지 줄곧 오역으로 남아 있다.(나귀님이 확인한 것 중에서 가장 정확해 보이는 번역은 지만지의 디킨슨 선집에 수록된 것이었다. 근데 이 시의 해석에 대해서는 미국 사람들도 설왕설래하더라).


파시클의 디킨슨 선집은 계속해서 개정판이 나오고 있는데, 어쩌면 오역/오타 같은 문제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나귀님이야 구판과 신판 모두를 갖고 있지는 않으니, 내용이 정확히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번역/오역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그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라는 것이 그러한데, 나귀님이라면 십중팔구 "예쁜 사람들 사이에서 나만 안 예쁘더라" 정도로 옮겼을 것 같으니, 이 정도면 번역자의 센스가 작렬한 사례로 충분히 꼽을 만하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오역은 큰 문제다. 예를 들어 "수탉 씨에게 죽음은 무슨 상관일까"라고 옮긴 시는 "죽은 자에게 수탉이 무슨 상관이랴" 정도로 옮겨야 맞을 것이다. 내용을 보면 죽은 자는 세상 일에 관심 없다는 것이니까.





위에서 소개한 몇 군데 말고도 지금 당장은 기억이 나지 않는 희한한 출판사가 몇 군데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나중에 기억이 나면 다시 한 번 끄적끄적해 보고, 아니면 말고, 뭐, 그래야겠다. 그나저나 원래는 "마리루이제 플라이서의 길고도 화려했던 극작가 생활"이라는 제목만 달아놓고 본문에서는 영 딴판으로 "오카자키 교코와 자기 몸에 대한 혐오"에 대해서 끄적끄적해 보려고 했는데, 결국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서 엉뚱한 소리만 지껄이고 떠나는 셈이 되었다. 왜 나는 새해부터 이렇게 정신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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