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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의 학교
이서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5월
평점 :
보라색을 좋아한다. 파랑의 냉철함과 빨강의 정열이 같이 겹쳐진 듯한 빛을. 빨강도 아닌 것이 파랑도 아닌 것이 마음에 따라 시시때때로 달라 보이는 애매함이 매력적이다.
포장으로 사용된 띠지부터 시선을 끌던 책이다. 게다가 제목마저 <유.혹.의 학교>라니. 껍질을 벗겨보니 회색빛으로 흐릿하게 묘사된 여성의 실루엣이 야릇하다. 유혹에 대한 매뉴얼과 실전이 담긴 책일까? 으흣~ 19금 영화를 보기 전의 짜릿한 느낌이 스멀스멀 마음을 간지럽힌다. 다큐적인 서적을 주로 다루는 출판사 이름과 책 제목이 잘 매치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하게 했지만, 이런 장르도 가끔은 발간하나 싶었다. 아무 책이나 허술하게 내놓을 출판사는 아니리라는 믿음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리라며 철저하게 야하리라는 상상을 만들어냈다. 냉큼 책장을 넘겼다.
하.하.하. 나름 순진하다는 얘기를 들어왔던 시절도 있었건만 언제부터 나는 ‘유혹’이란 말에 야시시한 의미만을 부여해왔던 걸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한동안 머쓱했다. 중간 중간에 등장했던‘섹스, 정사, 관능, 침대, 발기, 성기, 욕망’이란 단어는 분명 자극적이었건만, 중학교 때 흠뻑 빠져 읽던 <하이틴 로맨스>보다 덜 야하게 느껴지는 거다. 그런 말들조차 차분하게 느껴지는, 이 책 참 묘하다.
무엇이 이런 맛을 내는 걸까. 한참 생각한 끝에 결론을 내린다. 그것은 사유의 깊이와 넓이와 객관성일 지도 모르겠다. 그녀 혹은 그녀 주변의 친구들이 마주쳤던 남자들과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 사이드 메뉴와 같은 느낌을 준다. 방점은 삶과 소통과 관계에 선명하게 찍힌다. 솔직하고 담담하게 그려내는 이야기 속에는 좀 더 생동감 있는 삶을 만들고 싶은 치열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유혹’에서 흔히 연상되는 이미지를 넘어선다. 저자의 시선은 인간과 그 사이의 관계와 삶에 닿아있다. 감성적이면서 이성적이어서 읽는 이를 유혹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나를 둘러싼 세상을 유혹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여러 가지 형태의 자극. 생물학적으로 우리 몸에서 자극을 수용하는 것은 감각 기관이다. 나의 감각을 유혹하는 것들을 생각해본다. 나의 눈, 코, 귀, 혀, 피부는 무엇에 유혹되는가.
첫째, 시각에 대하여.
기름기 좌르르 흐르는 후라이드와 매콤달콤 발그레한 양념. 나는 반반치킨에 유혹된다. 후라이드만의 구성은 너무 건조하고, 양념만의 세상은 과하게 뻘겋고 축축하다. 반반씩 조합된 발상, 누가 생각했는지 참 기발하다. 응용 편으로 짬짜면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반반치킨이 먼저 나왔던가, 짬짜면이 먼저 였던가?
안데르센 동화에 등장하는 인어는 신비한 아우라를 뿜어낸다. 사람과 물고기의 모습이 반반인 캐릭터. 반반치킨 얘기하다 갑자기 인어로 도약하니 뜬금없기는 하지만 인어의 존재 역시 유혹적이다.
옷 중에서는 나시나 옆구리 쭉 찢어진 치파오가 유혹적이다. 홀딱 벗은 것은 차라리 야하지 않다는 말들을 한다. 입고 벗음의 경계가 애매한, 보일 듯 말 듯한 시각적 이미지는 나머지 부분에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건 퍽이나 유혹적이다.
위로 던져 올린 공이 정점에 있는 순간을 볼 때에도 유혹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올라감과 내려감의 사이에 있는 잠깐의 멈춤. 찰나이기에 더욱 매혹적이다.
둘째, 후각에 대하여.
베이비 파우더향이나 아이보리 비누를 좋아한다. 언젠가 왜 이런 향이 좋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에라, 좋은 건 그냥 좋은 거지 이유가 있나, 뭐. 그 때 내린 결론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보니 어렴풋이 이유를 알 듯 하다. 어린 시절을 연상케 하는 향이기에 어른이 되어버린 나를 유혹했던 건 아닐까 하고. 이미 지나온 시간들에 대한 향수가 나를 끌어당겼던 걸까.
셋째, 청각에 대하여.
음악과 울림 좋은 악기와 그런 목소리에 유혹된다. 리듬 있는 소리에 나는 매번 설레곤 한다. 몽환적인 소리를 내기에는 하프가 적당하지만, 내게 그보다 유혹적인 것은 낮게 깔리는 베이스 기타의 둥둥거림이다. 배경인 듯 배경 아닌 배경 같은 소리랄까. 드러나지 않으면서 귀 기울이는 이에게 강한 울림을 주는 악기. 가사도 좋지만 강허달림의 <기다림, 설레임>이 나를 끌어당기는 이유 중 하나다. 노래 속 베이스 기타의 소리가 정말 좋다. 시작 부분에서의 ‘통통’ 소리도. 악기의 매력은 연주되는 음과 음 사이의 울림에 있다. 울림 사이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틈은 사람의 감성을 유혹적으로 자극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말과 말 사이 느슨하게 걸쳐 있는 침묵이라고. '(p25) |
노래를 듣다보면 가끔 악센트처럼 인식되는 소리가 있다. 반인반수의 승기가 빨강, 파랑 옷을 입고 오른쪽, 왼쪽으로 뛰어다니던 앨범 자켓. 드라마 ‘구가의 서’의 삽입곡, 이사벨의 <My Eden>을 유혹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은 배경처럼 깔리는 시계 소리와 사이사이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이다.
MC몽의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과 같은 랩도 매력적이다. 랩은 대화와 노래를 동시에 보여주는 매력적인 음악이다. 가만히 말을 하는 듯 하면서도 들려주는 시 인듯 리듬이 있다.
단조풍의 노래 역시 내 마음을 끌어당긴다. 이선희의 <인연>처럼.
넷째, 맛에 대하여.
맛을 보고 음식을 먹는 편이 아닌데다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하는 식생활을 고수해왔지만, 먹는 순간 유혹되던 맛은 있다.
아포가토.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에스프레소를 얹어낸 환상의 콜라보. 감동받은 마음에 발음조차 생소했던 이 말의 뜻을 찾아보았던 기억이 있다. 이탈리아어라는 것을 알았고, ‘끼얹다, 빠지다.’라는 의미라는 것을 알고 그것 참 잘 어울린다 생각했다. 차가움과 뜨거움, 달콤함과 씁쓸함이 섞인 조화로움에 빠져 한동안은 커피숖에 갈 기회가 올 때마다 찾곤 했다.
다섯째, 촉감에 대하여.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운 초극세사도 좋지만, 너무 부드럽지도 거칠지도 않은 사람의 살결과 맞닿는 감촉을 좋아한다. 촉감을 타고 온기가 전해져오기 때문이다. 촉점과 온점이 동시에 자극되는 상황은 뜨거운 난로보다도 유혹적이다.
저자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유혹을 말하기도 한다.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 사이>라는 노래가 있다. 노래 제목과 같은 관계는 수많은 로맨스 드라마나 소설에 등장하는 유혹적인 관계이다. 우정으로 포장된 사랑. 그 접점에 흐르는 설렘이란!
'사랑은 자꾸만 소통하고 갱신하는 행위' (p281) |
마음 깊숙이 들어오는 말이다. 그래, 머무는 사랑이란 없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드라마에서 부르짖던 주인공의 말이 틀렸음을 이제는 알겠다. 사랑은 계속 변하는 것이다. 그것을 무중력 상태인 듯 유지시켜주는 것은 계속적인 소통과 업데이트를 향한 노력이리라.
가장 유혹적인 순간은 언제일까. 과거, 현재, 미래 중 내게는 현재가 가장 유혹적이다. 이미 지나가버려 화석처럼 굳어진 시간은 매력이 없다. 다가오지 않아 알 수 없는 미래를 알기 위해 아등바등 하고 싶지도 않다. 현재가 가장 좋다. 스스로 느끼고 움직일 수 있는 순간, 변화의 출발점이 되는 순간이다. 영어의 의미를 알고 더욱 감탄했던, 말 그대로‘선물’과도 같은 매력을 지닌다.
‘유혹은 멈춰 있지 않고 움직이면서, 열려 있는 시선으로 삶과 세상을 이해하고 도발하고 품어내는 일이었다.’(p18) |
나를 유혹하는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공통점이 발견된다. 모든 것들이 ‘경계’에 존재한다는 것. 모든 경계는 유혹적이다. 어디로든 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며, 새로운 세상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혹은 이렇듯,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양 함께하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듯 함께 가고,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양 함께 듣고 새기는 일이야. 마치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히는 듯이. 그야말로 생의 감각이 폭발하듯 살아 오르는 가장 관능적인 순간이 아닐까?'(p26) |
'삶의 유혹에 응답하고 싶다. 나의 삶을 유혹하는 내가 되고 싶다.' (p345) |
여기까지 이 리뷰를 읽어낸 당신은 이미 나의 글에 유혹된 것이다! 라 자신 있게 말하고 싶기도 하고. 그런데, 쩝~^^; 음,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글을 쓰고야 말테다! 가느다란 실이 되어 나의 시선을 당긴 유혹의 책은 내 자신에 대한, 내 삶에 대한 유혹으로 나를 데려다놓았다. 좀 더 가슴 뛰는 삶을 만들고 싶다는. 무엇을 할까. 생각만으로 설레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