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페이지 훌쩍 넘는 범죄스릴러 소설들, 게다가 영화화된다는 소설은 이제 그만 읽자. 유혹에 빠지지 말자. 마음먹은지 꽤 됐는데 새소설이 소개되면 궁금해지는거라. 에이, 몹쓸 호기심, 궁금증. 이야기에 빠져서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다는 얘기를 공포처럼 간직하자. 어렸을 때 전래동화집에서 봤던가,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늘 협박하셨던 할머니가 해주셨던 얘기였나? 그 얘기가 평생 내 뒤를 캥기게 했었다. 나무꾼이었나, 어느 날(이 '어느 날'이란 얼마나 황홀한 유혹인가, 모든 이야기는 이 '어느 날'부터 생기는 것이다.) 나무하러갔다가 도깨비들이 들려준 얘기를 듣게 되는데, 얘기가 재밌는 나무꾼은 계속 얘기를 해달라고 졸라대고 지칠때까지 얘기를 듣고 집에 돌아왔는데 세월이 엄청나게 흘렀더라던가 어쨌다나. 그런데 도끼자루는 여기서 썩는거였나? 헷갈려.

옆구리, 허리가 결린다. 좀 무리하며 놀았던가? 5월은 설, 추석이 들어있는 달과 같은 제3의 명절이나 마찬가지다. 부담 팍팍. 아직도 하순에 치러야 할 행사가 남아있다. 정신적으로 피곤한 5월에 들어와 읽은 책이 [쓰리 세컨즈]다. 4월에 읽은 책도 좀 정리하고 싶은데 언제나 그렇듯 안된다는 거 알잖아. 마거릿 애트우드의 [그레이스], 존 어빙의 [트위티스트 리버에서의 마지막 밤]을 읽으려고 했다가 도저히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 돼 읽기를 포기했다. 왜 그러지? [그레이스]는 고작 50여 페이지, 존 어빙의 책은 그래도 100 페이지 정도 읽은 것 같은데, 두 소설 모두 기대 이하로 흥미롭지 않다, 아직까지는.

 

[쓰리 세컨즈]는 아주 매끄러운 소설이다. 북유럽 느와르라고 소개된 이 소설은 요즘 국내에 소개되는 노르딕 스릴러나 느와르 소설이 그렇듯 딱히 노르딕스러운 걸 찾을 수 없는 그냥 일반화된 범죄스릴러로 보면 된다. 마약거래에 침투한 경찰측 정보원들의 실상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연구하여 극사실적으로 표현했다는 소개를 자랑처럼 내세우고 있는데 그런 디테일들에 정신없이 빠져들게 되는 건 틀림없다(튤립의 사용이 흥미로웠다). 이런 디테일들과 정밀하게 짜인 플롯이 주인공인 피에트 호프만(암호명 파울라)의 신의 경지에 오른 전문성과 결합하면서 이상하게 너무 인공적인 냄새가 난다. MSG 팍팍 들어간 음식처럼. 호프만이 죽었을 거라고 믿으며 읽는 독자는 아마 없지 않을까 싶다(이 정도는 스포일러에 해당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마지막에 호프만은 왜 연락을 하지? 도대체 왜 그러는건데? 아, 속편에도 나오고 싶어서인가? 이 소설의 진짜 미스터리는 그 대목인 것 같다.

호프만이 모든 걸 준비해나가는 과정을 읽으며 영화 <니키타>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뤽 베송 감독의 <니키타>. 처음 볼 때는 재밌게 봤는데 몇 해 전에 우연히 TV에서 다시 볼 때는 짠하게 슬퍼져 울었다. 니키타와 호프만의 차이도 꽤나 흥미롭다. 영화 <무간도> 시리즈는 모두 봤고, 꽤나 잘 만들어진 영화였는데 기억이 잘 안 난다. 첫편에서 양조위의 그 고독하고 비애 가득한 얼굴 표정만이 잔상처럼 남았다고 할까. 

 

호프만이 한두 수 앞을 내다보며 상황과 사태를 철저히 장악하는 인물이라면, 형사 에베트는 호프만이 활용할 카드에 이미 포섭된 인물이지만 정작 자신은 무지하다. 이런 캐릭터는 대충 얼른 떠오르는 것만 해도 <도망자>의 형사 토미 리 존스라든지, <아저씨>의 형사라든지, 뭐 차고 넘칠 것이다. 흥미로운 건, 에베트는 호프만이 이용할 카드이지만 또한 호프만으로 하여금 그런 준비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든 장본인이 되기도 한다. 뫼비우스띠처럼. 물론 에베트가 깨닫게 된 때는 게임오버된 이후지만. 에베트는 잠시나마 죄의식까지 짊어진다. 걱정마시라, 마지막에 에베트는 교도소 CCTV를 봄으로써 죄의식 또한 깔끔하게 날려버린다. 이런 게 할리우드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니키타>에서 니키타가 떠난 후 남은 두 남자(더불어 관객까지)의 죄의식은 어찌 할 도리없이 간직해야 할 것으로 남고. 우리의 <아저씨>조차도 원빈이 형을 살던 뭐 딴 댓가를 치르던 형사의 죄책감 또한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딴 죄의식 같은 건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만큼 완벽한 일처리 솜씨에다가 다시 연락까지 해대는 저 철저한 능력맨을 어찌할꼬.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계절도 더 나아가지 않고 딱 이쯤에서 멈춘다면. 여리여리한 연초록 잎들의 나무들을 보노라면 곧 짙어져 탁해질 한여름의 우람한 나무들은 생각하기 싫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라서 청춘과 젊음의 싱그러움을 발산하다가, 우렁우렁해지다가 쪼그라들어간다. 그리고 다 내놓고 '나머지는 침묵'이다.

'어쩔 수 없는 건 결국 어쩔 수 없다'고 한 김훈의 문장이 쓸쓸한데, 늙고 죽는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생각 앞에서 깊어지지 않는다면 인류의 미래는 참혹할 것 같다. 이 어쩔 수 없는 일을 어찌해볼 수 있는 일로 바꾸려는 욕심들이 곧 탐욕으로 바뀔 날들을 보게 될 것 같은 예감을 받았다. 리사 프라이스의 [스타터스]는 돈만 있으면 200세라도 어린 몸을 '렌탈'해서 젊음을 누릴 수 있는 근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준다. 단기 임대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영구렌탈'을 노리는 기업과 그와 결탁한 정치인도 있다. 자본과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무한탐욕을 만날 때 벌어질 수 있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상을 설정하고 있다.

 

흥미로운 얘기일 것 같아서 냉큼 읽었다. 소재나 작가의 상상력도 높이 사줄만 한데 <트와일라잇> 같은 류로 분류할 수 있겠다. 간혹 허술한 대목들이 나오지만 주인공이 10대이니 치밀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뭐, 그 정도로 이해해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또한 영화화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염원이 곳곳에 보이는 엔터테이너적 소설이라서 깊은 완성도를 바라지도 않는다면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10대인데다 삼각 로맨스는 기본이다.

 

자신의 몸이 누군가에게 렌탈되어 그 기간 동안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는 채 몸을 돌려받는다면 어떨까. 렌탈된 동안 이식된 칩에 문제가 생겨 수시로(정말 편의대로) 원주인 스타터스와 렌탈엔더가 텔레파시로 소통하듯 얘기할 지경까지 이르면 어떤가? 게다가 렌탈한 자가 내 몸을 이용해 누군가를 암살하려(아, 물론 그와 같은 반사회적 행동은 칩에서 제거되어 있지만 세상이 어디 법전에 있는대로만 움직이던가? 칩을 변형하거나 수정하는 '테크니션'도 이미 시장을 형성하고 있지 않겠는가?) 한다면 어쩔 것인가? 재밌는 상상인데, 흔하디 흔하게 보는 할리우드 영화를 상상하면 전개가 어찌 될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좀 경악한 건 마지막 부분인데, '올드맨'과 관련된 부분이다. 주인공 캘리의 로맨스와도 관련 있는 인물인데, ... 이 무슨 매저키스트적인 판타지라는 말인가. 여자들이 흔히 갖는다는 나쁜남자에 대한 판타지에다가, 또 흔히 여자들이 갖기 쉬운 약점, 악한 남자일지라도 자신이라면 무언가 바꿀 수 있다는 비운의 주인공 코스프레 판타지를 느끼게 한다. 오, 약한 자여 그대는 여자이니.

 

 

 

 

 

 

 

 

 

 

 

 

 

 

 

 

세대간에 착취 수준을 넘어 그야말로 전쟁에 이르는 미래가 진짜로 올까? 베르베르의 단편 [황혼의 반란]은 [스타터스]와 반대로 연고없는 노인들을 체포하여 죽이는, 미래에 있을 법한 일을 생각해 본 것 같다.

엔더들은 젊은이들이 젊음을 '낭비'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자신들이 그 몸을 렌탈할 이유를 찾고, 젊은이들은 노인들이 '일도 안하고 밥만 축내고 재정을 축낸다'고 소거를 생각한다면, 그 세상은 '디 엔드'일 것이다. 아, 이 좋은 봄날, 어쩌다 흉흉한 상상을 하게 됐나.

 

 

 



 
 
다락방 2012-04-24 11:58   댓글달기 | URL
저 이책 되게 궁금했거든요. 나름 생각하기로는 sf 적이며 스릴러이기도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이..[트와일라잇]과 비슷한 부류라구요? 저는 [트와일라잇]을 좋아했지만, 그런 비슷한 류는 별로인데..
그래서 에잇 읽지말자 했다가 마지막에 포스트잇님께서 경악하셨다는 그 부분이 막 궁금해져서 다시 읽어볼까 싶네요. ㅎㅎ

포스트잇 2012-04-24 12:09   URL
저도 '되게 궁금'해서 읽었어요.궁금함을 참지 못해서.. 영화화를 원하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경악은 그냥 제가 느낀거라서,나이든 사람들은 금방 눈치챌 것 같습니다만... . 점심 전이신가요? 맛있는 점심 드시길.
 

흐린 날은 마음에도 구름이 몰려든다. 그냥 내내 쨍쨍하면 안되나?

어제 눈에 띈 책은 원제가 '카라시니코프 Karashinikofu'인 [역사를 바꾼 총 AK47]이다.

 

 

 

 

 

 

 

 

 

 

 

 

 

 

 

카라시니코프는 이 총을 개발한 구소련의 설계기사였는데 2차대전 당시 참전 독일군의 개인화기에 대항하는 무기를 고민하다 개발한 자동소총의 이름이기도 하다. 잔고장이 적고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사용할 수 있으며 약간의 연습만 하면 어린아이도 사용할 수 있다하니 내전이나 분쟁지역 곳곳에서 어린이들의 손에 들려 사용되는 무기이기도 하다.

이 총의 역사를 통해 아프리카 내전을 비롯해 지금의 '새로운 전쟁' 양태를 볼 수 있는 책이 될 것 같기도 하다.

책을 읽기 전이라 제목에 '역사를 바꾼 총'이라고 덧붙인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얼마전에 관심을 끌었던 책도 있어서 조만간 함께 읽어볼 생각이다.

 

 군사적 폭력의 탈국가화

 

 

 

 

 

 

 

 

 

 

 

 

 

 

....... 총을 들어야했던, 총을 달라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 .......

우리에게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어제가 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감각.

요 며칠 종이에 살이 베이는 감각에 진저리치고 있다.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을 읽다보면 눈길눈길 가는 데마다 어찌나 셱스피어(셰익스피어를 줄였다)가 밟히든지. 그래서 양쪽 책이 다 궁금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20세기 미국문학의 3대 작가 중 한 사람이라는 너새네이널 웨스턴의 [미스 론리하트]에 대해서 블룸은

"뛰어난 문장과 패러디, 허무주의적 신랄함은 셱스피어의 [자에는 자로 Measure for Mesure]와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Troilus and Cressidar] 이후 유사한 예를 찾기 어렵다" 고 한다.

[미스 론리하트]도 셱스피어의 두 작품도 그냥 금시초문이다.

 

 

 

 

 

 

 

 

 

 

 

 

(건국대출판부의 [자에는 자로]는 원서강독용이다)

[자에는 자로]와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는 한번 더 나오는데 마르셸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함께 언급된다.

"마르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화자 마르셸의 대모험이 주는 최상급의 아이러니와 매혹적인 악취에 가장 가까운 것은 [자에는 자로]와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정도이다."

전예원에서 나온 신정옥 역의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는 당시 구입할 때 교보에 없었던 관계로 도서관에서 형설출판사의 이덕수 역의 책을 빌려다 읽고 있는 중인데, 영한 대역에 교재용 책처럼 편집된 책이다. 오탈자에다가 인물 표기법도 엉망이어서 내용이 대충 어떤지 읽어볼 생각으로 잡고 있으나 한숨만 나오는 책이다. 화도 난다.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는 일종의 '다크 코미디 dark comedy'로, 이런 식의 장르 구분에 예전 비평가들은 비판적이었다고 하는데 요즘 독자들에겐 재밌는거 아닌가. 트로이전쟁 동안 벌어진 그리스와 트로이의 왕과 영웅들 간의 '가치'논쟁이 흥미로운 것 같다. 자신의 신념과 주장을 연설하면서도 행동은 이를 배반하는 이중적이고 분열적인 인물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것 같다. 그러니 얼마나 정신사나운 극이겠는가. 아직 읽고 있는 중이다. 더 가자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까지 가야하는데, 갈 수가 있겠는가. 쯧.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 세권을 읽은 게 전분데, 생각보다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계속 읽고 싶었으나, 완독은 너무나 장구한 프로젝트를 요구했기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권 '스완네 집쪽으로' 속 페이지에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인용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 책은 어떤 배움의 이야기이다. 더 정확히는 한 작가의 배움의 과정의 이야기이다"를 써놓았다. 이 말을 미스터리삼아 읽어갈 생각이었을 것이다. 지금부터 아주 오래전 일이다. .......

 

 

 

 

 

 

 

 

 

 

 

 

다시 셱스피어로 돌아가서, 새삼 내가 읽은 셱스피어 작품을 꼽아보니 4대비극(햄릿,오셀로,리어왕,맥베스)에다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샤일록이 나오는데다 여성 캐릭터(포샤)가 흥미롭다는 [베니스의 상인] 정도가 전부였다. 햄릿만 번역본을 달리 해 몇 번 읽었고 이번에 또 다시 읽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박우수 역의 [햄릿]은 운을 중시한 것이나 지나친 고어를 피해 요즘 읽는 이들에게 편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문장을 쓴 건 이해할 수 있으나 맛이나 아취가 휘발된 것 같은데다 호칭도 통일되지 않은 채 사용된 것도 있고, 게다가 상감마마, 세자는 뭐냐? 에잇, 구입을 후회했어. 로쟈님이 여러 번역본 비교할 때 흥미롭게 본다는 1막 2장의 햄릿 대사,

"A little more than kin, and less than kind"는 "친척 이상이지만 친척만도 못하죠"로 번역했다. 친척 사이로 머물렀어야 하는데 부자관계가 되버린 상황에 대한 냉소적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읽었을 때 남의 다리 긁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읽는내내 조금씩 부족하고 헐겁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햄릿은 그렇고, 다른 셱스피어 작품에 관한한 무식하다고 해도 변명할 말이 별로 없다.

블룸의 셱스피어 언급 대목 몇개만 더 들여다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과 [맥베스]의 친연성이라든지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 닉 캐러웨이는 [햄릿]의 호레이쇼와 같다고 비교하는 것 등이 재미있다. 

 

"호레이쇼/캐러웨이는 햄릿/개츠비의 고뇌와 의문을 감싸고 있는 까다롭고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인물이다. 개츠비의 실질적인 근거는 없다. 플라톤적 자아관에서 볼 때 개츠비는 실재하지도 않으며 우리가 알 수 있는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햄릿을 향한 호레이쇼의 자유로운 사랑처럼 개츠비를 향한 캐러웨이의 지독한 사랑은 감동적이긴 하지만, 개츠비는 단지 열망 뿐이고 정신은 없으며 의미없는 충동에 흔들린다."

 

또 [인형의 집]의 헨리 입센의 대표작으로 블룸이 꼽은 건 [헤다 가블레르Hedda Gabler]라는 희곡인데 주인공 헤다는 셱스피어의 클레오파트라와 이아고가 결합된 인물이라고 분석했다.

 

 

 

 

 

 

 

 

 

 

 

 

 

 

오셀로의 이아고야 알겠지만 [헤다 가블레다]는 번역서가 없는 듯하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대략 이 세 권 정도에 나온듯하다. 어떤 책이 제일 읽을만한지 하, 이거야 원 한 권만 읽고 말 것인가 세 권 다 읽어볼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여튼 블룸은 입센의 작품에는 셱스피어의 자취가 짙게 배어 있다라고 하는데 [헤다]와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Titus Andronicus]와의 친연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 작품 또한 금시초문아닌가.

  

 

 

 

 

 

 

 

 

 

 

 

이 작품은 유혈이 낭자한 소극이며 어쩌면 풍자극이라는데 전예원에서 나온 신정옥 역의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를 구입했었다(지만지는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다. '러'냐 '로'냐 이 한 글자의 차이가 신경을 긁는다. 왜 표기법 하나 통일이 안되냐.). 지만지 것을 구입하고 싶었으나 당시에 교보에 없었다. 젠장. 살 때는 다급하게 구했는데(읽고 싶어서) 아직 읽지 못하였다. 작품해설부터 읽어보니, 이 작품은 "악몽이라고나 할 세계에서 일어나는 그야말로 참혹한 비극"이란다.

"잔학, 폭력, 광기가 무성한 피비린내나는 복수의 비극"

1593년 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셱스피어가 원작자인지 의문이 무성하다고. 공연횟수는 셱스피어의 타작품에 비해 많지 않다고. 초기 습작기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높이 평가하는 측과 폄하하는 측의 주장이 팽팽하다나 어쩐다나.

내면적 갈등에 촛점이 맞춰진 후기 비극에 비해 이 작품은 외면적 비극이 핵심적인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는데 인간의 극단적인 잔학성을 드러내 보인다는 작품이다. 블룸은 소극이며 풍자극으로 정의했다. 여튼 읽어볼 일이다. [헤다 가블레르]는 번역서라도 있어야 읽어볼 것 아닌가.

 

코맥 맥카시의 [핏빛 자오선]에 이르러 맥카시는 셱스피어적인 고고한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이며 작품의 홀든 판사는 이아고와 같은 인물이라고 본다. 비극적인 주인공인 소년이 이 불가사의한 이아고 같은 인물인 홀든 판사에 의해 끝내 파괴되는 작품이라고 해설했다.

 

 

 

 

 

 

 

 

 

 

 

더불어 셱스피어의 4대 사극이 한데 묶인 이태주 역의 범우사 판을 읽고 있는데....... .

 

 

 

 

 

 

 

 

 

 

 

 

헨리4세 1부, 헨리4세 2부, 헨리 5세, 리처드 3세 네 작품이다. 헨리 4세에 그 유명한 캐릭터 폴스타프가 나온다.

이아고와 버금가는 캐릭터로 꼽는 폴스타프의 매력을 어떻게 구해내며 읽어야할지 난감해 하고 있는 중이다. 폴스타프와 헨리 5세(헨리4세 때는 헨리(할)왕자였던)의 이중성이 흥미로운 주제라는데 아직 내게는 모호하고, 책 붙잡고 있기가 힘들다.

범우사 판이 아닌 다른 번역본도 구해봐야 할 것 같다.

 

 

 

 

 

 

 

 

 

 

 

 

이 외에도 전예원의 셱스피어전집에는 리처드2세, 헨리8세, 헨리6세 1,2,3부가 있다.

셱스피어 전집만해도 평생 읽어야 할 프로젝트다운 볼륨감을 자랑하지 않는가. 거기에 해설서나 분석, 비평서까지 넣으면 엄두가 안난다. 관심 갈 때마다 한 권씩 찾아서 읽으면 되지 욕심부릴만한 일이 아니다.

 

[맥베스]와 [오셀로]는 늘 헷갈리고(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비웃는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이번에 다시 [오셀로]를 읽으며 오셀로는 왜 그다지도 빨리, 순간에 의심에 빠지게 되는지 다소 의아했다. 지 아무리 이아고가 있었다해도 그건 오셀로 안의 뭔가가 있는 것은 아닌가. 오셀로 자체가. 이에 대해서도 수많은 해석이 존재한다. 연극상연을 위한 대본이었으니 대사만을 보았을 때와는 다른 공연상의 보완적 상황이 보태졌을 것이라는 것에서부터 질투라는 것 자체가 지닌 속성, 오셀로의 무어인이라는 인종적 설정에 기인하는 인종차별적 성격 등을 지적한다.

셱스피어의 작품을 흥미롭게 깊이 읽기 위해서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상연을 위해 내가 연출자로서 혹은 배우로서 어떻게 해석해서 표현할 것인가라는 절박한 입장에 서 봐야할 듯하다.

 

전에 읽었던 가와이 쇼이치로의 [햄릿의 수수께끼를 풀다]를 읽다가 햄릿의 그 문제의 문제,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다'에 대한 해석이 늘 맴돌곤 했는데,

 

"햄릿이 단순히 복수라는 행위가 아니라 자기가 존재해야 할 방식을 고민한다는 점이 이 극의 본질"이라고 쇼이치로는 정리했다.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마음에 더 숭고한  태도는. 고통으로,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견디는 것인가,

 아니면 무기를 쳐들어 난관의 바다에 맞서는,

 그리고, 거부하며 그것을 끝장내는 것인가, 죽는다, 잠든다-

 그뿐, 그리고 잠든다는 말이 끝장,

 상심과 천 가지 당연한 충격,

 육신이 물려받은 충격의 끝장이라면 - 그건 완료지,

 몸 바쳐 바라 마지 않을. 죽는다, 잠든다.

 잠든다, 어쩌면 꿈군다. 아하, 그게 골치로다.

 그 죽음의 잠 속에 어떤 꿈이 올지

 우리가 이 필멸의 육신을 벗어 버린 다음에 말야.

 망설일밖에 그런 고로

 그토록 오랜 삶이라는 재앙이 생겨나는 거야.

 (이하 생략)

 

  김정환 역, [햄릿] 3막 1장, 아침이슬

 

'견디는 것'과 '끝장내는 것' 사이의 결정, 그런데 죽음 이후 올 꿈이 어떤 꿈일지가 두렵다는 것이다.

하, 이토록 생각많은 남자 같으니.... ....



 
 
 

봄바람에 미칠 것 같은 날이다. 사무실 돌아와 숨 좀 돌리면서 인터넷 들여다보는데 한겨레 기사에 재밌는 게 떴다.

지난 26일자 기사인데 나는 이제 봤다. "남자는 여자를 의식할 때 왜 '인지손상' 보일까"라는 제목의 기사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카>의 심리학 실험 결과 기사를 계기로 이 주제에 대한 몇 가지 연구를 소개하고 있다.

어쨌든 이 기사의 주요 핵심은 여자들은 이성이 있다는 것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데 비해 남자들은 매력적 이성이 있는 상황, 아니 여성이 다른 방에서 비디오캠을 보고 있을 것이라는 간접정보만 주어도 행동이 크게 달라진단다.

무엇을 수행하는 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곧 '인지적 손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적으로 해석하길, 이는 좋은 인상을 남겨서 씨를 퍼뜨리려는 데 기여하려는 심리적 메카니즘에서 나온다는데 그따위 말은 개나 줘버리라고 하고.

남자는 왜 여자를 만나면 어쩔 줄 몰라할까 라는 참으로 수수께끼같은 현상에 대해 이렇게 웃기는 연구결과를 보여주다니, 한참을 웃었다.

'인지손상'이래잖아. 하하하하.



 
 
다락방 2012-04-10 08:41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 이거 재미있는데요? 인지손상이라뇨. 하하핫

포스트잇 2012-04-10 10:40   URL
재밌죠?기사 읽고 정말 많이 웃었답니다.인지손상이 어떤 맥락에서는 심각한건데,저 경우에는 쫌 웃기잖아요^^그렇게 쩔쩔매는 남자들 보면 쫌 귀엽긴 하죠,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