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파잔'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한다. 야생에서 잡은 아기 코끼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둔 뒤 저항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몇 날을 굶기고 구타한다. 절반의 코끼리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죽지만 강인한 코끼리는 살아남아 관광객을 등에 태우고 돈벌이의 수단이 된다. 그들의 영혼은 산산이 부서지고 본능의 심연에서 어려풋하게 냉혹한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단순하다. 자유를 향한 자기 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하고, 세상이 혼란스럽지 않은 척하는 것.
저자는 이 이야기가 당신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는 매 맞는 코끼리였고 다른 곳에서는 몽둥이를 든 자였다고.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내가 피해자였는지 가해자였는지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이미 파괴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라고.
책의 제일 앞 프롤로그의 이 첫부분을 읽은 순간부터 나는 이 책을 사랑할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나 역시 어떤 곳에서는 매 맞는 코끼리였고, 다른 곳에서는 몽둥이를 든 자였는데, 그리고 이미 영혼이 파괴되고 껍질만 남은 채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음을 스스로가 알고 있었는데.
지대넓얕 시리즈는 모두 훌륭하지만 개인적으로는 0권은 정말이지 훌륭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하다. 우주, 인류, 베다, 도가, 불교, 철학, 기독교 등 다루는 주제와 시간 범위부터 장난이 아닌데 채사장 특유의 명확하고 깔끔한 정리로 이 모든 것들을 하나로 꿰어간다. 본문은 세계의 근본구조는 무엇입니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데 이런 답을 제시한다.
"나-세계"
이것은 본질적으로 이원론의 세계관이고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명제일 것이다. 이 세계관을 가지고 전개되는데 1,2장이 세계를 시간적 구성으로 나눈다면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공간적 구성으로 나눈 3~7장. 그 중 동양적 세계관은 3~5장, 서양적 세계관은 6~7장이다. 그리고 책을 한걸음한걸음 따라가다보면 세계와 나와의 관계, 일원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즉, 이 세계의 근본구조는 무엇입니까? 라고 할 때 "세계와 나는 하나다."가 이 책의 결론이다. 즉, 이 책은 한마디로 '세계와 나는 나뉘어져 있다'라는 이원론에서 시작해 과학과 역사, 철학과 종교를 거쳐가면서 '세계와 나는 하나다'라는 고대 성인들의 사상을 현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이해하기 쉽고 알기 쉽게 알려주는 책인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너무나도 재미있고 흥미롭다. 이 책을 읽고 채사장, 정말 천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게다가 문장은 어찌나 간결하고 깔끔하고 재미있는지, 정말이지 내가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게 만든 몇 명의 사람 중에 채사장도 포함이다.
#1. 준비운동-세계를 투명하게 보기
이 책의 전체가 모두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역시나 프롤로그, 그리고 준비운동이다. 그는 준비운동으로 세계를 단순하고 명료하게 구조화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기존의 세계관에 대한 판단중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의 세계관을 판단중지 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단순하고 명료하게 구조화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이런 준비운동을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세계를 투명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다"
위대한 스승들은 모두 세계를 투명하게 바라보는 것을 모든 지혜의 출발점으로 여긴다. 주역에도 '관'이라는 개념이 나오고,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부터 시작해 칸트의 인식론도 마찬가지다. 나의 고정관념과 판단, 생각, 확신, 신념 등을 모두 내려놓고 세계를 투명하게 보기. 그렇기 위해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 이는 개인적 차원의 일이기도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우주적 차원의 일이기도 하다.
"자기반성은 스스로와 대면하는 사유과정을 말한다. 마치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유의 출발점이자, 최소 조건이 된다. 당신이 사유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개관적 대상으로 마주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36)
그리고 강한 인간원리에 의하면 우주 또한 이러한 사유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어느 순간 우주는 그 안에서 관찰자의 탄생을 허용해야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관찰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바로 강한 인간 원리와 참여 인간 원리다. 이것이 바로 우주에 인간이 탄생한 이유라는 것이다.
#2. 자아, 세계, 그리고 관계
저자는 세상에는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실재론과 관념론. 우선 실재론은 세계가 자아보다 앞서 있다는 관점이다. 반면 관념론은 자아가 세계보다 앞서 있다는 관점이다.이 차이로 두 세계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실재론은 결국 세계와 자아의 분리라는 이원론으로 향하고, 관념론은 세계와 자아를 통합적으로 고려하는 일원론으로 향한다. 이것을 아는 것은 책 전체에서 굉장히 중요한데, 우리 현대인의 사고를 지배하는 세계관은 대부분 이원론인데 이것은 반쪽짜리 세계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앎'의 영역은 2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안다는 것을 아는 영역'과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영역', 그렇지만 사실 앎의 대부분의 영역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는 영역이다. 우리는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인정하기보다 그것이 없다고 가정한다. 그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어쩌면 더 큰 세계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원론'이다.
일원론은 간단하다. 나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이 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지옥이라면 이것은 흔적으로 남아 당신의 다음 삶을 결정할 것이고, 당신의 마음이 천국이라면 당신의 다음 삶도 그렇게 결정될 것이다. 붓다가 윤회의 고리를 끊는 방법으로 왜 팔정도를 강조했느니, 왜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등 도덕 선생님 같은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내가 바른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은 그것을 심판하는 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나의 마음에서다. (378)
"마음을 세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얻는 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와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다. 결론적으로 유식 사상은 우리 눈앞에 펼쳐진 세계가 사실은 우리 마음에 그려진 이미지이고,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잇는 것은 오직 의식뿐임을 밝혀낸다. 그리고 의식의 심연까지 깊게 파고 들어감으로써 의식을 일으켜 세우는 능력으로서의 아뢰야식까지 더듬는다. 즉 최종 종착지에 이르러 그들이 발견한 것은 자아와 세계를 일으키게 하는 근원적인 능력이었던 것이다. 만약 인류라는 존재가 자아가 무엇인지, 세계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탐색하고자 하는 운명에 처해진 존재라고 한다면, 결국 우리가 마지막에 도달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이러한 능력, 자아와 세계를 일으켜 세우는 능력으로서의 아뢰야식의 탐색에 있을 것이다. (380)
"이것은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우파니샤트>의 범아일여, 노자의 도와 덕의 관계, 유학의 <태극도설>, 그리고 서양 철학의 핵심이 되는 관념론, 중세 기독교의 신비주의와 이어지는 것이다. 세계가 내 마음의 반여잉고, 그러므로 세계와 자아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설명은 세계를 진지하게 통찰하고자 하는 모든 이가 결국에 도달하게 되는 최종 결론이다.(380)
초기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 중 하나인 <화엄경>은 이러한 결론을 매우 명료하게 표현한다. 바로 '일체유심조'다. 세상의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단순히 '네가 마음먹은 대로 될 것'이라는 자기계발적 메시지로 해석되기에는 너무도 묵직한 개념이다. 일체유심조는 존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꿰뚫는다. 우리가 언젠가 이 말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될 때, 아마도 우리는 더 지혜로워질 것이다. 내 앞에 드러난 현상 세계가 내 마음이 지어낸 것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욕망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로써 자유로워질 테니 말이다. (381)
그동안 내가 뇌과학책과 심리학, 자기계발서, 촐학, 물리학, 불교 관련 책을 읽으면서 조각조각 메꿔오던 퍼즐이 이제야 맞춰지는 것 같았다. 범아일여, 일체유심조, 관념론, 모두 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거다. "나와 세계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 한마디를 찾으러 20년 가까이 책을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무거움에 대한 사유는 지금부터 그 무게에 맞게끔 고민해나가야겠지.
우리는 이제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세계 바깥은 내가 상상하는 세계가 아니다. 단단하고 안정적이며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이 아름다운 눈앞의 세계는 세계의 실체가 아니라 나의 의식 능력이 만들어낸 내 의식 안의 세계다. 그러므로 나의 세계는 내가 눈뜬 것과 동시에 생성되어 내가 눈 감는 동시에 소멸한다. 나와 세계는 분리되지 않는다. 나는 내 안을 보는 자다.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노자의 도와 덕, 불교의 일체유심조, 칸트의 관념론,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탄생한 위대한 스승들은 궁극에서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470)
덧붙여,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일까. 최근 <내면소통>을 읽는데 이 책에서 말하는 자아와 세계의 합일을 뇌과학적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만약 이 책을 다 읽고 한발짝 더 나아간 책을 읽고 싶은 갈증에 헤매이고 있다면 <내면소통>을 추천한다.
#3. 나와 세계의 관계를 알았다면 이제 침참해야 할 때,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이 책의 주제와 결론은 명확하다고 말한다. 주제는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이고 결론은 세계와 자아의 합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토록 오래된 고대의 지혜를 들춰보아야만 하고 일원론의 세계관을 알아야 하는가?
영리한 작가답게 이에 대한 답 또한 써져있다. 실용적인 이유로는 우리가 고전을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이고, 실제 이유는 우리가 반쪽의 세계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원론이라는 비좁은 섬 안에 머물고 있기에 자기 내면의 가려진 영억으로 나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두번째는 존재론적 이유다. 세계관은 당신 내면의 감옥이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 세계관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하며 죽는다. 그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심지어 그 바깥이 있는지조차 상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첫째, 세상의 목소리를 의심하라.
둘째, 외부의 떠들썩한 목소리를 가라앉힐 당신만의 시간을 만들어라.
셋째, 남는 시간을 이용해 내면의 시간을 가져라.
넷째, 마음이 가라앉았다면, 깊은 정적 속에서 자기 자신과도 대화하지 안흔 침묵의 순간을 경험하라.
다섯째, 이제는 현실로 나아가라. 책과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생각을 경청하고 말을 줄이고 그 안에서 배우고 너그러워져야 한다.
여섯째, 계획을 세워야 한다. 몸도 마음도 평온한 어느 날에,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의 삶이 다하게 될 날을 에아려보고 남은 삶 전체의 거시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고대의 인도인처럼, 삶의 시간 중 언제 자아를 찾는 시간을 가질 것인지, 언제 내면을 향한 여행을 시작할 것인지, 팽개쳐두었던 나의 살을 다시 펼치고 먼지를 떨어내고 다림질해야 한다.
일곱째,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 당신이 계획한 깨달음을 향해 열린 길을 따라 항해해야 한다. 곁의 사랑하는 이들의 손을 잡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지중하게 나아가야 한다. (552~553)
마지막 에필로그를 읽는데 뭉클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할 수 있는 거 말고, 정말 내 삶이 다하게 될 날을 헤아려 보면서 어떤 계획을 세울 수 있을까. 마침 오늘은 몸도 마음도 편안한 날이니 계획을 한번 세워볼까나..
나는 올해 48살이 되었다. 내 삶은 아마도 길게는 30년 정도가 남지 않았을까. 부계 유전으로 고혈압과 혈관질환, 당뇨를 가지고 있고, 나도 고위험군이다. 아버지 친척들을 보아도 80이 넘기신 분은 한분도 계시지 않으니 아마도 이 정도로 생각하는게 합리적이겠지. 그리고 아무리 건강하게 관리한다고 해도 75세 정도부터는 건강이 급속도로 하락하겠지. 그렇다면 내가 건강하게 몸과 마음을 영위하며 생활할 시간은 25년 내외로 남아있는 셈이다. 그리 길지 않은 거다.
나는 50까지는 30대부터 고민해오던 돈과 경제적 자유에 대한 불안에서 자유롭고 싶다. 대출을 모두 갚고 싶다. 대출을 모두 갚게 되면 1년 정도 안식년을 갖고 싶다. 따뜻한 나라에서 요가와 명상을 하면서 내가 요즘 빠져있는 자기계발 프로그램의 이론적 내용을 정리하고 싶다. 그전에 페미니즘에 대한 책도 한 권 내고 싶고, 돈을 벌기 위한 일이 아닌 개인의 만족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 50대의 내 인생은 몸과 마음의 합일을 위해 더 노력하고 싶다. 요가와 명상을 직업으로 삼고 싶고, 다른 이들의 건강과 성장을 위해 기여하고 공헌하고 싶다. 그리고 이 일을 70이 될 때까지 하고 싶다. 70이 넘으면 불교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며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하루하루 정진하고 싶다.
25년이 짧다고 생각했는데 미리 그려보려고 하니 아득하기만 하다. 그리고 거시적이고 우주적 관점에서 생각하기보다 당장의 대출과 이자에 대한 걱정부터 건강과 진로(?)에 대한 고민부터 드는 게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의 뇌가(나의 의식이) 계속해서 무언가를 지향해나가고 있기 때문이겠지. 좀더 천천히 불안과 걱정과 염려와 이유를 내려놓고 사유를 시작할 때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