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 - 예니체리 부대의 음모
제이슨 굿윈 지음, 한은경 옮김 / 비채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우선 책으로 들어가기 전에 제목에 대해 좀 언급하고 싶다. 원제목은 <The Janissary Tree>이다. 이것을 <환관탐정 미스터 야심>으로 바꿨다. 좋다.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미스터 대신 랄라 라던가 예펜디 라던가 아니면 그냥 야심이라고 썼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미스터하고 오스만 제국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야심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다. 책표지는 원작의 표지를 그대로 따랐다. 뭐, 불만은 없지만 우리에게 맞는 표지를 고민해봤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 출판사에서 표지를 원작에만 의존하는 것 같아서 하는 얘기다. 자, 이쯤하고 책으로 들어가자.
19세기 쇄락의 길을 걷고 있는 이스탄불의 한가운데에서 독특한 탐정 랄라 야심을 만나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다. 이 작품은 단순한 미스터리 작품으로 봐도 좋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고 그동안 멀리했던 오스만 제국, 지금의 터키에 대한 근대사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으로 읽을 수 있다.오스만 제국을 떠받치고 있던 에니체리가 사라진 지 십년, 그리고 서구식 군대를 도입한지 이십년 만에 술탄 앞에서 열흘 뒤 열병식을 거행해야 하는데 장교 4명이 사라지는 일이 발생하고 그 중 한명이 거대한 솥단지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이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동시에 마침 술탄의 궁 내밀한 안쪽의 하렘에서 한 소녀가 살해된다. 모두가 야심만을 부르고 있지만 야심은 궁 안에서 일어난 일보다 장교들의 흔적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솥이 상징하는 예니체리의 흔적을 찾아 이스탄불을 돌아다닌다.
이 작품은 독특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야심부터가 독특하지만 야심의 친구인 전 폴란드 대사도 독특하다. 그는 폴란드라는 나라가 사라져 나라 없는 대사로 이스탄불에 남았기 때문이다. 그는 줄곧 이렇게 야심에게 말하곤 한다. ‘나라 없는 대사와 남성 없는 남자가 만나 하나가 되었다.’고... 그들은 그야말로 반쪽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프랑스로 가는 배를 탔다가 납치되어 지금의 술탄의 모후가 된 술탄에 버금가는 지휘를 가지게 된 프랑스 여성이 있다. 이 여성은 러시아 대사 부인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가문이나 출신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그도 보통 프랑스인이었지만 발레디 술탄의 자리에 올랐고 그녀의 친구는 나폴레옹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쾨첵 춤을 추는 여장 남자 등 이스탄불의 최상위 계층에서 하위 계층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인물들을 배치시키고 있다.
그 인물들이 야심의 눈길에 따라, 말에 따라, 행동에 따라 이스탄불에서 일어나는 사건 속으로 우리들을 깊이 끌어들이고 있다. 야심은 그의 나라 오스만 제국이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는 걸 잘 아는 인물이다. 또한 어떤 이유로 환관이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경험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 상인 밑에 있을 때는 그리스가 독립을 하자 그들을 그리스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러니 그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 인물도 아니고 전통과 나라에 매인 인물도 아니다. 유연한 사고와 폭넓은 사교성이 그의 장점이고 욕심 없는 마음이 그의 미덕이다.
추리소설이라면 요즘의 대세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팩션과 반전이다. 이 모두를 충족시키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우리가 모르던 곳으로의 여행은 언제나 즐겁다. 하지만 우리와 비슷한 점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옛 문화에도 환관, 즉 내시가 있었고 구중궁궐에 임금님과 여인들만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런 점들이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좋다. 하지만 무엇보다 야심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이다. 그 시대 홈즈는 척 보면 압니다 식의 수사를 했지만 야심은 전형적인 탐정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발로 뛰어 다니며 정보를 모으고 아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만나고 위기에 쳐하고 친구에 의해 구출되고 다시 사건에 접근해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작품 후기에 에니체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첨부되어 있다. 참 좋은 자료다. 이 작품이 단순한 터키의 색다른 탐정 이야기가 아님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어필하는 모습이 좋다. 책을 덮은 뒤 <The Janissary Tree>에 대해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까. 에니체리 나무는 단순히 예니체리만의 상징은 아니다. 그것은 예니체리가 오스만 가문의 흥망과 함께 했듯이 오스만 투르크인들의 전통과 문화의 뿌리다. 예니체리는 부패되어 사라지고 문화는 돌고 도는 것이라 흥망성쇠를 함께 하지만 사람이 계속 남아 기억하는 한 이스탄불이 어떤 식으로 바뀌든,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든 간에 살아 숨 쉴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이런 뿌리 깊은 나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나무를 어떻게 가꾸고 바라보느냐는 결국 가꾸는 자들의 몫일 테니까.
올 해 가장 독특하고 매력적인 탐정을 꼽으라면 아마도 야심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