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는 예수에 관한 전기(傳記)다. 전기는 '내러티브'로 이루어지는데,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문학 비평이라는 도구를 통해 살펴본 네 편의 복음서는 한 "예수를 그린 네 편의 초상화"라 할 수 있다.

단 한 장의 초상화만으로 그 초상화의 주인공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단일한 복음서가 아닌 네 편의 복음서 덕분에 우리는 예수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 온전한 예수의 모습에 조금 더 다가가기 위해서는 네 편의 각기 다른 초상화를 천천히 비교하고 자세히 분석해야 한다. 형식과 내용에 있어 고대 전기와 유사성이 뚜렷한 복음서는 일종의 고대 전기라 할 수 있다. 복음서에 사용된 자료를 분석하면,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은 마가복음이다.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과 'Q', 이에 더해 각자의 고유한 자료를 사용했으며, 요한복음은 독자적 자료를 가지고 가장 마지막에 기록되었다. 자료들은 양식에 따라 기적 이야기, 어록, 비유, 선포 이야기로 분류할 수 있다. 복음서 저자들은 이러한 원자료를 바탕으로 각자의 관점에 따라 편집, 구성하여 자신이 이해한 바를 독자에게 제시했다.

복음서를 전기라는 형식의 문학으로 볼 때, 저자, 독자, 본문의 삼각 구도를 통한 문학적 접근이 가능하다. 각 복음서의 저자는 내러티브 해설자로서 본문의 내러티브를 조금씩 다른 플롯으로 해설한다. 이 해설의 일차적 독자는 저자가 글을 쓸 때 상정한 내포 독자이지만, 지금 복음서를 읽는 우리 자신도 복음서의 실제 독자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2천 년 해석의 역사가 있다. 그 역사 속에서 모든 영감의 근원인 성령 하느님은 복음서 저자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서학자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복음서는 온전한 인간이자 온전한 하느님인 성자 하느님에 관한 인간의 언어로 된 하느님의 말씀이며, 창조성의 원천인 성부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창조적 응답이다. 이처럼 복음서는 문학적 방법으로 인간이 기록한 책인 동시에 인간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하느님이 기록한 책이다.

초대 교회와 교부들은 '네' 편의 복음서를, 그리고 네 편의 복음서'만'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에 그리스도교 전통은 네 상징을 부여했다. 마가는 사자, 마태는 인간, 누가는 소, 요한은 독수리. 그 후로도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었고, 신학과 문화, 신앙과 예술 영역에서 수많은 예수상으로 재탄생했다. 복음서가 네 편이라는 점은 그 과정에서 해석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동시에 해석의 한계를 설정하는 자극제이자 제어 장치로 작동했다. 복음서는 네 편이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이야기, 즉 예수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예수는 오직 하나,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이다. 예수는 네 편의 이야기에 뿌리내리고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듣는 이들을 한 예수와 대면하게 하고 예수가 하느님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한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복음서와 만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제자로서 예수와 만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 편의 복음서에서 우리는 한 예수를 만나고 주로 고백하고 경배한다. 그리고 예수를 따른다. 어떤 사람은 사자 같은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인간적인 모습으로. 우리 중에는 소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수리 같은 사람도 있다. 교회나 교파도 마찬가지다. 인간적인 모습을 중시하는 교회/교파도 있고, 소처럼 묵묵히 희생하는 특징을 가진 교회/교파도 있다. 사자가 인간에게 틀렸다고, 소가 독수리에게 가짜라고 할 수 있을까. 사자, 인간, 소, 독수리가 모두 한 예수를 그린 다른 초상화이듯이,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우리도 한 예수를 따르는 다양한 제자들이다. 네 편의 복음서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다름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화합과 일치를 이루라는 명령일지도 모른다. 네 편의 복음서를 꼼꼼히 읽고 그 안에 드러나는 미묘한 차이와 독특한 분위기를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그 명령을 따르는 첫걸음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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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지음), 《철학 고전 강의―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라티오, 2016.

제31강 요약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에 이르는 형이상학의 핵심문제를 유한자(또는 대상 세계), 인간, 무한자라는 축을 중심으로 개관하고, 그 속에서 칸트의 시도가 어떤 의의를 가지는지 알아본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자에 이를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긍정하고 있는데, 플라톤에서는 이론과 실천이 통일을 이루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어 있다. 데카르트와 칸트의 출발점은 '자기의식'으로 동일하면서도 데카르트의 자기의식이 신에 의존하고 있는 것과 달리 칸트에서는 인간과 무한자가 단절되어 있다. 인간과 무한자의 단절에 직면한 칸트는 '최고선'을 요청함으로써 도덕 판단의 근거를 마련하고, '판단력'으로 자연 영역과 자유 영역의 연결을 시도한다.

플라톤에서 인간과 유한한 사물의 관계는 감각에 의한 것, 불확실한 것이기에 대상 세계에 대한 인간의 앎은 의견(doxa)일 뿐이다. 인간과 무한자의 관계에서 인간은 무한자를 알 수 있고, 무한자로 상승할 수 있다. 이 무한자는 '선善의 이데아'로, 이론적 앎의 영역과 실천적 행위의 근본원리가 결합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무한자, 곧 선의 이데아에 대한 앎이 가능한 플라톤에서는 선의 이데아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으면 곧바로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일어난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인간의 앎은 지각에서 시작하여 기억, 경험 등을 거치고, 이 모든 것을 거친 다음 인간은 '부동의 원동자'라고 하는 무한자에 이를 수 있다. 이론적 앎의 영역이 부동의 원동자를 정점으로 하는 완결된 체계를 갖추고 있다 해도 실천의 궁극목적인 행복(eudaimonia)의 도덕적 올바름에 대해서는 이론학으로부터 확실한 답변을 가져올 수 없다. 실천의 궁극적인 목적, 실천이 지향해야 하는 도덕의 제일원리는 정치적 존재인 인간이 정치생활 공동체인 폴리스에서 살아가며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이렇게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어 있다.

데카르트와 칸트는 자기의식에서 출발한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자기의식은 근대적 사유의 출발점이다. 데카르트는 '의심하는 나'에서 시작하여 자기의식에 이르는데, 이 자기의식은 불안한 것이어서 대상 세계에 대한 앎은 신의 보장이라는 배경 속에서 작동한다. 데카르트에서 무한자와 유한자의 관계는 신에 대한 믿음이 어설픈 자기의식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칸트에서 자기의식은 진리 인식의 원천이다. 진리 인식의 원천은 자기에게 있지만 대상 세계로부터 인식 주관에 주어지는 데이터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이론적 앎의 영역에서 완전히 확실한 인식을 만들어낼 수 없다. 무한자로부터는 경험 데이터가 아예 주어지지 않으므로 무한자에 대한 앎 자체가 불가능하고, 영원 불변한 보편적 도덕의 기초를 세울 수도 없다. 그런 까닭에 인간이 요청해야만 하는 것인데, 요청한다는 것은 사변적인 것이므로 이론과 실천의 통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칸트에서 인간과 신은 합치될 수 없고, 유한자와 무한자는 단절되어 있다. 고대적 사유에서는 유한자인 인간이 무한자에 이를 수 있었으나, 근대적 사유에서는 자기의식이 등장하면서 인간과 무한자는 멀어지게 된다.

칸트에 따르면 경험에서 시작하는 인간의 앎은 확실성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실천의 영역으로 들어왔을 때는 이성의 사변적 요구가 들어서게 된다. 이성의 사변적 요구는 도덕 판단에 있어서 절실하게 필요한 최고선을 향하고 있다. 최고선이라는 이념은 '직관이 없는, 사유의 순수한 형식'으로, 경험 데이터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앎 자체가 시작되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것이기에 요청할 수밖에 없다. 최고선을 요청한다는 것은 그것이 인간에 앞서 있어서 인간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구성적 원리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그때그때 통제하는 통제적 원리라는 것이다. 도덕의 원리가 통제적인 것이라 해도 그것은 자유의지의 결단에 의해 움직인다. 자유의 영역은 인과율로 작동하지 않는 영역이고, 최고선의 실현 원리인 행복은 인과관계에 따라 작동하는 자연의 영역에 속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충돌을 해소하기 위해 칸트는 자연 속에 목적이 있다고 하는 '자연 목적론'을 상정하여 자연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을 연결하고, 자연을 인간의 궁극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정당화한다. 칸트는 이를 '외적합목적성'外的合目的性이라고 부르고, 이렇게 자연 바깥에서 자연을 목적에 연결시키는 힘을 '판단력'이라고 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무한자와 합치될 수 있었던 인간은 데카르트와 칸트에서 무한자와 멀어져 단절되었고, 그 단절을 메우기 위해 칸트는 다시 무한자를 요청한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자에 대한 명석판명한 앎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으나, 그렇다 해도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는 한 인간은 무한자와의 관계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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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종교개혁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루터와 그의 개혁에 대한 정치 지도자들의 폭넓은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혁에 대한 정치적 지원의 바탕에는 로마를 향한 독일의 정치적 불만이 있었고, 여기에 루터 자신의 개인적 소명의식이 결합하면서 루터는 개혁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개혁가 루터의 목표는 정통 그리스도교의 회복이었으며, 그것의 핵심은 성경이 강조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있었다.

1517년 '95개 논제'에서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 이르는 일련의 사태를 계기로 루터는 개혁에 착수했다. 그보다 앞서 개혁을 시도한 인물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실패했던 곳에서 루터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 성공의 배경에는 동료 및 다른 개혁가들의 활동, 인문주의와 출판 인쇄물의 혜택 등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정치 지도자들의 지지와 후원을 빼놓을 수 없다. 사실상 종교개혁은 시초부터 정치적이었으며, 종교개혁의 운명을 결정할 사람은 루터가 아니라 카를 5세 황제였다. 황제는 개혁 세력에게 정치적이면서 종교적인 탄압을 가했고, 탄압에 맞서는 동안 루터와 그의 동료들은 지방에서 제국에 이르는 모든 층위의 정치와 얽히게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종교개혁은 정치와 복잡하게 얽혀들어 갔지만, 이 흐름에서 실질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루터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루터의 95개 논제에는 '대사/면죄부'뿐만 아니라 교황에 대한 공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로마는 신속하게 루터를 파문했다. 로마의 대응에도 루터는 멈추지 않고 독일에 대한 로마의 착취와 폐해를 비판하는 글들을 출판했다. 루터의 저술들은 귀족들의 정치적 지지와 동료 학자들의 학문적 지원을 받으면서 로마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찼던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와 동시에 루터의 내면에는 개혁을 이끌도록 하느님이 자신을 부르셨다는 확신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의로움'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루터는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신학적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았다. 이를 기초로 로마의 낡은 지침을 대체하는 신앙생활의 필수적 안내서들을 새롭게 펴냈다. 루터는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개혁은 '하느님의 사업'이며, 자신은 그 일에 부름받은 '하느님의 대리자'라고 생각했다.

루터는 새로운 그리스도교가 아닌 정통 그리스도교의 회복을 원했다. 그가 바라던 그리스도교는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올바른 믿음과 선행 및 바른 성사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성경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다른 어떤 책보다 성경을 중시했던 루터는 성경을 직접 독일어로 번역했다. 루터의 성경 번역은 성경의 정확한 의미를 찾는 해석 작업이었으며, 해석의 기준은 복음이었다. 그는 복음을 그리스도에 대한 담론으로 정의했다. 이 복음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성경의 권위가 드러난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직 성경'이라는 구호는 성경이 모든 쟁점에 대해 배타적 권위를 지닌다는 주장이 아니라 교회 안의 쟁점에 관해 최고의 권위를 지닌다는 의미이다. 루터에게 성경의 권위는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정의하고 강조한다는 사실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중세 교회의 낡은 전통과 대립하며 그리스도교를 바로 세우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혁이 실패할까 노심초사했으며, 실제로 돌이킬 수 없는 분열로 이어진 개혁의 결과는 그가 세웠던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비전이 실현될 수 없는 이상향에 가까운 것이었음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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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향기다. 벌써? 걸음을 멈추고 잠깐 눈을 감는다. 해마다 라일락 향기는 이렇게 살짝 놀래키면서 찾아온다. 봄바람과 함께 온다. 늦은 봄 초저녁 라일락 향기 실은 포근한 바람이 불쑥 찾아왔다. 누군가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처럼.

"이러한 순간들을 감지하고 잠깐이라도 그 순간을 붙잡고" 있는 것. 기도로 '들어가며' 준비할 것은 이것이 전부라고, "잠깐이면 충분"하다고 《기도》는 이야기한다. 쉬우면서도 쉽지 않은 출발이다. 세상이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빠른 세상을 탓하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못하는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다. 살려고 점점 더 속도를 내지만 빠른 속도가 우리를 살리지 못한다는 것 또한 잘 안다. 느리게 살 수 있다면 좋겠으나, 당장은 "속도를 늦추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도》는 하루 중 고요한 '순간'을 만들고 그 순간 혼탁한 내면을 맑게 가라앉히는 것이 기도 '시작하기'라고 말한다.

시작하기가 고요함에서 출발했던 것처럼 '더 깊게 들어가기'의 첫 번째 단계도 침묵이다. 고요한 순간에 시작된 기도가 귀 기울이기로 이어진다면, 침묵에서 더 깊게 들어가는 기도는 응시하기로 깊어진다. 고요함 속에서 침묵을 유지하는 것, 귀 기울이고 또 응시하는 것, 이것은 모두 수동적인 행위이다. 말을 건네는 것도,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도 우리가 하는 일은 아니다. 《기도》는 억지로 뭔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엄포를 놓거나 윽박지르는 대신, '걱정하지 마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기도는 의무도 숙제도 무거운 짐도 아니다. 기도는 선물이며 우리는 그 선물을 받아서 누리기만 하면 된다.

선물이 아무리 좋아도 시간이 지나면 흥미를 잃게 된다. 선물의 가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람 마음이 쉽게 변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우리가 때때로 지루함과 무기력함에 빠지는 것은 기도의 여정이 사막을 지나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성숙한 신앙으로 가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통해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자신의 감각을 의존하지 말고 당신에게만 의지하라고 가르치"신다. 사막을 통과하면서 하느님에게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고 성장한 기도는 행동을 준비하는 것이다. 기도 자체가 곧 행동의 준비라는 의미이다. 하느님은 "어떻게둔 행동하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러하기에 조바심을 내거나 지나친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는 없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늘 기도가 쉽지 않았다. 이기적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기도 제목을 주루룩 늘어놓는 것이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거창한 기도 제목을 주워섬기는 것도 위선처럼 느껴졌다. 모두 핑계일 뿐이지만, 마음의 동요 없이 꾸준히 한결같은 기도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다. 《기도》를 읽고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요한 순간, 침묵하는 시간을 새로 만들면서 선물 상자를 조심스럽게 풀고 있다.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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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지음), 《철학 고전 강의―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라티오, 2016.

첫 시간 요약

철학은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을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존재론'(ontology)이다. 존재론은 세계의 근본 원리를 찾으려는 시도로서, 이러한 시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검토하기 위해 철학 고전 텍스트를 읽는다. 텍스트를 읽을 때는 자신이 무지한 상태임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철학의 탐구 대상은 세상의 모든 것—희랍어 'ta onta'—이다. ta onta, 세상의 모든 것,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탐구는 존재론이다. 제일철학이라고도 하는 존재론은 철학과 근원적으로 같은 말이다. 넓은 의미의 존재론에는 형이상학과 좁은 의미의 존재론이라는 두 가지 하위 영역이 있다. 형이상학은 인간의 감각적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을 다루고, 좁은 의미의 존재론은 초월적인 것을 제외한 감각적인 것을 다룬다. 형이상학은 아주 오래된 학문 분야이므로 '전통적 형이상학'이라 일컫는다. 전통적 형이상학은 우주론, 영혼론, 신론의 세 영역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영역 형이상학'이라고도 한다. 이들 영역에 관철되어 있는 원리를 찾으려는 시도를 '사변적인 것'이라고 하는데, 그에 따라 '사변 형이상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통적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공부하는 것은 철학의 전 영역으로 나아가기 위한 기본적 원리를 터득하는 것이다. 헤시오도스는 서구 존재론의 씨앗을 보여주었으며,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 만물을 법칙에 따라 질서짓고 설명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플라톤은 '좋음'이라는 초월적 형상을 목적으로 제시하고 그 위에 인간과 공동체를 세우려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에서 시작하여 부동의 원동자에 이르는 완결된 체계를 구축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자기의식과 초월적 신을 진리 형성의 주요한 요소로 내세웠다. 칸트는 종래의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도덕적 명령이 요구되는 지점에서 '장래의 형이상학'을 구상했다. 헤겔은 유한자인 인간이 역사성을 매개로 무한자의 입장에 올라선다고 하는 역사 형이상학 또는 역사 존재론을 제시했다.

이와 같은 개관을 염두에 두고 텍스트를 읽어 나가는데, 이때 가져야 할 태도는 '무지의 지', 즉 자신이 무지한 상태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플라톤은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무지의 지를 세 단계로 나누어 말한다. 첫째 단계는 자신의 무지를 알지 못하는 무지의 무지 단계이며, 둘째 단계는 특정한 분야의 앎은 가지고 있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려면 셋째 단계인 자신의 무지를 철저히 자각하는 무지의 지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내세우는 무지의 지는 인간이 자신의 삶과 그것에 결부된 앎 전체를 철저하게 다시 설정하고 그에 따라 전면적으로 다시 형성해 나갈 것을 요구하는, 일종의 존재론적 결단을 드러내는 것이다.

무지의 지라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철학의 근본이 되는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텍스트를 읽고 익히는 것. 이것은 근본학을 통해 자신의 앎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존재론적 결단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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