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향기다. 벌써? 걸음을 멈추고 잠깐 눈을 감는다. 해마다 라일락 향기는 이렇게 살짝 놀래키면서 찾아온다. 봄바람과 함께 온다. 늦은 봄 초저녁 라일락 향기 실은 포근한 바람이 불쑥 찾아왔다. 누군가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처럼.

"이러한 순간들을 감지하고 잠깐이라도 그 순간을 붙잡고" 있는 것. 기도로 '들어가며' 준비할 것은 이것이 전부라고, "잠깐이면 충분"하다고 《기도》는 이야기한다. 쉬우면서도 쉽지 않은 출발이다. 세상이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빠른 세상을 탓하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못하는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다. 살려고 점점 더 속도를 내지만 빠른 속도가 우리를 살리지 못한다는 것 또한 잘 안다. 느리게 살 수 있다면 좋겠으나, 당장은 "속도를 늦추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도》는 하루 중 고요한 '순간'을 만들고 그 순간 혼탁한 내면을 맑게 가라앉히는 것이 기도 '시작하기'라고 말한다.

시작하기가 고요함에서 출발했던 것처럼 '더 깊게 들어가기'의 첫 번째 단계도 침묵이다. 고요한 순간에 시작된 기도가 귀 기울이기로 이어진다면, 침묵에서 더 깊게 들어가는 기도는 응시하기로 깊어진다. 고요함 속에서 침묵을 유지하는 것, 귀 기울이고 또 응시하는 것, 이것은 모두 수동적인 행위이다. 말을 건네는 것도,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도 우리가 하는 일은 아니다. 《기도》는 억지로 뭔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엄포를 놓거나 윽박지르는 대신, '걱정하지 마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기도는 의무도 숙제도 무거운 짐도 아니다. 기도는 선물이며 우리는 그 선물을 받아서 누리기만 하면 된다.

선물이 아무리 좋아도 시간이 지나면 흥미를 잃게 된다. 선물의 가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람 마음이 쉽게 변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우리가 때때로 지루함과 무기력함에 빠지는 것은 기도의 여정이 사막을 지나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성숙한 신앙으로 가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통해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자신의 감각을 의존하지 말고 당신에게만 의지하라고 가르치"신다. 사막을 통과하면서 하느님에게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고 성장한 기도는 행동을 준비하는 것이다. 기도 자체가 곧 행동의 준비라는 의미이다. 하느님은 "어떻게둔 행동하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러하기에 조바심을 내거나 지나친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는 없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늘 기도가 쉽지 않았다. 이기적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기도 제목을 주루룩 늘어놓는 것이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거창한 기도 제목을 주워섬기는 것도 위선처럼 느껴졌다. 모두 핑계일 뿐이지만, 마음의 동요 없이 꾸준히 한결같은 기도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다. 《기도》를 읽고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요한 순간, 침묵하는 시간을 새로 만들면서 선물 상자를 조심스럽게 풀고 있다.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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