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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늙을까, 왜 병들까, 왜 죽을까 - 내 안의 세포 37조 개에서 발견한 노화, 질병 그리고 죽음의 비밀 ㅣ 서가명강 시리즈 38
이현숙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9월
평점 :
생명체를 이루는 기본적 단위 중 하나가 세포라면, 이 책은 세포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지식을 담았다. 그러므로 이미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당연하다. 어쩌면 꼭 알아야 할 지식이란, 그 속에 이미 아는 것이 모르는 것만큼은 있다는 뜻이다. 단지 이미 아는 그 지식의 의미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거나, 이 기본적인 지식이 지금은 어느 지평까지 확장됐는지, 또는 최첨단의 지식과 내가(나도) 아는 기초의 지식이 이어지는 관계와 맥락을 모를 뿐이다. 알아도 모르고, 아는 만큼 모른다. 이미 아는 것이 꼭 알아야 하는 것인 이유다.
BRCA2를 보면서 ‘이게 바로 암이구나‘라는 생각했었다. 그 이유는 BRCA2는 DNA 수선 장애에도 참여하고, DNA 복제 때 복제가 제대로 완성되도록 항상성을 유지하는 데도 참여하기 때문이다. 또 BRCA2는 세포가 분리될 때 염색체가 제대로 분리될수록 조절하는 데도 참여한다. 이런 유전자가 망가지면 점점 세포가 분열할수록 돌연변이가 많이 생겨서 암에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유전자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암 생물학에서 얘기한 여러 가지 도메인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116~117쪽
이 책은 현재 암세포 생물학에서 탁월한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 중견 생명과학자인 저자가 일반 대중의 눈높이에서, 세포에 관한 세포(기초)적인 지식을 전해준다. 특히 세포와 관련한 다양한 주제들 중에서도 저자의 전문 분야인 암, 그리고 암이 발생하는 핵심적인 원인인 노화에 집중한다. 세포에 관한 분자생물학적 이해가 어떻게 암의 진단, 치료, 완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기 쉽게 구성한 점이 인상적이다. 암의 진단과 치료가 의학이라는 협소한 영역의 난제가 아니라, 너무나 당연하게도 생물학을 비롯한 생명과학의 여러 학문이 함께 해결 중인 문제라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줄기세포 치료가 아직도 요원한 이유는 바로 암세포가 줄기세포를 일부 닮았다는 점에 있다. 어쩌면 암은 하늘에서 떨어진 나쁜 녀석이 아니라, 줄기세포라는 아주 훌륭한 보험 세포의 발생과 분화 과정을 사생아처럼 유용해버린 나쁜 녀석이 만들어낸 질병인지도 모른다. -56쪽
다음 그래프에서 텔로머레이스의 역기능인 발암에 대해 알 수 있다. 앞서 말한 위기를 벗어나고 계속 분열하는 암세포들의 85~90%에서는 텔로머레이스가 발현되고 있다. 이 세포들이 유래한 정상 세포들에서는 없었는데, 위기를 극복하면서, 혹은 극복하기 위해 획득한 형질이다. 다시 말해 보통의 세포가 줄기세포와 생식세포에서 발현되는 텔로머레이스를 얻게 되면 텔로미어가 유지되면서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세포, 이 범주에는 암세포가 포함된다. -158~159쪽
세포가 분열을 멈추고 노화하는 시점을 결정하는 텔로미어와 그 텔로미어의 작용을 막아서 어떤 세포는 계속 분열하며 노화하지 않게 하는 텔로머레이스의 존재는, 이제 꼭 알아야 할 지식에 속한다. 분열을 멈추고 노화하는 세포가 증가하는 것은 그 세포들이 모인 인체 자체의 노화를 의미하기에, 세포에서 텔로머레이스를 발현시켜 신체 노화를 막을 가능성은 큰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세포 노화를 일으키는 텔로미어와 세포 노화를 막는 텔로머레이스의 기능이, 돌연변이 세포가 노화하지 않고 이상 증식을 계속하는 암 세포와 맞닿는 맥락을 이 책은 잘 보여 준다. 암 세포 중 일부가 노화하지 않고 이상 증식을 계속하는 것은, 텔로머레이스를 발현하거나 아예 텔로미어의 감소 자체를 회피하는 능력을 확보한 까닭이다.
세포의 돌연변이이자 인체 건강의 핵심인 암세포의 관점에서 세포에 접근한다는 것은 이 책의 중요한 장점이다. 일반적인 세포와 그것이 모인 인체의 건강을 추구하는 방식과 암세포를 제어하는 방식의 정교한 관계를 일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설명해 주어서다. 예를 들어 텔로미어를 억제해서 세포 노화를 막는 텔로머레이스의 가능성은 미래 의학의 해법처럼 언급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텔로머레이스는 이미 암 세포의 생존법이라는 점에서 단지 이 기능을 일반적으로 발현시키는 것만으로는 인체가 건강해질 수 없다. 모든 세포의 텔로머레이스를 발현시켜서 세포 노화를 막는다면, 오히려 암 세포가 더 쉽게 발생할 수도 있다. 따로 암 세포가 텔로머레이스 형질을 획득해야 하는 비용을 오히려 줄여 주는 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자 특정한 부위에서 일정한 기능을 하게 도는 일반 세포들과 어느 부위에서 어떤 기능이나 할 수 있도록 분화되는 줄기세포 중에서 암세포는 줄기세포의 특성마저 있다. 암세포가 부위를 가리지 않고 전이되어서 일반 세포들의 다양한 기능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저자는 줄기세포가 너무 많아질 때 암이 발생하는 부작용의 사례를 지적하고 있다. 암세포와 줄기세포의 유사성 내지 연관성을 시사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부위와 기능을 가리지 않고 재생할 수 있는 줄기세포의 기능도 그 자체로는 인체의 건강을 담보할 수 없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포의 능력은 암세포에서도 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미 명확했는데, 단지 내 기본적인 지식이 엉성했을 뿐이다. 무작정 줄기세포의 특성도, 텔로머레이스도 ‘우리 편’이라고 단정한 셈이다.
팀 헌트Timothy Hunt의 서명은 특별하다. G1, S, G2, M의 순환을 그린 다음 ‘the cell cycle(세포 주기)‘이라고 쓰고, 밑에 ‘팀 헌트‘라고 서명한다. G1, S, G2, M은 바로 생명의 비밀이다. 모든 진핵 세포는 세포 주기에 따라서 이렇게 분열한다.
전 세계에서 역사적으로도 전무후무하게 단 한 명만이 이런 서명을 할 수 있기에 나는 그의 서명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관하고 있다. 그가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부럽지 않다. 세상에는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가 있고, 노벨상을 받지 않은 사람 중에도 훌륭한 과학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헌트의 서명만은 너무 부럽다. 내가 생명의 비밀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걸 밝혔다는 사실을 서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 멋지지 않은가? -46~47쪽
물론 이 책은 이런 경솔한 편 가르기가 틀렸다고 굳이 훈계하지 않는다.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는 사이에, 세포의 작용이 인체에 유익하다고 일방적으로 단정해 왔던 내 인식의 한계를 직면했을 뿐이다. 아마도 이것이 저자의 의도였을 듯하다. 자신의 의도를 자연스럽게 납득시킨 이런 흐름에서 교육자로서 저자의 원숙함도 엿보게 되었다. 그 덕분에 암세포 생물학, 분자생물학의 획기적인 발전과는 별개로, 암의 정복이 아닌 완만한 관리, 치료의 가능성, 중요성을 제시하고 세포와 신체 노화를 극복할 가능성을 성급히 낙관하기보다 여전히 크고 많은 과제가 주어질 것임을 예측하는 저자의 신중함도 납득할 수 있었다. 암 정복, 세포 노화의 극복, 두 과제 모두 그런 개념 혹은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저자는 이 과제의 결말을 예측하거나 낙관하기보다, 세포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은 여전히 많고, 무엇을 모르는지도 계속 알아야 한다는 통찰과 경험을 의연하게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