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잠자리에 누운 내 아버지는 비행기 소리를 듣곤 했다. 영국으로 들어오는 독일 비행기들이었다. 그들은 깊은 밤이면 다시 독일로 날아갔다. 런던에서 동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켄트Kent 지방에서 벌어진 일이다. 아버지는 1934년에 태어났다. 그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아버지가 다섯 살이었다는 뜻이다. 켄트는 영국의 폭탄 골목Bomb Alley으로 불렸다. 독일 군용기들이 런던으로 향하며 지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폭격기가 표적을 놓쳤거나 남은 폭탄이 있을 경우 돌아오는 길에 아무 곳에나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루는 길을 잃은 폭탄이 할아버지 댁 뒷마당에 떨어졌다.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 P7
우리가 어린 시절의 흥미와 관심을 다 잃고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아니다. 나는 스파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소설이라면 모조리 읽었다는 농담을 하곤 한다. 몇 년 전 어느 날 책장을 살피다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전쟁을 다룬 논픽션 서적을 엄청나게 많이 모아두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역사를 다룬 유명한 베스트셀러는 물론이고 특수한 역사적 문제를 연구한 책, 절판된 자서전, 학술서까지. 그 책들 대부분은 전쟁의 한 측면을 다루고 있었다. 무엇일지 짐작이 가는가? ‘폭격‘이다. 스티븐 부디안스키Stephen Budiansky의 《공군력 Air Power》, 타미 데이비스 비들Tami Davis Biddle의 《항공전의 수사학과 실제Rhetoric and Reality in Air Warfare》, 토머스 M. 코피Thomas M. Coffey의 《슈바인푸르트에 대한 결정Decision over Schweinfurt》 등 폭격을 다룬 역사서들이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 권만 더 예를 들어볼까? 로버타 월스테터Roberta Wahlsteter의 《진주만: 경고와 결정Pearl Harbor: Warning and Decision》을 읽어보았는가? 아니라면 당신은 정말 재미있는 책을 놓친 것이다. - P9
이 책을 쓰고 있을 때, 당시 미 공군 참모총장이던 데이비드 골드페인David Goldfein과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장소는 워싱턴 D.C.에서 포토맥강을 사이에 두고 바로 건너 버지니아 북부에 있는 합동기지 마이어-헨더슨 홀Myer-Henderson Hall 내의 에어하우스Ar House였다. 많은 미국 고위 군 관계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웅장한 빅토리아풍 거리에 자리한 커다란 빅토리아식 건물이었다. 저녁 식사 후, 골드페인 장군은 그의 친구와 동료, 그러니까 다른 공군 고위 관리들을 초대했다. 다섯 명이 장군의 뒷마당에 모여 앉았다. 그들은 대부분 전직 군 조종사들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들도 대개 군 조종사였다. 이 책에서 다룰 사람들의 현대 버전인 셈이다. 밤이 깊어 가면서, 내 눈에 띈 것이 있었다 에어하우스는 레이건 국립 공항Reagan Nationglal Airport 바로 아래쪽에 있다. 거의 10분에 한 번씩 머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갔다. 특별할 것이 전혀 없었다. 시카고나 탬파 또는 샬럿으로 향하는 일반 상업 여객기였다. 이 비행기들이 머리 위로 날아갈 때마다 장군과 그 동료들 모두의 시선이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위쪽을 향했다. 어쩔 수없는 집착이었다. 그들은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 P11
(로리스) 노스태드Lauris Norstad는 원한다면 (이 제21폭격기사령부에서) (커티스 에머슨) 르메이Curtis Emerson LeMay의 부사령관으로 잔류해도 좋다고 말했다. 너무나 모욕적인 제안이었기에 (헤이우드) 핸셀Haywood Hansell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노스태드는 열흘 안에 정리를 마치라고 지시했다. 핸셀은 멍한 상태로 주위를 서성였다. 괌에서의 마지막 날, 핸셀은 평소보다 술을 좀 더 마시고 젊은 대령이 연주하는 기타에 맞춰 부하들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 "늙은 파일럿은 죽지 않는다. 결코 죽지 않는다. 그저~ 사라질 뿐이~다." - P17
미 육군 장교들을 키워낸 유서 깊은 훈련장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사관학교의 예배당은 허드슨강 위의 가장 높은 지대에 서서 학교의 스카이라인을 압도하고 있다. 이 예배당은 1910년 웅장한 고딕 복고 스타일로 지어졌다. 오로지 어두운 회색 화강암으로만 만들었으며 창은 좁고 길다. 이 건물은 견고하고, 꾸밈없고, 흔들리지 않는 중세 요새의 힘을 가지고 있다. 빌더(제2차 세계대전 이후 펜타곤의 외부 연구 기관 역할을 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주 샌타모니카에 만들어진 싱크탱크 랜드 코퍼레이션RAND Corporoion에서 일했던 정치학자 칼 빌더Carl Builder)는 이렇게 말한다. "이곳은 서로와 그리고 그들을 키워낸 땅과 가까운 사람들이 간단한 의식을 치르는 데 적합한 조용한 장소다." 이것이 바로 육군이다. 애국심 강하며 국가에 대한 봉사에 뿌리를 둔 군대인 것이다. - P5354
해군사관학교 예배당은 아나폴리스Annapolis에 있다. 웨스트포인트 예배당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지었으나 훨씬 더 크고 웅장하다. 아메리칸 보자르beaux-art[신고전주의 양식이 프랑스 국립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에 유입되어 새롭게 정립된 구성 중심의 예술 사조] 스타일의 이 건물에는 파리 앵발리드 Invalides의 군 예배당 디자인을 기반으로 한 거대한 돔이 있다.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이 섬세하고 화려한 내부를 비춘다. 오만하고, 독립적이며, 세계적 규모의 확고한 야심을 품고 있는 대단히 해군다운 장소이다. - P54
공군이 콜로라도 언덕 한가운데에 알루미늄과 강철을 이용해 수직으로 세워둔 전투기 모양의 예배당을 건설했다는 것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하는가? 칼 빌더는 그의 책에서 이런 의문을 던진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공군은 자기들을 군의 오랜 가지, 즉 육군이나 해군과 가능한 한 차별화되기를 필사적으로 원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또한 공군은 유산이나 전통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현대적이길 원한다. - P55
하지만 히틀러가 폴란드를 공격했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으며, 1941년 여름에는 모두가 미국 역시 곧 전쟁에 나설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 나라가 전쟁을 시작하면, 강력한 공군력이 필요한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강력한 공군력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얼마나 많은 비행기가 필요할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워싱턴의 육군 고위 지휘부는 절박한 심정으로 그 해답을 갖고 있을 법한 유일한 전문가 집단을 불러들였다. 앨라배마주 맥스웰필드에 있는 전술학교의 교관들을 말이다. 이렇게 해서 폭격기 마피아는 워싱턴으로 갔고, 미국이 공중전에서 한 모든 일의 본보기가 된 놀라운 문서를 내놓았다. 문서의 제목은 〈AWPD-1(Air War Plans Division One)〉이었다. 이 문서는 미국에 필요한 항공기(전투기, 폭격기, 수송기)가 어느 정도인지 극히 상세히 제시했다. 얼마나 많은 조종사와 몇 톤의 폭발물이 필요한지는 물론 초크 포인트 이론에 따라 선정한 이 모든 폭탄의 독일 표적, 즉 50개의 발전소, 47개의 수송망, 27개의 석유 정제소, 18개의 항공기 조립 공장, 6개의 알루미늄 공장, 6개의 ‘마그네슘 공급원‘도 포함되었다. 이 놀라운 기획 작업은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단 9일이 걸렸다.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앨라배마주에 은둔해 10년을 보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종류의 초인적 개가였다. 폭격기 마피아는 전쟁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 P6364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정량적인 세계와 관련한 모든 생각을 이름은 (프레더릭) 린더만Frederick Lindemann(이후 처웰 경Lord Cherwell이 되었다)의 두뇌에 저장했다. 그리고 1940년 전쟁이 터진 직후 총리가 되자 린더만을 옆에 두었다. 린더만은 처칠 내각에서 처칠 정신의 문지기 역할을 했다. 그는 처칠과 콘퍼런스에 갔다. 처칠과 식사를 함께 했다. 린더만은 술고래인 처칠과 식사할 때 외에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럴 땐 취하도록 마셨다. 주말이면 처칠의 시골 별장으로 갔다. 사람들은 새벽 3시에 불 옆에 앉아 함께 신문을 읽는 두 사람을 목격했다. 스노C. P. Snow는 이렇게 표현한다.
절대적으로 진실하고 대단히 깊은 우정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에 대해 얼마간의 대가를 치렀습니다. 처칠의 가까운 다른 동료들은 린더만을 몹시 싫어했지만 처칠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린더만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처칠은 그렇게 놔두지 않았습니다. - P81
린더만의 전기 작가 중 한 명은 그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적을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다면 잘못되었다는 것을 뻔히 아는 논거도 주저하지 않고 이용할 사람이었다." - P83
헤이우드 핸셀은 남부의 명문 군인 가문 출신이다. 그의 현조부玄祖父와 존 핸셀John w. Hensell은 미국독립혁명에 참여했다. 고조부 윌리엄 영 핸셀William Young Hansell은 1812년에 일어난 미영美英전쟁 때 육군 장교였다. 증조부는 남부 연합군의 장성, 조부는 장교였다. 아버지는 흰색 리넨 양복에 파나마모자를 쓰고 저녁 식사 자리에 등장하는 육군 군의관이었다. 헤이우드는 영국군 장교처럼 단장短杖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모두가 그를 어린 시절 별명인 포섬Possum이라고 불렀다. 핸셀은 키가 작고 호리호리했다. 춤을 잘 췄고, 시를 썼으며, 가극 〈길버트와 설리번Gilbert and Sullivan〉의 광팬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책은 《돈키호테》였다. 그가 가장 우선하는 것은 비행이었고, 두 번째는 폴로, 가족은 한참 격차를 둔 3순위였다. - P90
"배워야 할 것이 많다." 핸셀은 이런 사람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불굴의 정직함과 약간의 순진함을 지닌, 근본적으로는 로맨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 P91
볼베어링은 칼 노든이 첫 번째 원형을 제작할 때도 큰 문젯거리였다. 폭격조준기는 수십 개의 가동부可動部로 이루어진 기계식 컴퓨터였다. 폭격조준기의 계산이 정확하려면 각각의 가동부가 정확한 위치로 정밀하게 회전해야만 했다. 볼베어링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거나 완벽하게 매끈하지 않다면 폭격조준기 자체가 엉망이 된다. (중략) 문제는 전쟁이 시작되면서 갑자기 수천 개의 폭격조준기를 만들어야 했다는 데 있었다. 이는 노든이 더 이상 볼베어링을 손으로 일일이 닦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생산 쪽을 맡고 있던 동업자 (테드) 바스Ted Bath는 매우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는 한 회사에 가서 이렇게 말했다. "수십만 개의 볼베어링을 생산해주셨으면 하오." 그러고는 사람들을 시켜 볼베어링의 크기를 측정하게 했다. 완벽한 혹은 허용 오차 범위 내에 있는 볼베어링을 발견하면 그것을 폭격조준기에 집어넣었다. 완벽한 제품을 찾으려면 50, 60, 100개쯤의 볼베어링을 검토해야 했다. 기준에 맞지 않는 나머지는 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 방식이 돈이 훨씬 덜 들었으니까. - P9596
육군항공대 전략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그 어떤 계획보다 기발한 계획을 세웠다. 두 지역에 대한 공습이었다. 주된 작전은 B-17 폭격기 230대를 슈바인푸르트의 볼베어링 공장으로 출격시키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작전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주의를 돌리는 우회 작전이 필요했다. B-17 폭격기들이 슈바인푸르트로 떠나기 직전 다른 B-17 비행단은 슈바인푸르트 남동쪽의 작은 도시 레겐스부르크로 떠나기로 했다. 독일은 그곳에서 메서슈미트Messerschmitt 전투기를 만들었다. 레겐스부르크 공격으로 독일 방어군의 주의를 끌어 슈바인푸르트로 향하는 폭격기들의 길을 터준다는 생각이었다. 레겐스부르크로 향하는 폭격기들은 미끼였다. - P97
커티스 르메이는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의 가난한 지역에서 성장했다. 형편이 어려운 대가족의 장남이었던 그는 야간에는 주조공장에서 일하며 혼자 힘으로 오하이오주립대학 토목공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을 마치고 육군에 입대한 그는 항공단에서 놀랄 만큼 빠르게 승진했다. 33세에 대위가 된 이래 소령, 대령, 준장을 거쳐 37세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 P9798
"아무런 불만도 없었습니다." 커티스 르메이는 불평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더구나 외부인에게는. (연합국의 제2차 세계대전 기록용) 영화 관계자들이 헤이우드 핸셀을 인터뷰했다면, 그는 유창하게 몇 마디 똑똑한 대답을 한 뒤 사람들을 장교 숙소로 불러 자비로 술을 대접했을 것이다. 핸셀은 르메이와 정반대였다. - P100
표적에 직선으로 날아가는 B-17 폭격기를 격추하려면 대공포 377발을 쏘아야 한다. 300발하고도 77발이라면 많은 양이다. 따라서 직선비행은 위험하긴 하지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위험이라고는 할 수 없다. 르메이는 이렇게 말했다. "해보자. 직선비행을 하자. 7분간 직선 고정 비행으로 접근하자." 자살행위처럼 들리지 않는가? 휘하의 모든 조종사가 실제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덧붙였다. "내가 우선 시도해보지." 르메이는 1942년 프랑스 생나제르Saint-Nazaire 폭격 비행에서 선두에 나섰고, 회피 기동을 하지 않았다. 자,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표적에 떨어진 폭탄은 이전 폭격의 두 배였지만 그들은 폭격기를 한 대도 잃지 않았다. - P103
칼라일배럭스Carlisle Barracks의 육군유산교육센터Army Heritage and Education Center 소장이자 미국육군역사연구소US Army Military History Institute 소장을 역임한 콘래드 크레인Conrad Crane은 르메이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군 사령관이라고 칭했다.
그는 역동적인 리더였습니다. 부하들의 어려움을 공유했죠. 그는 공군 역사상 최고의 항법사였고. 뛰어난 조종사였으며. 정비까지도 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맡고 있는 리더로서의 측면은 물론이고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잘 알았습니다. 그는 공군 최고의 문제 해결사였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주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많이 묻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 P107108
그러나 세심하게 계획된 이 유인 임무는 예정된 미끼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르메이의 조종사들은 여름날 새벽의 짙은 안개 속에서도 이륙할 수 있었다. 르메이가 그런 문제를 대비해 훈련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이륙 훈련을 반복했다. "장비만을 이용하라. 밖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하라." 하지만 다른 사령관들은 르메이처럼 하지 못했다. 전투기 승무원들은 독일로의 장거리 출격에 지쳤고, 동료를 잃은 충격에 빠져 있었다. 잠이 부족했으며, 불안하고 기진했다. 이런 부하들에게 "향후 임무 수행 때 안개가 낄 가능성이 있으니 오늘 새벽 6시에 맹목 이륙盲目離陸[시계視界 비행이 아닌 상태에서 계기나 무선 장비를 이용해 행하는 이륙]을 연습을 한다"고 말한다는 게 사령관으로서 얼마나 힘든 일일지 짐작이 가는가? 그런 일은 르메이만이 할 수 있었다. 그는 가차 없이 엄격한 사람이었다. 의미 없는 연습으로 보이는 것을 밀어붙일 때 부하들이 하는 불평 따윈 그의 관심 밖이었다. - P114
리언 페스팅거Leon Festinger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회심리학자가 되었다. 나는 공군을 위한 연구 경험이 전후戰後 그의 유명한 연구의 동기, 즉 ‘시커스Seekers‘라고 불리는 시카고의 한 종교 집단을 분석하게 된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항상 궁금하게 여겼다. 페스팅거는 한 가지 질문을 마음에 품고 시커스에 접근했다. 수년 전 폭격기 마피 l아가 믿었던 게 모두 거짓으로 판명되었던 참혹한 시기 동안 그의 마음을 스쳤을 것이 분명한 질문이었다. 확신이 현실에 부딪혔을 때 진정한 신자들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리언 페스팅거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느끼는 바나 자신이 하는 일에 잘 부합하는(그것을 정당화하는) 인식만을 받아들일 것이란 생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정말 그런 식으로 움직인다면 그런 일이 아주 흔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죠."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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