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가장 긴 실만을 써서 무늬를 짠다
타스님 제흐라 후사인 지음, 이한음 옮김 / EBS BOOKS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1년에 이 책이 나오자마자 샀던 것은 저자 타스님 제흐라 후사인이 파키스탄 여성 최초로 끈 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물리학자라는 점에 우선 끌려서였다. 그는 이탈리아, 스웨덴 스톡홀름대, 미국 하버드대 등에서 연구했고, 2021년 기준으로는 고향인 파키스탄 라호르의 LUMS 과학공과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다음으로는 그가 현대 양자역학, 그중에서도 2012년 스위스 제네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세른)의 힉스 입자 발견을 기준으로 지난 300여 년 물리학사의 가장 중요한 여섯 발견을 다룬 대중서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 저명한 현대 물리학자들의 추천이 그 가치를 충분히 뒷받침해준다는 생각도 물론 들었고, 마지막으로 제목이 적확하고 유려했다.

 

물리학과의 우리 모두는 그 기사가 어떻게 나왔는지 잘 알았다. 균형 잡힌 시각에서 잘 쓴 기사였다. 그는 연구자들을 희화화하지 않았고, 그들의 연구 경력에 입발림하는 칭찬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기사가 크게 호평받은 것은 그가 연구 정신과 그 연구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제대로 포착했기 때문이다. 그 기사는 내가 지나다니는 복도 게시판에 꽤 오랫동안, 몇 달 동안 붙어 있었고, 나는 작게 나온 그의 사진과 이름도 본 적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레오나르도…… 뭐 그런 쪽이었다. -31

 

 이 책을 살 때부터 다소 걸렸고, 어쨌든 사고 나서도 미뤘던 것은, 결국 저자가 저 내용을 담은 형식이 소설이어서였다. 분야를 막론하고 어느 분야의 구성원이 쓴 자기 분야에 관한 소설은 썩 내키지 않는다. 드라마나 영화라면 딱히 좋지도 싫지도 않은데, 책만 그렇다. 국문학과나 영문학과 교수가 소설을 쓰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각각 국문학(), 영문학() 자체에 대한 소설을 쓴다면 그 역시 내키지 않는다. 자기 얘기를 그렇게까지하고 싶어한다는 점이 돌부리다. 이 책의 저자와 그 주제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도착한 책을 들춰보니, 물리학과 관련된 두 남녀의 미묘한 감정이 이야기의 얼개를 이룬 듯했다. 드라마나 영화는 호불호가 없다고 방금 쓴 주제에, 의사가 쓴, 병원에서 의사들이 연애하는 이야기는 매체가 무엇이든 싫지 않다고 말하기도 싫다. 어쨌든 이 책의 구성을 2012년의 물리학 관계자인 두 남녀가 지탱하고 있음에도 이 부분을 보도자료에 밝히지 않은 편집자의 마음을 이해했다. 나도 최대한 그렇게 썼을 것이다. 로맨스가 전개의 핵심이지만, 주제나 내용의 핵심은 아니니까. 안 쓸 수만 있다면야. 소설이면 이미 충분하지. 그리고 내가 고마워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로맨스도 한 스푼 들어갔다는 점을 굳이 밝혀 줬더라면, 저 지점들이 마음을 끌어도, 미리보기로 정성스레 트집 잡고서 주문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꽤 높다. 내부인이 자기 분야를 소설로 썼는데 로맨스 요소까지 있다니. 지친다.

 

내가 쓰는 기사에 스스로 점점 만족을 못 느낀다고 털어놓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그에게 여전히 과학에 관해 쓰고 싶지만, 다른 식으로 쓰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편집자가 으레 하듯이, 조가 이 새로운 방식이 어떤 것인지 물었을 때 나는 딱 부러지게 대답하지 못했다. - 23~24

이 힉스 보손 기사 말인데요,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지요? 오늘 아침 여기에서 터져 나온 감정에 관해서도 썼어요? 이 연구에 매달려온 사람들, 아니 이 연구 자체가 삶이었던 사람들의 기쁨은 담았어요? 그들의 흥분, 혼란 그리고 그들이 이 연구에 쏟아부은 피와 땀, 눈물은요?” -56

 

 사기 전에 로맨스 요소를 몰랐던 것은 행운이고, 사고서 로맨스만 잡아낸 것은 성급했다. 알고 보니 로맨스가 아니었다거나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역시나 로맨스는 제 구실을 했다. 단지 그 로맨스 자체가 정말로목적이 아니었을 뿐이다. 아니면 지극히 부수적인 귀결이거나. 남성 레오나르도는 과학 전문 저널리스트이고, 여성 사라는 끈 이론을 연구하는 대학원생이다. 두 사람이 힉스 입자 발견을 공표하는 2012년의 세른에서 만난다. 작가는 이 지점을 기꺼이 감수했을 것이다. 둘은 서로에 대한 호감만큼이나 자신의 작업, 저술과 물리학에 충실하다. 로맨스도 결국 그 진지함에서 기원한다. 이 얼개가 저자의 자기 미화라면, 그 설득력은 부족하지 않다.

 

맥스웰의 방정식은 겉으로 보기에는 진동하는 전기장이 진동하는 자기장을 생성하고, 또 그 반대로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지. 그런데 끝없이 번갈아 진동하는 이 운동이 빛의 요람을 만든다는 사실이 드러난 거야. 빛은 맥스웰의 이론에서 파동으로 여겨져. 이 방정식에서 도출된 일정한 속도로 전자기장에서 퍼져나가는, 자체적으로 유지되는 물결치는 교란이야. -167

나는 난생처음 보는 듯 밤하늘을 응시했다. 별빛이 무심하게 태양 옆을 쌩 지나치는 대신에 사실상 고개 숙여 인사한다는 것을 과연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우리가 전혀 모르는 컴컴한 깊은 우주 공간에서 이 미묘한 사회적 인사 교환이 기나긴 세월 동안 이루어져왔다. 나는 천체가 얼마나 더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는 자연의 섬세한 예의범절이 또 뭐가 있을까? -234

방정식들은 자신들이 자취를 남긴 우회로를 충직하게 따라오면 길이 조금씩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반복해서 증명했지. -300

 

 2012년의 두 사람이 자아내는 지난 300여 년의 물리학적 사건들은 널리 알려진 거인들이나 그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시점이 아니다. 모두 뉴턴, 맥스웰, 아인슈타인, 보어 등이 아닌, 이미 그들의 업적, 그들이 바꾼 세상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여전히 경이로워하는 주변 사람들이며, 사건이 여파가 미치는 시점이다. 거대한 당사자의 일방적인 경이가 아닌, 그가 일으킨 경이의 공명을 섬세하고 설득력 있게 묘사해냈다. 파키스탄 최초의 여성 끈 이론 물리학자라는 저자의 경험은 책에 담긴 구체적인 사실의 정확성뿐만 아니라, 너무나 낯선 지식과 전환이 어떤 여지도 없이 납득될 때의 다채로운 경이감을 묘파하는 힘이 된 듯하다. 지금까지 물리학의 경로는 당연하지 않아서 놀랍고, 그 당연하지 않은 것이 제 위치를 당연히 찾아가는 까닭에 다시 놀라운 걸음들로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그저 당연하거나 당연하지 않아서 걸어온 길이 아닌 셈이다.

 

마치 온기와 보금자리를 제공했던 공리들이 조각나 부서지고, 우리는 춥고 발 디딜 곳도 없는 무지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지. 때때로 이런 식으로 사유 체계에 구멍이 뻥 뚫리는 듯할 때,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야. 해체된 조각들을 다시 모아 재구성해서 기존에 제대로 설명했던 것들을 간직하고, 앞으로 나올 새로운 설명이 들어갈 공간까지 갖춘 새 구조를 만드는 거지. -321


 이 모든 경로, 무늬를 가장 긴 실에 함께 물들이기 위해서라면 로맨스는 유일하지는 않더라도 꽤 효과적인 매체였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무엇이 알거나 모르거나 결국 혼자서는 버티지 못하고 텅 빈 자리를 마련해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그 사유 체계가 결정적이라는 반증이라면, 그렇게 빈 자리를 갖춘 사람들끼리 만나는 이야기에 엮는 것도 단지 효율적인 선택은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