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부동산세법의 위헌 여부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헌법재판소와 국민주권 간의 관계, 헌법재판소와 다른 헌법기관, 특히 의회로 상징되는 대의기관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금 고민할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헌재의 결정에 동의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이 문제들은 헌법학계와 정치학계가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모색해야 하는 긴절한 화두이다.

행정, 입법, 사법, 헌재의 4권 분립?

주지하다시피 헌법재판소는 이른바 '87년 체제'의 아들이었다. 9차 헌법개정시 헌법재판소를 헌법기관으로 헌법에 명기해 다양한 권한과 역할을 부여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수차례의 군사 쿠데타를 통해 헌정이 중단된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헌법질서를 수호할 기관을 따로 마련하자는 생각이 분명 작용했을 것이다. 아울러 위헌 심판 및 국가기관간 권한 쟁의,정당 해산, 탄핵심판 등의 사안은 그 성격상 정치성이 강해 대법원으로 대표되는 사법부가 정치적 중립성을 가지고 판단하기 어렵다는 이유도 작용했을 것이다.

아무튼 출범한지 만 20년이 된 헌재는 대통령 탄핵 기각 결정과 행정수도 이전 특별법에 대한 위헌 결정으로 단숨에 대한민국 최고의 헌법기관이 되었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 분립이 아니라 행정, 입법, 사법, 헌법재판권력의 4권 분립이라는 주장도 한다. 이번 종부세법의 위헌여부에 대한 헌재의 결정은 헌재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노무현 정부 이래 국가의 주요의사를 결정하는 최종심급의 역할을 하고 있는 '제왕적 헌재'의 등장은 매우 징후적인 사건이다. 이는 국민주권을 실현할 대의제(代議制)기구인 의회와 대통령, 그리고 대의제 기구와 국민 간의 간극을 좁혀야 할 의무가 있는 정당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지 못하며 이들의 빈자리를 헌재 등이 메우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를 '정치의 사법화' 내지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본격화'라고 불러도 좋겠다.

'정치의 사법화' 혹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가 본격화되는 것이 심히 걱정스러운 이유는 무엇보다 이런 사태가 '대표와 책임의 원리'라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뿌리채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이 지향하는 통치구조의 구성원리는 국민주권의 원리와 대의제의 원리이다. 즉 대한민국 헌법은 헌법 1조 2항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해 대한민국의 유일한 주권자가 국민이라고 선언하고 있지만, 국민주권은 직접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대표(예컨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를 선거를 통해 선출하고 국가의 주요한 의사결정을 그들에게 맡기는 대의제(代議制)민주주의를 통해 간접적으로 실현된다. 물론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투표 등의 방법으로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민주주의를 일부 구현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대의제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의 유일한 주권자인 국민은 선거를 통해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자신들의 대표로 선출해 권력을 위임하고 대부분 정당 출신인 국민의 대표들은 선거를 통해 자신이 속한 정당과 자신에 대해 심판을 받는것이다. 그런데 만약 '정치의 사법화' 혹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가 본격화하면 위와 같이 '대표와 책임의 원리'를 통해 실현되는 국민주권이 심각하게 침해되거나 왜곡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된다.

신행정수도이전에 관한 특별법의 위헌성을 다투는 헌법소원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내린 위헌 결정이나 종부세법의 일부 위헌을 결정한 헌재의 판단이 바로 좋은 예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가 압도적인 다수의 의결로 마련한 법률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들어 간단히 무력화시킨 헌재는 주권자인 국민의 의사를 결정적으로 침해한 것이다.

국민주권의 침해와 왜곡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헌재가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모습들은 국민의 대의기관들이 마땅히 해야 할 '정치'가 사라진 자리를 국민이 뽑지도 않았고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지도 않는 '사법기구'가 대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나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대표와 책임'의 원리를 기초로 구현되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는 중대한 위험요소일 뿐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이 주권 행사에서 소외되는 비극을 낳게 된다.

헌재의 권한과 역할에 대한 헌법적 필요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헌재의 기능을 대법원이나 제3의 기구를 신설해 이관한다 해서 이런 사정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제왕적 헌재의 독주 혹은 '정치의 사법화'를 막을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인가? 모호하고 궁색하기는 하지만 정당정치의 복원과 대의기구의 정상적 작동 그리고 성숙한 국민의식이 유일한 해법이 아닌가 싶다. 정당이 국민과 대의제 기구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여야와 대통령이 타협과 설득에 기반한 정치를 하며, 국민들도 문제만 생기면 헌재로 달려가 판단을 구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정당과 대의제 기구들을 신뢰할 때 헌재의 전성시대는 마감될 수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국가의 중대사를 헌법재판관들의 판단에 맡겨 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태경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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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8-11-19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겨울을 맞을 마음의 준비를 못했는데 갑작스레 너무 춥네요..감기조심하세요..

외로운 발바닥 2008-12-22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뒤늦게 배꽃님이 방문하셨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방문하셨을 때는 그렇게 추운 줄 몰랐는데, 오늘은 서울이 정말 추웠습니다. 배꽃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전출처 : 로쟈 > 아이리스 장과 난징대학살

올해는 1937년 난징 대학살이 일어난 지 70주기가 되는 해이고 이 사건을 다룬 영화들이 제작될 거란 소식은 작년 11월에도 전한 바 있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2040276&paperId=1007817). 오늘자 프레시안의 '할리우드 통신'은 그 영화들이 대거 개봉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기사에서는 우리에게 '아이리스 장'이라고 소개된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원제는 <난징의 강간>)의 저자가 '아이리스 창'으로 표기되고 있다('Iris Chang'이니까 영어로는 그렇게 읽히겠다). 만지면 덧나는 상처 같은 역사적 상흔이지만 우리와 무관하달 수도 없기에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국내에서도 개봉되는 것인지...  

프레시안(07. 03. 08) 아이리스 창의 <난징대학살> 영화화

"미국 하원이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키더라도 사과하지 않겠다"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발언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과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 야당 및 진보세력, 그리고 미국 정가 일각에서도 아베 총리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이 일본의 과거사 인식 문제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데는, 올해가 난징 대학살(1937~38) 70주기를 맞는 해란 점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타임지는 최근호(12일자)에서 난징 대학살 70주기를 맞아 미국, 일본, 홍콩, 중국 등에서 관련 극영화, 다큐멘터리들이 대거 제작, 개봉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한 난징 주민은 무려 26만명. 강간 피해여성만 2만명이 넘는다. 그러나 일본정부와 보수파는 난징대학살의 실상이 왜곡됐거나 과장됐다는 입장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난징대학살 관련 영화들이 속속 선보이는 것을 계기로 세계각지에서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될 가능성이 높다고 타임은 전망했다.

난징대학살 관련 영화 중 가장 먼저 개봉되는 영화는 빌 구텐타그, 댄 스터언 감독의 <난징>. 지난 2003년 9.11테러 관련 다큐멘터리 <쌍둥이 빌딩>으로 아카데미 장편다큐부문상을 수상했던 두 감독의 극영화 데뷔작이다. 우디 해럴슨과 마리엘 헤밍웨이가 1930년대말 난징에 거주하다가 일본군에 의한 현지 중국인 학살을 목격하게 되는 미국인들로 등장한다. 두 감독은 사건 당시의 기록필름, 생존자 및 목격자들의 증언, 극중인물들처럼 난징에 살았던 외국인들의 서신 및 일기 등을 기초로 영화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지난 1월 미국 선댄스영화제에 처음 선보여 호평받았으며, 이번달 말 홍콩 국제영화제에도 출품될 예정이다.
  
<난징>제작 뒤에는 아메리칸온라인(AOL) 부회장 테드 레온시스의 재정적, 정신적 뒷받침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2004년 카리브해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베스트셀러 <난징대학살(원제 : 난징의 강간)> 저자인 아리리스 창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우연히 신문기사를 통해 알게됐다"며 "그때까지 내가 그처럼 끔찍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고 영화 <난징>제작에 뛰어들게 됐던 계기를 털어놓았다.


  
레온시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난징대학살>은 지난 97년 미국에서 출간돼 무려 10주간이나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목록에 올랐던 저서. 중국계 미국인인 저자는 난징에서 직접 발굴한 광범위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사건의 실상을 상세하게 재구성해냈다. 이 책은 난징대학살에 대해 알지못했던 미국 독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아이리스 창은 당시 나이 29세로 유명 작가반열에 올랐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7년뒤인 2004년 아이리스 창은 갑작스럽게 자살로 생애를 마쳐 다시한번 독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는 아직도 베일에 싸여있다. 하지만 주변인물들은 창이 생존시 일본 보수우파로부터 많은 협박을 받아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며, 그것이 그의 죽음에 한 원인이 됐을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미국사회에 난징학살의 진상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창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도 현재 제작 중에 있다. 캐나다 감독 빌 스파힉의 <잊지 못하는 여자 : 아이리스 창 스토리>가 바로 그것. 그런가하면 창의 책도 곧 영화화된다. 제작자인 제럴드 그린은 <난징대학살>의 영화화 판권을 3800만달러에 구입, 곧 촬영에 들어갈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감독은 <툼레이더>를 만들었던 사이몬 그린.

이 밖에 올리버 스톤 감독, 홍콩 감독 스탠리 통, 중국감독 류추안 등도 난징 관련 영화를 준비중이거나 크랭크인을 앞두고 있다. 타임에 따르면, 아이리스 창의 어머니 잉잉창은 "영화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난징의 비극을 알리려는게 아이리스의 소원이었다"며 딸의 책을 기초로 한 작품 등 관련 영화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대해 감격을 나타냈다.
  
그런가하면 일본에서도 난징 영화가 만들어진다. 지난 1월 미시마 사토루 감독은 기자회견을 열고 빌 구텐타그 감독의 <난징>을 "중국의 조작된 자료만을 토대로 한 작품"으로 맹비난하며, 자신의 영화<난징의 진실>이 "사실있는 그대로"를 관객들에게 알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수 우파인 미시마 감독은 " 30년대 말 난징에서 일본군에 의한 조직적 학살, 강간이 자행됐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한편, 구텐타그 감독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수많은 법의학적 증거,수많은 사진증거, 수많은 필름 증거, 그리고 수많은 목격자들의 증언이 존재한다. 난징의 참상을 입증하는데 이 이상 더 어떤 증거가 필요한가"라며, 역사의 진실을 거부하는 일본을 날카롭게 비판했다.(신영 기자)

07. 03. 08.

P.S. 난징대학살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http://www.youtube.com/watch?v=YoW2WYdOsvg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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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kleinsusun > 무정한 맞선

커플매니저는 옛말 컴퓨터가 짝 골라준다‘무정한 맞선’

성공률 더 높아… 컴퓨터 짝찾기

‘하모니 매칭 시스템’이라는 로고가 화면에 떠 있는 노트북에 A씨의 ‘조건’을 입력했다. 서울 중위권 대학인 S대 출신, 연봉 3000만원, 일반기업(30대 대기업을 제외한 기업군) 사무직원, 30세…. 키와 몸무게는 물론 종교, 부모의 직업과 학력 그리고 재산까지 모두 160여 개의 항목이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컴퓨터에는 A씨가 결혼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경쟁력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객관적 배우자 지수’가 떴다. 71.7점. 이어 A씨의 조건에서 선택 가능한 배우자 풀(pool) 여성 38명의 이름이 화면에 죽 떠오른다. 최적의 배우자는 올해 29세로 전문대를 졸업한 10급 공무원으로, 연봉은 1800만원이다. 물론 이같은 과정은 보안키가 있는 극소수의 사람만 볼 수 있다.


◆70·80년대 마담뚜, 90년대 커플매니저… 2000년대에는 컴퓨터?

산업구조와 인구구조가 변하는 가운데 제때 ‘짝’을 만나지 못하는 남녀가 급증하면서 한국에서 ‘맞선 사업’은 인맥 넓은 사람의 개인사업이 아니라 산업으로 성장했다. 알음알음으로 사람을 소개해주던 70·80년대 ‘마담뚜’에 이어 90년대 말부터 맺어주기를 전문으로 하는 ‘커플 매니저’가 급증하더니, 이제는 컴퓨터가 대량의 정보를 분석·가공해 사람과 사람의 결혼을 중매(仲媒)하는 새로운 메신저로 떠올랐다.

결혼정보업체 선우의 ‘한국결혼문화연구소’ 이희길 소장은 “컴퓨터의 안목이 커플매니저보다 훨씬 낫다”며 통계치를 내밀었다. “전문가인 커플매니저가 맞선을 주선했을 때 양쪽에서 ‘만나겠다’는 답변을 얻어내 만나게 되는 확률이 평균 12.8%였지만, 컴퓨터를 이용하니 22%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실제 선우에서는 한때 120여명에 달했던 커플매니저 수가 최근에는 50여명 수준으로 줄었다. 맞선시장의 급속한 산업화가 이뤄지면서 컴퓨터라는 기계가 커플매니저가 하던 일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조건’은 컴퓨터가 맞춰준다. 사랑할지만 선택하라”

이 시스템을 개발한 선우는 이를 ‘하모니 매칭시스템’이라고 명명했다. 지난 1995~2004년 사이 10년간 선우를 거쳐간 남녀 5만여명의 나이, 학력, 직업, 외모, 부모의 학력과 재력 등을 분석, 실제 결혼에 미치는 영향을 통계적으로 분석했다. 이를 바탕으로 신규 회원들에게 ‘5만명의 평균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점수를 부여하는 ‘객관적 배우자 지수’를 개발한 것. 배우자 지수에 따라 소개 가능한 배우자의 풀이 결정되고, 컴퓨터는 이중 통계적으로 가장 결혼 확률이 높았던 조합을 골라내 배우자감으로 소개해 준다. 이용자는 상대방이 컴퓨터로 골라진 짝인지, 커플매니저가 찾아낸 것인지는 모른다. 그냥 ‘사랑할 수 있는가’만 판단하면 되는 것이다.

사람을 점수화하는 데 대해 ‘비정하다’는 비판이 나올 만하지만, 선우측은 “인간의 느낌을 객관화한 결과물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그렇다면 조건이 달라지면 어떻게 될까. A씨의 조건 가운데 직업을 변리사로, 연봉은 7000만원이라고 소개하자 컴퓨터는 금세 태도를 바꿨다. 소개된 여성의 나이는 28세로 한 살 더 어려졌고, 출신 대학은 전문대에서 서울 중위권 대학으로, 직업은 대기업 사무직이며 연봉은 2600만원이었다. 모두 5단계(매우 좋음, 좋음, 보통, 나쁨, 매우 나쁨)인 인상 등급에서 배우자감으로 선택된 여성의 인상 등급은 ‘좋음’에서 ‘매우 좋음’으로 한 단계 뛰었다.

이 소장은 “시스템을 개발하면서 고정관념을 바꿀 만한 통계적 수치가 나오길 희망했지만 결국 고정관념을 확인하고 말았다”며, “그게 현실”이라고 했다.

중매자가 변하면 짝을 맺어주는 ‘결정적 변수’도 달라질까. 그러나 “남자의 경우 연봉(직업), 여자는 키와 몸무게 등을 조합해 만든 ‘외모지수’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게 이들의 설명. 선우 이웅진 대표는 “평균적인 인식은 여전히 ‘남자는 돈, 여자는 외모’라는 데서 별로 벗어나 있지 않더라”고 말했다.

염강수기자 ksyoum@chosun.com
입력 : 2006.11.01 00:51 43' / 수정 : 2006.11.01 00:5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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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누가 역사를 소유하는가

미국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의 한 명이라는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알마, 2006)가 지난주에 출간됐고, 나는 어제 책을 구했다. 사실 에릭 포너란 사람인 누구인지도 몰랐고, '역사란 무엇인가' 같은 좀 구닥다리 제목이 붙은 책을 손에 들기는 쉽지 않지만(왜 'Who owns history?'란 원제를 살리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일부 서평에서 읽은 바 그를 '소련 체제의 노골적인 옹호자이며 미국에 대해서는 앙심을 품은 역사학자'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다고 해서 관심을 갖게 됐다. 게다가 책은 '새로운 역사를 원하는 러시아 사람들'이란 장도 포함하고 있는데, 저자가 1990년 4개월간 모스크바대학에 교환교수로 체류한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한다. 내가 궁금증을 가질 만한 이유이다.

우연이긴 하지만, 책이 출간된 것과 동시에 조지 부시에 대한 미국 역사가들의 평가가 보도되었다. 그를 '사상 최악의 대통령'이라 평하는 역사학자들의 명단에 에릭 포너란 이름이 단연 선두에 올라 있다. 이 정도면 "지난 20년 사이 가장 많은 저술을 발표한, 독창적이면서도 영향력 있는 미국 역사가"(워싱턴포스트)란 평판이 근거없는 립서비스는 아니라는 게 분명하다. 번역서의 타이틀이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라고 뽑힌 이유이기도 하겠고(그러니까 '에릭 포너'란 이름을 한 열 번 정도 중얼거려서 얼른 '하워드 진'만큼 입에 익도록 해두는 게 좋겠다). 관련기사들을 옮겨놓고 몇 개의 이미지를 붙여둔다. 당연한 일이지만, 적어도 그의 러시아 이야기 정도는 조만간 읽어보고 몇 마디 적어둘 참이다.

뉴스21(06. 12. 05) "부시, 역대 최악 대통령"

미국 역사가들이 조지 W. 부시대통령을 ‘사상 최악의 지도자’로 꼽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중간선거 참패 이후 다시 한번 부시 대통령의 체면이 구겨졌다. 워싱턴 포스트지가 3일 보도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부시 대통령에 대해 냉혹하다. 대부분 ‘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꼽거나 ‘최악의 대통령 톱5’, ‘백악관 불명예 전당 헌액’ 등 재임 6년간의 치적에 혹평을 가하고 있다. 역사학자들이 참여하는 이 평가는 지난 1948년 처음 시작된 뒤 미국민들의 큰 관심을 모아왔다.



컬럼비아 대학의 에릭 포너 교수는 역대 대통령 중 부시 대통령을 ‘최악’으로 꼽고 있다. 부정부패, 초법적 오만, 전쟁 등 대규모 재앙 초래 등 역대 대통령들이 재임 중 저지른 실수들을 교훈으로 삼기는커녕 ‘종합적’으로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포너 교수는 부시 대통령의 경우 전쟁 포로를 다루는 가운데 피의자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 기본적 인권을 무시하고 비밀교도소를 운영하는 등 법을 무시한 독선적 스타일로 오히려 미국의 명예를 훼손하고 국제적 고립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부시 대통령은 명분도 없는 이라크전을 감행해 결국 국가적 재앙을 초래했으며, 대통령의 독단으로 전쟁을 감행한 제임스 폴크 대통령과 비견되나 폴크 대통령은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해 오히려 ‘위대한’ 대통령 반열에 접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시 대통령은 또 베트남전으로 혹평받고 있는 린든 존슨 대통령보다 낮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존슨 대통령은 국내 정책면에서는 민권법과 의료보장 등 치적을 평가받고 있다. 이들 전문가들은 아직 임기가 2년 남은 부시 대통령에게 ‘오사마 빈 라덴 사살’ ‘김정일 핵포기’ 등 사태 반전 요소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지난 6년간의 실적만으로 이미 최악의 대통령 반열이 불가피하다고 덧붙였다.

중앙일보(06. 12. 09) '색안경' 벗고 미국사 틀린 그림 찾기

역사는 사실만으로 이뤄진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일본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중국은 우리의 고대사를 왜곡하고 있다. 그뿐인가. 우리 내부에서도 이념에 따라 같은 사실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비틀려 버린다. 어떤 이는 이를 '역사 전쟁'이라고도 한다. 여러 역사 해석들이 충돌하고 대립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역사가 돼버렸다. 그래서 누가 쓰느냐에 따라 제각각의 역사가 생겨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역사는 누가 쓰느냐', 또는 '역사는 누가 소유하느냐'로 바꿔놓으면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을 법하다. 이 책의 원제도 '누가 역사를 소유하는가(Who Owns History?)'다. 서로 다른 주제의 에세이들을 모아놓아 잡다해 보이긴 하지만 역사해석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전체를 일관성 있게 묶어 준다.

누가 쓰든 역사 서술에서 사실과 해석을 엄격히 분리하기는 어렵다. 일부 사실을 골라내 부각시키고, 다른 사실은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을 훼손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선별 작업 자체가 바로 해석 행위인 셈이다. 이 같은 해석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오류들을 저자는 조목조목 지적한다.

저자는 미국사를 중심으로 학계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쟁점들을 다룬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에선 왜 사회주의가 발흥하지 못했는가라는 주제다. 저자는 이를 규명하려는 갖가지 접근방식들을 소개한다. 미국에선 봉건주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잡다한 문화와 인종 탓에 노동자들이 단결하지 못했다, 민주주의가 일찍 도입돼 계급의식이 미처 자라나지 못했다….

개별적으론 그럴듯 해보이는 해석들이지만 저자는 각각의 허점을 가차없이 들춰낸다. 그러곤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토록 오랫동안 역사학자들이 해답을 찾지 못했다면 물음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라며. 즉 '미국에선 왜 사회주의가 없느냐'는 질문은 자본주의의 발전엔 반드시 사회주의가 수반된다는 선입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질문에 이미 해석이 섞였으니 답에도 해석이 들어갔던 셈이다. 저자는 또 미국인들이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자유'라는 구호도 인종적 배타주의 속에서 나왔다고 비판한다. 독립선언문에 나온 개인의 자연권은 백인들에게만 해당하지 흑인들은 제외돼 있었다는 것이다.

컬럼비아대 종신교수이자 남북전쟁 연구의 권위자인 저자는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에 열성적이다. 그 연장선에서 저자는 미국의 팽창주의와 군사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이때문에 저자는 미국의 보수파에겐 성가신 존재로 찍혀 있다. 한 보수 언론인은 그를 '미국을 망치고 있는 100인 가운데 75번째 인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문적 업적에 대해선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는 이례적으로 미국역사학자기구(OAH), 미국역사학회(AHA), 미국역사가협회(SAH) 등 3대 역사학 단체의 회장을 모두 지냈다.(남윤호 기자)

06. 12. 15.

P.S. 참고로, 미국의 한 언론인에 따르면 "에릭 포너의 <미국인이 생각하는 자유>는 미국의 모든 학교에서 읽어야 하는 필수적인 저작"이다. 아마도 이 책이 그의 대표작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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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멜로’ ‘괴물’ ‘주몽’ 논란이 남긴 것
[OSEN 2006-10-21 09:23]

숫자숭배에 지배당한 위험한 우리 사회

[OSEN=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정지영 아나운서의 퇴진까지 가져온 밀리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는 숫자 놀음에 경도된 우리 사회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것은 출판계에서는 ‘판매부수’로 불리며, 영화에서는 ‘관객수’로, 그리고 TV 드라마에서는 ‘시청률’로 불린다. 그것들은 이름만 다를 뿐 그 역할은 비슷하다. 작품에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 숫자들이 맡은 역할이다.

숫자들의 권력은 점점 커져서 언제부턴가 우리네 문화계는 콘텐츠 자체의 질에 승부하기보다는 이 숫자를 얻기 위한 무한경쟁에 들어서 있는 느낌이다. 스테디셀러보다는 베스트셀러를, 두고두고 꺼내보는 명작으로 남기보다는 최단기간에 최대의 관객을 끌어 모은 영화를, 그리고 시청자들과 호흡하는 완성도 높은 드라마보다는 욕을 먹더라도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를 추구하고 있다는 얘기다.

‘마시멜로 이야기’가 보여준 숫자놀음의 진수

‘마시멜로 이야기’는 작금의 출판계가 해온 기획 출판의 정점을 보여준다. 책은 작가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전문번역자가 아닌 아나운서 정지영씨의 얼굴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목적은 단 하나. 베스트셀러를 만들려는 것이다. 이러한 출판의 스타마케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벌써부터 연예인들은 작가라는 또 다른 명함을 갖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우리가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유명 연예인들은 자서전에서부터 여행서, 수필, 어학교재, 요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을 냈다. 일찍부터 출판사들은 스타마케팅을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는 얘기인데 실제 출판사 얘기를 들어보면 비디오를 갖춘 선물세트의 성격을 띤 서적류에 있어서는 상당한 돈이 오간다고 한다. 그만큼 스타마케팅을 활용한 책에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러한 스타마케팅을 활용한 책들을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중 ‘마시멜로 이야기’가 모난 돌이 된 이유가 그 책이 추구했던 베스트셀러에 있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이러한 책들이 과연 출판계에 진정으로 도움이 될 것이냐는 점이다. ‘마시멜로 이야기’의 경우 원 번역자는 이 책이 “1만 부나 나갈까 싶었지 이렇게 많이 팔릴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며 “내용은 좋지만 밀리언셀러감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 말은 책 자체의 내용보다 정지영씨의 이미지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걸 말해준다. 즉 이러한 책들은 스타들의 이미지를 포장한 ‘상품’의 성공이지 콘텐츠 자체로 승부한 ‘서적’의 성공으로 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대리작가들과 얼굴마담 스타들만 늘어나는 출판계는 당장의 이익을 위해 미래의 독서군을 빼앗는 사태를 예고한다. 이 사건은 정지영씨의 윤리적인 문제보다 더 앞서, 이러한 베스트셀러라는 숫자놀음에 빠져있는 출판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알 필요가 있다.

영화의 관객수와 드라마의 시청률

그런데 이러한 숫자 경도 현상은 출판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에서 관객수로, 드라마에서는 시청률로 대변된다.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최고의 수치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영화 ‘괴물’과 드라마 ‘주몽’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괴물’은 개봉 그 자체부터 괴물다웠다. 칸느 영화제에서의 호평(수상이 아니다)을 통해 솔솔 불어온 괴물에 대한 기대감은 마치 괴물의 탄생처럼 저 한강 밑바닥에서부터 차츰차츰 커져갔다. 그리고 대낮에 버젓이 등장한 괴물에 대해 일제히 언론들은 호평을 쏟아냈다. 비평가치고 괴물 평 안 해본 사람 없을 정도로(이 영화는 실제로 비평가들의 비평 욕구를 자극하는 구석이 있다) 홍보가 된 이 영화는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이 엄청난 속도로 관객몰이를 시작했다. 여기에 언론들은 ‘몇 일 만에 몇 만 돌파!’라는 식의 기사들을 쏟아냈다. 엄청난 정보의 홍수들로 범람하는 인터넷이라는 강물 속에서 뛰쳐나온 ‘괴물’은 일순간 ‘정보의 획일화’를 불러 일으켰다. 이제 어딜 가든 우리는 괴물에 대한 기사들을 보게 되었다. 그 숫자의 압력은 지대한 것이어서 우리를 극장 앞으로 가게 만들었다.

그런데 괴물이 사라진 지금까지 그 혼령은 여전히 인터넷을 떠돈다. 새로운 영화가 등장할 때마다 나오는 ‘○○, 괴물의 흥행 넘을까’류의 글들이다. 이러한 기사들은 괴물의 숫자를 다시 떠올리는 힘을 발휘하는 동시에, 새로 등장할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끄집어낸다. 그런데 엄밀히 생각해보자. 이 기사는 정보일까. 홍보일까. 정보라기보다는 홍보에 가깝다. 물론 ‘타짜’와 같이 19세 이상가 영화로서 500만 관객을 넘은 경우, 그것이 기사로 나왔다면 정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홍보로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대박 영화들에 조명이 집중되는 시각, 소외되고 있는 타 영화들이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관객수는 TV로 오면 시청률로 변신한다. 드라마 ‘주몽’에 많은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위 40%대를 넘는 시청률을 유지하는 것은 드라마적인 재미 이외에도 시청률의 그 숫자가 한몫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제 시청률은 권력이 되었다. ‘주몽’에 대한 비판이 어려운 것은 그 40%라는 막연한 시청률이 주는 무게감 때문이다. 이것은 ‘주몽’이외에도 수위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드라마들 모두가 갖고 있는 무언의 압력이다. 시청률이 권력이 된 상황은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가 탄생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무조건 시청률에만 올인하여 결국 시청률은 높으나 완성도는 떨어지는 드라마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드라마의 존재기반은 드라마 자체가 아닌 시청률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이제는 ‘높은 시청률 = 완성도 높은 드라마’라는 등식은 깨지게 된다.

예술작품은 재미없다는 말은 옛말(?)

과거에 흔히 우리는 ‘예술작품은 재미없다’는 식의 자조적인 얘기를 하곤 했다. 그러나 이 얘기 속에는 예술성과 상업성은 별개라는 의식이 있었다. 또한 이 얘기는 상업적으로 실패하더라도 그것이 예술적으로도 실패는 아니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문화계에서 이러한 얘기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듯 보인다.

영화 ‘괴물’에 대한 관심은 ‘재미있다’는 점에 ‘작품성이 있다’는 두 가지 요소를 함께 자극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칸느 영화제라는 작품성의 공간에서 벌어진 ‘재미있다’는 반응이었다. 드라마 ‘주몽’에 대한 관심의 증폭 역시 ‘최초의 고구려사에 대한 접근’이라는 가치와 ‘퓨전사극’이라는 재미가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물론 ‘마시멜로 이야기’ 역시 여타 연예인과는 다른 정지영 아나운서라는, 무언가 지적인 면모와 미모를 함께 갖춘 인물로 인해 가능했다(요즘 아나운서들의 전성시대는 바로 이 직업이 갖는 양면성에 비롯한 부분이 많다).

그렇다면 이제 예술작품(완성도 높은 작품)도 재미가 있다는 얘기인가.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보다는 거꾸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이 이제는 작품성이라는 부동의 지위까지 얻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좀더 대중과 가까워진 예술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으로도 읽을 수 있으나, 그럼에도 이제는 잘 팔리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 불리는 권력까지 부여한 혐의를 지울 수는 없다. 이로써 진정한 예술작품들은 예술로서도, 상업적으로도 소외 받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보다 다양한 콘텐츠를 즐기면 안 되는 것인가

우리는 현재가 다양한 콘텐츠의 시대라는데 이견을 갖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런 다양한 콘텐츠들을 실제로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매일매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정보들은 마치 다양성이 보장된 사회로 가는 징후로 얘기됐으나, 실제 우리의 삶은 그 중 ‘선별된’ 몇 개의 정보를 누리는 정도의 삶을 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많은 콘텐츠와 정보들은 어떤 식으로든 선별되지 않으면 모두 쓰레기가 된다. 그런데 그 선별과정은 과연 투명한가. 아니 공정한가. 이 정보들을 선별하는 순위 혹은 수치라는 근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부분에 우리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수치는 콘텐츠의 질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단순한 수치가 아닌, 다양한 작품들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되는 그 속에서 독자들과, 관객들과, 시청자들의 제대로 된 선택이 가능해질 것이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 mansuri@osen.co.kr 블로그 http://thekian.net/

<사진>대리 번역 논란을 일으킨 정지영과 영화 ‘괴물’, 드라마 ‘주몽’(위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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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0-21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난 사람" 한번 되어보려는 영웅적인 심리 아닐까요

외로운 발바닥 2006-10-25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정지영 아나운서에게 특별한 호감이나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참 씁슬한 사건인 것 같습니다. 정지영이라는 예쁜 연예인급 아나운서의 힘에 마케팅의 힘을 보태 순식간에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우리 출판계의 관행도 문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