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따금씩 가장 처음 실었던 원고부터 올릴게요.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



맞아도 되는 사람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기구가 있다. 줄여서 인권위라고 부른다. 국제인권법을 각 국가 안에서 실현하자는 UN의 취지에 발맞춰 우리나라에선 2001년에 출범했다.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사람의 인권을 공식적으로 보장하는 기관인 셈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유명무실해지고 있다는 게 중평이다. 이렇게 굳이 설명해야만 할 만큼, 인권위는 그 이름값 하는 의미 있는 활약을 펼친 바가 거의 없다. 오히려 의미 있는 부실만 돋보였던 것 같다. 촛불시위에서 발생한 인권침해에 대한 5개월 늑장대응, 용산 참사에 대해 인권위가 의견을 제출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회의를 현병철 인권위원장이 일방적으로 폐회하면서 불거진 기존 상임위원들의 사퇴 등등.

 

작년과 올해도 인권위의 부실한 활약은 이어졌다. 작년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이 광화문 대로를 걸었던 날, 인권위 소속 조사관 몇 명도 전경의 시민에 대한 인권침해를 감시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내 눈으로 확인한 바, 인권위 조끼를 입은 그들은 너무 적었고 또한 무기력했다. 시민들은 그들에게 전경의 무리한 진압을 막아달라고 호소했으나, 조사관들의 목소리는 작았고 무력했다. 전경들은 인권위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상관의 명령에만 복종했다. 131일 제주 강정마을에 대한 국방부의 행정대집행에서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집행이 막무가내로 과격하게 진행되어 부상자가 속출한 와중에 인권위 조사관까지 용역에게 맞았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강정 주민들은 제 일처럼 지적하고 분노하는데도 인권위에서는 아직껏 별 말이 없다.

 

지금까지 한 얘기가 인권위 비방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인권위를 무척 좋아한다. 2003<십시일반>, 2006<사이시옷> 등 인권 만화집을 펴내며 한국 만화와 인권 모두에 기여했던 인권위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사심을 접어두더라도 이번 강정 행정대집행에서 인권위 조사관이 용역에게 맞았던 일에는 나도 강정사람들이 그렇듯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2013년에 출간된 세 번째 인권 만화집 <어깨동무>에 실려 있는 만화 한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분노를 표출하려 한다. 제목도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맞아도 되는 사람". 네이버 웹툰 <송곳>의 최규석 작가 작품이다.

 

작품은 비교적 담담한 내레이션과 함께 노동자들이 당한 참담한 폭력을 보여준다. 특정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기업 이름들을 익명으로 처리했지만, 2006년부터 2012년 동안 실제로 있었던 폭력의 상황들이다. “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덮쳐온 자동차에 조합원 13명이 크게 다쳤다.” 2010년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용역경비업체 직원 차량에 당한 일이다. “경찰은 도망치는 사람들을 뒤에서 공격했고, 소화기에 맞은 것으로 보이는 참가자 한명이 사망했다.” 2006, 포항건설 노조원 하중근 씨의 죽음이다. “그리고 사냥이 시작됐다.” 2009년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 옥쇄파업에 대한 강경진압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내레이션이다.

 

노동권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던 노동자들이 이처럼 용역과 전경 등에 폭력을 당할 때, 노동권 문제는 인권 문제로 확장된다. 하지만 그 폭력이 사회적으로 인지되지 못하고 맞은 사람맞아도 되는 사람이 될 때, 인권은 선택적으로 적용되는 무언가로 축소되고 만다. 맞아도 되는 사람은 이렇게 만인이 누릴권리인 인권을 누리지 못해도 되는사람이 여기저기 존재하는 사회, 그것을 겨냥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아마 이런 이유들을 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분노하지 않음으로 인해 일어나는 효과도 함께 밝혀두자. 먼저, 언론이 알리지 않아서 몰랐으니까. 그렇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우리가 분노하지 않기 때문에 언론도 침묵한다.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니까 기사거리도 되지 않는다. 둘째, 그런 경우가 너무 많아서. 이런 일에까지 분노한다면 화낼 일이 너무 많지 않은가. 하지만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그때마다 분노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거침없이. 셋째, 당할 짓을 했으니까. 가장 문제적인 경우일 것이다. 최규석 작가가 넘어서고자 하는 인식일 터이고. 그의 설명은 이렇다. “정부와 언론은 끝없이 그들이 맞아도 되는 이유들을 설명하고 우리는 이해당한다.” 그러면서 당할 짓을 만드는 이유의 목록도 갈수록 늘어날 것이다. 넷째, 분노해봐야 나만 손해니까. 솔직하면서도 안타까운 이유다. '작은 폭력'은 가해자도 작아서 윽박지를 수 있다. 하지만 '거대한 폭력'에 움찔했다간 나도 맞는다. 폭력 자체는 교정되지 않고 나만 폭력의 피해자로 편입된다는 두려움. 우리는 이것을 경험으로 알기에 침묵한다. 우리의 침묵을 발판 삼아 '거대한 폭력'은 계속된다.

 

훨씬 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만 더 지목하자. 내 삶을 꾸려가기에 바빠서. 사실 그렇다. 자기 가족이 아닌 이상, 어린이와 여성과 반려동물의 피해에도 우리는 댓글과 인터넷 포스팅 정도로밖에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다. 그런 마당에 별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문제에, 모두가 떠들지도 않는 이슈에, 허구헌날 일어나는 일에, 당할 짓을 한 사람들의 당함에, 후환까지 두려운데 무슨 분노를 한단 말인가. 분노는 표출되지도 끓어오르지도 싹을 틔우지도 않는다. '내 삶'을 꾸려가기 위해 우리는 '분노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이처럼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가 분노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사람들, 그것이 이 만화의 제목이다. 맞아도 되는 사람은 분노하지 못하는 우리가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름이다.

 

강정 행정대집행에서, 이번에는 인권위 조사관까지도 맞아도 되는 사람의 반열에 올랐다. ‘맞아도 되는 사람이 나오지 못하도록 활동해야 하는 인권위가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때, 그 스스로 맞아도 되는 존재로 전락한 이 지독한 패러독스. 인권위는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음으로 맞아도 됨을 인준하고 있지만, 오히려 강정 주민들은 조사관이 맞았다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맞았다는 것을 문제로 인식하고 발화하는 것이야말로 맞은 사람이 맞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강력하게 말한다. 사실 강정 주민과 활동가들은 세월호·쌍차·용산·밀양 등이 맞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증언해왔다. 그들의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보면 정말 그렇다. 인권위 조사위원이라서 맞았다고 호소한 게 아닌 것이다. 또 하나의 패러독스다. 늘 맞는 사람들이 누구도 맞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외치는 이 상황.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맞았다고 소리를 지르는 이들이 이미 여러 대 맞은 사람인 이 상황. 궁금하다. 그들이 우리처럼 분노하지 않기를 선택할 여러 이유에도 불구하고 분노를 선택하는 이유는 뭘까?

 

다시, 우리에게 묻자. 이런 패러독스의 사이에서, 별로 맞아보지 않은 우리가 지나가는 길에 마주친 형상 앞에서 분노하고 움직이는 것을 선택할 이유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을 몸으로 알고 있는 이들 앞에서, ‘인권위가 무력하고 무기력한 오늘날의 인권과 함께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2015.2.12 송고

2015.3.3 <주간경향> 11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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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따금씩 가장 처음 실었던 원고부터 올릴게요.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


 



완생의 길을 걷다


드라마 <미생>의 처음과 마지막은 만화 <미생>과 사뭇 다르다. 요르단 에피소드가 수미상관으로 배치된 점도 그렇지만, 그보다 더 내 눈길을 끈 것은 한결 증폭되어 표현된 미생들의 고생이다. 초반부에서는 인턴 동료 사이에서 고생하는 장그래의 모습이 드라마만의 오리지널 씬들을 통해 다소 과장되지만 그만큼 더 와 닿게 표현되었다. 후반부는 오 차장이 사표를 내기까지의 과정이 눈에 띈다. 만화에서는 갈 회사가 정해지고 퇴사하지만, 드라마 판에선 달라진 사내 분위기에 마음 고생하다 결국 떠나는 것으로 그려진다.[19국] 만화에서는 타부서 서류 열람을 방해받으며[141수] 불안감을 살짝 느끼는 정도였다면, 드라마의 묘사 속에서 오 차장이 받는 압박은 훨씬 무겁다. 그 압박 속 오 차장은 회사를 그만두는 단 하나의 선택에 내몰린,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절대 살아날 희망 없는’ 미생의 모습이었다.


오 차장이라는 미생은, 구체적으로는 내부 고발자의 상황에 처해 있다. 온전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대 중국 무역에서 행해지던 과도한 콴시 관행을 적출한 오 차장과 영업3팀은, 그 이전 박 과장의 리베이트 건을 적발한 일의 연속선상에서 내부 고발자로 완전히 찍히고 만다. 적폐라 할 만한 관행이건만 그로 인해 유지될 수 있었던 대 중국 무역에서의 ‘편안함’이 사라지면서, 다른 팀들은 ‘불편함’을 초래한 오 차장들을 불편해 한다. 따라서 오 차장이 ‘우리’ 회사의 일원인 한은 중국 무역은 어렵다는 것은 회사의 입장일 뿐만 아니라 타 팀원들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오 차장은 회사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회사라는 사회 안에서 죽어나가야만 하는 희생양이 된다. 중국이라는 실리의 신 앞에서 희생양을 바치고서야 원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와 그 안의 사회는 유지될 수 있다.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가 지적했던 희생양 제의로 유지되는 사회의 매커니즘이 <미생>에 담겨 있다.


그런데 이런 매커니즘이 내부 고발자만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계약직 사원 장그래도 마찬가지로 희생양이다. 내부 고발자가 우발적인 희생양의 형상이라면, 계약직은 제도적으로 구현된 희생양이다. 2년마다 한 번씩 죽어나감으로써 그 회사의 안정을 도모하고 정규직 사원의 상대적 안정감을 확인하게 하는 희생양, 그것이 계약직이다. 그런 점에서 <미생>은 영업 3팀을 중심으로 한 희생양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희생양들의 삶을 향한 희망을 그린 것으로 이해되는 이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그런 희생양들을 만들어내는 회사-사회는 무엇인가를 또한 그 희생양 곁에서 살아가며 나의 완생을 욕망하는 ‘우리’의 모습을 날카롭게 묻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먼저 회사-사회를 묻자. 지금까지 나는 회사(會社)와 사회(社會)를 의도적으로 섞어서 사용했다. 같은 한자로 구성된 이 둘은 개념적으로 분명 다르지만 묘하게 닮았다. 그래서일까, 우리의 언어생활을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사회생활의 공간으로 말하며 은연중에 사회를 회사로 대체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며 입단에 실패하고 사회로 나서게 된”[단행본 인물 소개] 장그래는 회사에 입사하면서 비로소 사회에 속하게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바둑에선 하수가 고수와 마주할 때, 급을 맞춰줍니다. / 그런데... 사회에선, 고수를 상대로 신입사원이 접바둑을 둡니다.”[47수] 이렇듯 사회의 경계는 회사를 중심으로 그어진다. 바둑을 두던 시절에는 사회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의 언어생활에서 흔히 발견되는 혼동이다.


사회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런 혼동은 언어생활로만 제한될 것도 아니다. “회사 안은 전쟁터, 밖은 지옥”이라는 <미생>의 명대사는 “해고는 살인이다”의 완곡어법이라 해야 할 것이다. 죽은 자만이 이를 수 있는 곳이 지옥이다. 회사 밖으로 내쫒긴 이는 사회적으로 죽은 자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가운데 26명은 정말로 죽었다.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 죽었다.) 회사-사회의 포개짐은 그저 언어적인 착각만은 아니며, 실재를 반영하고 있는 삶의 잔혹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회를 향한 고민은 회사에 대한 고민과 뗄 수 없는 문제다. ‘작은 사회’로서의 회사가 ‘큰 사회’를 가리는 이 착시는 오히려 현실적일뿐만 아니라 큰 사회를 제대로 보는 매개가 될 수도 있다. 무너진 사회를 ‘작은 사회’와 ‘큰 사회’ 모두의 측면에서 또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 희생양을 만드는 것으로 유지되는 회사-사회가 드러내는 진실에 대한 고민이 그것이다. 이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고민해 볼 차례다. ‘사회’라는 말로 가려지는 개별 행위자로서의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가장 최근의 이슈를 떠올리는 것이 답을 찾는 과정으로 적절하겠다. ‘땅콩 회항’ 사건 후 박창진 사무장이 일부 동료들에게서 외면당하는 상황에서, 내부 고발자가 되어버린 그의 모습은 오 차장과 겹쳐진다. 대한항공이라는 작은 사회의 구성원 일부는 박 사무장을 희생하여 자기를 보존하려 한다. 그것이 수직적인 위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 구성원들은 ‘우리’의 거울이다. 내 주변의 누군가를 희생하여 나의 완생으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욕망은 지금껏 사회를 유지해 왔던 뒤틀린 사회의 욕망을 잔뜩 끌어안고 있다.


때로 멀리서 보면 보인다. 오 차장을 지켜본 독자/시청자들이 그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듯이, 실제 인물 박 사무장이 실명과 얼굴과 자리를 내놓고 싸우는 이 싸움에 대해서도 사람들 대부분이 지지를 보내고 있다. 작은 사회는 외면하지만 큰 사회에서 응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박 사무장은 싸울 힘을 얻는다. 가깝든 멀든, 사회적 지지 없이 그의 싸움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를 우리의 작은 사회 안으로 옮겨 놓는다면 어떨까? 우리는 그를 지지할 수 있는가? 그를 희생하지 않기 위해 내가 희생당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수 있는가? 회사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희생양을 요구하는지는 않을런가?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 앞에서 초점을 달리해 생각해 보자. 드라마 <미생> 마지막 화에서 오 차장은 루쉰의 말을 인용한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 같다. 지상에는 원래 길이 없었다.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이다.” 그저 하나의 새 회사를 세우는 희망으로 읽히지 않는 말이다. 오히려 희망적인 사회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완생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의 돌로는 완생을 이룰 수 없다. 작은 바둑판에서조차 완생의 요건인 두 집을 이루려면 적어도 여섯 개의 돌이 필요하다. 완생은, 외롭지 않게 서로를 위로하며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사회적 공유물이다. 개인의 완생이란 없다. 희생양을 만들어 나를 살리려는 생각으로는 완생의 길을 걸을 수 없다. 우리의 완생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 길이 완생의 길이다.


그것은 고생길이기도 하다. 희생양의 고생을 함께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미생이 ‘절대 살아날 희망 없는’ 사회에서는 사회를 고민해야 하며, 그 고민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개개인의 몫이다. 내 옆의 미생과 함께 고생길을 스스로 여는 것, 그것이 완생의 길이다. 그러니 완생의 길을 열고 있는 미생에게 고마워할 일이다. 굴뚝 위의 미생과, 박 사무장이라는 미생에게, 내 옆의 누군가에게 고마워하며 걷는다. 완생의 고생길, 지금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그 길을.


2015.1.22 송고

2015.2.3 <주간경향> 11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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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따금씩 가장 처음 실었던 원고부터 올릴게요.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는 방법


아직 영화 <국제시장>을 보지 않았다. 연말연초에 볼 겨를이 없었는데, 이런저런 말들이 많이 들린다. 그저 영화의 만듦새 문제가 아니라 공동의 ‘기억하기’와 ‘역사 쓰기’의 문제가 얽혀 있는 것 같다. 듣자 하니 생각나는 만화가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란 점에서 닮아 있는 만화들이 여럿 떠올랐지만, 그 중에서도 한 작품의 아버지가 가슴에 박혔다. 어쩌면 내가 만난 가장 특별한 아버지일 ‘안토니오’가 바로 그다.


안토니오는 90세에 요양원에서 창문으로 뛰어내려 자살했다. 만화는 바로 그 장면에서부터 시작해서 이 아버지의 일생을 어린 시절부터 다시 훑어간다. 이런 구성은 그의 삶 곳곳에 그의 자살의 이유가 박혀있음을 넌지시 일러주는 듯하다. 안토니오는 스페인의 시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자랐다. 농사일을 거들기 위해 8세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던 그는 20세에 도시로 탈출하다시피 떠난다. 바로 이듬해 전쟁이 터졌다. 우리가 스페인내전으로 알고 있는 그 전쟁이다. 그 후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이어졌다. 이 전쟁통의 연속을 그린 분량이 이 작품,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지금까지 숨겨온) 한글판 제목이 보여주듯 안토니오는 아나키스트였다. 하지만 전쟁 중에 친구와 동료들의 영향 속에서 뿌리내린 그 사상이 그의 인생 모두를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나도 이것을 실감나게 깨달은 건 이 작품을 추천하고 다닌 지 얼마 지나서, 제목 때문에 읽는 사람과 그 탓에 오히려 읽지 않는 사람을 모두 접하고서였다. 작품의 선택에 어떤 정치적 선이 그어져 있는 셈이다. 그 선 앞에 설 때마다 나는 원제(“비행의 기술” 혹은 “비행의 예술”/ El Arte de Volar)를 이야기해 주며 달리 읽힐 여지가 있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낼 일은 아니었다. 평론가로서 그 선을 넘어서 대화하기 위해서는 나도 작품을 다시 읽어야만 했다.


그러면서 새삼 주목하게 된 부분이 있다. 안토니오가 전쟁 후 스페인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하던 시기이다. 예전에는 아나키즘에서 변절하는 과정으로 읽혔던 부분이, 이제는 완전히 새롭게 읽혔다.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나눴던 납탄으로 만든 반지를 도저히 낄 수 없게 된 그가 이렇게 고백하는 대목부터다. “납탄 반지 이후 내가 갖게 된 새로운 반지는 바로 혈육이었다…” 아들을 안고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아이의 탄생으로 내 존재의 이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사상이나 독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단지 아이의 밝은 미래만을 생각했다. 그것이 나의 새로운 사명이었다. / 이 애만은 내가 걸어온 길을 피하게 하고 싶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랬다. 그는 아나키즘이라는 사상을 단순히 버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새로운 사상가가 된 것이었다. “신도, 주인도, 국가도 없다!”가 아나키스트의 근본 강령이라면, “오직 자식이 있다!”가 아버지의 근본 강령일 것이다. 그 강령과 함께 안토니오는 전혀 일관되어 보이지 않는, 모순된 삶을 산다. 윗사람을 배신해서 그의 회사를 빼앗고, 빼앗은 회사 일이 너무 많아서 가정에 소홀해지고, 소홀해진 틈을 타 바람을 피게 되고, 그러면서도 아들의 교육이 걱정되어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고, 결국에는 자신이 그랬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동료에게 회사를 빼앗기는 일이 ‘아버지’ 안토니오의 삶을 채운다.


그런데 나는 이 막장 드라마 같은 대목이 너무나 뭉클했다. 물론 묘사와 연출·대사와 내레이션 등 모든 만화의 요소가 탁월하지만, 줄거리로만 놓고 보자면 크게 의미가 와 닿을 것이 없는 삶인데,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밝혀둘 것이 있다.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안토니오’의 아들이 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긴 회고를 바탕으로 직접 스토리를 썼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의 온갖 치부를 샅샅이 그려낸 이 시기 이 대목은 너무나 뭉클하다. 그렇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말해 주었던 그 진정성도 물론 값지지만, 정작 나의 뭉클함은 아들에게서 온 것이었다.


대상에 대한 서술은 대상 못지않게 서술자에 대해서도 보여주는 법이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의 작자는 직접 아버지가 되어 1인칭으로 발화한다. (이 의미는 작품을 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그렇게 ‘나’로서 고백하는 온갖 이야기들을 보면, 아들과 아버지가 온전히 겹쳐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겹쳐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바로 이 막장스러운 부분이다. 미화하거나 감추는 것이 아니라 아들은 아버지의 치욕스러운 부분을 모두 그렸다. 아들은 아버지가 되어 그가 던적스럽게 살았던 세계를 경험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모순적으로 살아내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직접 앓았다. 그것은 곧바로 아버지의 삶에 대한 긍정은 아니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긍정’한 것은, 당신 스스로의 삶에 대한 후회였다. 그러면서 가장 ‘부정’한 것은, 아버지를 후회하도록 만든 세계 그 자체였다.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의 자살을 비행(飛行)으로 받아들인다. 아버지를 너무나 잘 이해했기에 아들은, 자살이라는 극단적 형식으로 나타난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부정을 긍정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진정으로 자랑스러워한 것이다. 아버지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안토니오는 그렇게 해방을 경험했다. 그 해방은 아들에 의해 더 명확해졌다. 불편할 수 있는 이 작품을 깊이 껴안고 인정한 스페인과 유럽 독자들(그리고 어쩌면 한국도!) 덕에, 작가는 이런 말까지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정의와 평등, 그리고 사랑과 번영이라는 날개를 가지고 정직하게 날고 싶어 했지만 그 날개는 처참하게 찢겨졌다. 그러나 마침내 오늘날, 그분은 삶의 무게를 벗어버리고, 픽션이라는 창공에서 긴 실루엣을 남겼다.” 이처럼 가족의 테두리를 벗어나 윤리에 기반한 아버지에 대한 ‘위로’와 ‘긍정’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기와 역사 쓰기라는 공동의 과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직시’를 통한 ‘해방’은 흔치 않다.


<국제시장>이 ‘아버지 세대를 위한 영화’라는 감독의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개인적인 이야기도 섞여있다고 했던 것 같다. 아버지와 그 세대를 위로하는 감독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대한민국식 ‘아버지 사상’을 몸으로 살아냈던 ‘아버지 세대’에 대한 우리 아들딸들의 기억과 역사가 영화의 역량과 한계를 넘어 어떻게 이야기 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새삼 궁금하다. 우리가 윤리를 외면하지 않고서 아버지 세대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2015.1.1 송고

2015.1.13 <주간경향> 1109호



(안토니오 알타리바,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길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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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에 한번 <주간경향> '만화로 본 세상' 코너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올해부터 시작했는데 아직 알라딘서재에는 한편도 옮겨두지 않았네요. 이제 하나씩 옮겨둘까 합니다. 시작은 최근에 오사 게렌발의 <7층>으로 쓴 글입니다.


(지인이 찍어서 보내준 출간본 사진)

(인터넷판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 서재 포스팅 버전으로 봐주시길 바랍니다.)



"폭력의 연애를 끊고 ‘세상 밖’으로 나와라"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지만... 이 제목은 제가 하려던 이야기와는 결이 전혀 다릅니다. 칼럼 제목을 데스크에서 바꾸는 일은 일상다반사라 그러려니 하는데요, 이번 칼럼 제목과 소제목은 좀 많이 이상해서 여기 서재에서라도 제가 붙인 제목이 아니라고 해명을 좀 해둬야겠다 싶네요. 번거로우시더라도 여기 이 글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송고 후에 본문도 약간 수정했습니다.) 글을 좀더 깔끔하게 쓰지 못해 데스크에서 오해한 걸 거예요.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재건의 고된 작업"을 시작해야 할/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희생자들과, 또 '우리'와 나누고 싶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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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 떠날 곳이 있다.

언젠가 TV에서 가수 김경호가 긴 머리 때문에 겪었던 고충을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지하철에서 여성으로 오인당해 추행을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소름 끼쳤겠네’ 정도의 감흥과 함께 웃어넘겼었다. 그런데 최근 페이스북에서 다른 머리 긴 남성의 성추행 경험담을 읽을 때는 감흥이 전혀 달랐다. 여성으로 오인된 남성이 그런 불쾌한 경험을 여러 차례 겪었다는 것은, 여성들이야말로 그처럼 잦은 성추행을 경험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예전과 달리 거기까지 내 생각이 미쳤던 것은 글 자체의 초점이 거기 있었던 덕도 있지만 최근 들어 여성의 경험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기회가 늘어나고 있는 데 이유가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해시태그, ‘메르스 갤러리’ 사태 등등 여성들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요즘이다. 그만큼 남성인 내가 낯섦 속에서 얻는 깨달음도 크다.

깨달음은 곧 놀라움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것, 모르고 있던 것이 정말 많았다. 남성인 나의 경험과 대조해보니 더 놀라웠다. 여성들이 경험하는 폭력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흔한데 반해, 나는 비슷한 경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는 택시 기사에게 옷을 왜 그렇게 입었냐고 핀잔을 들어본 경험이 없다. 차를 직접 몰더라도 ‘운전 못하면 집에나 있으라’는 식의 폭언을 들은 적도 없다. 대중교통에서 누가 내 엉덩이를 만져서 소스라쳤던 경험도 없으며, 어두운 골목길에서 성폭행을 당할까봐 무서웠던 적도 없다. 그러니 그런 불쾌한 경험을 하고서, 지인에게 “옷을 그렇게 입으니 그런 일을 당하지” 따위의 헛소리를 듣고 말문이 막힌 적도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최근 지속적으로 공론화가 이어지고 있는 ‘데이트 폭력’ 사례들에서처럼, 애인이나 배우자에게 맞아본 적도 없다.

그러니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게 되었을 뿐, 여성이 경험하는 현실이나 그 감정을 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저 모르는 일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 어떤 여성도 데이트 폭력에 희생당하지 않기”를 바란다던 한 피해자 여성의 바람이 이루어지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기 위해 마침 만화를 조금 더 아는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건넬 작품이 있다.

(오사 게렌발, <7층>, 우리나비)


스웨덴 작가 오사 게렌발의 <7층>은 실화다. 작가가 대학 시절 겪었던 고통스런 기억을 담아낸 이 이야기는 폭력에 물든 연애 경험이 어떻게 오사를 바꾸어 가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 무엇이 이 고통스러운 연애를 끊을 수 없게 만드는지를 충실하게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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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는 원래 ‘블랙 오사’라고 불릴 만큼 검정색을 좋아하는 여성이었다. 옷도 눈화장도 머리도 모두 까맣게 치장한 오사였지만 학교에서 뭇사람의 환심을 사는 ‘멋진’ 닐과 사귀게 되면서부터 그녀는 표백되어간다. 그것이 닐이 원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둘만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닐이 원하는 대로, 그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오사는 친구들과 점점 더 멀어진다. “이제부터 너와 나만 생각해.” 이 달콤한 사랑의 말이 사실은 독점욕의 발로임을 독자는 금세 지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작품 속의 오사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닐 외에는 아무도 없으며 온 자아를 닐의 시선에 가둔 오사는 외양과 정신 모두 더 이상 오사가 아니게 되었다. “넌 변해야 한다고!” 닐이 말했기 때문이다. 검정색과 좋아하던 음반과 추억이 깃든 물건들까지 모두 버리고서, 오사는 닐을 만나기 위해 이전의 자신과 헤어져야 했고 사회에서도 멀어져야만 했다.

“닐은 내가 변하도록 도왔고 그렇게 변해감으로써 나는 마침내 그에게 인정받는 연인이 될 수 있었다.” 이제 남자친구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오사에게, 닐은 더욱더 뒤틀린 사랑을 행사한다. 오사의 자그마한 몸짓 하나, 숨소리 하나가 모두 닐의 질투심을 자극했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한숨을 한번 쉬었을 뿐인데도 닐은 오사가 그 순간 화면에 등장한 남자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더러운 년!” 오사는 닐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소리 내지 않고 숨 쉬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오사의 염색한 검은 머리가 자랄수록, 그래서 검지 않은 머리가 더 길어져갈수록 닐의 폭력도 더 심해져만 갔다. “창녀”라는 심한 욕설에 오사가 참지 못하고 발끈하자 드디어 닐은, 오사를, 때렸다.

“규정1: 그가 날 때린다면 그를 떠날 것. 규정2: 그가 날 때린다면 그를 떠날 것.” 오사도 안다. 하지만 떠날 곳이 없다.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도록 “길들여져” 버린 오사는, 모든 사회적 관계를 끊어낸 오사는, 오직 생각만 할 수 있을 뿐 실제로 떠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사는 그렇게 믿는다. 바깥은 없다. 넌 “역겨워.” 넌 “끔찍해.” 넌 “저속해.” 닐의 말대로 자신을 바라보게 된 오사와 “왜 자꾸 나를 돌게 해? 날 미치게 만들지 말라고!!!” 말하며 무너져가는 오사의 목을 더 세차게 조르는 닐만이 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하지만 오사에겐 그것밖에는 없다. 떠날 곳이란, 없다.

이렇게 끔찍한 연애가 어떻게 끝나게 되는지는 길게 말하지 않으려 한다. 끔찍한 연애가 그만큼 끔찍한 논리와 합리화에 의해 지속되었다면, 단절은 정말 갑작스럽게 기적처럼 비논리적으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나는 여기까지 읽으며 지금까지 공개된 많은 데이트 폭력의 주인공들이 말하지 않은 것들을 아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피해 여성들이 이별을 선택하기 어려웠던 이유, 공론화를 결심하기 어려웠던 이유가 <7층> 안에 빼곡했다. 그들 스스로도 돌아보며 ‘바보 같았다’고 말하듯, ‘사랑’의 폭력 속에서 피해자를 붙잡아버린 주박은 경험해보지 않은 이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 이것을 나는 <7층>의 서사와 이미지 속에서 겨우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

‘우리’에게 다시금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기적처럼 없다고 생각했던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오사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에게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주변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오사가 아버지와 여자 교수님에게 상황을 알리자 그들은 사려 깊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아버지는 오사를 구출해 주었고, 교수님은 학교 내에서 닐과 만날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하고 오사에게 병원에 가고 경찰에 신고할 것을 권유한다. 의사의 진료도 경찰의 조사도, 이후의 재판도 모두 오사를 제대로 돕는다. 그렇게 일단락이 나고 오사는 샅샅이 흩어진 스스로를 주워 모은다. 재건은 너무나도 어렵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없다고 생각했던 떠날 곳과 함께, 그녀는 재건의 작업들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이 작품, <7층>이 그 재건의 마지막 단계였다. 그래야 도처에 널린 닐과 마주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경험을 하며 갇혀있는 이들에게 바깥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창문 밖의 신호가 바로 <7층>이다. 뛰어내릴까를 고민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오사는 열어 보인다. 그녀들이, 떠나갈 바깥을.

‘떠날 곳이 있다.’ 이 말을 거짓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그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2015.6.26 송고

2015.7.7 <주간경향> 1133호


(오사 게렌발, <7층>, 우리나비)

(오사 게렌발, <7층>, 우리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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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 - 2014 앙굴렘 국제만화제 대상후보작
톰 골드 지음, 김경주 옮김 / 이봄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한 번 읽는 데 10분도 안 걸린다. 아는만큼 보이고, 모르는만큼 궁금해진다. 기존의 앎을 탈구축하는 첫걸음을 떼게 하고 공부를 시작하게 만드는 데 겨우 10분이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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