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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편에 이어서)

물론 이른바 ‘나쁜 일’, ‘좋은 일’은 보통 사람의 눈에 비친 개념일 뿐, 진정 덕을 갖춘 사람의 눈에는 좋은 일이나 나쁜 일 자체가 없다. 그들은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할 뿐이며, 도의 원칙을 따르므로 행한 일이 모두 좋은 일에 부합할 뿐이다. “높은 덕은 덕이 아니라 한다”, “높은 덕은 하지 않으니 인위적인 것이 없다”는 말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높은 덕을 갖춘 사람은 좋은 일을 할 때 좋은 일을 하고자 인식하지 않으며, 스스로 좋아하고 모두가 좋아하므로 흥이 나서 기꺼이 행한다. 일을 행하고 다른 사람이 모두 그를 좋은 사람이라 칭찬하면 그는 오히려 답답해진다. 내가 좋은 사람인가? 좋은 일을 했는가? 나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했을 뿐인데!


마음씨가 곱고 남을 돕기를 좋아하는 부자가 있었다. 어느 해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이 집과 일터를 잃고 노숙하는 신세가 되었다. 부자가 이를 보고 마음 아파하며, 집을 지으면서 특별히 처마를 크게 만들었다. 유랑자들에게 비를 피할 곳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집이 다 지어지자 과연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부자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자 그의 가족과 가난한 사람들 간에 말다툼이 벌어지기 일쑤였고 사이가 매우 나빠졌다.
이듬해 겨울 어느 저녁 한 노인이 처마 밑에서 얼어 죽었다. 부자의 가족과 다투었던 사람들이 이를 보고 부자에게 인덕이 없다며 손가락질했다. 얼마 후 태풍이 불어와 부자의 처마가 날아갔다. 부자의 가족과 반목하던 사람들은 하늘이 벌을 내렸다며 고소해했다.
부자는 다시 집을 새로 지으면서 처마를 작게 만들고, 남은 돈으로 작은 집을 한 채 더 지었다. 초라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피난처가 될 수 있었으니, 모두가 부자의 넓은 도량에 감격했다.


이 부자는 좋은 사람인가? 아마도 아직 부족할 것이다. 자신은 큰 집을 지으면서 남에게 처마 하나만 내주었고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고는 다툼까지 벌였으니 말이다. 훗날 집을 다시 짓고도 작고 초라한 집 한 채만을 더 지었을 뿐이지 않은가. 두보는 자신의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찌하면 넓고 큰 집 천만 칸을 마련하여 세상의 춥고 가난한 사람 모두 기쁜 얼굴 갖게 할까.” 얼마나 배포 있는 좋은 생각인가! 이에 비하면 부자가 베푼 선행은 별 것 아니다. 하지만 두보는 말에만 그쳤을 뿐이다. 자신도 낡은 초가집밖에 없었으니 남을 위해 ‘넓고 큰 집 천만 칸’을 마련할 여력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부자는 작지만 실질적인 선행을 베풀었는데 말이다.


노자의 기준에 따르면 부자는 진정 덕을 갖춘 사람은 아니다. 좋은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측은지심 때문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스스로 편안해지고자 했을 뿐이다. 그는 먼저 가족의 생활을 살피고 난 후 타인을 생각했고, 능력이 닿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작은 일을 행했다. 하지만 그가 남에게 베푼 작은 집은 대부호가 남을 위해 지은 ‘넓고 큰 천만 칸’과 본질적으로는 같다. 불가의 관점을 빌리자면, 이 둘은 똑같은 공덕을 세웠다.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자신과 가족을 고통에 빠뜨리는 사람이 있다. 이는 인, 의의 범주에 속하며 그 경지가 오히려 부자에 이르지 못한다.


요컨대 노자는 좋은 일을 하라든지, 좋은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본심을 다해 능력이 닿는 범위 안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독려할 뿐이다!


누군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나쁜 일 하기를 좋아한다면 어찌할까?


이는 도가 아니다. “도가 아니면 일찍 그친다”고 하지 않았는가. 끝이 멀지 않을 것이다! 

 

- [왼손에는 명상록, 오른손에는 도덕경을 들어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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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어록
높은 덕은 덕이 아니라 하니 이로써 덕이 있다고 하고, 낮은 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하니 이로써 덕이 없다고 한다. 높은 덕은 하지 않으니 인위적인 것이 없고, 낮은 덕은 억지로 행하니 인위적인 것이 있다. 높은 인(仁)은 억지로 행하지만 인위적인 것은 없고, 높은 의(義)는 억지로 행하여 인위적인 것이 있다. 높은 예(禮)는 억지로 행하니 그것에 반응이 없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강요한다. 그러므로 도를 잃은 후를 덕이라 하고, 덕을 잃은 후를 인이라 하며, 인을 잃은 후를 의라 하고, 의를 잃은 후를 예라 한다. 무릇 예는 충(忠)과 신(信)이 얄팍해진 것이며 혼란의 시작이고, 먼저 아는 것은 도의 화려함이며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그런 까닭에 대장부는 그 두터움에 거하며 얄팍함에 머물지 않고 그 실속 있음에 거하고 화려함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높은 덕을 갖춘 사람은 형식적인 ‘덕’을 추구하지 않으니, 이를 진정한 ‘덕’이 있다 한다. 낮은 덕을 갖춘 사람은 ‘덕’의 요구를 어기니 이는 진정한 ‘덕’이 아니다. 높은 덕을 갖춘 사람은 덕을 행하지만 덕이라 생각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행한다. 낮은 덕을 갖춘 사람은 일부러 도덕을 추구하며 억지로 행한다. 높은 인을 갖춘 사람은 의식하지 않고 인애(仁愛)를 베풀며, 높은 의를 갖춘 사람은 일부러 인애를 표현하고 이를 행한다. 높은 예를 갖춘 사람은 일부러 도덕, 인애를 표현하되 만일 그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으면 분노하며 도덕과 인애를 던져버린다.

 

그러므로 도를 잃으면 이른바 덕이 필요하고, 덕을 잃으면 이른바 인이 필요하고, 인을 잃으면 이른바 의가 필요하고, 의를 잃으면 이른바 예가 필요하다. 예라는 것은 사람이 충과 신의 뿌리를 잃은 후 남은 폐허와 같을 뿐이니 재앙의 시작이며, 총명한 사람이 주워 올린 도의 빈 꽃일 뿐이니 우매한 길의 시작이다. 대장부는 뿌리에 거하되 폐허에 머물지 않고, 열매를 따되 공허한 꽃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스스로 선견지명이 있다고 여김은 도의 겉치레이며 우매함의 시작일 뿐이다.


노자의 경지는 참으로 높다. 천신만고 끝에 산에 올라 이제 다 올라왔다고 느끼는 순간 고개를 들면 더 높은 봉우리가 기다리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호의적으로 사람을 대하고 선의로 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데, 이제 보니 그것은 그저 도의 잔재일 뿐이니 말이다. 우리가 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호적으로 사람을 대하고 선의로 일할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사실 이는 부차적인 선택일 뿐 최선의 선택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면 노자의 말은 확실히 옳다. 사람이 도를 잃으면 자연의 규율을 알지 못하고 눈앞이 어두우니 덕의 불을 켜 마음을 밝혀야만 한다. 덕은 본심에서 우러난 진정한 선이다. 즉, 불가에서 말하는 ‘자신을 제도하고 남을 제도한다’, ‘스스로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훌륭한 보살 정신이기도 하다. 자신을 크게 하고 자기 제도를 실현해야만 남을 제도한다 할 수 있고, 자신을 부양해야만 남을 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덕은 선한 마음, 선행 행위뿐 아니라 지식, 지혜, 진취적인 정신 등 많은 것을 포함한다. 덕을 잃으면 밝게 비추는 것이 없으니 모두가 어둠 속에서 헤매며 부딪히고 넘어져 다칠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부축하고 서로 도울 인이 필요하다. 다정함이 무엇이고, 선의가 무엇인가! 인이야말로 세 번째의 가치다. 많은 사람들이 사심을 품고 인애의 마음은 찾아보기 어려우니 타인의 고통을 본 체 만 체 수수방관하며 “자기 집 앞 눈은 자기가 치우고, 남의 집 기와의 서리를 상관하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로 일관한다. 이때가 바로 의가 필요한 때이다. ‘의’의 원칙은 같은 ‘도’로 서로 돕고 같은 ‘기질’을 서로 추구하는 데 있다. 여기에 이르니 이미 널리 베풀지 못하고, 몇몇의 대상을 겨냥하는 데 그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의조차 갖추지 못하고 이롭지 않다.

 

그럼에도 의를 보고도 행동하지 않으며, 심지어 배은망덕하게 행한다. 여기에 이르면 사회의 인심은 필연적으로 혼란해지고 사방에서 다툼이 일어나니 어찌할까? 이때가 바로 예가 필요할 때이다! 예는 법률, 기율, 제도 외에도 예의, 예절 등 명문화된 규정이나 약정된 규칙을 포함한다. 요컨대 사회의 모든 행위를 총괄하는 종합규범이며, 영리한 사람들이 정한 ‘게임규칙’이다. 자발적인 선을 잃고 규칙으로 마음속의 악을 제약해야 한다면 사회가 어찌 혼란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노자는 결코 ‘법치’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현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예는 다툼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이는 일시적인 방편일 뿐이다. 진정으로 도덕을 갖춘 사람은 법률의 제약 없이도 나쁜 일을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제안 없이도 선한 일을 행한다. 이것이 바로 노자가 도덕을 제창하는 근본적인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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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노자는 어째서 ‘부쟁(不爭, 다툼이 없음-역주)’을 부르짖었을까? 이른바 ‘부쟁’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성취한 결과를 다투지 않고 공로를 다투지 않으며 헛된 명리를 다투지 않는다.
“성인은 일을 하고도 자랑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고도 거기에 안주하지 않는다.” 노자가 이미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성취를 위해서는 노력하여 쟁취하고 다다익선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재능을 숨기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재능을 펼치고자 노력해야 한다. 노자는 천지의 만물 창조를 두고 끊임없이 찬양했다. 그런데 사람이 어찌 앉아서 그 성과만을 누리며 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둘째, 높은 것을 다투려 발돋움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높이를 드러낸다.
키 작은 판창장(潘長江)은 탁자 위에 올라서지 않고도 자신이 거인임을 증명한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십분 발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기 때문이다. 키 큰 야오밍(姚明)은 목을 움츠려 스스로 무능한 척 할 필요가 없다. 최고의 센터로서 날마다 농구 경기장을 누비며 멋진 승부를 선사하니 말이다.
사실 높음을 다투는 것도 다툼이고 낮음을 다투는 것 역시 다툼이다. 다만 노자의 ‘부쟁’은 자연스런 표현을 강조하는 것이지 능력을 숨기라는 것이 아니다.
현대 중국에서 성현이라 불릴 만큼 추앙받는 인물을 꼽으라면 아마도 ‘벼 교배의 아버지’ 위안룽핑(袁隆平)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다툼과 다투지 않음의 두 가지 면을 절묘하게 운용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위안 선생은 젊은 시절, 19년간 교사로 일했다. 늘 성실하게 교사로서의 책무에 최선을 다했다. 외국어를 가르칠 때에는 먼저 충분히 공부하여 사전 없이도 영어와 러시아어 문장을 매끄럽게 독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외국 잡지를 통해 유럽의 멘델(Gregor Johann Mendel), 모건(Thomas Hunt Morgan)이 세운 염색체, 유전학설이 품종 개량에 중대하게 기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염색체, 유전학설을 가르치는 한편 잡종의 우등성을 이용한 작물 교배의 비전을 알리고 직접 실험까지 진행했다. 벼 교배는 세계적인 난제로 아직까지 성공한 예가 없었다. 이에 위안 선생은 말했다. “해외에 성공 사례가 없다고 중국인이 성공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는 넘치는 투지와 자신감으로 해외 전문가와의 경쟁에 뛰어들었다. 잡교에 쓸 웅성불임 벼를 찾기 위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전국을 뒤진 결과 마침내 광둥(廣東)의 한 지역에서 반가운 결과물을 얻어냈다.


‘문혁(文革)’ 기간에 위안 선생은 교사직을 잃었지만 도리어 잡교 연구에 전력을 기울일 좋은 기회라 여겼다. 자신이 받은 불공평한 대우를 마음에 두지 않고 묵묵하고 성실하게 8년 동안 노력한 끝에 마침내 품질이 우수한 새로운 종의 벼를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중국에 ‘녹색혁명’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1975년 겨울 중국 국무원이 시범종의 신속한 개발 확대와 잡교 벼의 대량 보급을 결정하면서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성취한 결과물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성과를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잡교 벼가 세계적으로 보급되면서 위안 선생은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어 국제무대에서 이미 여러 개의 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인도의 전 농업부 장관 쉬리라즈나스 싱 박사는 그를 높이 평가했다. “우리는 위안룽핑 선생을 ‘벼 교배의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의 성취는 중국을 넘어 세계의 자랑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일구어낸 성과물은 인류에게 복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세계적인 과학자이며 노벨화학상 수상자이자 미국과학진흥협회 회장인 피터 아그레(Peter Agre) 박사는 이렇게 칭찬했다. “위안룽핑 선생이 발명한 벼 교배 기술은 세계 식량 문제 해결에 지대하게 공헌했으며, 식량 생산량이 증대되어 해마다 세계 3,500만 인구의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의 명성이 날로 높아진 것과는 상관없이 위안 선생은 여전히 보통 연구원의 모습으로 일에 몰두하며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직접 논에 나가 연구한다.
명리를 바라보는 위안 선생의 시각은 담백하다. 수많은 직함과 겸직 제의에도 그는 최대한 고사하고, 가능하다면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으며, 오직 벼 교배에만 모든 역량을 쏟아 붓고 있다. 자신의 연구결과로 특허를 냈다면 중국 제일의 갑부가 되기에 충분했겠지만, 그는 사심 없이 특허권을 국가에 기증했다.
최선을 다해 성취하고 성과물을 나눔에는 한없이 대범하고 겸손하니, 이것이야말로 진정 도를 깨달은 고상한 사람의 모습이 아닐까?


일부러 의견을 숨길 필요도 없다. 적절한 침묵은 장점이 많다. 그러나 당신의 의견이 인류를 복되게 할 수 있다면 마음에 담아두고 표현에 인색할 필요가 있는가? 옛말에 “군자와 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면 10년 글을 읽는 것보다 낫다”라고 했다. 내용 없는 말이야 물론 할 필요가 없겠지만, 만일 당신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말이 많다 한들 어떠랴. 쑨중산(孫中山)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힘없는 자를 힘 있게 하고, 비관하는 자를 나아가게 하라.” 만일 당신의 말이 힘없는 자에게 자신감을 주고 비관하는 자에게 삶의 용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다면 이 또한 공덕이다.
한 젊은이가 줄리어스 프랑크(Julius Frank) 박사를 취재하기 위해 방문했다. 프랑크 박사는 시립대학의 심리학 교수로, 이미 일흔을 넘긴 고령이었지만 마음과 몸은 여전히 젊고 건강해 젊은이들의 탄성을 자아낼 정도였다.


“아주 여러 해 전에 한 중국 노인과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지요.” 프랑크 박사가 입을 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는 극동 지역의 포로수용소에 있었답니다. 그곳 상황은 말할 수 없이 참담했어요. 먹을 것이 부족하고 깨끗한 식수도 구할 수 없었지요. 가는 곳마다 온통 이질, 학질을 앓는 환자투성이었어요. 일부 전쟁 포로들은 작렬하는 태양 아래에서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였죠. 저 역시 죽음으로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의 등장이 삶에 대한 저의 생각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바로 그 중국 노인이었어요.”


젊은이는 프랑크 박사가 전하는 그날의 일에 귀를 기울였다.
“그날도 나는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죄수들에게 잠깐 산책이 허락되는 그 광장에 앉아 있었어요. 전기가 통하는 담장으로 기어올라 자살하는 방법이 가장 쉽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지요. 문득 옆에 한 중국 노인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죠. 당시 굉장히 허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헛것이 보이나보다 생각했어요. 일본의 전쟁포로 수용소에 어떻게 갑자기 중국인이 나타나겠어요? 이때 그가 고개를 돌려서 내게 물었어요. 아주 간단한 질문이었는데 이것이 내 삶을 구원했지요.”


젊은이는 호기심에 가득 차 물었다. “당신의 삶을 구원한 그 질문이 무엇이었나요?”
“그의 질문은 ‘여기서 나가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뭔가요?’였어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죠.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이미 답이 있었죠. 아내와 아이들을 보고 싶었어요. 문득 반드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족은 내가 살아 돌아가야 할 충분한 이유였죠. 그의 질문은 잃었던 것, 바로 살아 돌아가야 할 이유를 깨닫게 해주었어요. 그날부터 사는 일은 더 이상 힘들지 않았어요. 하루를 지나갈 때마다 전쟁의 종식이 가까워지고 나의 꿈을 이룰 날도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중국 노인의 질문은 내 생명을 구했을 뿐 아니라 일찍이 배운 적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었어요.”
“그게 무엇인가요?” 젊은이가 물었다.


“목표의 힘!”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7층 불탑을 쌓는 것보다 낫다”라는 옛말이 있다. 중국 노인의 단순한 한 마디가 프랑크 박사의 마음속에 신념을 심어주었으니 이는 그의 목숨을 구원한 것과 같았다. 이처럼 가치 있는 의견을 마음속에 두고 표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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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어록
발돋움하는 자는 오래 서지 못하고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걷는 자는 멀리 가지 못한다. 스스로 드러내는 자는 드러나지 못하고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는 인정받지 못하며 스스로 뽐내는 자는 공(功)이 없고,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까치발로 높아지려 해도 높아질 수 없고 큰 걸음으로 빠르게 걸어도 얼마  가지 못한다. 과장하는 자는 사실 통달하지 못하고 스스로 옳다 여기는 자는 사실 알지 못하며 허풍을 떠는 자는 공적이 없고 스스로 우쭐대는 자는 실제로는 무능하다.


노자는 특히 ‘다투지 않는 덕(不爭之德)’을 강조했으며 스스로 드러내고 옳다 여기며 뽐내고 자랑하는 것은 모두 다툼의 표현이라 했다. 다툴수록 결과는 의도와 반대로 나타나며 다투지 않으면 오히려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도덕경》 제22장에서 노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이리하여 성인은 하나(一)를 가슴에 안고 천하의 법이 되게 한다. 성인은 스스로 드러내지 않아도 그 존재가 드러나게 되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 않아도 옳은 것으로 드러나고 스스로 뽐내지 않아도 공이 있게 되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아도 그 이름이 오래간다.” ‘하나(一)’란 자연의 도, 즉 ‘도가 하나를 낳음(道生一)’을 가리킨다. 성인은 도덕적 원칙을 품고 스스로 드러내고 스스로 옳다 여기며 스스로 뽐내고 자랑하는 심리적 충동을 극복한다. 그러므로 그는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이치에 통달하여 공적을 이루고 천하를 이끌 수 있다.


노자의 관점을 두고 일반 사람들은 표현을 자제하고 자신의 재능과 의견을 숨기고 남과 경쟁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그러나 재능을 숨기는 것은 실질적인 일을 이루지 못함을 의미하고 의견을 숨기는 것은 다른 사람과 원활하게 소통하지 않음을 뜻한다. 그러면 아무도 당신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면 당신이 어찌 공적을 세우고 천하에 영향을 미치겠는가? 고의로 숨기는 방법은 결코 자연스럽지 못하며 노자의 관점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적지 않은 인재가 표현의 기회를 포기한 채 은둔생활을 했다. 그들은 탁월한 재능이 있으면서도 나라와 백성을 이롭게 할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들은 훌륭한 생각이 있으면서도 마음에만 담아두었으니 풀이나 나무처럼 시들어버렸다. 이 시시한 문인들은 스스로를 도를 깨달은 고상한 사람이라 여기지만 사실 그들은 쓸모없는 인간이며 도와는 거리가 멀다!


노자가 만년에 청우(靑牛)를 타고 함곡관(函谷關)을 건널 때의 일이다. 관문지기 윤희(尹喜)가 노자에게 책을 하나 써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노자는 5,000언(言)으로 이루어진 저서를 남겼으니 이것이 《도덕경》이다. 이때 백 살이 넘어 백발이 성성한데 얼굴은 동안인 한 노인이 노자의 이름을 듣고 관아로 달려와 노자를 보더니 간단히 예를 갖추고 물었다.

 

“듣자하니 선생께서는 박학다식하고 다재다능하다 들었습니다. 이 늙은이는 한 가지 일에도 밝지 못하니 선생께 가르침을 구하고자 합니다.”


이어서 노인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저는 올해로 백여섯 살이 되었는데,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하는 일 없이 한가로이 지내왔습니다. 내 연배의 사람들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땅을 개간했지만 땅 한 뙈기도 갖지 못했고, 집을 지었지만 결국 황폐한 교외 무덤에 묻혔지요. 하지만 나는 평생 농사에는 손도 대지 않았어도 오곡을 먹고 기와 조각 한 장 만져보지 않았지만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집에 살고 있습니다. 선생, 평생을 분주하게 살고도 남은 건 일찍 죽은 것밖에 없는 그들을 내가 비웃어도 되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노자는 미소 짓더니 땅바닥의 벽돌과 돌덩이를 가리키며 태연하게 말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노인께서는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노인이 말했다. “물론 벽돌을 택하겠지요. 벽돌은 쓸모가 있지만 돌덩이를 어디에 쓰겠소?”
노자가 다시 물었다. “돌덩이가 수명이 길까요? 아니면 벽돌이 수명이 길까요?”
노인이 말했다. “당연히 돌덩이지요.”


노자가 말했다. “사람들은 수명이 긴 돌덩이를 선택하지 않고, 수명이 짧은데도 벽돌을 선택합니다. 쓸모가 있기 때문이지요. 천지만물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수명은 짧지만 사람과 천지에 유익하면 모두 그것을 선택하니 짧아도 짧지 않지요. 또 수명이 길어도 사람과 천지에 소용이 없으면 모두 그것을 버리니 길어도 길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전설로 남아 있는 고사이긴 하지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위해 성취하고자 하는 노자사상의 정수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이를 위해서는 재능과 의견을 숨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드러내어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세상을 위해 공헌해야 할 것이다. (하편에 계속)

 

 


- [왼손에는 명상록, 오른손에는 도덕경을 들어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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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편에 이어서)

“더불어 하기는 능히 착하게 한다(與善仁)”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낮은 차원에서 말하자면 좋은 사람과 사귀고 나쁜 사람을 멀리함을 의미한다. 이는 평안한 처세의 기본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이솝우화(Aesop's Fables)》에도 이런 의미를 담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농부가 막 씨를 뿌린 밭 곳곳에 그물을 쳤다. 몰래 씨앗을 먹는 학을 잡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학 한 마리가 그물에 걸렸다. 그물 때문에 다리가 부러진 학은 농부에게 애걸했다. “저는 놓아주세요! 저를 가엾게 여겨주세요! 저는 학이 아니라 황새인데, 본래 성정이 아름다운 새라 물건을 훔치는 일은 하지 않아요. 보세요. 저는 부모님께 효성스럽고 열심히 일한답니다. 제 깃털을 자세히 보면 학과는 전혀 달라요.” 농부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는 씨앗을 훔쳐 먹으려던 학과 함께 잡혔으니 그들과 함께 죽을 수밖에.”
살다보면 나쁜 마음을 품지 않았거나, 본심은 나쁘지 않은데 불행히 나쁜 사람에게 연루되어 화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친구를 사귀는 데 신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 높은 차원에서 말하자면 글자 그대로의 의미뿐 아니라 누구와 사귀더라도 악의 없이 선한 마음으로 대하며, 소인배나 악인에게도 예로써 대하고 심지어 사랑을 베풂을 의미한다. 나쁜 사람은 독약처럼 사람을 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독약도 자연의 산물이니 나름대로 존재의 합리성이 있다. 공자의 제자 자장(子張)은 이렇게 말했다. “현명한 사람을 존중하나 보통 사람을 포용하고, 능함을 기뻐하나 재능이 없음을 가엾게 여긴다.” 이는 노자의 “더불어 하기는 능히 착하게 한다”는 말과도 비슷하지 않은가!


춘추 시대 명장 전기(田忌)가 제(齊)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도주하자 초 왕이 직접 변방까지 나와 그를 맞으며 제나라 군의 상황을 물었다. 전기가 말했다. “제나라가 신유(申孺)를 주장으로 보낸다면 초나라는 5만의 군대만으로도 개선하여 돌아올 수 있습니다. 제나라가 전거(田居)를 주장으로 보낸다면 초나라는 20만을 출병해야 승부를 겨룰 수 있습니다. 만일 제나라가 면자(眄子)를 주장으로 보낸다면 초나라는 나라 군대를 모두 출병시켜야 합니다. 그리해도 망국만 겨우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 왕이 이유를 묻자 전기가 말했다. “신유라는 인물은 오만방자하고 인재를 푸대접하고 평범한 사람은 얕잡아 보니, 인재와 평범한 사람이 모두 그를 위해 일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거라는 인물은 정직하고 예로서 인재를 대하지만 평범한 사람은 무시합니다. 인재는 그를 위해 기꺼이 일하지만 평범한 사람의 마음은 얻지 못하니 그와의 승부는 절반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면자라는 인물은 인재를 존중할 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을 아끼니 상하의 모든 사람이 그를 위해 기꺼이 필사적으로 싸우길 원합니다. 그러니 그와 힘을 겨루면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을 뿐이라 생각합니다!”

훗날 제나라는 신유를 필두로 초나라를 공격했다. 초 왕은 전기의 충고대로 5만 군사를 보내 대승을 거두었다. 제나라가 다시 면자를 보내 초나라를 공격하자 초 왕은 직접 지휘를 맡아 나라 전체의 군대를 이끌고 적을 맞이했다.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겨우 망국의 재앙만은 피할 수 있었으니, 전기가 예언한 그대로였다.


우호적인 마음으로 사람을 사귀고 진심을 다해 타인을 아끼면 진정 이익을 얻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면자는 인재를 존경하고 평범한 사람을 아꼈으니 진정 ‘더불어 하기를 능히 착하게 하는’ 인물이었다.
“말을 능히 믿음직스럽게 한다(言善信)”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말을 믿을 만하게 한다는 의미다. 낮은 차원에서 말하자면 언변이 좋고 요점을 말하며 표현에 능하여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무릇 우수한 지도자는 재능과 개성이 다르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 또한 저마다 특징이 있지만, 공통점을 지닌다. 언변이 출중하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우수한 지도자는 뛰어난 연설가였다. 특히 서양의 민주주의를 시행하는 국가의 지도자는 입으로 표를 구하는 셈이니 언변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좀 더 높은 차원에서 말하자면 “말을 능히 믿음직스럽게 한다”라는 것은 언변에만 그치지 않는다. 우선 말하는 태도가 진실해 속이려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둘째로는 말의 내용이 진실하고 신뢰할 수 있어 속임수가 없어야 한다. 셋째로는 말의 결과에 책임감을 가지고 뱉은 말은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해낸다면 “말을 능히 믿음직스럽게 한다”하기에 충분치 않겠는가!


“정치는 능히 다스림으로 한다(政善治)”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일은 능히 거뜬히 한다(事善能)”라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관리하는 일을 훌륭히 하고 해야 할 일은 제대로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낮은 차원에서 말하자면 관리와 일처리 능력이 우수하여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순조롭게 해결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만사에 능할 수 없는데 어찌 어떤 업무든 다 훌륭하게 처리할 수 있겠는가? 어찌 어떤 일이든 다 잘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정치는 능히 다스림으로 한다”와 “일은 능히 거뜬히 한다”를 실현할 수 있을까? 물론 능력이 닿는 일을 해야 한다. 힘닿는 범위에서 잘하고자 노력한다면 자연히 잘할 수 있다. 역부족이라면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소동파(蘇東坡)는 이렇게 말했다. “태산을 끼고 북해를 넘는 일은 할 수 없는 것이지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어른에게 허리를 굽히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확실히 역부족인 문제가 있다. 반면에 할 수 있고 또 유익하여 최선을 다해도 좋은 일이 있다. 능력은 닿지 않지만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은 어찌할까? 물론 다른 사람이 하도록 넘겨야 한다.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 있고, 당신이 해결할 수 없는 전문적인 문제는 전문가의 도움을 구할 수 있다. 이같이 하면 어떤 일이든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움직임에 능히 때를 맞춘다(動善時)”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일을 하는 것이 시의적절해야 한다는 뜻이다. 《열자(列子)》에 이런 말이 있다. “무릇 때를 얻는 사람은 흥하고 때를 잃는 사람은 망한다. ……천하에 이치가 늘 옳음이 없고 일이 늘 그름이 없다. 과거 필요했지만 오늘은 그것을 버릴 수도 있고, 오늘은 버렸지만 훗날 그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소용이 되고 되지 않음에 반드시 옳거나 그름이 없다. 사람이 틈을 타고 때를 만나 일을 당하여도 방법이 없는 것은 지혜에 속하는 문제이다. 지혜가 만일 부족하면 자네들이 아무리 공자처럼 학문이 박식하고 강태공처럼 병법에 훌륭하더라도 어디에 간들 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의미는 이러하다. 시의 적절하게 일하면 번성하고 시의에 맞지 않으면 실패한다. ……천하에 영원히 옳은 도리는 없으니, 어제 사용되었던 것이 지금은 버려질 수도 있고, 지금 버려졌던 것이 훗날 다시 소용될 수도 있다. 관건은 시기에 맞느냐의 문제이다. 만일 한 번 정한 뒤로 변하지 않는다면 공자처럼 박학하고 강태공처럼 책략에 능하다 하더라도 빈궁한 결말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총명한 사람은 일을 할 때 먼저 땅을 관찰하고 나서 어떤 도구를 사용할지 선택하고, 먼저 백성의 상황을 살피고 나서 일의 목표를 결정하며, 모두의 의견을 종합하고 나서 구체적인 조치를 정한다.
행동하기 전 현재의 조건, 환경, 민심을 충분히 파악한다면 “움직임에 능히 때를 맞춘다”하기에 충분하리라!

 
- [왼손에는 명상록, 오른손에는 도덕경을 들어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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