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꽃 - 농부 전희식이 치매 어머니와 함께한 자연치유의 기록
전희식.김정임 지음 / 그물코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하기 위한 필독서, 《똥꽃》
전희식․김정임의 《똥꽃》을 읽고


책과 함께 하는 동안,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따끔거렸다. 그건 내 부끄러움 때문이었고, 내 위선 때문이었다. 나는 가급적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살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똥꽃》은 그것이 단지 착각이었음을 알려줬다. 그랬다. 이 책은 정작 내 노부모에 대한 예의를 제대로 지키고 있었던가, 하는 뼈아픈 자문을 하게끔 유도했다. 아프고 또 아팠다. 특히나 어머니. 

나는 어머니를 다시 생각했다. 2년여 전 위암 수술로 체중이 많이 줄고 아직 수술 전의 입맛을 되찾지 못하신 내 어머니. 그전에도 불효자였던 나는 어머니를 ‘환자’로만 대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움직이는 것이 불안했고, 어머니가 그 전처럼 집안일을 하고자 하시는 것이 불만이었다. 책은 그런 나를 일깨웠다. 어머니를 ‘환자’ 역할에만 머무르게끔 한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었다. 어머니는 어머니 그 자체의 존재였건만, 나는 선을 넘어섰던 것이다. 어머니를 환자의 역할로만 규정해 버린 나의 폭력. 전희식 선생은 치매 어머니를 역할이 아닌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고 있었다. “소박한 효심만으로 늙은 어머니를 모실 수 없을 것이다.”(p.30) 그렇다. 존재에 대한 예의는 친절하고 상냥하고 돌보는 것만으로 지켜질 수 있는 게 아닌데 나는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늙고 더구나 병을 겪은 어머니에게 심신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내 멋대로 규정해 버린 것이다.

전 선생이 어머니를 서울이 아닌 장수군의 시골집에 모신 것은 그런 이유였다. 어머니의 남은 인생을 가두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도 나는 어머니를 ‘환자’의 틀에 가둬 어쩌면 사육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존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각자에겐 고유한 삶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있다. 늙고 병들었던 어머니이라손 자유의지로 행동과 생의 행로를 결정하는 것을 온전히 존중해야 한다. 하물며 전 선생은 그 의지가 자유롭지 못할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그렇게 대했건만, 나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 가족의 간섭과 제재는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설혹 그것이 애정일지라도. 가족 사이에 선이 없다는 자체로 그건 폭력이다. 그것이 선의였다고 해도 역할이 아닌 존재를 질식하게 했다면, 그건 비윤리적인 것이다. 전 선생의 어머니에 대한 태도와 자세는 내게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어머니의 존재감을 북돋우고 있었다. 어떤 가치판단 없이 어머니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존댓말을 쓰고, 오갈 때마다 인사와 큰절을 올리고, 하는 일마다 꼬박 알리고 허락을 받았다. 치매 어머니를 세상 밖에 동떨어진 존재가 아닌, 혼자가 아닌 존재로 여기는 그 태도가 나는 참으로 인상 깊었다. “치매 걸리면 다 그렇다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수롭지 않은 거라고 말은 하면서도 치매 노인의 비난과 의심이 정작 자기를 겨냥하면 열불을 내면서 반박하고 무시하는 것을 나는 많이 봐 왔다.”(p.98)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치매에 대한 편견을 하나 거둬줬다는 것이다. 치매를 단순 병으로 치부하고 치매 이전의 삶과는 단절된, 치료할 수 없는 무엇으로 간주하던 나였다. 그런 면에서 그의 시각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어머니 굴절된 삶의 현재적 표현이 지금의 치매다. 오늘의 어머니를 인정하려면 고른 삶뿐 아니라 굴절된 삶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치매로 드러나지 않았다면 어머니 인생은 일찍 사라졌을 수도 있다.…치매는 그렇게 살아온 삶에 대한 필요한 현상이고 치유의 과정이다.”(p.99) 한마디로 그의 해석 말마따나, ‘포기한 삶의 틈새로 끼어든 이물질들’. 그리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 노인의 고통과 아픔을 덜어 드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해 본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상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나는 정작 알지 못한 채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책이 말하듯,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생각하는 돌봄’이 필요한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자식이 없는 삶은 가능하지만 부모가 없는 삶은 없다”(p.250)는 김광화 선생의 언급마냥, 문득 내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밤이 기억났다. 잠자리 들기 전, 나는 갑자기 울음꼭지를 켰다. 아들의 갑작스런 울음소리에 놀라 방으로 온 어머니에게 나는 “엄마가 죽는 게 싫다”고 징징거렸다. 죽음을 처음 인지하던 시기에 어머니의 죽음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날 안아주면서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우리 아들을 두고 먼저 안 죽어”라고 말했다. 그건 물론 거짓말임을 안다. 어린 아들을 안심시켜 주기 위한.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새삼 그때를 떠올렸다. 아들을 두고 안 죽는다고 했던 어머니의 그 마음. 나는 그런 어머니를 얼마나 이해하려고 했던가. ‘어머님의 건강과 존엄을 생각하는 기도잔치’를 통해 전 선생이 건넸던 이 말은 못난 아들인 나의 마음을 콕콕 찔러댔다. “내 어머니를 간절히 떠올리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없이 베풀고 끝없이 용서하는 어머니 마음을 갖는 것, 세상의 어머니로 살아가리라 다짐하는 것, 어머니를 모심으로써 스스로 세상어머니가 되는 것.”(pp.157~158)

그렇게 어머니와 함께 노인들을 다시 생각했다. 고령화 사회, 실버복지 등을 떠벌리지만, 시류는 그렇지 않다. 노인들을 백안시하면서 ‘어리게 혹은 젊게 보임(동안)’에 대한 과도한 경배수준의 찬사를 읊어대고 있는 것이 지금의 풍경이다. 이건, 늙음 혹은 나이듦에 대한 차별이 명백하다. 이 책은 그래서 어떤 경고다. 누구나 늙고 죽어갈 것을 알면서도 젊음 혹은 동안이라는 이름의 분별없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를 향한. 결국 그 분별없는 열정이 훗날 날카로운 부메랑이 돼 우리의 존엄을 훼손하리라는 것을.  

무엇보다 나는 책의 노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 깜짝 놀랐다. 전혀 생각지 못한, 품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童話)는 있는데 왜 노화(老話)는 없는지, 노인헌장과 노인생활헌장이 정작 얼마나 노인들(의 존엄)을 배제하고 있는지. “노인에 대한 사회의 무지와 무례가 도를 넘고 있다.”(p.161)는 그의 말은 명백한 사실이다. ‘육아’(育兒)에는 그토록 애를 쏟고 사회적 비용을 들이면서, ‘시노’(侍老)에 무관심한 것은 결국 자신과 사회의 존엄을 깎아먹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큰 행사나 공공기관은 방문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올 수 있도록 시설이 마련되고 놀이교사를 배치하기도 하지만 어디에도 불편한 부모를 모시고 갈 수 있는 행사나 공공기관은 없다.”(p.161)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하는 것. 그것에 대해 우리는 좀더 많은 얘기를 나눠야 한다. 누구에게나 닥칠 노년을 위해서라도, 노인들의 마음에 한 발짝이라도 들어가는 일이 중요하다. 전 선생은 책을 통해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사랑은 죽은 세포도 살리고 정성은 통증을 경감시킨다는 체험적 결과를. 노인은 외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같은 하늘아래 숨을 쉬는 존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는 분들이다. 노인의 얘기를 들어주고, 그 얘기에 장단을 맞춰주면서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해주는 일이, 우리네 삶의 품격과 존엄을 위해 필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책은 내 얼굴을 화끈거리게도 만들었지만, 내 어머니, 노인, 치매에 대한 새로운 경지를 열어줬다.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동안을 경배하는 사회보다,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노년을 맞기 위한 질문과 답을 할 수 있는 사회, 그런 대화를 격려하는 사회를 만들어 우리 자신의 존엄을 지켜야한다. 

충분히 밥값 하고 계시는 내 어머니를 위해, 그리고 언젠가 내게도 닥칠 노년을 위해,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좀더 귀 기울이고 어머니의 존엄을 지키는 아들이고 싶다. 이젠 내가 어머니 등을 두들겨 드리면서, 나를 상하지 않게 하면서, 인간과 존엄 그리고 돌봄을 좀더 생활 속에서 실천할 때다.

P.S. 아직 이 해가 저물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남았지만, '아듀 2008~'을 외치기 전까지 몇권의 책을 더 읽겠지만, 이변이 없는 한, 《똥꽃》(전희식·김정임 지음/그물코 펴냄)은, (내가 꼽은)'올해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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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괴물 - 할인행사
봉준호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미군기지의 환경오염 현황 및 정화계획, 정화사업 진행 상황이 상시 공개된다는 경기도의 발표가 있었다.
진즉, 말 안해도 당연해야 할 것이 선심쓰듯 발표되는 것이 나는 못마땅하지.
지들끼리 꿍꿍따, 놀고 있는 꼬라지, 졸라 못마땅.
그렇게 미국만이 유일하게 해외에 군사기지를 두고 있지, 잘났어 증말.  

사실, '괴물'은 여전히 서식 중이다.
2년 전 온 천하에 정체가 드러났음에도, 뻔뻔도 하지.
이젠 새끼까지 깠다.
그 쉐이는 근데 돌연변이인지, 변태인지, 쥐새끼 닮았다. 찍찍.
괴물 찌끄레기로 설쳐대는 꼬라지, 장난 아니다. 머리 용량은 꼴랑 2MB란다.
콱 쥐어불고 싶은 쥐쉐이.
젤로 짜증나는 건, 그 쥐쉐이, 약자들만 물고 늘어진다는 게다.
괴물 찌끄레기다보니, 만만한 건, 그저 약하고 없는 자들 뿐이다.
딴데 가선, 찍소리도 못하는 쥐쉐이.
토건사업 한답시고, 기실 시궁창이나 뒤지던 쉐이라, 악취만 진동하는 쥐쉐이.
70년대의 구호가 그랬다지. "우리 동네 남은 쥐를 모두 잡자"
어쩜, 그리 70년대 구호와 딱 어울리시나. 이 쥐쉐이.
절대 괴물이 되지 못함을 알면서도, 괴물을 욕망하는 꼬라지하곤.

2006년 7월27일, '괴물'의 존재가 세상에 공개적으로 처음 드러났던 날이었다.
영화 <괴물> 개봉.
1300만이 넘는 흥행의 첫 테이프를 끊으며 등장했던 괴물은,
끝내 박멸되지 않았다.
2년이 지난 지금, 괴물은 되레 서식지를 넓힌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우리 안의 괴물도 점점 더 커져간다.
2년 전에서 한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외려 뒤로 밀리고 있는 우리 동네.
쥐쉐이까지 득세할 정도로 서식환경이 더 나빠진 탓이다.
괴물과 쥐쉐이의 서식앞에 우리의 생존법은, 아마 '하악하악'(?)


아래는 2년 전, 내가 만난 <괴물>에 대한 품평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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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들의 연대 보여준 '괴물'

“약자는 뭉쳐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무너지는 수밖에 없다.”


#1. 최근 주한미군기지의 환경오염실태와 비용처리 문제가 재차 도마 위에 올랐다. 주한미군이 반환했거나 반환할 예정인 기지 중에서 환경오염 조사를 마친 29곳의 오염 실태는 한마디로 ‘어이없음’이었다. 무상으로 빌려 쓴 주제에 이를 더럽힌 ‘싸가지 없음’ 때문이다.




이에 한국과 미국은 환경치유와 절차 등을 놓고 1년6개월여 동안 ‘협상’을 진행해 왔다고 한다. 한국정부는 ‘오염자부담원칙’을 들어 주한미군의 책임을 주장했으나 ‘합의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오염정화가 제대로 되지 않은 기지들을 돌려받게 된 상황. 힘 센 놈의 ‘강압’에 의한 것인지, 그렇지 못한 자의 ‘포기’였는지는 몰라도, 이른바 ‘합의’는 이뤄졌다. 그렇다면 이른바 깡패에게 삥 뜯길 때도, ‘합의’는 된 거다.




한국 정부를 대표한 환경부는 미국과의 합의 결과를 “우리 정부가 원하던 수준에 미흡하다. 나머지 오염 치유는 반환 이후 우리나라(국방부)에서 치유할 계획이며, 국민부담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환경부는 그 치유 비용을 기준에 따라 277억원~1205억원이 들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환경단체 등에서 추산한 수천억과는 큰 차이가 난다.
"오염 미군기지 반환, '협상'이 있긴 있었나"
 14개 미군기자 환경오염 실태 또 드러나



#2. 2000년 용산 미군기지 영안실 부소장 맥팔렌드 앨버트는 한국인 직원에게 주검 방부처리용 약품인 포름알데히드 475㎖짜리 480병(20상자)을 싱크대 하수구에 버리도록 명령했다. 포름알데히드는 장기간 노출될 경우 백혈병 등 암을 일으키는 발암물질로 물에 희석돼도 독성이 없어지지 않으며, 하수구에 버릴 경우 하수관을 타고 퍼지는 가스도 유해하다. 이른바 ‘맥팔렌드 사건’.




당시 명령을 받고 이를 방류한 군무원은 이를 미8군 34사령부에 보고 및 진정을 제기했으나 미군은 별 내용없이 유감만을 표시했다. 이에 녹색연합은 당시 토머스 슈워츠 주한미군 사령관과 맥팔렌드 부소장을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서울지검은 포름알데히드 무단방류 지시 혐의로 맥팔렌드를 벌금 500만원에 약식기소했고 서울지방법원은 정식재판에 회부했다. 




담당재판부는 공소장 부본을 맥팔렌드에게 송달하려 했으나, 주한미군 당국은 수차례 수령을 거부했고 현재까지 공판은 열리지 못하고 있다. 더 웃긴 건, 미군은 맥팔렌드에 대한 자체적으로 감봉 30일의 징계처분을 했다는 공식입장을 발표했으나 얼마 뒤 맥팔렌드는 영안소 소장으로 승진까지 한 반면 이 범죄행위를 시민단체에 제보한 한국인 군무원은 해고당했다. 웃기는 짬뽕이다.




똥배짱과 굴욕 사이




환경오염 관련 국제 원칙은 ‘오염자’ 부담이다. 그리고 범죄가 저질러졌다면 처벌받는 것이 당근 아닌가. 오염자와 범죄자가 누구인지는 명약관화하다. 그런데도 저지른 자는 ‘똥배짱’이고 피해를 입은 자는 ‘굴욕’이다. 줄 거는 다 주면서도 돌려받는 건 불신뿐인 이 괴상망측한 상황. 지금의 한미관계는 예를 들자면, 부하가 살인을 저지른 조폭 두목을 위해 큰집까지 갔으나 가족들도 돌봐주지도 않고 배신당한 그런 형국 같다. 최소한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말,은 여기서는 통용될 것 같지 않다. 이미 ‘괴물’이 돼 버린 마당 아닌가.




잠깐, 괴물(怪物)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1. 괴상하게 생긴 물체.

2. 괴상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괴상(怪常)의 의미는 또 이렇다. 보통과 달리 괴이하고 이상함. 보통 정도의 수준이라면 저런 어이없는 작태를 보일 리도 없다. 한마디로 수준이하다. 수준 이하의 것들을 이제부턴 ‘괴물’이라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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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사회가 낳은 ‘괴물’

 

개봉 직후 승승장구, 파죽지세인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 이런 미국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반미감정 어쩌구저쩌구 하는데 일정부분 맞다. 한강변에 나타나는 괴물의 탄생비화(?)를 다룬 첫 장면. 주한미군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한국인에게 포름알데히드의 무단방류를 지시한다. 그렇다. ‘맥팔렌드 사건’이 자연스럽게 대입된다. 독극물을 먹고 자란 괴물은 한강을, 서울을, 한국을 공포로 잠식한다. 미국이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현실사회에 대한 노골적인 메타포(은유)다.




이와 함께 미국(정확하게는 부시정부)의 괴상스러움은 다른 형태로도 풍자된다. 괴물의 탄생에 일조한 독극물의 방류에 이어 대중에 공포심을 주입하는 ‘(괴물)바이러스’. 기득권이 자신의 세력과 힘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은 알려져 있다시피 간단하다. 공포와 위험을 조장하는 것. 기득권의 개인기다.




영화 속에서도 이 같은 기제는 고스란히 작동한다. 있지도 않은 괴물 바이러스는 미국과 당국에 의해 존재하는 것처럼 규정된다. ‘에이젼트 옐로우’. 웃기지도 않은 바이러스 퇴치단의 존재에서 국제 정세의 한 단면이 연상되지 않는가. 그렇다. 이라크전. 전쟁광 카우보이들의 전쟁 명분은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WMD)와 생화학무기였다. 이미 일을 개차반으로 벌려 놓고선 ‘잘못된 정보(miss information)’에 의한 것이라고 당당히 말한 카우보이 괴물.




미국은 최근에도 ‘잘못된 정보’를 나불거렸다. 지난 6월 수니파 종교지도자를 7시간이나 구금해 수니파 이라크인들의 강력반발을 사기도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란을 향한 군사공격 위협 역시 마찬가지다. 부시정부는 저질렀던 실수를 되풀이하는 작자들의 모임 혹은 저질러 놓고선 나중에 ‘아님 말구’라며 뻔뻔하게 들이대는데 일가견 있는 집단이다.




그런 한편으로 기득권(지배자)이 만들어놓은 바이러스 포비아의 악영향은 세상을 우울하게 만든다. 사람들 사이에 만드는 간극. 극 중 마스크를 쓴 사람들의 행렬이 이를 대변한다. 기침하는 사람에 대한 따가운 눈총. 이를 통해 문득 AIDS바이러스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떠올린다. 전염에 대한 과도한 공포심을 조장하고 동성애에 대해 폭력을 가하도록 만든 어떤 편견. 이 편견 또한 우리 안의 괴물.
편견과 차별 그리고 자본, 감염인의 생명을 노린다
감염인에게 날아드는 해고통지서, 직장검진



그렇다. 괴물이 미국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괴물’은 다층적이다. 시작부터 ‘독극물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괴물>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사회를 그렇게 투영한다. 무고한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안겨다주고 생명을 빼앗는 괴물의 존재는 도처에 깔려 있다. 동맹을 무기로 때론 한국민의 삶을 억압하는 미국, 없는 자를 더욱 핍박받도록 시스템을 강권하는 신자유주의, 어이없는 명분으로 전쟁을 도발하는 패권주의, 한국이라는 땅에서의 비극 혹은 재난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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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은 단순히 자연 발생한 돌연변이 개체가 아니다. 비열하고 때론 평범하기 그지없는 악들이 쌓이고 쌓인 퇴적물이다. 그저 ‘깊고 넓은’ 한강에 방류하면 독극물이 희석될 것이란 단순치명적인 발상이 불러온 가공할만한 결과. 그 결과물 앞에 사람살이는 그저 괴물에게 무기력하게 당해야만 하는 것일까. 정부는, 언론은, 경찰은, 의사는..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은 과연 무엇을 해 줄 것인가.

 

 

현실사회의 메타포




봉준호 감독은 미군으로부터 잉태된 괴물의 활약상(?)을 현실사회의 여러 모습과 결합시킨다. 괴물로 인한 재난은 그동안 우리네 사람살이를 끔찍하게 만든 인재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영화상의 설정이 낯설지 않다. 제대로 된 근대화를 거치지 못한 채, 비호감을 급호감으로 바꾸고자 노력했던 세월. 정권과 기득권의 호령에 억지춘향식 끌려 다닌 부작용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허우대 좋은 조어를 만들어놨지만, 음습한 곳에서 키운 한강의 괴물은 결국 우리네 사람살이를 위협하는 꼬라지.




봉 감독은 이를 위해 한강변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한 가족을 등장시킨다. 현서만 완전소중 챙기는 빈둥빈둥 소시민 강두(송강호)를 비롯, 운동권 출신 대졸실업자 남일(박해일), 늘 타이밍을 놓쳐 늦되는 남주(배두나), 강두의 현명한 딸 현서(고아성), 그리고 과거세대의 초상을 대변하는 할아버지 희봉(변희봉). 잘난 것도, 별달리 대수로울 것도 없고 가끔 사고 치면서 근근이 하루하루 버티는 루저 가족.




이들은 우리네 사람살이의 비극을 보여준다. 외부 혹은 내부의 적들에 둘러싸인 눈물나는 분투 혹은 애환. 현서를 찾기 위한 박씨 일가 앞에 우리 내부의 괴물이 떡하니 나타난다. 죽은 줄 알았던 현서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박씨 일가의 말을 씹는 건 미군도 아니고, 바로 내부에 있었다. 있지도 않은 바이러스에 노출된 위험인물로 낙인을 찍는 것은 물론, 말을 씹는 것도, 우리를 지켜주는 존재로 알았던 ‘공권력’.




그들은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아이를 잃은 슬픔 따윈 안중에 없다. 또 다른 병균의 숙주로 치부해버리곤 감금과 치료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딸을 찾고자 애원하는 강두를 가볍게 정신병자로 몰아세우는 의사의 정신병적 매몰참은 또 어떻고. 뇌물 요구하는 공무원, 그림에만 몰두하는 언론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등등 우리 안의 괴물은 똬리를 튼 채 언제든 우리네 삶을 그로기로 몰고 갈 태세다. 강두 가족은 그저 누구의 도움도 없이 고군분투할 도리밖에.




뭐 글타고 이런 알레고리를 심오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익숙한 기제들 아닌가. 그저 웃으면서도 서글픈 심정이 밀려듦을 막을 순 없지만.




혹자는 바이러스에만 골몰하고, 괴물을 잡는데 띄엄띄엄한 정부나 당국의 처사가 이상하다고도 했지만, 나는 그것 역시 이 땅의 현실을 넌지시 알려주는 상징이 아니었나하는 싶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 구해주기보단 뒷북만 열라 쳐대는. 늑장대응, 수수방관..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 봉 감독이 그걸 감안했다면 빙고~, 아님 말구.^^; 혼자만의 해석일 뿐이니 다른 생각이라면 나에게 돌을 던져도 좋다만ㅋㅋ 




어쨌든 영화의 이미지들은 우리가 겪은 일련의 사건들이나 현실을 적나라하게, 혹은 넌지시 떠올리게 만든다. 악몽 같은 일들을 여느 일상처럼 겪는 이 땅의 특수한 상황에서 괴물은 바로 바로 우리를 자양분으로 삼아 태어난 것이 아닌가. 이 풍자를 웃으며 바라봐야 하는 씁쓸함. 이 쓸씁함과 슬픔을 블랙유머로 풀어낸 봉 감독의 솜씨야 여기저기서 주야장천 떠벌린 마당이니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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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봉 감독은 정치적 함의를 다분히 품고 있음에도 프로파간다로서의 괴물을 직조하진 않는다. 그의 시선이 꽂히는 것은 괴물 등쌀에 부대끼는 소시민의 삶과 그들의 연대다.





약자들은 뭉치고 서로를 보호해야 한다




<괴물>은 우리가 슈퍼맨이나 X맨 등 기존 할리우드 영화들이 보여준 영웅상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존재와 맞닥뜨리도록 한다. 그건 일방적 구원이 아니다. ‘상호 보호’라는 테제를 간직한 한국형 영웅이라고나 할까. 그들은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 악을 무찌르는 익숙한 영웅의 전형과 다르다.




그들은 자기 삶을 지키려는데 충실하다. 굳이 가족애나 가족주의란 테두리를 짊어지지 않아도 좋다. <괴물>은 일견 현서를 구하기 위한 강두를 비롯한 박씨 일가의 ‘괴물(무찌르기) 원정대’의 좌충우돌기 같지만 결론까지 보자면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 괴물에 잡힌 현서가 그 출구 없는 하수구에서 더 작은 아이를 보호하려 애쓴다. 탈출을 시도하다 두 명 모두 괴물의 입에 먹혔을 때도 현서는 그 아이를 자신의 작은 몸으로 에워싼다.  그리고 강두가 그 아이를 거두는 과정.


그들은 약하긴 매 한가지지만 경쟁이나 생존을 위해 더 약한 자를 밟고 일어서지 않더라. 봉 감독이 인터뷰에서도 밝힌 내용도 그렇다. “...서로가 서로를 계속 보호하려는 이런 설정은 제가 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이기도 해요.”




미군의 악행과 공권력의 부재로 괴물은 설쳐대고 가족은 갈기갈기 찢긴다. 나약한 소시민들이야 ‘보이는 위협’ 앞에 움츠러들고 타인에 대한 경계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 그건 인지상정이다. 그럼에도 아무 액션 없이 무너질 수 없는 것이 사람살이다. 괴물로부터 위협당해도 더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힘이 필요한 곳엔 손을 내밀 것을 권하는 것이 내가 본 <괴물>이었다.




누군가를 짓밟고 일어서라는 무한 경쟁의 구도를 주입시키지 말았으면 한다. 약육강식이 아닌 상호보호가 필요한 시대. 자국민들의 안위를 보장하지 못하면서 실체 없는 국익을 들먹이며 ‘걱정마라’는 흰소리만 해대는 정부가 누구에겐 괴물일 수도 있다. 대체 누구를 위한 이익인가. 양심을 걸고 했다지만, 그의 양심을 믿는다손, 그 양심이 지켜줄 것은 정작 약자들이 아닌 강자의 이익일 수 있음을 모르는 걸까, 알면서 그러는 걸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비슷한 경제수준의 국가들 중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느끼는 나라의 비극(MBC다큐멘터리 '행복'을 보니 그러더라). 강자는 괴물이 되고 약자는 노리개로 전락하는 사회. 장삼이사의 사람살이는 세계평화나 정의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조금이라도 더 불행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뿐이다. <괴물>의 괴물이야 보이는 위협이지만, 21세기를 휘감고 있는 괴물은 워낙 얍삽하지 않은가. 그 괴물에 맞설 수 있는 건 서로 손을 맞잡는 것 밖에 더 있겠나.




그러나 사실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남의 고통엔 관심없는, 그래서 너무도 엄혹한. 최근의 일만 놓고 봐도 그렇다. 포항 건설노조의 포스코 본사 점거를 놓고 ‘왜’라고 물으려 하지 않고 그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시선, 평택 대추리 농민의 절규·비정규직노동자들의 울부짖음에도 되려 그들을 배부른 자들의 농땡이 정도로 치부했던 눈길. 악의 평범함. 누구 말마따나 남을 짓밟고 일어서는 것이 미덕이라고 강요당하는 시대, “너의 불행과 아픔이 곧 나의 행복과 기쁨”이 이 시대의 명징한 징후 아니던가.


과연 이런 상황에서 연대가 가능하고 희망을 끄집어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신기섭 한겨레 논설위원은 이렇게 말한다. “가장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기득권층은 원래 그렇다 해도, 이들과 엇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은 달라야 한다. 그런데 왜 그들조차 점점 외면할까? 제 스스로 고통을 감당하기도 버겁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이웃의 고통에 예민해지는 것이 함께 사는 길이다.”


이글, 일독을 권한다
☞ 남의 고통에 무덤덤한 사회

최소한 인간은 아니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괴물이 되지 않는 길도 명징하지 않는가. 나도 당신도, 우리 안에서 키운 괴물에 잡아먹히는 일은 끔찍하다. 그리고 그것 자체도 인식하지 못한 채 사는 것은 더 끔찍하다.


<괴물>을 보면서 새삼 이 문구가 떠올랐다.

“약자는 뭉쳐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무너지는 수밖에 없다.”

내가 아는 약속의 장소는, 물론 없을 지도 모르지만, 이런 곳이다. 약자들이 뭉치는 곳.

그래서 나는 <괴물>이 좋았더랬다.






궁금하다. 당신이 본 <괴물>은 어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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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 외로운 너를 위해 쓴다
정이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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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마지막'으로 읽은 책. 무엇을 떠나보내고 싶어서였을까. 무엇을 정리하고 싶어서였을까. 누군가 그러더라. 연말, 소득공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 안에 가득찬 미련한 감정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흠, 그럴 듯하단 생각이 들긴해.

사실, '작별'이란 제목이 냉큼 마음으로 들어왔다. '이별(離別)'이 아닌, '작별(作別)'이어서 좋았달까. 그게 뭐, 별다른 차이냐고 투덜거리면, 할말은 없어.^^; 순전히, 내 억측이지만, 작별이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행위라면, 이별은 왠지 내동댕이쳐진 느낌이야. 이별은, 쓸쓸한 느낌이 더해. 백과사전을 뒤져보니, 그러더라. 작별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짐. 또는 그 인사', 이별은 '서로 갈리어 떨어짐. ≒별리·상별'. 내겐, 혀에서 구르는 '작별'의 어감이 더 좋아.

정이현은, 말하고 싶어했어. 나직하게. 나는, 그 말을 조근조근 듣는 아이가 됐어. 별다른 이유가 있겠어. 진짜, 작별할 시간이잖아. 2007년에게. '마지막'이라는 말이 주는, 이 묘한 감상들. 당신도 알잖아. 말끝마다, 마지막, 마지막 하면서 사람들은 어떤 주술을 외지.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어느 순간에 대해. 나는, 그 순간을 나누고 싶은 책으로 <<작별>>을 고른 게지. 나에게도, 영영 작별을 고하고픈 2007년의 어떤 순간들이 있으니까.

정이현은, 7개의 감정을 분절해 놨어. 외롭게, 가득하게, 어른스럽게, 자연스럽게, 사랑스럽게, 뼈아프게, 당혹스럽게. 덜그럭덜그럭. 정이현은, 균질하지 않아. 감정의 결은 출렁거리면서도 켜켜이 생의 결을 쌓아가고 있더라. 굳이 어렵게 따라갈 필요는 없더라. 자신을 증명하면서 타인과 소통하고픈 욕망에 시달리면서도, 타인과의 부대낌에 에라이,하고 고독을 택하고픈 소망 사이에서 외줄을 타기도 한다.

나는 처음, 정이현을 읽었다. 대체로 <<작별>>은 나른하고 미끈해. 섬뜩한 귀기나, 감정의 파고가 벅차 오르는 클라이맥스는 없어. 이 글에는, 도시 중산층, 큰 굴곡 없이 사랑받고 자란 사람의 향기가 은연 중에 뿜어나오더라. 뭐, 그것이 나쁘다거나, 좋다거나, 그런 말은 아니야. '마지막'을 레떼르를 붙이고 보기엔 무난하단 얘기. 2007년12월31일과 2008년1월1일이 사실 다를 건 없지만, '작별'은 12월31일에 어울리는 인사가 아닐까. 정이현의 '단칸방'에서 나온 지금, 나는 그냥 '90년대'가 아른거린다. 보고 싶거나, 그리운 그런 것은 아니고. 작별도 제대로 할 필요가 있지. 발길에 걷어채는 과거 때문에 발걸음을 떼기가 힘들다고? 발목을 친친 감으면서 매달리는 미련과 후회 때문에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겠다고? 그래도 우린, 거닐어야 한다는 걸 알잖아. 생은 그래도 지속됨을 알잖아.

그래, 2007년의 '균열'은 뒤편으로 밀어넣고. 2008년을 향한 '항해'가 기다리나니. 

그래,
작별은,
'뜨거운 안녕'보단 '나직한 안녕'이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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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길을 잃다
서숙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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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빠름을 경배하고, 변화를 당연시하는 시대. 그렇다. 모든 것은 떠나게 되어 있고, 잊혀지게 마련이다. 그 모든 변화를 우리는 감내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빠름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일까. 모든 것은 하나둘 떠났다. 그 옛날, 우리가, 시대가 품고 있던 어떤 유적 같은 것들. 발길에 걷어 채일 수도 없을 만큼, 과거는 빠르게 잊혀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쉽게 망각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어떤 복고의 힘은 ‘세다’. 추억의 힘도 ‘세다’. 너무 빠르고, 너무 변해서, 그 속도와 변화를 따르지 못하는 ‘느린’ 사람들에겐, 과거가 발길에 채인다. 한편으로, 잊혀짐이 두려워서일까. 지난 유적들이 때론 우리를 불러낸다. 망각이 마냥 온당한 것만은 아니라는 듯. 물론 그것이 철저히 상업성에 기인한 부름일 수도 있지만.

서숙은 그래서 책머리부터 이야기한다. 레트로스펙티브. 깨달음은 더딘 발걸음으로 올 것이라고. 늦된 자신을 위무한다. (너무 빨라도, 너무 변해도, 이에 쉽게 적응 못해도) 괜찮아, 괜찮아. 너무도 빠른 속도와 변화의 시대에, ‘괜찮아’라는 나지막한 속삭임은 하나의 주술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지탱할 수 있다. 낙오해도, 밀려나도, 뒤떨어져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나는 <일부러 길을 잃다>의 텍스트를 그렇게 읽었다. ‘길 잃기’의 주체성. ‘이 길이 아니면 안 된다’가 아니라, ‘이 길이 아니라도 좋다’. 누군가는 그것을 ‘길을 잃었다’로 표현하겠지만, 당사자는 또 다른 이정표를 찾는 행위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 그래서 서숙은, <하와유? 컴퓨터>에서 외친다. “가상현실이 그치고 현실이 있게 하라.” 가상현실에 적응 못한 세대의 볼멘소리로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어차피 각 세대가 조응하는 접점의 ‘차이’일 뿐이다. 그것은 길을 잃은 것이 아니다. 사이버에 적응 못한 구세대의 푸념이 아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가 아닌 각자의 삶의 방식. 일부러 택하는 ‘길 잃기’의 행위. 그러하기에, “인간의 참모습은 그 정신에 있지 않고 그 현존에 있습니다. 진실은 역사에 있지 않고 현재에 있습니다. 선악의 기준을 넘어 약동하는 생명력은 더욱 고귀합니다.”(<안녕하세요, 까뮈씨>) 무중력의 매력도 분명 있겠지만, ‘살아있음’의 심장박동을 느끼는 것은 역시나, 현실 속 현존에 있다는 사실을 서숙은 분명히 주장하는 듯 하다.

그런 한편으로, 서숙은 <휴대폰 이야기>를 통해, 서로 다른 그 길을 감식한다. 이해와 거리감을 표현하면서. 서숙은 “휴대폰 하나씩을 손에 들고, 목에 걸고 이 도시를 헤매는 우리의 젊은이들도 나름으로 유목민화하고 있는 셈”이라며, 디지털 시대의 코드(노마드)를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물론, 서숙은 자신의 자리에서 멀리 빗겨나진 않는다. 자신을 ‘안티 노마드’라 칭하면서 “자유로우나 고독한 영혼들은 마치 섬처럼 외롭게 떠있는 존재들 같다”거나 “그들이 쉼 없이 휴대폰을 통해 토해내는 것은 혹시 외로움의 비명은 아닐까”라고 의문을 내던진다. 그럼에도 딸로부터 버림받은 휴대폰을 주워든 자신의 뒤쳐진 걸음걸이. 레트로, 레트로. 산 보듯 강 보듯 어슬렁거리는 서숙의 길 잃기. 

주체적인 길 잃기는 어쩌면, 자의식의 발로다. 앞선 누군가 걸었던,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다고 나섰던, 길을 의심하는 행위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아니면 ‘케세라 세라’의 포기이거나. 마음은 끊임없이 요동칠 지어다. 진짜 길을 잃고 헤맬 때의 막막한 감정을 떠올려보라. ‘일부러’ 잃은 길이,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을 때의 황당함을 생각해보라. ‘나, 길을 잃어보련다’고 호기롭게 나섰다가, ‘나, 돌아갈래’하고 번복할 때의 심정이란. 그렇다고 마음의 소리를 외면할 수는 없다. “우리 한번 길 잃어볼래?”라는 말 속에는, 호기심과 두려움, 반항심 등등의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지 않을까. 길을 잃는 행위가 가져올 결과는 예측 불가능하지만, 또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서숙의 세계(수필)은 그러나, 일탈은 꿈꾸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능동적이라기보다는 수세적이다. 그의 글에는 중산층의 안온함이 여과 없이 묻어난다. 빠르고 변화무쌍한 시대를 공세적으로 거스르는 ‘러다이트운동’(기계파괴운동)과 같은 과격함이나 전복은 없다. TV 아침드라마와 신문을 통해 즐거운 세상사 걱정을 하고, 친구를 만나 규모 있는 살림살이의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여사를 만나 그림전시회를 가는. 물론 그것이 나쁘다거나, 결핍은 아니겠지만. 서숙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세계에서 모든 소재를 뽑으면서 세상과 소통할 뿐, 더 나아가지는 않는다. 간혹 길을 잃고자하는 의지도 드러내지만, 그것으로 그친다. 길 잃기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거나 생의 틀을 바꾸는 계기가 되진 않는다. 그저 숭실대학교 뒷마당에 당도하고야 마는 싱거운 모험.

물론 가끔은 서숙의 세계도, 마음도 흔들리는 것 같다. “매양 떠나고 싶어 하면서 한편으로는 한자리에 머물고자하는 우리. 한사코 홀로 있게 되기를 소망하는 반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진정한 대화를 갈구하며 끊임없이 인간의 품을 그리워하는 우리. 인연의 고리로부터 훌훌 벗어나고 싶어 하는 한편, 떨쳐내지 못할 집착에 연연하여 한없이 전전긍긍하는 우리.”(<마음이여, 정착하지 마라>) 그리고 자신들 부부의 은혼식(25년)과 친정 부모님의 금혼식(50년)을 맞아서도, 결혼을 의심한다. “책임감이나 의무감 또는 자식이나 집안을 위한다는 명분 그런 것 말고 뭐 좀 보다 절박하게, 하필이면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저 사람과 내가 같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결혼을 했는데, 이미 감정이 시들해져 버린 후에도 이 제도라고 할지 관습 속에 그저 안주해야 하는 당위가 과연 무엇일까.”

<나에게 사치는>을 읽으면서, 이전부터 혐의를 가지긴 했는데, 나에겐 ‘글쓰기’가 진짜, 사치라는 생각을 굳혔다. 채워지지도, 영글지도, 그렇다고 콘텐츠가 절박하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종의 배설구. 군더더기와 중언부언, 불확실한 세계. 그러나, 서숙은 단호했다. 이 사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여느 세계를 다룰 때와는 다르게 단호했다. 글쓰기가 서숙에게 주는 희열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스티븐 킹의 말이 떠올랐다. “글쓰기는 마술과도, 생명수와도 같”아서 “마음껏 실컷 마시면서 허전한 속을 채우라”던.(<유혹하는 글쓰기>)

나는, <일부러 길을 잃다>를 덮고서, 과연 궁금하기도 하다. 주체적으로 길을 잃었을 때, 그 결과를 생각했을까, 아니 했더라면, 어떤 결과를 바랐을까. 꽃은 필 때 질 것을 염려하지 않고, 태어날 때 죽을 것을 고려하지 않지만, 그것은 ‘의도하지 않음’이 전제돼 있다. 과연 내가 ‘일부러’ 길을 잃었을 때, 그것을 선택했을 때, 나는 그 길의 끝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일탈의 결과를 나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마음이여, 정착하지 말 것’을 주문한 서숙의 주체적인 길 잃기의 끝에는 어떤 ‘황홀경’이 자리매김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정착하지 못하는 마음을 장착한 나는, <일부러 길을 잃다>에 그은 밑줄을 다시 한번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그리곤 속삭인다. ‘다시 못 돌아가면 어떠랴, 괜찮아, 괜찮아...’ 시대의 흐름과 빠른 속도에 낙오된 나는, 이왕 늦어진 것, '달팽이의 속도'를 택하련다. 무한성장, '암세포의 논리'가 아닌. 나는, 변명처럼 일부러 길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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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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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난달 17일은 '세계빈곤퇴치의 날'이었다.
14년째를 맞은 이 날, 지구촌 곳곳에서는 '빈곤에 반대하는 지구적 호소(Global Call to Action against Poverty, GCAP)' 캠페인이 진행됐다. 한국에서도 '1017 빈곤심판 민중행동'이라는 행사가 열렸고, 빈곤에 대한 관심 촉구를 위한 '화이트밴드 콘서트'도 열렸다. 이 화이트밴드는, 뜻을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이 '흰 띠(White band)'를 착용해 빈곤 퇴치를 위한 실제적인 행동을 촉구한다는 의미다. 빈곤은 그렇듯, 더이상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수사가, 빈곤 문제의 부각을 막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럴까. 나의 문제는 영원히, 아닐까. 그저 남의 문제라고 덮으면 될까. 나는 묻는다.

다수빈국과 소수부국의 불균형.
알다시피, 빈곤은 심화되고 있다. 빈곤은 어디에도 널려있지만, 그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소수의 부자는 다수의 빈자를 착취하고, 이를 국가로 바꿔도 다르지 않다. 빈곤은 어디에도 널려있다. 그렇다면 빈곤에 대한 관심은? 미디어를 통해 빈곤국이나 기아국에 구호물자 등이 수송되는 것을 본 것이 다는 아닐까. 나는 그렇게 안도했던 것 같다. '국제기구나 부자 나라에서 저들을 도와주고 있구나, 다행이다.' 그것으로 나의 죄의식은 봉합된다. 그 구호품이 어떻게 그들에게 전달되고 소비되는지, 알 생각도 없었다. '저것으로 충분하겠지', 하고 여겼다. 그저 워낙 일상적인 현상으로만 치부해서일까. '함께 사는 길'을, '세계의 불균형'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타인의 고통에 예민해지지 못한 불찰.  

빈곤은 바로 우리의 문제 아닌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그래서 좀더 정밀한 진단을 내려준다. 빈곤은, 기아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과 자기가 속한 작은 우주에 대한 질문 자체임을. 사실, 쉽지 않은 문제다. 이 팍팍하고 비열한 세계에서,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는, 의외로 힘이 세다. 남의 빈곤까지 생각해볼 여력이 많지 않다. 그래도, 이 책은 말한다. 조금이라도 생각을 해보라고. UN식량 특별조사관으로 활동했던 장 지글러는 아들과 대화하는 형식으로 이를 쉽게 풀어낸다. 나와 관련없다고 치부하지만, 언제 내 자신의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이 곳은 우리가 함께 발 붙이고 있는 지구의,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이웃의 문제라고. 그는 나지막하게 건넨다. 기아의 진실을. 물론 그렇다고, 그런 이야기들이 귀찮다고 하는 사람을 그렇게 타박할 문제만은 아니다. 소수를 제외한 평범한 개인의 일상과 삶은 이미 어찌할 도리없이 숭악한 자본의 질서에 편입돼 죽지 않을정도로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정신의 빈곤. 

장 지글러는, 묻는다.
120억의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다는데, 왜 하루 10만명이, 5초에 한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가?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조사에 따르면, 2005년 현재 8억5000만명이 굶주림에 스러진다. 미국의 생산가능 곡물 잠재량만으로도 전세계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고, 프랑스의 곡물생산으로 유럽 전체가 먹고 살 수 있는 전세계적 식량과잉의 시대에도 우리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이들을 접해야 한다는 사실. 참으로 불합리하고 흉포한 세계질서다. 더구나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인 어린이들이 구조적 부조리에서 제일 먼저 당하게 되는 이 현실. 미디어에 나온 구호물품으로 당신의 죄의식을 씻지 말 것을 권한다. 실제 세계 곳곳에서 수백만의 빈민은 부자들의 쓰레기로 연명하고 있음을 장 지글러는, 폭로한다. 그걸, 몰랐냐고? 그렇다면, 그 쓰레기 생산에 일조하는 우리는, 괴물인가, 인간인가. '나면서부터 십자가에 못박히는 아이들'은, 우리의 쓰레기가 만들어낸 악몽이자, 비극이다. 우리가, 만들어놓은 비극.

'밥은 먹고 다니냐",
고 묻던 (송)강호(<살인의 추억>)의 말은 그저 허튼 농담이 아니다. 19세기 산업혁명으로 생산성의 급격한 향상으로 물질적인 결핍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지만, 굶주림으로 죽음에 이르는 생명들은 아직 여전하다. 아니 굶주림은 더 심화되고 있다. 장 지글러는, 말한다. "현재로서는 문제의 핵심이 사회구조에 있단다. 식량 자체는 충부하게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어." 빈곤은 세습되고 배고픔의 저주는 대물림된다는 사실. 끔찍하지 않은가. 국제기구, 구호단체의 손길에 모든 것을 내맡긴 채 팔짱을 끼고 있던 사이, 저주는 확산됐다. 어떤 대가도 한 아이의 생명에 비할 수는 없다는 말, 너무 이상적이고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산다. 밥은, 곧 생명.

테러, 전쟁, 그리고 다국적기업. 
나는 이 책을 통해, 테러와 전쟁, 그리고 다국적기업이 착취하는 기아와 빈곤의 구조를 좀더 명확하게 알게됐다. 그들은 기아를 무기로 삼아, 자신들의 정치적 혹은 경제적 욕망을 채우고 있었다. 밀로셰비치, 투라비, 테일러, 그리고 미국 등을 비롯, 네슬레의 흉악함. 그리고 북한 역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이야기. 또한 나날이 심해지는 사막화와 삼림파괴, 환경오염 등은 빈곤에 대처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을 점점 좁히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전세계적인 식량위기를 마주대하는 건 아닐까. 풍요의 종말.

그러면 희망은, 대안은? 
장 지글러는, 한 사람의 사례를 든다. Power Of One. 서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의 남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나라, 부르키나파소 출신의 토마스 상카라. 깨어있는 개혁가였던 상카라의 눈부신 조치는 아프리카 대륙의 귀감이 됐을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결국 그 역시 검은 커넥션에 의해 최후를 맞았다. 희망은 깨지고 비극은 반복되는 세계. 상카라의 방식은 맞았다. 자급자족과 식량공급의 확대의 충분조건에는 역시 사회정의의 확립이 있어야 한다. 기아와 빈곤에 눈감고 귀막고 입닫은 현실에서, 우리의 행동이 필요함을. 장 지글러는, 아들에게 세상을 뒤엎으라고 말한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못하게 된 살인적인 사회구조를. 아이에게 혁명할 것을 권하는 아버지? 그러나 장 지글러는 그것이 진정 아들을 위한 것임을 아는 것 같다.

야만적인 미디어들.
'지금-여기'의 대다수 주류 미디어들은 기아나 빈곤 문제에 그닥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눈을 감고 있는 것 같다. 빈곤 앞에 '악' 소리 제대로 내지 못한채 스러지는 빈자들의 아우성에 미디어들은 귀 기울이지 않는다. 빈곤은 너무도 익숙한 의제라서? 나서봐야 별 볼 일없다는 판단 때문에? 돈이 안돼서?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미디어의 해악은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기아와 빈곤을 부추기는 작자들과 다를 바도 없다. 부자 되는 법 설파를 멈추고, 빈곤한 자들의 아우성과 빈곤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해 주면 안될까. 하긴, 바보 같은 바람.

물론 그것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아.
나도 충분히 안다. 그러나, 학교도, 미디어도 이를 충분히 알려주지 않는건 아닐까. 빈곤이나 기아의 원인과 결과는 세부적이고 정확한 분석을 필요로 하는데, 왜 그들은 침묵할까. 미디어나 학교가 마땅히 해야 할 일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모호한 이상이나 현실과 괴리된 인간애나 정서만 가질 뿐, 그 구조적인 원인과 끔찍한 결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아닐까. 당신들의 잘난 지식과 지혜가 필요하다. 무엇이 빈곤을 심화시키고 세습시키는지, 대안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단 한사람이라도 그것을 제대로 고민하게끔 만들면 좋지 않겠나. 빈곤이 당장 없어지진 않겠지만, 한사람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다시 한번, 되새긴다.
'좌파 낭만의 스토리텔러' '결핍된 계급의식의 저격수', 켄 로치 감독의 일갈을.

   
  "희망은 없다. 정치가와 경제인은 대개 남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위해 일한다. 고용주는 고용인의 일자리를 뺏고, 헐값으로 대체 노동력을 산다. 이런 구조 안에서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 유일한 희망은 새로운 경제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소수의 탐욕에 봉사하는 경제가 아니라, 다수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그런 구조 말이다."
 
   
나는 여전히, 이 말을 믿는다. 아니 신봉한다. 그리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빈곤과 기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활로. 장 지글러 역시 이에 동조한다.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윤리를 벗어난 시장원리주의 경제(신자유주의),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이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어.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바로세우고, 자립적인 경제를 가꾸려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거야." 빙고. 이 책의 미덕은, 마음의 기아로부터 우선 탈피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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