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학 파스타 - 남자, 면으로 요리를 깨치다
권은중 지음 / 바다출판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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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2010년, 내가 가장 사랑한 드라마는 <파스타>였다. 아니, 넌 라임과 주원의 <시크릿 가든>에 열광했던 거 아녀? 하고 되물으면, 아니, 난 <파스타>의 손을 주저함 없이 들어준다. <시크릿 가든>, 좋았지만 <파스타>의 폭풍 매력을 넘어설 순 없다.

<파스타>가 끝나고서도, 후유증은 한동안 갔다.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릴 때마다, 나는 중간에 멈춰섰다, 아니 그것을 꿈꿨다. 붕셰커플의 짠한 키스가 있었던 건널목 키스 때문이었다. 건너편에서 나의 붕어(극중 서유경(즉 공효진)의 별명이었다)가 건너오고, 중간에 멈춰선 나는, 그녀의 입술을 훔친다. *^^*  

아, 부끄러버랑~ 그래, <파스타> 후유증!

허나, <파스타>의 주인공은 '파스타'가 아녔다. 파스타 배틀이 펼쳐지고, 파스타 블라블라 했지만, 파스타는 그저 거들 뿐. 파스타에 마음을 뺏기진 않았다. 사실, 그리 파스타가 맛있게 보이지도 않더라. 파스타를 뒤켠으로 밀어낸 로맨스와 주방의 정치가 돋보일 뿐. 

그래서, 그땐 몰랐다. 파스타가 향으로 승부하는 음식일줄이야. 그 다음이 맛이고, 온기란다. 그러니, 파스타에 반드시 허브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도 알 턱이 있나. 오래된 기억이지만, 파스타를 좋아했던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늘 까르보나라만 시켰고, 나는 한때 까르보나라에 중독됐다. 크림이 달달하기만 했던 그때.

알다시피, 파스타는 이탈리아의 라면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는 대신, 탱자가 회수를 건너면 귤이 되는 경우라고나 할까. 한국에선 파스타가 라면급이 아닌 엘레강스한 요리 비슷하게 세팅됐다. 약간의 허영과 사치가 가미된 것도 사실이고. '이탈리아'가 주는 에스프리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표준화된 조리과정과 재료를 덕분에 전 세계에 쉽게 퍼졌고, 그 때문에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이 파스타다.

안동의 양반 가문인 듯한데, 권씨 성을 지닌 저자(권은중)의 파스타는 좀 다르다. 표준화된 조리과정과 재료를 존중하지만, 존중이 고집에 머물지 않는다. 좀 더 창조적으로 나아간다. 말하자면, 권은중이라는 진짜배기 재료를 넣는다. 먹는다는 것에 대한, 그의 철학을 보자.    
 
"똑같은 요리라도 먹는 환경과 사람이 달라지면 당연히 그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 음식이 가진 고유한 특성도 현지에 맞게 적용할 때 빛을 발하는 법이다."(p.249)

알 덴테(al dente). 파스타 쫌 안다는 사람들이 거들먹거리는, 알 덴테. 즉, 너무 부드럽지도 않고 과다하게 조리되어 물컹거리지도 않아 약간의 저항력을 가지고 있어 씹는 촉감이 느껴지는 정도로 파스타의 최적 상태로 일컬어진다. 중간 정도로 설 익혀 꼬들꼬들하고, 치아에 씹히는 맛이 있는, 파스타의 헌법(?)이다. 꼬들꼬들한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할 만한 상태다. (커피도 꼭 그런 게 있다. 자신만의 미각이나 후각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와서 들이대는 거들먹들이 꼭 있다.)

그런데, 이 안동 남자는 알 덴테를 좋아하지 않는다. 퍼진 라면을 좋아하는 자신의 입맛따라 스파게티도 약간 퍼져야 제맛이라고, 파스타 헌법에 반기를 든다. 한 마디 더 붙인다. "퍼진 면발에 양념이 좀 더 잘 묻어난다."

오호~ 자신의 입맛을 알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면의 상태를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파악하고 있다. 파스타를 하면서 이 안동 남자는 좀 더 자신을 잘 알게 되고, 변했단다. 파스타가 삶에 틈입하면서 생긴 긍정적 변화. 파스타가 사람을 바꾼다.

파스타는 한 세계도 바꾼다. 생활 패턴뿐 아니라 사고방식도 변했다. 파스타는 거들뿐, 이 아니라, 파스타가 바꿨다! 이 남자, 주말에 골프를 끊은 대신 신선한 해산물을 사러 시장이나 마트로 향한단다. 유명 파스타집을 기웃거리지도 않는다. 거기보다 10배(자칭)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20여년 만에 청바지를 다시 입었다. 요리하는 사람은 위대한 창조자라는 경외심까지 갖게 됐다. 멋진 변화다. 

커피 덕분에 바뀐 나로선 이런 변화가 남의 일 같지 않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임상실험으로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먹는 것을 다룬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멋진 일인지도 안다. 저자의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재료를 고르고 요리를 만들고 사람들과 나눠 먹는 과정은 예술을 창작하고 발표하는 감흥과 다를 게 없었다."(p.7)

이탈리아 요리사들은 이렇게 말한단다. "복잡하면 이탈리아 요리가 아니다." 복잡하지 않은데서 창조가 나온다. 그래서, 이탈리아 요리의 가장 큰 특징은 창조성이다. 독학으로 다룬 파스타는 그래서 느끼하지도 않고, 거들먹거림이라곤 없다. 좀 안다고 젠체했다면, 이 책은 목에 걸렸겠으나 그런 게 없다. 안초비 대신 멸치젓을 쓰고, 간고등어로도 파스타를 만들 수 있음을 알려준다. 표준화됐다고 그대로 따라야 할 이유는 없는 법이다. 

자신만의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요리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다. 창조는 곧 자신만의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아니겠나. 그래서, 나는 지금-여기의 어떤 트렌드를 당최 이해할 수 없고, 불편하고 불만이다. 하나 같이 똑같은 먹을거리를 내놓는 이 땅의 거대 체인들 말이다. 표준화된 재료와 조리 방법, 하나같이 똑같은 사무적인 접대 태도로 그들은 어딜가나 비슷한 것만 내놓는다. 먹을거리뿐 아니라 인테리어까지 대동소이한 그곳에서 우리는 획일화된다. 거대 자본이 원하는 바다. 비약해서 그들은 파시즘이다. 질서정연함과 반듯반듯함으로 효율 자체가 목적인. 개성이나 창조성은 당최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생각하는 파스타 문화의 정수는 재료 자체의 고유성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오히려 다양한 재료를 써서 즉흥적으로 요리하는 창조성에서 우러나온다."(p.166)
 
그것은 조미료와 같다. 저자의 말마따나, 조미료는 모든 음식의 맛을 평등하게 만든다. 기계적인 평등. 사람들은 그것에 중독되고, 그것이 진짜 맛인양 착각한다. 생의 감각을 하나씩 잃고 있는 셈이다. 오호 통재라~

감칠맛 제대로 나는 된장찌개를 끓이기 위해선 조미료가 아닌 계절 나물과 해산물 등을 넣어야 하듯, 파스타도 그렇고 모든 음식이 그래야 한다. 커피 역시 마찬가지다. 재료 고유의 맛이 가장 중요하다. 먹을 것을 다루는 사람은 그래서 달라야 한다. 창조성의 근간에는 이런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 무엇보다 음식을 다루는 태도와 자세가 중요한 이유다. 

 "좀 더 건강한 식재료로 파스타의 원형질을 잘 살릴 방법은 없을까? 나는 이런 고민이야말로 요리하는 사람의 기본자세라고 생각한다."(p.119)

독학으로 했다지만, 저자의 파스타는, 비록 맛을 보진 못했지만, 그 핵심을 꿰뚫는 심미안과 요리를 대하는 태도 덕분에 맛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커피를 만드는 나는, 커피를 통해 그것을 깨달았으니까. 더구나 미슐랭 가이드의 별을 받고 싶은 사람도 아닌 그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요리를 나누는 소소한 즐거움을 안다. 

그래서, 나는 이 심정 또한 충분히 안다. 이해한다. 나 역시 그랬고, 그러하니까.  

"요리를 하다 보면 막연하게라도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꼭 요리해 줘야지, 라고. 오감을 최대한 동원하는 창조적 작업인 동시에 혼자 해내야 하는 고독감 때문인지 요리에 빠지다 보면 누군가에는 인정받고 싶은 바람이 자연스럽게 찾아온다."(p.142)

내가 커피를 하는 이유, 커피가 혁명을 추동했니, 커피가 소통과 관계의 매개가 됐니, 커피가 세계의 불공정함을 보여주니, 세계의 점들을 연결해주니,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니, 블라블라해도, 닥치고 커피 한 잔! 그 한 잔은 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 내려주고픈 것이다. 곧 내 마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꼭 내려주고픈 것이 내 커피다. 미안하지만, 그 커피를 위해 다른 사람들은 임상실험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나 할까.ㅋ  

아주 재밌고 흥미진진한 책은 아니지만,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을 알려주는 책이다. 맞아, 맞아 고개를 끄덕인 부분도 많았다. ‘서로 다른 세상이 만나 +α가 되는 세상을 만든다’ 는 의미의 알파라이징(alpharising). 커피 만드는 남자가 파스타 만나는 남자(책)을 만나 +α가 되는 되는 세상을 꿈꾼다는 의미에서, 이 책을 나는 '파스타 알파라이징'이라고 명명한다.

나는 기대한다. 저자가 꿈꾸는,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조용한, 물가 근처라서 창밖 멀리 바다가 강이 굽어보이는 동네에 있는 작은 파스타집. 저자가 이 파스타집을 찾아오면 달달한 커피 서비스를 약속한다는데, 어찌 가지 않을쏜가. 기왕이면 그 집에 갓 볶은 좋은 커피를 들고 찾아가서 (권은중) 주인장에게도 권해주리라. 파스타향과 커피향을 맡고 예쁜 여자들이 몰려들겠지? 아, 기분 좋다.

p.s.

1. 오타가 있다. 67페이지의 붇지(->붓지), 안팍(->안팎)이다. 2쇄에는 고치겠지?

2. 저자는 종종 '촌스럽다'는 표현을 쓰는데, 영 걸리고 좋지 않다.
저자가 적을 둔 신문사(한겨레)에서 이봉수 시민편집인(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이 한 번 지적한 적도 있었다. 촌스럽다는 표현은 대체로 '세련되지 못하고 어수룩하다'는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는데, 그것은 '촌'을 부정적인 곳으로 인식하는 도시내기들의 오만이자 거들먹거림이다.

실상 '촌'이란 말 자체는 그렇지 않은데도 '촌스럽다'는 말이 맥락에 따라 부정적 의미로 자주 쓰이는 것이다. 이봉수 시민편집인은 '촌스럽다'는 단어를 남발하는 것에 대해 언어의 공공성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한 탓이 아닐까?라고 지적했다. 신문기자인 저자는 그래서 더욱 주의했어야 했다. 2쇄를 찍을 땐, 다른 표현으로 고쳐졌으면 좋겠다.

(* 출판사에서 책을 받아서 쓴 리뷰이나, 
그것과는 무관하게 리뷰어가 자기 꼴리는 대로, 즉 소신대로 쓴 글임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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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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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마지막 날, 소셜벤처 경연대회, 커피 케이터링 지원을 나갔다. 
참고로, 소셜벤처는 이렇게 정의된다. 창의성과 혁신성을 바탕으로 하는 진취적 사회적기업 모델로 영업활동에서 발생한 수익으로 취약계층에게 사회서비스나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는 기업이다. 뭐, 말은 번지르르한데, 쉽게 말해 '돈벌이(혹은 돈놀이)에 영혼이 잠식되지 않은' 기업쯤 되겠다. (도둑과 도덕을 구분하지 못해,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 지칭한 이번 정권의 머리 빈(MB) 양반도 나름 심혈을 기울이는 일자리 자구책이 사회적기업과 소셜 벤처이기도 하다.)

3년 전부터, 매년 열리는 이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예전엔, 자신이 가진 재능과 기술, 의지로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의 모습으로 읽었었다. 물론 그들의 눈빛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패기와 함께 어떻게든 수상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커피를 건넸었다. 맛있게 마시라는 말 뒤에 생략했지만, 당신이 바꿀 세상을, 세상을 바꿀 당신을 지지한다는 내 마음의 말이 있었다. 내가 건네는 커피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자들에게 윤활유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 내 커피가 사회변혁 추동에 이바지했으면 좋겠다는 소원. 더구나 나는 커피가 혁명의 불쏘시개가 됐던 이야기에 혹한 자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오늘은 좀 다른 마음이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야만의 세상. 나는 어지간한 대사건(그건 아마도 침팬지의 혁명적 외침인 <혹성탈출:진화의 시작>과 같은)이 아니고서야, 이 야만은 꾸역꾸역 증식할 거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아프고 슬픈 지구를 위해 개인의 노력을 행하는 것.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고, 차를 덜 몰거나, 식습관을 바꾸며, 윤리적소비에 나서는 것. 좋다. 암, 좋은 일이다.

허나, 그런 것들은 그저 자기 만족이다. 야만 박멸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는 것 같다. 경제적으로 풍요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미친 빅딜이나 경제적 제국주의 국가들의 통렬한 자각과 대오각성에 의한 분배적 정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야만은 점점 더 뚱뚱해질 게다.

그러니까, 그들의 뚜벅이 걸음은 사소한 성공에 가깝다. 큰 실패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는 드문 경우. 희뿌연 안개 속에서 그나마 어설프게 비치는 반짝이. 그러면 그것은 절망인가? 아니. 사소한 성공은, 결국 내가 바뀌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세상을 바꾸기 보다는 야만의 세상이 강요해서 바뀌는 인간 본성을 놓치지 않기. 

오늘 내가 그들에게 건넨 커피는 그런 의미였다. 부디, 바뀌지 않기를. 야만이 당신을 덮쳐도 당신은 스스로를 지켜나갈 수 있기를. 최소한 괴물은 되지 않기를. 이미 많은 인간이 괴물과 좀비로 바뀐 도가니가 된 세상이니까. 내가 건넨 커피가 당신이 바뀌지 않을 수 있는데 작은 자극이라도 되길 바랐다. 

한편으로, 그것은 분노의 다른 표현이었다. 
나는 그들이 소셜 벤처를 꿈꾸고, 사회적기업을 지향하는 것이 지금의 야만에 분노하는 것이라고 봤다. 내가 바뀌지 않기 위해 야만에 대해 분노함으로써 그들은 사회적인 뭔가를 끄집어낸 것이다. 개인의 분노가 내면을 향하면 우울이 되지만, 사회성과 관련한 사고를 관장하는 전두엽은 분노가 밖으로 표출되도록 돕는다. 사회적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 왜 사회가 이 모양인가, 에서 우리는 본디 고민을 하도록 태어났다. 고민하다 보니, 답이 딱! 이리 살면 안 되겠다.

이 노친네, 스테판 에셀은 그래서 '밖으로' 분노할 것을 권한다. 분노하라고 대놓고 분탕질(?)을 한다. 분노할 거리를 내놓고는 야만에 진상짓(!) 좀 하라고 일갈한다. 지금 이대로 살아도 진짜 좋냐고 묻는다. 전체의 이익보다 특정인의 이익이 옹호되고, 부가 정당하게 분배되지 않고 금권을 지닌 누군가에게 편향되며, 국가 금권 외세에게 종속된 언론이 판을 치며, 인권을 겁박하는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 야만 혹은 도가니가 버젓이 똥폼 잡고 유세 부리는 세상에서 말이다.
    


여기 이 말을 보자.

"이른바 '불법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 삼는 사회, 언론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 결코 이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꼭 지금의 한국 사회를 말하는 것 같다. 93세의 레지스탕스 노투사의 이 말은, 프랑스 사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렇다면 프랑스 사회나 한국 사회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다는 말일까? 일정 부분은 그렇다. 여러 제반 여건을 비롯해 정치, 문화, 사회적인 상황이 다름에도, 전 지구적인 현상에서 비롯되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이른바 '세계화'라는 표현에 맞게끔, 전 지구의 연결망이 과거에 비해 확실히 촘촘해졌다. 거기에는 자본의 무한증식 포섭력(?)이 가장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이권을 향한 무한도전이 빚어낸 자본의 자기증식은 국가나 국경을 가리지 않았고, 어디든 돈 될만한 곳이라면 손을 뻗쳤다. 자본의 세계화는 세계의 많은 풍경을 획일화시키고 일찍이 없었던 일을 보여주고 있다.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사람들이 이토록 부추긴 적도 일찍이 없었다."(p.15)

세상은 어떻게든 상호연결돼 있다.
자본이 그것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어어~ 하다가 사람도 자본이 원하는 야만에 휩쓸리게 됐다. 덕분에 세상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내가 변하지 않으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 광활한 세계를 상대로 그렇게 해야 한다.

짧게는 30~40년, 더 길게는 산업혁명 이후 200년 이상을 참아왔다. 그런데, 이젠 참을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언제부터 우리가 다른 사람을 짓밟고 자연을 무시하고 살았나. 왜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정규, 비정규로 가르고, 친구를 사치로 여기게끔 만들었나. 청년들이 이렇게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아이들이 사육기계로 전락당하는데, 속수무책이어도 되나. 

세계의 상호연결성이 나쁜 방향으로만 작동하다보니, 그 폐해가 엄청나다. 노투사의 물음은 그래서 지금-여기에도 그대도 적용된다.
  
"잘 되어가는 사회란 무엇입니까? 모든 시민에게 생존의 방편이 보장되는 사회, 특정 개인의 이익보다 일반의 이익이 우선하는 사회, 금권에 휘둘리지 않고 부가 정의롭게 분배되는 사회입니다."(p.62)

이를 세 단어로 줄이면, 자유, 평등, 박애. 

야만이 세상을 삼키면서 함께 소멸되고 있는 단어였다. 그런 형편에서 우리의 분노는 안으로 향했고, 자존감을 잃은 개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스테판 에셀이 무관심을 최악의 태도로 꼽은 것은, 끊임없이 인정투쟁을 원하는 인간의 본성을 꿰뚫은 까닭이리라. 분노는 그래서 무관심의 반대말이다. 노장은 권한다. 자꾸 '삑살이'를 내면서 세계를 공황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화폐권력에 분노하라고. 아무렴, 지금 필요한 건, 그것!

"전에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쉽게 체념해버리던 일들을 이제 그냥 당하고 있지만 않고 이에 맞서 일어설 때가 온 것입니다. 특히 점점 더해만 가는 경제권력, 금융권력의 압제에 맞서 싸울 때가 온 것입니다."(p.64)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좋다.
내가 변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에서 나는 작은 숭고함을 봤다. 자기 나름의 분노의 동기를 갖고 그들은 하나둘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인정을 받고, 사회에 자연스레 스며들면 더욱 좋겠지만, 그 노력만으로도 나는 충분해 보였다. 스테판 에셀이 나치즘에 분노하였듯, 그들은 청년들이 실업의 고통에 시달리고, 돈 없다고 무시당하며, 장애가 있다고 일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투사였다. 스테판 에셀의 말("서양인들의 '생산 위주의 사고방식'은 세계를 위기로 이끌었으며, 그 위기로부터 탈출하려면 '항상 더 많이'라고 외치며 앞으로만 질주하는 태도와 과감히 결별해야 한다.")을 봤든 아니든, 그들은 야만과 주류의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분노할 줄 아는 투사였다.

나는, 투사들의 각성을 돕는 도우미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건넨 커피가 그들의 분노를 제대로 촉발하는 각성제가 되고, 나의 커피하우스는 제대로 된 분노를 깨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 그렇게, 나는 오늘 또 하나의 꿈을 꿨다. 9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가을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고, 분노도 익어가고 있었다. 노장, 스테판 에셀의 덕분이었다.

헌데, 책을 보면서 그의 분노에 공감하는 한편, 이성적 분노의 기원 또한 흥미진진했다.  
사실 '93세의 레지스탕스 노투사'라는 수식이 주는 후광이 너무 강한 것 같았다. 존경할만한 노장의 일갈은 분명 강력한 것이지만, 그런 식의 수식보다 더욱 놀랐던 것은, 집안 분위기였다. 프랑수와 트뤼포의 1961년작 <쥴 앤 짐(Jules And Jim)>이 관련된!  



트뤼포가 묘사한 그 놀라운 삼각관계는 바로 스테판 에셀의 부모의 이야기였다. 그가 세 살 때 어머니는 아버지의 절친과 사랑에 빠지고, 두 남자는 한 여자를 공유했다. 헌데, 이 놀라운 일은 영화 이전의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를 비도덕적인 일로 여기기 않았고, 세 사람은 세간의 윤리가 아닌 그들만의 윤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바라본 소년, 스테판 에셀이 있었다. 그 역시 남달랐다. 아니, 그다웠다. 무엇보다 그는 이런 관계에 흔들리기보다 자신만의 중심을 잡았다. 어머니 덕분이었다. 그는 충분히 자존감을 지닌 인격체로 자랄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 어머니의 동거남, 그리고 자신 가운데 어머니 엘렌의 사랑을 가장 많은 받은 사람은 자신이었다는 확신. 행복해지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행복해지려고 노력했던 사람. 어머니의 사랑과 행복이 그를 제대로 분노할 줄 아는 사람으로, 지금까지 그를 지지해왔던 것이다. 분노할 줄 아는 노장의 탄생이 놀랍고 즐거웠다. 

문득 궁금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또 다른 사랑이 나타난다면, 나는 어떡할 것인가. 스테판 에셀의 아버지, 프란츠 에셀과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글루미 선데이>의 선율이 뒤따른다.

한국판으로 별도 삽입된 스테판 에셀의 인터뷰가 없었다면, 《분노하라》의 재미는 분명 떨어졌을 것이다. '스테판 에셀 비긴즈'를 엿볼 수 없었을 테니까.


나는 이 말을 믿는다.

노장에 대한 존경이 없는 사회의 노장은 불행하고,
존경의 대상을 갖지 못한 젊은이들은 더 불행하다.

《분노하라》가 프랑스 출간 7개월 만에 200만부를 돌파한 것은, 노장에 대한 존경의 의미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모르긴 몰라도 존경의 대상이 있어서 마냥 불행하지만은 않으리라. 물론 진짜 필요한 것은 분노할 줄 아는 젊은이들이다.

프랑스 문필가, 앙드레 모루아는 나이를 먹는 기술에 대해, "뒤를 잇는 세대의 눈에 장애가 아니라 도움을 주는 존재로 비치게 하는 기술, 경쟁상대가 아니라 상담상대라고 생각하게 하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스테판 에셀은 도움을 주는 존재, 상담상대로 생각하게 하는 걸 보니, 제대로 나이가 든 사람으로 여겨진다.  
 

나도 나이듦이 그러했으면 좋겠다. '꼰대'가 아니될 순 없겠지만, 이를 가능한 한 늦추면서 '노장'이 될 수 있으면 빙고~! 커피로 제대로 된 분노를 추동할 수 있는 기쁨. 그것을 바란다. 내가 오늘 건넨 커피가 그들이 가진 분노의 또 다른 엔진으로 작동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있을라고. 그래서 (세상의 야만에) 분노하는 젊은이들이 세상의 야만에 굴복해, 세상에 맞춘다는 명목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내 커피는 할 일을 다했다. 중요한 건, 소셜 벤처 혹은 사회적기업을 대표하는 것보다 지키기로 마음 먹은 것을 지속적으로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또한 제대로 분노하는 길이다.

그런데 사실,
오늘 커피를 건네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지난해 노조를 만든 이화여대 미화노동 여사님께 커피를 건넨 일! 소셜 벤처 참여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묵묵히 그 뒤에서 미화 노동을 하고 계신 여사님께 커피 한 잔을 권했고, 쭈삣쭈삣 먹어도 되느냐고 수줍어 하시는 여사님께, 나는 호탕하게 그럼요~라고 답했다. 부디, 그 커피가 여사님의 하루를 잠시라도 빛나게 해줬던 순간이길. 커피 한 잔은 가끔 그렇게 마술을 부리기도 하니까. 마음이 필요할 때는 커피!    
 
"삶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남에게 베풀고 싶은 마음과 베푸는 기쁨을, 남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책임을 감수하는 것. 어떤 경우에도 남에게 베풀고 싶다는 마음, 이 마음을 북돋워야 합니다. 사람을 책임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성과 감성을 키워주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교육을 통해 계발해야 하며, 마음 교육을 위해서는 상상력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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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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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는 강용석이라는 동물이 있다. 그 동물, 딴에는 변호사 출신으로 한 나라의 국회의원이다(내 나라는 아녔음 하는 바람도 있음!). 작년에 학생들이 식사하는 자리에 낑겨서 모이를 주워먹다가 주둥이를 나불댔나보다. 아나운서를 지망하는 한 학생에게, "다 줄 생각해야 하는데 그래도 아나운서 할래?" 지랄입방정을 떤 것이다. 으응? 줘? 대체 뭘 줘?

(강)용석이는 구케으원을 알아서 그만두지 않았다. 하긴 그 지랄맞게 달콤한 그 자릴 왜 스스로 마다해? 떡하니 무심한 듯 시크하게 버텼다. 그래도 가시방석이었을텐데, 똥꼬 아프지 않았는지나 모르겠다. 


짜잔, 이런 와중에 8월31일 더 웃긴 쇼가 펼쳐졌다. 용석이 제명안을 놓고 국회에서 표 대결이 펼쳐졌다. 명색이 공인인데, 주둥이 잘못 놀린 죄로 당연 처단될 줄 알았다. 어라? 재석의원 259명 중, 용석이 자르자 111표, 용석이 그냥 두자 134표, 용석이? 난 몰러! 8표로, 용석이 안 잘렸다. 씨뱅 미친 거 아냐?


김형오 전 국회의장 나으리께서는 한 마디 더 지껄여주신다. "우리 용석이는 지성 교양 예의 갖춘 정의롭고 호감가는 반듯한 후배"란다. 참, 좋은 후배 두셨다, 그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수컷들의 소아병적인 연대다.

더 좆 같은 건, 한 신문에 의하면, 피해학생의 반응이었다. "두렵다"고 했다. "사회가, 정치가 이럴 줄 정말 몰랐다. 잘못은 우리가 아니라 그쪽(강 의원)이 했는데, 그런 잘못이 국회에서 용인된다면 그게 정의이고 공정사회인가? 곧 사회에 나가는 우리가 거꾸로 불이익 받게 되는 건 아닌가?"


아마, 그녀에겐 세상이 공포로 채색됐을 것이다. 충격과 공포. 그것을 내면화하도록 만드는 사회라니.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다. 벌건 여름에 펼쳐지는 공포잔혹극.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도직입적으로. 필요한 건, 혁명이다. 이 소식을 듣고 떠올린 건, 시저의 단호한 얼굴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서 기마경찰의 말을 뺏아 탄 시저가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그 장면. 나는 그 장면에서 껌뻑 죽었다. 그것은 김혜리 기자(씨네21)의 말처럼, '지성적 위엄'이었다. 시저가 침팬지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진정 우두머리였고, 나는 그의 손짓과 몸짓에 전율했다. 나는 그를 따르고 싶었다. 

여름 블록버스터, 그것도 할리우드의 것에서 혁명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그토록 짜릿한 순간이 올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물론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어떤 혁명이든 상품으로 팔 수 있는 공장이니, 그게 신기할 건 없다만, 이 영화가 주는 혁명적 쾌감의 일부는 시저의 표정과 몸짓에 빚지고 있다.


맞다. 나는 시저에 반했다. 이런 혁명적 우두머리의 등장이 그만큼 필요한 시대여서일지도 모르겠다. 치매 예방약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실험용 침팬지의 지능(과 지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졌고, 시저라는 혁명적 별종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대수로울 게 없다. 걸작이었던 1968년작 <혹성탈출>(그러고 보니, '68'이라는 제작연도가 의미심장해 뵌다!)의 프리퀄로 기획됐다는 배경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는 시저의 표정과 지성적 변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은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으로, <킹콩>에선 킹콩으로 퍼포먼스 캡처 연기를 선보인 앤디 서키스에 온전히 빚지고 있다. 다른 실제 배우들은 시저의 뛰어난 표정과 몸짓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에 불과하게 느껴질 정도다. 시저 찬양 도우미라고나 할까.




 

시저라고 처음엔 다른 침팬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윌 로드만(제임스 프랭코)의 애완동물이었다. 실험용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랄 수 있었던 환경이 여느 동물원 침팬지와는 다른 지점이었고, 지성의 진화를 인정받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는 점 정도. 덕분에 시저는 점점 자라면서 지성과 사유하는 힘을 기른다. 수화로 얘기하던 그가 어느 날, 엄마에 대해 묻고 태생을 고민하는 순간의 그 눈빛부터 나는 흔들렸다. 아, 혁명은 사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구나.



 

그도 허나 야생의 힘과 본능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로드만의 아버지이자 시저를 사랑해준 사람이 타인에게 봉변을 당하자, 그는 공격성을 드러내고, 결국 유인원 보호감호소(우리)에 갇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의실종된 상태로 줄곧 빨간 셔츠만 입고 다니던 시저가 혁명적 단초를 찾게 된 장소다. 앞서 자신은 다른 줄 알았다. 인간과 교감하고 교류할 줄 아는 그런 유인원으로.

그러나,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속한 계급에 대한 자각이었다고나 할까. 인간의 부속물로서 존재했던 자신에 대한 자각과 아울러, 무엇이 자신들의 적인지 명확히 깨달았다. 그는 또 한 번 깨어난다. 지성이 또 한 번 점프를 하면서 그는 현실을 깨닫는다. 생각을 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그의 눈빛, 나는 또 흔들렸다.

압권은 이후였다. 수화만 가능했던 시저가 우리에서 가해지는 핍박을 더 이상 참지 않고, "No~"라고 외친다. 그리고 일어선다. 언어와 직립보행을 획득하는 순간. 아, 자유를 만나는 순간이다. 노예임을 거부하는 순간이다.




 

혁명적 기운이 스크린을 감싼다. 나도 함께 외치고 싶었다. No. 어떤 영화나 현실에서도, 이렇게 강렬하고 인상적인 "No"를 만난 적이 없다. 지성과 자유가 쓰나미처럼 다가오는 그 혁명적 쾌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계급적 본능에 의해 그들의 봉기에 이입했다. 레알 혁명이 돋는 과정에 동참하고 싶었다.

시저와 그 투사들은 자유를 획득하고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것을 알려준다. "No"라고 말하고 일어서기. 그들은 전진한다. 우리를 뚫고 나가, 샌프란시스코의 활엽 가로수를 타고 이동하고 마침내 금문교에 도달한다. 약간 과장해서 이 금문교 장면을 만나지 못한다면, 당신의 2011년 여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 등 유인원들이 긴 팔을 늘어트리고 전진하는 풍경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금문교 교각을 긴 팔로 이동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진경은 아까도 언급했던, 시저가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외침이다. 이 광포하면서도 짜릿한 카리스마는 올해의 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  


이탈리아의 역사 교과서에는 시저가 지성, 설득력, 지구력, 자제력, 지속적인 의지 등 리더의 다섯가지 덕목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시저라는 이름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무엇보다 그 표정을 나는 잊지 못하겠다. 미세하면서도 격정적으로 변화하는 감정의 결. 이토록 풍부한 감정적 표현이 가능하게 한 기술에 대한 탄성도 탄성이거니와, 앤디 서키스의 디지털 연기에 아카데미건 어디건, 충분히 보상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강용석 병'을 겪은 2011년의 한국이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우리에 갇혀,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지금이다. 청년이고 장노년이고 없다. 청년들은 청년대로, 장노년들은 장노년대로 절망을 품고 있다. 아이들이라고 다른가. 먹는 것 갖고 장난치는 어른들 때문에 골치 아프다.

우두머리 다운 우두머리 없이 오합지졸들만 창궐하는 시대. 나는 시저를 우리의 우두머리로 추천한다. 지구탈출을 권하는 바다. 혁명의 시작은 시저를 옹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터다. 나는 시저를 따르겠다. 인간보다는 시저다. 일단 영화부터 보고 더 이야기하자.



 

아 참, 뭣보다 시저처럼 제대로 분노(분개)할 줄 알아야 하겠다. 93세의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이 말한 것처럼.

"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 -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 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분노하라》, p.26) 


용석이나 형오, 그 모습이 바로 우리들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한편, 그런 동물들에게 눌리지 말고, 두려움 느끼지 말고,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살아있다면 시저처럼, "No"라고 외치고, 직립보행을 해야 한다. 노예 아닌 주인의, 핍박이 아닌 자유를 찾는 길이다. 침팬지보다 못한 용석·형오 개새끼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레알 혁명 돋아야 할 사소하고 소소한 이유다. 그 동물들이 우리에게 도덕적 수치심을 안겨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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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이야기 - April Stor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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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짓.
4월이 간다. 봄 같지 않은 봄이다. 맞다. 오늘도 천둥번개를 동반한 억수 같은 봄비가 주룩주룩. 헌데, 봄은 모름지기 변덕대마왕.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 아이의 몸짓 같아도, 봄이니까. 그래, 봄짓이다. 봄짓, 4월.

벚꽃.
벚꽃이 거진 떨어졌다. 이번 비에 후두둑 끝장을 냈다. 봄비, 벚꽃 종결자.  벚꽃은 피는 순간부터 '벚꽃비'를 잉태한다. 나는, 벚꽃의 몸짓으로 4월을 읽는다. 매일, 벚꽃의 상태를 보면서 하루를 읽는다. 벚꽃은 주목 받는 시기가 무척 짧다. 그럼에도 벚꽃은 충분히 존재감을 발휘한다. 벚꽃 축제. 전국 각지에서 벚꽃은 축제라는 이름으로 소비된다. 그것으로 끝? 벚꽃은 비가 되면서, 어쩌면 슬프다. 봄꽃, 벚꽃.



 

4월 이야기.
그래. 4월이니까. 내 4월에 빠져선 안 될, 연례행사. 마지막 날에서야 틀었다. 역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벚꽃비가 내렸다. 마츠 다카코는 여전히 대학 신입생이다. 좋아하는 선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대학1학년의 여학생.

그 서툶이, 어리바리함이 더욱 사랑스러웠던 영화. 이와이 슌지 감독. 이 미친 감성의 소유자. 마츠 다카코. 더 없이 그 감성에 어울리는 여자. <4월 이야기>는 훌쩍 지나가는 4월의 봄날처럼 러닝타임이 짧다. 어떤 사랑이 그러하듯.

봄날, 사랑.




 

 

시작.
화려한 벚꽃 사잇길로 이사차량이 들어서는 것으로 <4월 이야기>는 시작한다. 우즈키(마츠 다카코)의 도쿄 입성이다. 춥디 추운 훗카이도에 살던 그녀로선 이 봄, 이 벚꽃이 그리 좋을 수 없다. 좋아하는, 아니 고등학교 시절부터 짝사랑했던 야마자키 선배가 있는 도시니, 그가 있는 서점까지 사랑스럽다. 봄빛, 반짝.




미소.
저 미소를 보라. 4월의 여신이 짓는 저 미소. 딴 건 다 필요없다. 이런 미소를 날리는 여자만 옆에 있다면. 세상은 저 미소 하나로도 충분하다. 존재의 이유? 그 따위, 저 미소 앞에서 삭제! 고로, <4월 이야기>를 보고 나면, 세상엔 딱 두 여자로 나뉜다. 저 4월의 미소를 짓는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 눈에 콩깍지가 씌인 놈에겐 그녀의 어리바리도 서툶의 미학처럼 느껴질 뿐이다. 때론 아무 것도 아닌 일이 기억에 깊이 각인될 수 있는 것처럼. 나는 4월이면, 저 미소 하나면 충분하다. 4월을 버틸 수 있는 이유. 봄눈, 미소.





흠칫.
놀라면서 전율이 일었다. 저렇게 서늘한 아우라. 저 사진을 처음 보는 순간, 한마디로 '돋았다'. 저 4월의 미소 소유자가 저런 아우라를 뿜어낼 수 있다니. <고백>. 내용이나 그녀의 역할을 알고는 있었지만, 저 사진 하나에 나는 완전 압도당했다. 4월에 볼 엄두, 나지 않았다. <4월 이야기>에 나는 복층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손. 봄밤, 오싹.



기사.
풋풋한 여대상에서 창백한 복수의 화신까지. 기사의 제목이다. 국내 개봉일자로 따지면, 11년, 제작년도로 따져도 그 정도는 될 터. 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발목 치마를 펄럭이며 하얀 자전거를 타고 캠퍼스를 누비던 소녀가 표정이 없는 말투로 슬픔과 분노를 표출하면서 복수를 하는 엄마로 바뀌었다. 대변신. 기사 표현대로 잔인하다. 추억을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살짝 그런 점도 있었다. 아직 <고백>을 보지 않은 건. 지금은 어쨌든 4월이니까. 봄날, 추억.

마츠상.

과거, 그녀를 소개한 적도 있다.( ☞ 당신은, 내 4월의 여신...) 사실, 4월에만 거의 떠올리다시피 한 그녀였는데, 기사를 보고 더 좋아졌다. 야망 없음에 대한 '고백' 때문이었달까. "배우라면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게 옳지만, 나는 변신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고백>의 내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면, 그건 감독이 끌어낸 것이다. 나는 온힘을 다해 노력했을 뿐이다. 더 나은 경지에 도달하려는 야망이 없는 게 내 문제라면 문제다. (웃음)." 야망 없음을 토로하는 이 무서운 배우. 참고로, <고백>은 지난 2월, 일본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4개 부문을 수상했다. 봄신, 여신.

마츠상2.

하나 더 있다. 더 좋아하게 된 계기. 그 시상식에서 사회를 보고 있던 그녀, 눈물을 흘리며 "살아 있다는 건 참 좋은 것 같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녀는 삶이라는 선물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배우로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에 대해 각인하고 있는, 보기 드문 배우다. 일본 동북부 지진에 대해 그녀가 남긴 말. "지금은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갈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고, 내가 필요한 것들을 진심을 다해 판단하고 선택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아무렴, 아무나 여신이 되는 건 아니다. 마츠상, 당신은 여전히 제 여신입니다.^.^ 봄밤, '4월의 고백'. 


 

 

봄비.

그래. 방사능이니, 최악의 황사니, 봄비 앞을 가로막는 이들은 날려버려~ 그냥, 봄비. 첫사랑을 만나 그에게 빌린 빨간 우산을 들고 쏟아지는 빗속으로 나가면서 환하게 미소 짓던 우즈키. 얼굴 가득 미소. 봄비는 그런 것이야. 봄비가 품고 있는 낭만을 쏟아지게 하는 것. 4월의 봄비 오는 날,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빨간 우산이 되고 싶다. 봄비, 낭만.


 

4월.  

오늘도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그 어느해 4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우즈키의 흔적을 좇아 벚꽃비 혹은 벚꽃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도쿄를 누비리라. 빨간 우산도 하나 챙기고, 자전거도 기왕이면 빌려서. 도란도란 <4월 이야기>를 나누면서. 4월이 지나는 봄, 나는 그런 4월을 다시 기다린다. 봄달, 당신.
 
오늘이 지나면,
나는 이제 <고백>을 보러갈 수 있다. 마츠상, 만나러 갑니다~
  

 


P.S... 벚꽃, 고백이 함께 맞물린 오늘의 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
송편(김석훈) 이 오늘, 마침내 정원(김현주)에게 고백을 했다. 담백한 고백. "내 여자 합시다." 내가 왜 좋았는지 몰라.ㅋ 정원의 눈이 초롱초롱. 그 돋는 고백을, 정말이지, 그만의 스타일로 해댄다. 그런 닭살 고백을 그렇게 담백하게 할 수 있다니. 중요한 건, 벚꽃 아래에서였다. 나는 벚꽃이 그 고백을 부추겼다고, 벚꽃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운다.

벚꽃 고백.

"누군가한테 내 마음을 주고, 슬픔을 주고, 내 시간을 준다는 게 나한테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서 오래 망설였어요... 나보다 내 눈이 먼저 당신을 보고 있고, 나보다 내 마음이 먼저 당신을 담고 있어요. 좀 더 버텨보려 했는데 더이상은 무리에요. 늘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방. "내 여자 합시다. 친구 때려치우고 남자, 여자로 만나 봅시다, 우리." 하악하악. 내가 송편이 된 줄 알았다. 왜 그리 좋아서 바둥댔는지. 흥, 벚꽃 때문이다. 나도 벚꽃 아래서 고백하리라! 송편과 정원, 건투를 빈다. 진심이다. ^_^

근데, 정원이 나는 좋아 죽겠다. 이런 캐릭터를 좋아한 적은 처음이다. 꺄아아.

내일이 다시 기다려진다. <반짝반짝 빛나는>, 짱이다. 4월의 고백, 반짝반짝 빛나는.
 
엉뚱하게도, 김수영 시인의 [봄밤]이 생각나는구나. 그래, 4월의 도쿄, 벚꽃눈이 내리는 봄밤, 나는 [봄밤]을 읊조리며 고백한다. 그 고백의 당사자, 당신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그날엔 이 노래를 연주해도 좋겠지.
'봄날, 벚꽃, 그리고 너'(에피톤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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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먹는 게 삼대를 간다 - SBS 스페셜 생명의 선택
신동화.이은정 지음 / 민음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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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스페셜 <생명의 선택> 3부작을 다 보진 못했다. 한 편만 봤는데, 그 한 편이 인상 깊었다. 특히 미 버지니아 주 폴리페이스 농장 조엘 농부의 가치관과 인식이 참 좋았다. 그랬던 차, 이 다큐가 책으로 묶였다. 이 어찌 반갑지 아니할쏜가! 책을 만났다. <<당신이 먹는 게 삼대를 간다>> . 이어 신동화 PD의 강연에도 참석했다. 푸근한 인상의 그는, 조곤조곤 다정하게 먹을거리의 중요성에 대해 말을 건넸다.  

공정무역 커피를 제공하고, 입과 몸에 좋고 즐거운 먹을거리 다루고자 노력하는 카페를 운영하는 나로선, 반가운 자리다. 책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가장 몰입했던 분야는 3부였다. '페어푸드, 도시에 실현되다'. 페어 트레이드(공정무역)와 함께 시작된 나의 커피(푸드)노동자의 삶과 꿈은, 커피(푸드) 민주주의였다. 1등만 좋은 것 먹는 더러운 세상, 먹을거리도 계급간 차등을 받아야 하는 현실이 나는 불편하고 짜증이 났다.

나는 그 새벽을 기억한다. 새벽 첫 지하철 무렵에서 만났던, 피곤함과 찌들림이 가득한 얼굴로 고단한 몸을 누이고 있던 노동자들. 아마도 그들은 대부분 블루칼라였으리라. 청소노동자나 화이트칼라보다 일찍 세상을 깨운 사람들. 그 고단함에, 나는 커피를 건네고 싶다는 생각했다. 고단함에서 살짝 미소를 띄우고 싶었다. 내 커피가 그들에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아주 자그마한 힘이라도 줬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커피로 시작한 나의 여정은 먹을거리에도 관심을 쏟으면서, 푸드 저스티스(Food Justice), 음식 정의에도 조금씩 시선을 주고 있다. 당장 도시를 떠나진 못하지만, 도시에서 행할 수 있는 농업적 실천을 해보고 싶다. 즉, 도시 농부로서 첫 발을 올해에는 내딛고 싶은 바람이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용기를 주고, 내 바람을 부추긴다. 내 몸을 움직여 다른 생물과 함께 호흡하는 일.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신PD가 강연에서 언급했다. 사람 아닌 동식물에도 '의식'이 있다고. 의식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릴 것인지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모든 것은 모든 것의 방식이 있고, 사람의 잣대만으로 다른 생물을, 자연을 재단해선 안 된다. 모든 생물에는 (하물며 무생물에도) 영혼이 있으며, 그 영혼의 교감이 먹는 행위를 통해 나타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생물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음식 비슷한 것, 고기 비슷한 것, 채소 비슷한 것 따위의 화학물질이나 첨가물 덩어리, 가공 식품은 생명이 없다. 지금의 도시 문명에서 늘 생명만 있는 것만 먹을 순 없다. 나쁜 것도 불가피할 때가 많다. 허나 가급적 피할 수 있다면, 산업화된 먹을거리 시스템의 자장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커피는 농약을 많이 치는 농작물이다. 플랜테이션 농업에서 대규모 수확을 해서 이윤을 많이 남기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물론 그것도 커피 노동자들의 의지가 아닌 농장을 소유하거나 중간 소비처인 거대 커피 체인들의 욕망에 의한 것이다.) 나는 그것에 발 담그고 싶질 않아서, 자연농(동티모르 사메 사람들의 커피) 유기농(멕시코 치아파스 사람들, 에티오피아 시다모 사람들의 커피) 공정무역 커피를 다루고 있다. 

무언가를 대표하기보다 지키기로 마음 먹은 것을 지킬 수 있길, 음식 정의와 함께 나의 꿈이 자라나길. 좋은 다큐, 좋은 책 내 준 신동화 PD가 고맙다. 나도 그처럼 세상에 쓸모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커피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책을 읽은, 두서 없는 거친 소감을 긁적이자면,  

#1. 우리집 셰프인 어머니는, 옥수수 앞에 사족을 못 쓰는 날 보고, 말씀하셨도다. “너, 전생에 옥수수 농부였냐?” 어머니가 농담처럼 던진 그 단어, 농부. 거지발싸개 도시적 가치에 길들여진 내가, 농부라는 말을 들어도 되는 것일까. 비록 전생이라지만! 행여나 전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정말 농부였으면 좋겠단 생각을 한다. 대통령 따윈 비교도 되지 않는, 더 큰 세상과 우주를 다루는 진짜 생명의 존재, 농부.
 
그런데, 다시 돌아가서 옥수수. 참 좋아하는데, 올해 옥수수 시즌이 오면 약간은 옥수수를 달리 보게 될 것 같다. 《당신이 먹는 게 삼대를 간다》에 언급된 옥수수 때문이다. 잠깐, 그 언급을 엿보자.

옥수수, 지금 거대해진 농산업 체제의 영웅이란다. 능력이 출중하기 때문이라는데, 얼핏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것을 확인 사살했다. 옥수수만큼 많은 유기물과 칼로리를 생산할 수 있는 식물은 없단다. 보관과 비축이 용이해 많이 키우면 키울수록 더 많은 돈이 굴러들어오는 지점도 있다.

따라서 산업 농업은 옥수수에 집중했다. 다양한 품종의 옥수수를 다뤘다는 게 아니다.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단일 품종을 재배했다. 미국 아이오와 주에는 콩나물처럼 빽빽하게 자라는 옥수수를 볼 수 있다. 조밀하게 심어서 엄청난 수확을 한단다.

그렇다면 땅은? 이 오밀조밀 빡빡한 옥수수를 견뎌낼 땅은 없다. 산업 농업은 또 다른 돌파구를 만들어냈다. 비료. 많은 양의 화학 비료를 투입, 옥수수의 영양분 부족을 해결했다. 단종 재배를 통해 무조건 많은 양의 옥수수를 거둬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좋지 않다. 위대한 식량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참조)가 농업생물다양성을 주창했듯, 단종 재배는 생물학적 다양성을 줄인다. 이는 해충과 질병을 확대시키고 잡초에도 취약하게 만든다. 이는 곧 농약을 부른다. 악순환의 시작이다. 제초제, 농약 등이 뿌려진 생물이 먹을거리가 돼서 인간의 몸속으로 투입된다.

옥수수는 더불어 ‘석유 먹는 하마로 변’했다. 옥수수용 비료를 만들기 위해 열, 압력, 수소를 발생시켜야 하는데, 이는 화석 연료를 필요로 한다. 책은 1칼로리의 음식을 생산하는데 1칼로리 이상의 화학 연료 에너지를 써야한다고 말한다. 기가 찰 노릇이다.

그것뿐이랴. 옥수수는 바이오 에너지를 만드는 데도 사용된다. 대체 에너지 만든답시고, 되레 석유 에너지를 쏟아 붓는 모순. 옥수수는 가공식품에 들어가는 구연산, 포도당, 과당, 엿당 등의 성분들을 만드는데도 쓰일뿐더러, 청량음료, 맥주, 케첩, 사탕, 핫도그 등등 패스트푸드나 편의점에 진열된 상품 곳곳에 암약(?)해 있다.

들으면 놀랄만한 것도 있는데, 치약, 일회용 기저귀, 쓰레기봉투, 표백제, 성냥, 배터리, 식물성 왁스, 살충제, 잡지 광택제, 건물 벽판, 이음재, 유리 섬유, 접착제 등에 옥수수는 투입된다. 책은 “인간도 옥수수”라고 말하면서, 옥수수는 ‘거대 농산업 체제의 슈퍼스타’라고 덧붙여준다. 그야말로 지금 옥수수는, 세상을 지배하는 작물이다. 전생이었기에 다행이지, 지금 옥수수를 재배한다면 나는 더 이상 농부가 아닐 것이다. 그저 옥수수 공장의 하수인에 불과했을 것이다.

#2. 가끔, 패스트푸드점에서 아이에게 먹을 것을 먹이는 어른을 보면 섬뜩하다. 아마 선의(아이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은, 혹은 배고픈 아이의 배를 채워주겠다는)에 의한 것이겠지만, 결과적으론 그건 아이들의 건강, 몸에 대한 학대이며 아이들에게 자연과 세상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패스트푸드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감각이 둔화된다. 소금과 지방이 많은 패스트푸드의 맛은 사람의 섬세한 미각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대부분 모르고 그런다지만, 아이가 크면서 몸과 마음에 문제가 생기면, 부모를 원망할 텐데… 아니, 어쩌면 소송을 거는 일도 생기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혼자 염려하는, 오지라퍼(공연히 오지랖이 넓은 사람)가 된다. 아이에게 음식도 아닌 음식 비슷한 것을 먹이는 어른. 화학 물질과 첨가물이 범벅된 공장형 음식 시스템에 의해 공산품처럼 뽑아져 나온 음식 비슷한 것으로 아이와 후손의 삶에 악영향을 미치다니, 불끈. 괜히 아이까지 불쌍해 뵈는, 나는 지질한 오지라퍼. 아이를 진짜 생각한다면, 더 낫고 좋은 음식을 고민할 지어다. 

책은 말한다. “특히 아이들의 미각 교육에 힘을 쏟고 있다. 어려서부터 좋은 음식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아이들이 신선한 채소와 과일의 맛을 접할 수 있게 늘 시식회를 연다. 입맛이야말로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p.197)

영어? 수학? 조기 교육 말짱 필요 없는 것 갖고 힘 빼고 돈 처바르지 말고, 진짜 조기 교육을 해라. 미각 교육. 아이가 행복하길 바랐던, 처음을 기억하라. 지금은 나쁜 음식, 나쁜 먹을거리 천국이다. 정크 푸드니 패스트푸드니, 나쁜 음식이 창궐한다. 헌데, 이건 과거에는 떠올리지도, 생각하지도 못한 것이다. 음식을 향해 누가 ‘나쁘다’고 말한단 말인가. 생명과 영양의 원천인 숭고한 먹을거리를 향해 감히!

인간을 지탱시켜주는 고마운 존재이자 늘 좋은 것일 수밖에 없던 음식을 변질시킨 건 인간이었고, 인간은 먹을거리에 의해 위협을 받는 처지에 취했다. 부메랑 효과. 음식도 아닌 음식 비슷한 것들이 사람을, 세계를 좀먹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마이클 폴란의 말을 인용하자. “음식 비슷한 물질 대신 음식을 먹어라.”
 




“가공식품은 식품의 다양성, 음식의 맛과 향미를 몰아냈다. 가공식품의 원재료인 옥수수와 대두가 엄청난 물량 공세로 밀어닥치면서 다른 식물들은 식탁에서 쫓겨났다. 가공식품은 가공 단계에서 본래 원료에 포함된 영양소가 없어지거나 감소된다. 또 다량의 식품 첨가물이 들어간다. 대부분 짜고 매콤하고 달콤한 맛이 난다.”(p.221)

#3. 《당신이 먹는 게 삼대를 간다》는 동물 공장 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우려도 함께 전한다. 지금 대학살 당하고 있는 소, 돼지, 닭 등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밖에 없다. 인간은 참으로 가혹한 존재다. 가령, 수평아리의 계생(鷄生)을 보자. 그는 달걀은 생산하지 못하고 사료만 축낸다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분쇄기로 향한다. 다시 강조하자. 태.어.나.자.마.자. 어떤 가능성도 차단당한 채 죽어가는 존재. 좀 더 근본적인 이유도 간단하다. 돈을 버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미친 짓이다.

협소하게 건강만 놓고 따져도, 책은 이것은 좋지 않다고 말한다. “음식 속의 스트레스가 먹는 사람의 몸에도 전달이 된다”는 주장을 알려준다. 

책의 물음은 그래서 독자의 사유를 자극한다. 당연한 것임에도, 당연하게 떠올리지 못했던 것들.

“왜 우리는 사육과 도축 과정에서 불필요한 고통에 시달리는 동물들의 불행한 처지를 보고도 눈감는가?
왜 수천 년 동안 농약과 제초제 없이 먹을거리를 길러 왔는데 이제는 아닌가?
왜 우리는 가족이 살아갈 안전하고 건강한 환경을 기업에 헐값으로 내주는가?
왜 사람이 먹는 생명을 기르는 일을 단지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자들에게 맡기는가?
왜 우리는 소중한 우리의 어린것들을 살리는 생명의 밥상을 정체불명의 화학 밥상으로 바꾸려 하는가?”(pp.126~127)

다른 생물을 먹어야만 버티고 견딜 수 있는 인간은 참 후안무치에, 안하무인하고 몰염치한 존재가 됐다. 다른 생명에 대한, 자연에 대한 예의를 잊은 것이다. 다시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인데도, 사람들의 시야는 참으로 좁아졌다. 소를 먹든, 돼지를 먹든,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구제역에 걸렸다고 무조건 학살을 시켜야한다는 주장 이전에, ‘돼지를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만들까’와 같은 생각을 먼저 해야 했었다. 고작 한다는 게, ‘어떻게 하면 돼지를 빠르게, 더 살이 많게, 더 크게, 더 싸게 키울 수 있을까’만 생각하니, 자본이 인간을 삼킨 것, 맞다.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방목 농장인 폴리페이스(polyface)의 ‘풀을 농사하는 사람’ 조엘 샐러틴의 말도 귀담을 필요가 있다. “미래에는 닭의 부리를 아예 없애는 유전자를 사용하거나 돼지의 스트레스 유전자를 제거한 뒤 더 좁은 우리에 돼지를 가둬 두는 일도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식물과 동물을 불경스럽게 보는 문화는 사람도 마음대로 조정하려 듭니다. 우리가 닭을 존중하는 것이 우리가 사람들의 사람다움을 인정하는 철학적, 윤리적, 도덕적 근간이 된다고 봅니다.”(p.159)

#4. 자, 우리의 지금 밥상을 보자. “출처를 알 수 없는 원재료에 식품 첨가물이 뒤엉킨 가공식품, 안전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유전자 조작 식품(GMO), 공장과 같은 대단위 시설에서 길러지는 가축과 그로부터 나온 육류, 농약과 화학 비료로 범벅이 된 과일과 채소 등이 우리 밥상을 점령했다. 그마저도 귀찮을 때는 전자레인지에 데운 인스턴트 음식으로 그저 한 끼를 때우는 데 그친다.”(pp.8~9)

고로 밥상은, 이미 시장이 됐다. 자고로 밥상은 하나의 세계요, 우주였다. 칼로리 이상의 정보와 언어가 있는. 산업 시스템은 그것을 지웠다. 이윤을 최대화하려는 목적에 생명과 음식은 외면했다. 저자이자 다큐PD인 신동화 PD는, 우리는 음식을 완성체가 아닌 원료로 보는 편견에 물들었다고 지적했다. 완전 동의한다.

“음식은 단지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과 같은 영양소의 기계적인 조합이 아니라 그밖에 아직 과학이 밝혀내지 못한 수많은 요소가 역동적인 상호 작용을 통해 협업하는 진화의 완성품으로 봐야 마땅하다.”(p.230)

음식을,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시 예전의 것으로 되돌려야 한다. 너무 멀리 와서 잊어버린 것을, 다시 머리와 몸에서 끄집어내야 한다. 나는 책에서도 언급된, 무척이나 유명한 이 문구를 믿는 편이다. 당신이 먹는 게 당신을 만든다.(You are what you eat.) 먹을거리가 발휘하는 힘에 대한 믿음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그것을 옳다고만 주장하는 건 아니다.

먹을거리와 음식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으면 좋겠다. 도시는 물론 농촌까지 산업화된 먹을거리 시스템이 장악한 지금, 그 공고한 시스템을 깨기 위한 시도에 나는 관심을 갖고 있다. 화학 물질에 대한 둔감증을 야기하고, 유전자 조작에 기를 쓰는 자본의 폭주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자본의 침이 고인 먹을거리가 화학물질과 GMO에 우리는 농락당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음식은 ‘생명의 양분을 공급해 주는 성찬(聖餐)’이 아니다. 음식은 제품으로 자리를 굳히면서 우리의 몸 자체도 시장이 됐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몸은 이미 자본의 식민지다.”(p.154)

#5. 책에서 가장 인상 깊고, 관심 있게 펼쳐본 테마가 ‘페어푸드’였다. 공정무역 커피를 다루는 나는, 생산자도 생산자지만,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계층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하고 있다. 억지로 말을 붙이자면, 커피 민주주의. 또한 어떤 커피를 마시는가가 정치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 거기에는 사회와 경제 구조, 정치의 방향을 결정하는 지점이 있다.

의무(무상)급식 논쟁도 넓게 보면 포함이 될 텐데, 음식을 놓고서도 벌어지는 계급 간의 마찰계수는 꽤나 높다. 무슨 말인고 하니, 소득불균형에 의해 나타난 먹을거리의 질적 차이가 결국 건강의 불균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경제적 하위 계층은 값싸고 질 낮은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는, 국가의 개념 상실 혹은 정신줄 놓기가 계속 이어지는 실정이다.

“한 사회의 시스템과 문화가 약해지고 무너질 때는 가장 약한 곳부터 영향을 받는다. 음식의 생산과 공급 시스템이 변하면서 생기는 부작용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부터 공격한다.”(p.190)

내가 눈 번쩍 뜨인 장면은 이것이다. 저소득층이 많이 거주하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웨스트 오클랜드 지역에서 펼쳐진 굿거리 장단! 몇몇 청년들이 한적한 주택가 한쪽 공터 앞에 사무실 탁자 두 개를 잇대어 만든 채소 가판대를 연다. 이 가판대에선 신선한 유기농 제철 채소와 과일을 공급한다. 이들은 ‘피플즈 그로서리(people's grocery)’의 멤버들이다.

인근의 놀고 있는 땅을 빌려 도시 농업을 시작한 이들은, 좋은 음식은 단순한 먹을거리와 영양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정의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피플즈 그로서리의 설립자인 브라함 아마디는 소외받는 사람들의 식생활이 새로운 사회 운동의 의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야말로, 푸드 저스티스, 음식 정의!

“음식은 건강으로 이어지고 건강은 행복한 삶과 직결된다. 이것이 바로 음식이 인간의 기본적인 인권이자 정의의 문제가 되는 이유라고 아마디는 역설했다. "음식 정의 운동은 인권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식품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에 관한 운동이지요. 생활 방식과 문화는 환경과 인간 모두의 존엄성을 지켜 주는 땅의 이용, 음식을 생산하는 방식과 직결됩니다."”(pp.197~198)

음식을 통해 우리는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나도 그런 운동에 동참하고 싶다. 내가 만드는 커피가, 내가 손 댄 음식이 세상을 아주 조금이라도 덜 슬프게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

“음식은 사람들의 건강만이 아니라 세상을 치유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운동은 음식을 맛있고, 순수하게 만드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우리가 구매하는 음식과 연결된 정의의 시스템을 되살리는 일이다. 먹을거리를 둘러싼 온갖 문제를 밥상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문제로 인식하는 일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소득과 관계없이 건강한 음식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찾아 줄 수 있다. 음식은 인권이다. 현재의 음식 시스템은 저소득층이 살아갈 수 있게 건강한 음식을 공급하는 데 실패했다.”(p.198)

아마 공정무역 커피는 음식 정의를 완성하는 두 번째 기둥에 해당할 터인데, 농민에게 정당한 몫을 찾아주는 것에서 시작되는. 아울러 내 봄은 도시 텃밭, 베란다 텃밭과도 같은 생물과 함께 호흡하는 것에도 중점을 두고 싶다. 나의 카페, 우리의 카페 Soul 36.6 앞에 나는 녹색 생물이 자랄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마련해서, 그 생물과 이야기를 나누고 세계를 향해 페달을 함께 밟고 싶다.

책을 통해 거듭 다짐한다. 함부로 내 입과 몸을 학대하지 않도록 노력하자! 마음껏 먹고 마시자가 아니라, 삼대가 함께 먹고 있다, 라는 생각도 아주 가끔은 할 수 있기를. 생명을 위한 선택이다. 푸드 저스티스를 향한 작은 걸음이고. 그거 아니? 먹으면, 시를 짓고, 노래가 나오는 음식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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