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은 2021년 6월 29일 대선출마선언을 했다. 그의 출마선언문엔 (문재인 정권이) "우리 헌법의 근간인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내려" 한다는 구절이 들어 있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호불호 혹은 심판의지를 떠나) 나는 그가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차이에 너무 집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로 민주주의의 특정 성격을 강조할 수는 있겠지만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만을 강조하면서 반민주주의적 행태를 비판하는 건 정치적 운신의 폭을 크게 좁히는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은 출마선언문에서 스스로 "민주주의는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고 자유는 정부의 권력 한계를 그어주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유가 빠진 민주주의는 진짜 민주주의가 아니고 독재요 전제"라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라는 용어에 이미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이 포함돼 있다는 것 아닌가? 그러니 필요에 따라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강조해 쓰면 되는 것이고, 일상적으로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해 정치적 의지를 표현해도 아무 문제 없다고 본다. 내가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양립불가능한 적대적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정리하면 이렇다.


1. 현행 헌법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용어는 전문과 제4(평화통일)에 두 번 나온다. 그리고 '민주적 기본질서'란 용어는 제84(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에 한 번 나온다. 참고로 두 용어를 제외하고 '민주'란 용어가 사용된 경우는 모두 8번이다.

 

2. 관심 사안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1972(7차 개정) 유신헌법 전문에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정당조항의 '민주적 기본질서'란 용어는 1960(3차 개정) 헌법에 처음 등장한다.

 

3. 따라서 만약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용어가 들어갔느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식으로 대한민국체제를 구분한다면 유신헌법 이전 대한민국은 사회주의체제라는 말인데 이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4. 우리 헌법재판소는 국가보안법 제71항 및 5항의 한정헙헌 결정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 기준을 제시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준다 함은 모든 폭력적 지배와 자의적 지배 즉 반국가단체의 일인독재 내지 일당독재를 배제하고 다수의 의사에 의한 국민의 자치, 자유·평등의 기본 원칙에 의한 법치주의적 통치질서의 유지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고,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본적 인권의 존중, 권력분립, 의회제도, 복수정당제도, 선거제도,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한 경제질서 및 사법권의 독립 등 우리의 내부 체제를 파괴·변혁시키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헌재 1990. 4. 2. 89헌가113 결정.)

 

 


5. 우리 헌법재판소의 판시 내용은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사회주의국가당사건(1952)과 독일공산당사건(1956)에서 표명한 독일기본법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Freiheitliche demokratische Grundordnung'의 판시 내용과 기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지만, 경제적 내용이 포함된다. 참고로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어떠한 폭력적 지배나 자의적 지배도 배제하면서, 그때그때의 다수의사에 의한 국민의 자결 그리고 자유와 평등에 기초하는 법치국가적 지배질서를 나타내는 질서"이고, "이 질서의 기본적 원리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 기본법에 구체화되어 있는 인권, 특히 생명권 및 인격의 자유로운 발현권의 존중, 국민주권, 권력분립, 정부의 책임성, 행정의 합법률성, 법원의 독립, 복수정당제원리 및 합헌적으로 야당을 형성하여 활동하는 권리를 가지는 모든 정당에 대한 기회균등이다"고 판시한 바 있다.(BVerfGE 2, 1 (12f); 콘라드 헤세, 통일 독일헌법원론, 박영사, 2001, 83쪽 참조.)

 

6. 독일기본법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표현은 제102, 112, 18, 212, 3(신설), 87a4, 911항 등에 나온다. 참고로 제20조에 "독일연방공화국은 민주적이고 사회적 연방 국가이다"고 하는 등 민주적이란 용어를 우리와 마찬가지로 함께 사용하고 있으므로 해석상 문제를 야기한다.

 

7. 우리나라든 독일이든 헌법재판소의 해석상으로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관념은 파시즘일 수도 있고 공산주의일 수도 있는 전체주의체제에 대한 반대성격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과거 독일에서도 반파시즘보다는 반공을 위한 '투쟁(전투, 방어)적 민주주의'의 근거로 주로 활용돼 왔는데, 최근에는 극우정당인 국가민주당(NPD)을 겨냥한 2017년 개헌을 계기로 극우정당에 국고지원을 배제하는 근거로도 작동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이 관념이 반파시즘을 포함하기는커녕 파쇼정권에 의해 반공을 넘어 국가보안법을 매개로 정권유지 탄압수단으로 주로 남용돼 왔다.

 

8. 유의할 점은 '투쟁적 민주주의'의 근거조항이라고 할 수 있는 정당해산 조항에서 독일기본법 제212항은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침해, 폐지하거나 또는 독일 연방공화국의 존립을 위태롭게'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 헌법 제84항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때'라고 하고 있다. 만약 '민주적'과 '자유민주적'이 그렇게 별스럽게 의미가 다르다고 강변한다면 오히려 우리 헌법이 독일기본법에 비해 훨씬 폭 넓게 정당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9. 개인적으로는 우리 헌법상 전문 및 평화통일을 위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표현과 정당해산 조항의 '민주적 기본질서'란 표현은 범주에 따른 강조의 차이라고 보여진다. 그 차이를 마치 양립불가능한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란 관념 외에 파시즘적 민주주의나 공산주의적 민주주의라는 관념도 인정하는 게 아닌가 의심한다. 말하자면 그런 민주주의(?)와 투쟁하기 위해 용어상 대비되는 자유민주주의란 관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체제는 민주주의 부정이 전제돼 있기 때문에(파시즘은 애초부터 민주주의 부정이념이며, 공산주의 이론상으로도 국가와 민주주의는 고사한다) '민주주의, 혹은 민주적 기본질서'란 용어로도 그런 체제와의 투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10. 언젠가 개헌정국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으니,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란 용어 자체가 양립불가능한 적대적 개념이란 관념은 정치적으로도 지양해둘 필요가 있다. 우리 헌법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든 '민주적 기본질서'든 범주에 따라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 실제로 세상이 진보한다면 이 용어차이가 아니라 국민적 정치관념의 시대적 진보에 의존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정치가 퇴행하면 '민주적 기본질서'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든, 어떤 용어로도 얼마든지 탄압당할 수 있고, 진보하면 그 용어차이가 아무 장애도 아닐 것이다.


 


11. 결론적으로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개념적으로 양립불가능한 용어가 아니다. 특별히 우리 헌법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땐 특정 범주에서의 민주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자유라는 단어로 수식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헌법이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양립시켜가며 대한민국체제를 규정하는 건 자가당착일 것이다. 나는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마치 양립불가능한 것처럼 대립하며 정치적 에너지를 낭비하는 건 부질없다고 본다. 그보다는 규범의 해석적 진보를 뒷받침하는 정치적 진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게 훨씬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김욱, https://twitter.com/GhimWook, 2021.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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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 듯하지만, 사실 영화 <기생충>의 '난제'는 그 결말 부분에서 드러난다. 기택의 아들 기우는 반지하집에서 저택의 기생충으로 갇힌 기택에게 "아버지! 저는 오늘 계획을 세웠습니다"라며 '환상'적인 편지를 쓴다. 그 편지의 요지는 이렇다.


"돈을 벌겠습니다. 아주 많이. 돈을 벌면 이 집부터 사겠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계단만 올라오시면 됩니다."


그것은 기우에게 '근본적인 계획'이었다. , 그러니 이제 우리는 그 '근본적인 계획'에 대해 물어야 한다. 기우의 근본적인 계획이 '돈을 아주 많이 벌어 그 집을 사는 것'이라면 그 계획이 이뤄졌을 때 세상은 뭐가 달라졌을까? 크게 달라진 건 없을 것이다. 기생충이 성공해 숙주가 됐을 뿐이고, 그 숙주에겐 새로운 기생충이 들어와 살 것이다. 한 가지 소소한 희망이 있다면, 기우가 숙주가 된 세상은 조금 더 좋은 세상이기를, 즉 숙주인 기우가 조금 더 좋은 숙주이기를 바랄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절망일까, 희망일까? 혁명을 원한다면 나쁜 절망일 것이고, 혁명을 두려워한다면 좋은 희망일 것이다. 봉준호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말한다.


"오히려 혁명으로부터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아요, 세상이. 혁명의 시대가 많이 지나가고, 혁명이라는 것은 뭔가 부숴뜨려야 될 대상이 있어야 되는 것인데, 그게 뭔지 혁명을 통해 깨트려야 되는 게 뭔지 파악하기가 되게 힘들고 복잡한 세상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복잡한 상항을 표현하는 것 같아요, <Parasite>(<기생충>)는 오히려."

-Santa Barbara Film Festival(산타바바라 영화제), Award for Outstanding Director(감독상) 수상 직후 인터뷰, Jan 23, 2020. 중에서-


봉준호는 혁명의 희망도, 반혁명의 절망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영화 곳곳에서 그랬다. 가난한 자가 곧 착한 자도 아니고, 부자가 곧 악한 자도 아니다. 다만 상층 선 안의 사람들은 안전한 곳에서 하층 선 밖의 사람들에게 관대할 수 있을 뿐이다. '기생충'이란 제목부터 하층에 대한 익숙한 우호적 은유라기보다는 대담한 역설적 은유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투쟁은 계급투쟁으로만 일어나지 않고, 계급 내 갈등이 더 사나울 수 있다. 주인공 기택은 달관한 듯한 철학으로 세상을 향해 냉소한다.


"계획을 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 되거든, 인생이. 그러니까 계획이 없어야 돼, 사람은. 계획이 없으니까 뭐가 잘못될 일도 없고, 또 애초부터 아무 계획이 없으니까 뭐가 터져도 다 상관없는 거야, 사람을 죽이건, 나라를 팔아먹건."


상층일수록 인생을 계획대로 살 수 있겠지만, 하층일수록 계획대로 살기는커녕 위에서 부르면 부르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나라가 흥하면 흥하는 대로, 망하면 망하는 대로, 즉 닥치는 대로 살 수밖에 없다. 차라리 아무 계획이 없는 편이 부질없는 꿈을 꾸며 계획에 얽매이는 것보다 마음이라도 편할 수 있다.


하지만 단지 꿈(환상)이라 해도 계획 없이 살기에는 너무 젊은 기우는 부자, 즉 숙주가 되는 '근본적인 계획'을 세웠다. 기태의 말처럼 그 계획은 "반드시 계획대로 안" 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지만, 설령 그 계획이 이루어진다 해도 세상이 혁명적으로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과거엔 '공산주의라는 근본적인 계획'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세상에 갇혀 계획 없이 출구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봉준호의 전작 <설국열차>에서 과감하게 열차 밖 세상으로 걸어 나가 본 이념적 장면을 상기한다면, <기생충>은 그보단 훨씬 더 뒤로 움츠러든 현실적 모습이다. 아마도, 그래서! 세상을 향해 날 선 경고를 날린 <조커>에 비해 이른바 주류사회가 덜 불편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혁명으로부터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세상은 봉준호의 잘못이 아니다. 그는 단지 우리에게 숙제를 남겼을 뿐이다. 혁명이 아니더라도 뭔가를 해야만 한다. 그게 '더 착한 숙주'가 지배하는 세상을 향한 '익숙한 틀 안에서의 쩨쩨한 전진'이라 할지라도 뭔가를 해야만 한다. 그것이 공생이라면 공생을 해야 한다. 봉준호는 우리에게 그 해묵은 숙제를 참신한 방식으로 절실하게 상기시켰고, 그것이 그를 거장의 반열에 올렸다.


*사족: 나는 프랑스 칸영화제가 2019년에 '이미' 평가한 <기생충>을 미국 아카데미가 2020년에 재평가한 것을 미디어와 대중이 훨씬 큰 이슈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조금 어리둥절했다. 이해되는 측면은 있지만, 프랑스인들에겐 조금 서운한 현상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김욱, https://twitter.com/GhimWook, 2020. 0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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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커>의 주제는 주인공 아서=조커가 자신의 노트에 왼손으로 삐뚤빼뚤 적었던 다음과 같은 문장에 모두 녹아 있다.

 

정신질환의 가장 나쁜 점은 당신이 정상인 것처럼 행동하기를 사람들이 요구한다는 것이다.

The worst part about having a mental illness is people expect you to behave as if you don’t.

 

이 문장이 왜 <조커>의 주제인가? 이 영화가 우리들 사는 세상에 대한 은유가 아니라면 문장 그대로 정신질환자의 삶에 관한 고통 정도로만 읽힐 것이다. 한데 이 영화는 은유다. 그것도 아주 냉혹한 은유다. 그런 의미에서 위 문장을 조금 풀어서 해석하면 이렇게 된다.

 

'정상적인 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들 만큼 열악한 환경 속에 놓여 있는 당신의 가장 큰 고통은 당신에게 심지어(!) 착한 시민 이데올로기까지 세상은 요구한다는 것이다.'

 

착한 시민 이데올로기가 뭔가? 우선 부자는 자신의 계층적 환경 때문에 세상을 향해 울고 싶거나 분노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열악한 계층적 환경에 던져진 아서는 얼마나 세상을 향해 울고 싶거나 분노할 때가 많겠는가? 하지만 최악의 문제는 그때마저도 웃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언제나 웃는 착한 모습으로 사회질서에 순응해야 한다. 이렇게 마음속에선 '울면서'도 세상을 향해선 '웃어야 하는' 것이 바로 착한 시민 이데올로기다.

 

'울면서 웃어야 하는' 아서의 삶은 어쩔 수 없는 망상적 삶이다. 자신을 학대한 부모로부터 '해피(Happy)'로 불리며 사는 망상! 자신을 두들겨 패는 청소년을 어른답게 용서해야 한다는 망상! 자신에게 관심 없는 복지상담사로부터 치료 받을 수 있을 거란 망상! 총을 건네며 덫을 만드는 자를 동료로 생각한 망상! 밑바닥 남자지만 여자와 사랑할 수 있을 거란 망상! 하찮아서 우스운 인간을 찾아내 방송소재로만 이용하는 유명 코미디언에게서 꿈을 찾는 망상! 자신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정치인에게서 가족 같은 애정을 찾는 망상!

 

 

영화는 아서가 조커로 변신해가는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면, 세상이 끊임없이 아서를 조커로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하지만 조커의 폭력이 정당화될 만큼 그 세상 사람들이 특별히 나쁜 사람들도 아니다. 세상은 그저 아서에 냉정하고 무관심했을 뿐이다. 회자되는 호아킨 피닉스의 계단 춤 장면은 아서에서 조커로 완전히 변신한 모습을 인상적으로 담았다. 참고로 영화 <기생충>에선 계단이 부유한 세계에서 빈곤한 세계로 하락하는 은유였는데, <조커>에선 달동네의 착한 망상세계에서 냉혹한 현실세계로 전락하는 은유가 된다.

 

조커는 잔혹하고, 무자비하게 망상을 쳐부순다. 물론 그 무자비함은 의도된 불편함을 불러일으킨다. 당연히 우리는 불편해 해야 한다. 한데 이 불편함에 대해 '폭력미화' 영화라고 비난만 하고 끝내는 건, 값비싼 영화를 아주 값싸게 소모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태(논란)가 자주 반복되곤 하는데, 나쁜 조커를 만든 건 나쁜 영화가 아니라 나쁜 현실이다. 그러니 '영화=거짓'을 불편해 하지 말고 '=진실'을 불편해 해야 한다.

 

 

조커는 (채플린의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란 명언을 오마주해) '내 인생이 비극인줄 알았는데, 희극이었다'고 내뱉는다. 우리는 생계가 달린 광고판을 비극적으로 빼앗긴 아서가 희극적인 조커복장으로 사력을 다해 뒤쫓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웃는다. 마지막 장면은 가까이서 보면 살인의 흔적인 피 발자국을 남기며 걷는 조커의 비극적 모습이지만, 멀리서 복도 끝부분만을 보면 정신질환자를 붙잡으러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희극적 모습일 뿐이다. 가까운 비극을 멀리서만 보고 희극을 보듯 웃고만 있을 순 없잖은가?

 

 

 

'울면서 웃어야 하는' 아서의 삶은 체화된 이데올로기적 삶이다. 심지어 우리는 패륜적 권력으로부터 학살을 당해도 질서 있는 비폭력저항만 허용된다는 이데올로기를 체화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언젠가 이 평화로운 질서에 억눌려온 삶들이 임계점에 도달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지금 아서=조커는 냉정하고 무관심한 세상을 향해 호소하고 있다. 자신의 희극을 좀 더 가까이서 봐주기를, 그래서 자신의 비극을 좀 더 가까이에서 이해해주기를.

 

영화가 묻는 질문에 우리는 대답해야 한다. <조커>의 '정당화되지 않은 폭력'이 불편한가? 어쩌면 머잖아 '폭력의 정당화'라는 입증책임에서 벗어난 수많은 조커들의 탄생을 눈앞 현실 속에서 보게 될 수 있는데도, 오직 영화 속 조커만 불편한가? 내일의 나쁜 조커들을 감당하기 싫다면아직 오늘까지는 착한 아서들이 '정당화되지 않은 폭력은 안 된다'고 믿고 있을 때, 그들의 '울면서 웃어야 하는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그럴 준비가 돼 있는가? 이 세상은 지금 소중한 시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김욱, https://twitter.com/GhimWook, 2019.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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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최저임금 논쟁(이른바 소득주도성장논쟁)을 보면서 울고 싶은데 뺨 때린다(울려는 아이 뺨 치기)’는 속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는 이유가 뺨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인가를 가지고 각자의 진영논리를 동원해 유리한 사실만을 강조해가며 일방적으로 우기는 부질없는 사태가 속출한다.

 

 

어쨌거나 문재인 정부는 정부대로 여기서 밀리면 안 되는 거고, 반대당은 반대당대로 오히려 정부가 이른바 소득주도성장을 포기하면 허탈해 할 것 같은 느낌까지 준다. 그렇다면 한참 후의 막장을 확인할 때까지(어느 한편이 항복선언을 할 때까지) 갈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문재인 정부의 당찬 포부도 그렇고, (지지율 분포를 보면) 국민도 아마 그러기를 원하는 듯싶다. 따라서 이제 대한민국이 호랑이 등에 올라탄 셈이다.

 

우리 경제를 살리는 방법을 말하는 건 뛰어난 경제학자라도 겸손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가 처해 있는 최저임금 상황을 이해하는 것 자체는 경제학자가 아니라도 크게 어렵지 않다고 본다. 실제로 통계적 사실 자체에 관한 다툼도 크지 않다. 말하자면 문제 해결의 어려움은 통계적 사실 인식의 차이가 아니라(물론 통계청장이 의심스런 이유로 바뀐 탓에 앞으로는 통계적 사실 자체도 쟁점이 될 수 있다), 통찰 혹은 이념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본다.

 

통계를 보면, 우선 우리나라의 2016년 기준 노동소득분배율은 63.3%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67.0%보다 3.7낮은 하위권(28개국 중 21번째) 수준이다.(고용노동부, <통계로 보는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모습(부록)>(2018).) 그렇다면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커지도록 뭔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래서 최저임금을 크게 올리는 건 어떨까? 하지만 '(2017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 대비 (2018년) 최저임금(7530)’으로 계산하면 이미 OECD 4위다.(인터넷 <매경 이코노미>, 2018727.) 주휴수당을 포함한 최저임금은 9045원으로 3위가 된다.(인터넷 <중앙일보>, 2018419.)

 

그럼 이렇게 높은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은 어떨까? OECD는 전체 노동자의 임금을 일렬로 줄 세웠을 때 정확히 중간에 있는 값인 중위임금3분의2 미만을 받고 일하는 사람을 저임금 노동자로 정의하는데, 한국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2016년 기준으로 23.5%나 된다. 미국에 이어 2위다.(고용노동부, <통계로 보는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모습(부록)> (2018).) 형편없는 상황이다.

 

이런 사태를 작심하고 극복하려는 듯, 고용노동부는 중위임금 대비 68.2%(경총 추산)의 내년 최저임금(8350원, 주휴수당 포함 시 10020원)을 확정 고시했다. 이는 OECD 회원국 중 3위에 해당하는 높은 수준이다.(인터넷 <중앙일보>, 201883일.) 한마디로 최저임금으로 우리 경제의 약점인 저임금 노동자 문제를 모두 일거에 해소해버리겠다는 의미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 볼 통계치다. 어쩌면 통찰에 가장 중요한 통계치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최저임금 영향률은 어떨까? 중요한 사안이므로 인터넷 <중앙일보> 기사를 직접 인용한다.

 

내년 최저임금 대상자는 국내에서 일하는 근로자 4명 가운데 한 명인 501만명이다. 이런 영향률(25%)은 한국보다 경제수준이 높은 선진국을 크게 웃돈다. 프랑스의 영향률은 10.6%. 일본 11.8%, 미국 2.7%, 네덜란드 6.6%. 선진국에는 없는 주휴수당을 포함하면 영향률은 40%에 달한다. 국민 절반 가까이가 국가가 정한 임금을 받게 된다는 얘기다. 생산성과 회사의 수익 등을 따져 결정되는 임금의 시장논리가 사실상 무력화되는 셈이다.”(인터넷 <중앙일보>, 201883.)

 

위 통계치만 꼼꼼히 살펴보더라도 왜 우리나라에서 최저임금을 둘러싼 논란이 이렇게 큰지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위에서 최저임금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일 실업자 증가 부작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법에 정한 최저임금을 받지 못 하는 최저임금 미만율’, 말하자면 노동 암시장부작용도 거론하지 않았다. 앞으로 최저임금 충격이 초래할 이런 핵심적 부작용이 어떤 식으로 폭발할지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아울러 우리나라 임금노동자의 연간 근로시간은 2016년 기준 2,052시간으로 OECD 20개국 중 2번째로 열악한데, 이를 올해 7월부터 주당 최대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크게 줄였다. 당연히 개선해야 할 노동시간이지만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함께 탈출구없이 진행돼버린 셈이다. 법적 강제만 있으면 시장을 일거에 지배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보인다. 이런 식이라면 왜 차제에 최고임금제도까지 함께 창설해 소득격차를 원하는 만큼 획기적으로 줄이려는 생각은 않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이제 우리는 나라의 미래 명운이 갈릴 퀴즈를 풀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OECD 하위수준의 허약한 경제체질과 복지부재를 안고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25~40%에 직접 영향을 주게 될 최저임금을 법적 강제를 통해 GNI 대비 OECD 최고수준으로 충격적으로 밀어올림으로써 분배율, 소득격차, 실업자, 그리고 산업구조조정 등 문제까지 그럴 듯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 나는 다행히 경제학자가 아닌지라 출구를 배려하지 않은 우리나라 경제 구조에 대한 법적 문책의 결과가 어떨지 경제학적으로 추론할 책무가 없다.

 

호랑이는 대한민국을 등에 태우고 이미 내달리기 시작했다. 올해에 더해 내년 최저임금도 급격한 인상이 확정됐으니 올해 상황은 아마 예고편에 불과할 것이다. 이른바 소득주도성장이 성공하면 그 과실은 누구보다 중하위 계층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실패하면 그 포퓰리즘의 대가는 전 국민이 치러야 할 것이다. 두려운 일이다. 어쨌거나 국민 스스로 호랑이 등을 선택했으니 이런 저런 뒷북들이 부질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른바 소득주도성장에 그저 행운 있기를 바란다.

 

김욱, https://twitter.com/GhimWook, 2018. 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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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에 대하여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이윤 옮김 / 필로소픽 / 201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개소리에 대하여>의 원제는 <On Bullshit>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개소리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조리 없고 당치 않은 말을 비속하게 이르는 말이다. 이 비속적 번역어가 좀 자극적이라는 느낌을 줄 수도 있겠지만 그 의미를 곱씹다보면 오히려 잘 선택된 용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2008 봄, 광화문을 휩쓴 '미국산 쇠고기 수입 위생조건 협의는 광우병 쇠고기에 대한 위험을 완전히 차단하지 못 했다'는 주장은 개소리’였을? 이 주장이 단지 진실/거짓 차원의 다툼이었다면 개소리가 아니다. 반면 이명박은 “1만 명의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하라”(인터넷 <조선일보>, 2008년 5월 31일)는 차원에서 접근했는데, 이는 그 주장을 '개소리'로 들었다는 말이다.

 

양측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문제는 광화문의 외침이 진실/거짓 차원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속셈(예컨대 정권에 대한 공격)의 맹목적 수단이었는지 하는 것이다. (참고로 나는 '개소리'냐 아니냐를 둘러싼 이 아이러니한 엇박자가 노무현의 자살과 현재까지의 우리 정치 현실에 인과적으로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친 것으로 본다. 그렇게 말할 만한 근거가 쌓여 있다.)

 

이런 난해한 사례를 통해 '개소리'에 대한 자세한 분석논리가 궁금해졌다면, 이제 이 책을 읽을 준비가 된 셈이다이 책의 저자 해리 G. 프랭크퍼트는 '개소리'의 본질을 이렇게 규정한다.

 

그것은 바로 진리에 대한 관심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 즉 사태의 진상이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한 무관심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개소리의 본질이라고 보는 것이다.(37.)

 

진실/거짓에 대한 무관심, 이것이 없어서는 안 될 개소리의 일차적 특징이다. 그럼 개소리의 관심은 뭘까?

 

그가 반드시 우리를 기만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그의 기획의도enterprise이다. 개소리쟁이에게 유일하게 없어서는 안 될 독특한 특징은, 그가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속셈을 부정확하게 진술한다는 사실이다.(56.)

 

따라서,

 

정직한 사람의 눈과 거짓말쟁이의 눈은 사실을 향해 있지만, 개소리쟁이는 사실에 전혀 눈길을 주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개소리를 들키지 않고 잘 헤쳐 나가는 데 있어 사실들이 그의 이익과 관계되지 않는 한, 그는 자신이 말하는 내용들이 현실을 올바르게 묘사하든 그렇지 않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기 목적에 맞도록 그 소재들을 선택하거나 가공해낼 뿐이다.(58~59.)

 

그 개념이 거의 드러났다. 이쯤에서 뭔가 연상되는 개념이 있을 것이다. 거짓말쟁이와 개소리쟁이의 차이는 도둑(강도)과 사기꾼의 차이와 흡사한 면이 있다. 도둑(강도)자신이 물건을 훔쳤는지 안 훔쳤는지(뺏었는지 안 뺐었는지)에 대한 사실관계 그 자체를 속이는 것에 관심이 있다. 하지만 사기꾼은 , 권력, 명예 등을 위한 속셈을 속이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 기만적 목적을 위해 그는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진실을 말할 수도 있고, 거짓을 말할 수도 있다. 즉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일련의 아무 말은 진실/거짓의 하이브리드이며, 그 하이브리드 아무 말의 진실/거짓에 대해서는 스스로 아무 관심도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나쁠까? 프랭크퍼트는 (그가 생각하는 진리라는 관점에서)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훨씬 더 큰 진리의 적이다”(63)고 주장한다. 물론 동의하지 못 할 수도 있다. 특히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을 위해 내로남불을 거리낌 없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이들이라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들에겐 아마도 프랭크퍼트의 다음과 같은 경고도 절대 들리지 않을 것이다.

  

말하는 사람의 입맛에 맞는 것 외에는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마구 주장하는 개소리 행위에 과도하게 탐닉하다 보면, 사태의 진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정상적 습관은 약화되거나 잃어버리게 된다.(62.)

 

사태의 진상에 무관심한 기만적 목적의 진영논리’, 즉 사기꾼 식 개소리에만 탐닉할 경우 정확성correctness’이 아닌 진정성sincerity’(66~67)을 내세워 무조건 나(우리)만 잘났다고 이전투구할 수밖에 없다. 진실/거짓(정확성)이 어떠하든, 우리는 진정성이 있고 상대는 진정성이 없으니(우리는 사기꾼이 아니고 상대는 사기꾼이니), 우리는 선하고 상대는 악하다는 맹목적이고 공허한 상호비방만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상 고정불변한 확정적 사기꾼/비사기꾼은 없다는 근거에서, 프랭크퍼트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사실이 이런 한, 진정성 그 자체가 개소리다.(68.)

 

이제 이 리뷰도 결론을 내려야 한다. 우리는 모두 다소간 개소리를 할 수 있다. 심지어 '광우병 쇠고기' 사례에서 보듯, 개소리 아닌 진술이 개소리로 인식될 수도 있다. 이런 어지러운 사태 속에서 만약 진정성, 즉 개소리에 지나치게 심취할 경우 그 결과가 무엇일까? 그 과실이 언제까지나 달콤하다면 우리는 천년만년 개소리를 즐겨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진실/거짓에 무관심한 정치경제사회문화가 역사 속에서 가혹한 대가를 치르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 개소리쟁이들이 진정한 개소리쟁이들이라면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의 진실/거짓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영을 막론하고) 개소리와 개소리쟁이들이 유래 없이 활개 치는 지금 우리 현실을 몹시 우려한다.

 

사족: 책값이 (팸플릿 크기인데) 분량에 비해 너무 비싸다고 느낄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듯한 가격에 내놓은 수많은 개소리 책들보다 이 반개소리’  책이 (그 내용을 제대로 소화할 수만 있다면) 훨씬 더 상큼하게 철학분야 책읽기 애피타이저 역할을 해줄 것이다. 애피타이저야 원래 양이 적은 게 당연하니, 다른 이유라면 몰라도 책값에 비해 분량이 적다는 이유로 외면하지는 말기 바란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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