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은 2021년 6월 29일 대선출마선언을 했다. 그의 출마선언문엔 (문재인 정권이) "우리 헌법의 근간인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내려" 한다는 구절이 들어 있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호불호 혹은 심판의지를 떠나) 나는 그가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차이에 너무 집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로 민주주의의 특정 성격을 강조할 수는 있겠지만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만을 강조하면서 반민주주의적 행태를 비판하는 건 정치적 운신의 폭을 크게 좁히는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은 출마선언문에서 스스로 "민주주의는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고 자유는 정부의 권력 한계를 그어주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유가 빠진 민주주의는 진짜 민주주의가 아니고 독재요 전제"라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라는 용어에 이미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이 포함돼 있다는 것 아닌가? 그러니 필요에 따라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강조해 쓰면 되는 것이고, 일상적으로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해 정치적 의지를 표현해도 아무 문제 없다고 본다. 내가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양립불가능한 적대적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정리하면 이렇다.
1. 현행 헌법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용어는 전문과 제4조(평화통일)에 두 번 나온다. 그리고 '민주적 기본질서'란 용어는 제8조4항(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에 한 번 나온다. 참고로 두 용어를 제외하고 '민주'란 용어가 사용된 경우는 모두 8번이다.
2. 관심 사안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1972년 (제7차 개정) 유신헌법 전문에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정당조항의 '민주적 기본질서'란 용어는 1960년 (제3차 개정) 헌법에 처음 등장한다.
3. 따라서 만약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용어가 들어갔느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식으로 대한민국체제를 구분한다면 유신헌법 이전 대한민국은 사회주의체제라는 말인데 이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4. 우리 헌법재판소는 국가보안법 제7조1항 및 5항의 한정헙헌 결정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 기준을 제시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준다 함은 모든 폭력적 지배와 자의적 지배 즉 반국가단체의 일인독재 내지 일당독재를 배제하고 다수의 의사에 의한 국민의 자치, 자유·평등의 기본 원칙에 의한 법치주의적 통치질서의 유지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고,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본적 인권의 존중, 권력분립, 의회제도, 복수정당제도, 선거제도,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한 경제질서 및 사법권의 독립 등 우리의 내부 체제를 파괴·변혁시키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헌재 1990. 4. 2. 89헌가113 결정.)
5. 우리 헌법재판소의 판시 내용은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사회주의국가당사건(1952년)과 독일공산당사건(1956년)에서 표명한 독일기본법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Freiheitliche demokratische Grundordnung'의 판시 내용과 기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지만, 경제적 내용이 포함된다. 참고로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어떠한 폭력적 지배나 자의적 지배도 배제하면서, 그때그때의 다수의사에 의한 국민의 자결 그리고 자유와 평등에 기초하는 법치국가적 지배질서를 나타내는 질서"이고, "이 질서의 기본적 원리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즉, 기본법에 구체화되어 있는 인권, 특히 생명권 및 인격의 자유로운 발현권의 존중, 국민주권, 권력분립, 정부의 책임성, 행정의 합법률성, 법원의 독립, 복수정당제원리 및 합헌적으로 야당을 형성하여 활동하는 권리를 가지는 모든 정당에 대한 기회균등이다"고 판시한 바 있다.(BVerfGE 2, 1 (12f); 콘라드 헤세, 『통일 독일헌법원론』, 박영사, 2001, 83쪽 참조.)
6. 독일기본법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표현은 제10조2항, 11조2항, 18조, 21조2, 3항(신설), 87a조4항, 91조1항 등에 나온다. 참고로 제20조에 "독일연방공화국은 민주적이고 사회적 연방 국가이다"고 하는 등 민주적이란 용어를 우리와 마찬가지로 함께 사용하고 있으므로 해석상 문제를 야기한다.
7. 우리나라든 독일이든 헌법재판소의 해석상으로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관념은 파시즘일 수도 있고 공산주의일 수도 있는 전체주의체제에 대한 반대성격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과거 독일에서도 반파시즘보다는 반공을 위한 '투쟁(전투, 방어)적 민주주의'의 근거로 주로 활용돼 왔는데, 최근에는 극우정당인 국가민주당(NPD)을 겨냥한 2017년 개헌을 계기로 극우정당에 국고지원을 배제하는 근거로도 작동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이 관념이 반파시즘을 포함하기는커녕 파쇼정권에 의해 반공을 넘어 국가보안법을 매개로 정권유지 탄압수단으로 주로 남용돼 왔다.
8. 유의할 점은 '투쟁적 민주주의'의 근거조항이라고 할 수 있는 정당해산 조항에서 독일기본법 제21조2항은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침해, 폐지하거나 또는 독일 연방공화국의 존립을 위태롭게'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 헌법 제8조4항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때'라고 하고 있다. 만약 '민주적'과 '자유민주적'이 그렇게 별스럽게 의미가 다르다고 강변한다면 오히려 우리 헌법이 독일기본법에 비해 훨씬 폭 넓게 정당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9. 개인적으로는 우리 헌법상 전문 및 평화통일을 위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표현과 정당해산 조항의 '민주적 기본질서'란 표현은 범주에 따른 강조의 차이라고 보여진다. 그 차이를 마치 양립불가능한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란 관념 외에 파시즘적 민주주의나 공산주의적 민주주의라는 관념도 인정하는 게 아닌가 의심한다. 말하자면 그런 민주주의(?)와 투쟁하기 위해 용어상 대비되는 자유민주주의란 관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체제는 민주주의 부정이 전제돼 있기 때문에(파시즘은 애초부터 민주주의 부정이념이며, 공산주의 이론상으로도 국가와 민주주의는 고사한다) '민주주의, 혹은 민주적 기본질서'란 용어로도 그런 체제와의 투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10. 언젠가 개헌정국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으니,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란 용어 자체가 양립불가능한 적대적 개념이란 관념은 정치적으로도 지양해둘 필요가 있다. 우리 헌법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든 '민주적 기본질서'든 범주에 따라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 실제로 세상이 진보한다면 이 용어차이가 아니라 국민적 정치관념의 시대적 진보에 의존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정치가 퇴행하면 '민주적 기본질서'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든, 어떤 용어로도 얼마든지 탄압당할 수 있고, 진보하면 그 용어차이가 아무 장애도 아닐 것이다.
11. 결론적으로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개념적으로 양립불가능한 용어가 아니다. 특별히 우리 헌법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땐 특정 범주에서의 민주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자유라는 단어로 수식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헌법이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양립시켜가며 대한민국체제를 규정하는 건 자가당착일 것이다. 나는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마치 양립불가능한 것처럼 대립하며 정치적 에너지를 낭비하는 건 부질없다고 본다. 그보다는 규범의 해석적 진보를 뒷받침하는 정치적 진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게 훨씬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김욱, https://twitter.com/GhimWook, 2021. 0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