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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투쟁이든 투쟁의 논리는 조금 아이러니한 데가 있다. 궁극적으로 투쟁 대상자를 박멸시킬 것이 아니라면(역사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자들도 종종 있었다), 그 투쟁 대상자와의 관계를 궁극적으로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아주 중요한 핵심 의제가 된다. 예컨대 페미니즘은 남성을, 반영패투쟁은 영남인을, 계급투쟁은 자본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헌법을 보자. 1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4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로동자, 농민, 군인, 근로인테리를 비롯한 근로인민에게 있다고 규정한다. 무슨 말인가? 북한의 근로인민이 주권을 가지고, 남북한 전체 인민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의미다.

 

, ‘북한이 남북한 전체 인민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논리야 우리도 그런 식의 논리로 싸워 왔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한 가지 의문이 있을 것이다. 왜 북한의 주권은 북한 전체 인민이 아닌 근로인민이 가지는 걸까? 예컨대 심신이 허약해 노동을 못 하는 병약자나 노인에겐 주권이 없단 말인가?

 

알랭 바디우는 <알랭 바디우, 공산주의 복원을 말하다>에서 간단한 표현으로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마르크스가 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보편적인 것이라고 했던 의미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어떤 개별적인 속성도 갖고 있지 않은, 이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따라서 부정의 보편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북한 헌법은 20세기 공산주의 실험이 모두 그랬던 것처럼,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태껏 (역사적인 의미로는 거의 절망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로 진보해가지 못했다는 고백이다. 이는 20세기 공산주의는 결국 뭔가 다시,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논리를 갖춰, 새로운 역사를 향해, 새로운 출발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최근 대한민국의 많은 이들이 페미니즘의 극단적 변이 현상에 놀라고 있는 듯하다. 역사 경험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투쟁에나 이런 극단적 변종은 항상 있었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 변종이 영구적으로 승리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문제는 이런 식의 극단적 변종의 속물적 언행을 이념적으로 어떻게 제압하느냐가 사실상 모든 운동의 성패를 좌우한다.

 

근원적으로 우리 사회가 이런 어그로 소동에 당황하는 건 우리나라 주류 페미니즘 철학의 빈곤함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모든 투쟁에서 철학의 빈곤함이 역사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철저히 숙고해야 한다.

 

모든 투쟁은 그 투쟁을 야기한 적대자를 박멸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 지역, 계급 등등, 모든 투쟁의 궁극적 목적은 각 범주의 불평등부정의를 로 만드는 데 있다. 물론 투쟁의 주체와 대상자, 혹은 투쟁 주체의 이념과 대상자의 반이념을 구분하는 것은 투쟁과정에서 필수 요건이다. 하지만 불평등부정의가 무가 된다면 투쟁을 위한 적대적 구분이 왜 영구적으로 필요하겠는가? 무가 돼야 한다는 건 결국 투쟁 주체와 대상자의 적대적 구분을 지양하고 보편성을 확립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투쟁도 투쟁의 주체가 무로 지양될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하지 못 하는 한 궁극적으로는 실패를 예정한 것이다. 앞으로도 더 나은 삶을 위해,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여러 범주의 투쟁 주체로서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 모두는, 스스로, 언젠가, 반드시, ‘로 지양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 희망 없는 모든 투쟁은 불온하다. 투쟁 대상자가 역사적으로 불온했던 그만큼, 아니 어쩌면 열악한 처지에 있는 자들의 피눈물을 오도오용하는 그만큼 더, 불온하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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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월드컵 기간에 좀 황당한 한국 관련 작은 소동이 두 차례 있었다. 마라도나가 자신에게 환호하는 한국인들을 보며 눈 찢기 제스처로 화답(?)한 것과, 미국 라틴계 방송 텔레문도의 두 멕시코계 방송인이 한국 덕에 16강에 진출하자 기쁨에 들떠 역시 눈 찢기 제스처를 했는데 주위에서 단체 웃음으로 이에 호응한 사건이다. 이후 마라도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해명을 했고, 두 방송인은 사과를 했지만 무기한 출연정지 처분을 받았다.

 

어쩌다 가끔 이렇게 남미인들이 우리를 향해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된 비하 제스처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니, 그보다는 이런 황당한 상황을 맞으면 어떤 감정이 생기는가? 내 경우, 감정보다는 (다소 의아할 수도 있겠는데)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도입부(37)에 나오는 이 구절이 우선 연상된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5백 년 동안 한국을 통치해 왔으며 스스로를 일본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해 온 관료제도의 통치자들을 포섭, 매수 혹은 파멸시켜야 했었다. 그것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그들의 통치를 강요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서 유럽국가들이 그들의 식민지에 대해 겪었던 것에 비하여 보다 많은 곤란을 겪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제국의 침략자들이 원주민을 그나마 순조롭게 통치하기 위해서는 원주민이 생각하기에도 자신들보다 침략자들이 뭔가 우월하다고 인정해주는 것이 필요한데, 제국 일본은 강점지 조선으로부터 그런 암묵적인 내심의 인정을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유럽국가들이 주로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등 식민지를 지배하면서 겪은 어려움보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면서 겪은 어려움이 훨씬 더 컸다는 것이다.

 

 

근데 이런 사태는 단순한 정신승리였을까? 아니다. 커밍스의 주장대로, 제국주의 역사 속에서 마주친 제국과 원주민은 어쩔 수 없이 그런 우열의식이 드러나는 초면의 상대였다. 한데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그게 아니었다. 말하자면 역사 DNA(민족적 집단 무의식)’속 민족적 우월의식으로 따지자면 조선이 일본보다 더 강했으면 강했지, 약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인들에게 제국 일본은 외계인처럼 갑자기 등장해 처음 마주치게 된 우월한 문명국이 아니라 오히려 고대로부터 문명을 전해주고 부대끼며 살았던 그저 낯익은 외국(왜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오늘날까지 흥미로운 관계를 유발시키고 있다. 예컨대 이렇게 질문해보자. ‘일본인은 궁극적으로 한국인을 비하할 수 있는가?’ ‘비하는 사전적 풀이에 의하면 업신여겨 낮춤이다. 예컨대 조센징이라는 말은 일본인이 한국인을 비하하는 말로 통용된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백인들이 흑인들을 비하하면서 니그로라고 말하는 용어처럼 완벽한 비하용어로 사용될 수 있는가?

 

정신승리하는 극우적인 일본인은 그럴 수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보기에 그건 불가능하다. 그 비하는 예컨대 한국인이 일본인을 비하하면서 쪽발이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비하의미를 담기 힘들다. 말하자면 일방이 다른 일방에 대해서만 일방적으로 비하하는 용어가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조센징니그로같은 사회언어학적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내 보기에, 비하가 완벽하게 성공하려면 비하하는 자의 지위가 비하 받는 자의 지위보다 우월해서 그 간극을 극복하기 힘들어야 한다. 예컨대 전통적인 관계에서 비하는 계급적으로 주인이 종에게, 인종적으로 식민자가 원주민에게, 성적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등, 자신의 우월한 지배관계를 과시하는 의미이지, 종이 주인에게, 원주민이 식민자에게, 여성이 남성에게 등, 단순히 언행만으로 우월의식을 애써 만들어 보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오늘날에야 개인적인 처지에 따라 그 우열의식이 얼마든지 유동적이긴 하지만 전통적집단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관찰해보자. 예컨대 가끔씩 폐쇄된 사적 자리에서 우리가 자를 붙여 말하는 강대국 국민(특이하게도 우리가 강대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나라 국민에겐 자를 붙여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이 있는데 이는 엄밀하게 말해서 비하라기보다는 일종의 저항적 언어 습관에 가깝다. 또 가끔씩 뉴스를 보면, 우리보다 약소국이라고 간주하는 나라(예컨대 대만) 국민들이 시위 등으로 우리를 대놓고 비난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의 반응은 이른바 강대국(예컨대 미국) 백인이 어쩌다 사회적으로 우리를 비하하는 것이 이슈가 됐을 때의 반응에 비하면 거의 무반응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비하가 우열의식 속에서만 그 의미를 갖는다는 살아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제 서두의 사례를 풀어보자. 내 개인적으로는, 마라도나나 멕시코계 방송인들의 그런 우발적 행위로부터 비하를 당했다는 감정을 별로 느끼지 못 했다. 이는 가정하자면 미국의 어떤 잘난 유명 백인(예컨대 노벨상쯤 수상했다고 해두자)이 그런 행위를 했을 때 느끼는 감정과는 사뭇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마라도나나 그들 멕시코계 방송인들도 그런 행위를 한 이유가 비하라기보다는 아마도 그것을 친근한 장난쯤으로 생각했거나 아무 생각 없는 무지(그렇다 하더라도 물론 당연히 그들도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철부지 같은 행동인지는 배워야 한다)에서 나온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볼 때, 그들이 한국인에게 눈 찢기 제스처를 하거나 혹 한국인이 그들에게 비너라고 말한다면 ‘우열관계 없는 천박한 비하 흉내일 뿐이다.

 

어쨌거나 비하가 결국 사회문화적 관계의 표시라면, 비하할 수 없는 자들이 철없이 아무나에게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나 말을 해댈 때가 아니라 비하할 만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누군가를 (어떤 경우는 무의식적으로) 비하하는 언행을 할 때 마음의 상처가 깊어진다. 예로부터 그랬다. ‘비하는 아무나가 아무나에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왕이 아랫사람을 무시하고 놀릴 때 비하이지, 광대가 왕을 놀리는 건 풍자일 뿐이다. 그러니 개인적인 사회관계에서도 자신이 약자의 처지에 있을 때보다는 강자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때 자신의 언행을 보다 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비대칭적 사회 규범으로라도 지위의 형평이 맞춰진다면 그나마 세상이 공평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7.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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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전>. 이 영화는 좀 특별하다. 리메이크 판인 이 영화가 오리지널 판 <마약전쟁>의 그저 그런 스토리를 빌려 철학적으로 완전히 다른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더 놀라운 것은 수준 높은 철학적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들이대지 않고 단순한 범죄 스릴러 영화 같은 일종의 착시효과를 통해 관객동원까지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품의 완성도를 갖춘 영화가 대중적 성공까지 거두는 것은 모든 영화인의 소망일 것이다.

 

<독전>이 선생이 누구냐는 데 재미의 초점을 맞추라고 제안한다. 뭐 그렇게 어려운 수수께끼는 아니다. 하지만 그 수수께끼를 모두가 맞힌 순간 정작 다른 문제가 제기된다는 점이 핵심이다. 그 문제는 이렇다. ‘모두가 이 선생이라고 생각하는 이 선생이 진짜 이 선생이 맞는가?’ 드러난 이 선생, 즉 락이 이 선생인 건 맞다. 하지만 그 락이 원호가 인생을 걸고 추적한 이 선생일까? 원호가 추적한 이 선생은 락의 실상이 아닌 허상이었다. 원호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실재한다고 믿었던 락의 허상,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 문제의 핵심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왜 이 선생의 실상이 아닌 허상이 세상을 지배하는가?’ 조금 다른 식으로 변주하면, ‘왜 이 선생도 이 선생의 허상을 필요로 하는가?’ 이 화두의 철학적 문제의식은 생각보다 깊고, 넓고, 심지어 불온하기까지 하다. 아마도 많은 이들은 이 철학적 문제의식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불쾌해 하거나, 피하거나, 공격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모두가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이 선생의 허상을 필요로 하는 우리 삶에 대한 각자의 (거부) 반응을 다음 명제를 통해 직접 확인해보기 바란다.

 

나는 명품의 치장을 통해 나의 허상이 존재하는 걸 원한다.’ ‘회사 대표인 나는 내 실제 능력보다 훨씬 더 큰 능력과 권력 네트워크를 가진 것처럼 보이고 싶고, 그런 허상을 활용하고 있다.’ ‘나는 예수나 부처의 실상에는 별 관심 없고, 인간이 믿는(만든) 그 신적 허상에만 관심이 있다.’ ‘나는 노무현의 실상엔 별 관심 없고, 그 허상(이미지)에만 열광한다.’ ‘연예인인 나는 대중이 나를 바라보는 허상을 즐기기도 하고, 그 때문에 고통스럽기도 하다.’ ‘나는 전쟁이나 스포츠에서는 상대를 속이거나 겁먹게 할 허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독전>의 감독 이해영은 누구보다 이런 모순을 더 절감하며 살았는지 모른다. 그는 성소수자임을 고백한 사람이다. 성소수자는 자신의 겉모습, 즉 바깥으로 드러난, 그리고 모두가 실상이라고 간주하는 허상이 내면의 실상과 모순을 빚는다. 남의 삶을 대신 산 락이 그 남의 어릴 적 사진을 보며 원호에게 말한다. “저 아니에요. 근데 저 맞아요.” 원호가 창밖을 내다보며 눈물을 그렁거리다 락에게 너는 살면서 행복했던 적 있냐?”고 묻는 엔딩 대사는 락의 진실에 대한 뒤늦은 반응이자, 허상을 쫒아온 자신의 공허한 삶에 대한 회한이다.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면 허상과 실상의 모순에 대한 그런 개인적 질문이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현상을 놓고 보면 다른 관점의 질문이 훨씬 더 심각해진다. 우리는 과연 사회적 실상에 관심이 있긴 한가? 세상은 오히려 허상의 메커니즘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닐까? 허상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쉽고 편리하게 허상이 지배할 수 있도록 순응해야 하는 건 아닌가? 그건 우리가 실상보다는 허상을 통해 우리를 위로하고, 조작하고, 지배하고, 이익을 얻고, 만족하려는 속내가 본능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은 아닌가?

 

<마약전쟁>빌리는 허수아비로 밝혀지는 실재 인물이었다. 이런 맥거핀적 발상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한데 <독전>의 이해영은 이 평범한 기법을 실재하는 이 선생부재하는 이 선생’, 즉 실상과 허상의 모순이라는 모티브로 비범하게 변경했다. 그리고 이 모티브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로 담아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마약전쟁>과는 아예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거의 찾기 힘든 특별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독전>의 영어 제목은 친절하게도 <Believer>. 그러므로 우리는 그 제목이 함축하고 있는 진지한 질문에 잠시라도 정색하며 대답하는 게 예의다. 우리가 믿는 것은 실상인가, 허상인가? 아니,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것은 실상인가, 허상인가? 실상이 아닌 허상으로 살아가는 자, 혹은 그 허상을 실상으로 믿고 (싶어 하며) 살아가는 자,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도 행복할 수 있는가? 어차피 그것이 삶이고, 세상인가? 엔딩에서 외롭고 차갑게 울리는 한 방의 총소리가 우리의 맹목적 삶을 소스라치게 각성시킨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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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수 www.mokp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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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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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간지 기자가 <책혐시대의 책읽기> 저자 인터뷰를 하자면서 대뜸 그랬다. “책읽기 책을 왜 썼냐? 당신이 쓴 책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거다.” 하긴 그러는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다. 책읽기 책은 아주 많다. 내가 여기에 한 권을 더 추가하려고 했던 이유가 뭘까? 책에 그 이유를 적었지만 더 그럴 듯한 해명이 필요한 듯싶다.

 

흔하기 짝이 없는 책읽기 책을 쓴 죄(?)로 나는 기자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얘기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스님들은 왜 각자 자신의 화두를 붙잡고 깨우치려 하는가?” 선어록은 누구라도 쉽게 구할 수 있다. 해설서도 있다. 선대 고승들이 이미 깨달은 내용을 학습해 그런가 보다고 그대로 따르면 될 텐데 뭣 때문에 스스로 화두를 붙잡고 시간을 낭비하며 씨름을 할까? 더 심란한 의문은 그렇게 고생해서 깨달아 봐야 고승들의 깨우침과 다른 혹은 더 뛰어난 특별한 내용이 있을까 하는 점이다. 내가 책을 쓴 이유는 이 대답과 관계가 있다.

 

그에 대한 구체적 대답은 조금 뒤로 미루고 먼저 할 말이 있다. 나는 이 책을 독자 모두가 각자(!) 자신의 문제의식(화두)으로, 자신의 머리로, 자신의 노력으로, 역사 속의 '아름답고 잔인한 생각의 진화과정을 따라잡아보라고 권유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런데 우리가 천재들의 생각을 따라잡는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가능하다!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긴 하지만 충분히 가능하다. 모두가 천재가 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천재를 이해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그 이유는 책에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 그럼 그렇게 천재를 이해했다 치자. 이 이해는 이제 내 것인가?! 아직은 아니다. 섣부르게 이 이해를 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앞에 얘기한 고승들의 해탈 경험을 모아 놓은 선어록을 해설서를 통해 이해한 다음, '이제 그들의 해탈이 내 것이 됐다'고 우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흥미로운 건 심지어 불교계에도 그런 식의 주입식 화두문답에 의한 유사 해탈 모습이 있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말한다면, ‘뭔가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 때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내 스스로 다시 알게됐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다시 알게 될지도 모른다. 무협지의 젊은 주인공이 얼떨결에 무림 절대고수로부터 주입받은 내공을 실전을 통해 끊임없이 제 것으로 만들어가며 눈앞의 새 세상을 극복해가는 이치와도 유사하다. <돈키호테>와 <파우스트>는 그런 앎의 고행과 관계가 있는 가장 유명한 책일 것이다.

 

우리는 주입식 교육에 너무 익숙하다. 그래서 심지어 책읽기에도 그런 습관이 마치 우리들의 본성인양 아주 강하게 나타난다. 역사 속 위인들, 우리 시대의 뛰어난 학자들, 유명 저자들의 책을 그저 주입식으로 이해했을 뿐이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풍조가 넘쳐난다.

 

이쯤에서 강한 의문이 있을 것이다. 결국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게 중요하지 자기 것인지 아닌지가 뭐 그렇게 중요하며, 설령 자기 것이 아니라도 모두 똑똑한 사람들의 훌륭한 생각과 결국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인데 그게 나쁜가?

 

나쁘다! 그런 식의 자기 것처럼 보이는 훌륭한 남의 생각을 아무리 소중하게 간직해봐야 책읽기의 목적이랄 수 있는 새로운 문제 해결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지식을 책읽기를 통해 자신의 논리와 생각으로 재구축한 것만이 내일을 위한 내 지혜고, 내 힘이다!

 

강조하건대, 자신이 훌륭한 사람들의 생각과 결론적으로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문제라는 게 아니다. (아마 실제로 대부분, 그리고 대부분의 사안에서 그럴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결론적 생각을 내 나름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그렇게 터득한 것이 아니라면 바로 그게 문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읽기에서까지 주입식 정보와 결론만을 탐하는 습관을 강화한다면 책읽기는 약이 아니라 오히려 독이다. 이런 식의 책읽기는 사람을 똑똑한 바보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이럴 거라면 왜 전 국민이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들여 구태여 책읽기를 해야 하는가?

 

극단적으로 말해, 그게 정말 우리의 민주주의에 아무 문제도 없다면 대한민국의 아주 소수만 열심히 책읽기를 하고, 그들이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든(심지어 개돼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들 생각(결론)을 이해했다면서 당신 생각이 바로 내 생각이라고 영혼은 없지만 너무나 편리한 맞장구만 쳐주면 될 일 아닌가?

 

하지만 그러고 싶은가? 나는 절대 그러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악착같이 앞으로도 내 스스로의 머리로 책읽기를 하려 한다.

 

나는 <책혐시대의 책읽기>를 통해 파편적이 아니라 체계적인 책읽기를 아주 강조했다. 그건 다시 말해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가다듬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어서 그런 것이다. 처음엔 다소 막연하게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입체적인 사고로 스스로의 생각을 강하게 만들고, 재미를 얻게 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으로 책읽기를 안내하는 맘에 드는 책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흔한 책읽기 책을 정색하며 다시 쓴 것이다. 이것으로 변명이 됐기를 바란다. 끝으로 이 책을 눈여겨 봐준 미디어의 다음 필자들에게 감사한다.

 

http://www.hankookilbo.com/v/080a6e99d30a44a3bab2cc90c9f10ae2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8051807312926968

http://www.fnnews.com/news/201805161709362294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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