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최저임금 논쟁(이른바 소득주도성장논쟁)을 보면서 울고 싶은데 뺨 때린다(울려는 아이 뺨 치기)’는 속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는 이유가 뺨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인가를 가지고 각자의 진영논리를 동원해 유리한 사실만을 강조해가며 일방적으로 우기는 부질없는 사태가 속출한다.

 

 

어쨌거나 문재인 정부는 정부대로 여기서 밀리면 안 되는 거고, 반대당은 반대당대로 오히려 정부가 이른바 소득주도성장을 포기하면 허탈해 할 것 같은 느낌까지 준다. 그렇다면 한참 후의 막장을 확인할 때까지(어느 한편이 항복선언을 할 때까지) 갈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문재인 정부의 당찬 포부도 그렇고, (지지율 분포를 보면) 국민도 아마 그러기를 원하는 듯싶다. 따라서 이제 대한민국이 호랑이 등에 올라탄 셈이다.

 

우리 경제를 살리는 방법을 말하는 건 뛰어난 경제학자라도 겸손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가 처해 있는 최저임금 상황을 이해하는 것 자체는 경제학자가 아니라도 크게 어렵지 않다고 본다. 실제로 통계적 사실 자체에 관한 다툼도 크지 않다. 말하자면 문제 해결의 어려움은 통계적 사실 인식의 차이가 아니라(물론 통계청장이 의심스런 이유로 바뀐 탓에 앞으로는 통계적 사실 자체도 쟁점이 될 수 있다), 통찰 혹은 이념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본다.

 

통계를 보면, 우선 우리나라의 2016년 기준 노동소득분배율은 63.3%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67.0%보다 3.7낮은 하위권(28개국 중 21번째) 수준이다.(고용노동부, <통계로 보는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모습(부록)>(2018).) 그렇다면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커지도록 뭔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래서 최저임금을 크게 올리는 건 어떨까? 하지만 '(2017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 대비 (2018년) 최저임금(7530)’으로 계산하면 이미 OECD 4위다.(인터넷 <매경 이코노미>, 2018727.) 주휴수당을 포함한 최저임금은 9045원으로 3위가 된다.(인터넷 <중앙일보>, 2018419.)

 

그럼 이렇게 높은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은 어떨까? OECD는 전체 노동자의 임금을 일렬로 줄 세웠을 때 정확히 중간에 있는 값인 중위임금3분의2 미만을 받고 일하는 사람을 저임금 노동자로 정의하는데, 한국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2016년 기준으로 23.5%나 된다. 미국에 이어 2위다.(고용노동부, <통계로 보는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모습(부록)> (2018).) 형편없는 상황이다.

 

이런 사태를 작심하고 극복하려는 듯, 고용노동부는 중위임금 대비 68.2%(경총 추산)의 내년 최저임금(8350원, 주휴수당 포함 시 10020원)을 확정 고시했다. 이는 OECD 회원국 중 3위에 해당하는 높은 수준이다.(인터넷 <중앙일보>, 201883일.) 한마디로 최저임금으로 우리 경제의 약점인 저임금 노동자 문제를 모두 일거에 해소해버리겠다는 의미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 볼 통계치다. 어쩌면 통찰에 가장 중요한 통계치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최저임금 영향률은 어떨까? 중요한 사안이므로 인터넷 <중앙일보> 기사를 직접 인용한다.

 

내년 최저임금 대상자는 국내에서 일하는 근로자 4명 가운데 한 명인 501만명이다. 이런 영향률(25%)은 한국보다 경제수준이 높은 선진국을 크게 웃돈다. 프랑스의 영향률은 10.6%. 일본 11.8%, 미국 2.7%, 네덜란드 6.6%. 선진국에는 없는 주휴수당을 포함하면 영향률은 40%에 달한다. 국민 절반 가까이가 국가가 정한 임금을 받게 된다는 얘기다. 생산성과 회사의 수익 등을 따져 결정되는 임금의 시장논리가 사실상 무력화되는 셈이다.”(인터넷 <중앙일보>, 201883.)

 

위 통계치만 꼼꼼히 살펴보더라도 왜 우리나라에서 최저임금을 둘러싼 논란이 이렇게 큰지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위에서 최저임금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일 실업자 증가 부작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법에 정한 최저임금을 받지 못 하는 최저임금 미만율’, 말하자면 노동 암시장부작용도 거론하지 않았다. 앞으로 최저임금 충격이 초래할 이런 핵심적 부작용이 어떤 식으로 폭발할지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아울러 우리나라 임금노동자의 연간 근로시간은 2016년 기준 2,052시간으로 OECD 20개국 중 2번째로 열악한데, 이를 올해 7월부터 주당 최대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크게 줄였다. 당연히 개선해야 할 노동시간이지만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함께 탈출구없이 진행돼버린 셈이다. 법적 강제만 있으면 시장을 일거에 지배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보인다. 이런 식이라면 왜 차제에 최고임금제도까지 함께 창설해 소득격차를 원하는 만큼 획기적으로 줄이려는 생각은 않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이제 우리는 나라의 미래 명운이 갈릴 퀴즈를 풀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OECD 하위수준의 허약한 경제체질과 복지부재를 안고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25~40%에 직접 영향을 주게 될 최저임금을 법적 강제를 통해 GNI 대비 OECD 최고수준으로 충격적으로 밀어올림으로써 분배율, 소득격차, 실업자, 그리고 산업구조조정 등 문제까지 그럴 듯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 나는 다행히 경제학자가 아닌지라 출구를 배려하지 않은 우리나라 경제 구조에 대한 법적 문책의 결과가 어떨지 경제학적으로 추론할 책무가 없다.

 

호랑이는 대한민국을 등에 태우고 이미 내달리기 시작했다. 올해에 더해 내년 최저임금도 급격한 인상이 확정됐으니 올해 상황은 아마 예고편에 불과할 것이다. 이른바 소득주도성장이 성공하면 그 과실은 누구보다 중하위 계층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실패하면 그 포퓰리즘의 대가는 전 국민이 치러야 할 것이다. 두려운 일이다. 어쨌거나 국민 스스로 호랑이 등을 선택했으니 이런 저런 뒷북들이 부질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른바 소득주도성장에 그저 행운 있기를 바란다.

 

김욱, https://twitter.com/GhimWook, 2018. 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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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에 대하여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이윤 옮김 / 필로소픽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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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개소리에 대하여>의 원제는 <On Bullshit>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개소리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조리 없고 당치 않은 말을 비속하게 이르는 말이다. 이 비속적 번역어가 좀 자극적이라는 느낌을 줄 수도 있겠지만 그 의미를 곱씹다보면 오히려 잘 선택된 용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2008 봄, 광화문을 휩쓴 '미국산 쇠고기 수입 위생조건 협의는 광우병 쇠고기에 대한 위험을 완전히 차단하지 못 했다'는 주장은 개소리’였을? 이 주장이 단지 진실/거짓 차원의 다툼이었다면 개소리가 아니다. 반면 이명박은 “1만 명의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하라”(인터넷 <조선일보>, 2008년 5월 31일)는 차원에서 접근했는데, 이는 그 주장을 '개소리'로 들었다는 말이다.

 

양측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문제는 광화문의 외침이 진실/거짓 차원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속셈(예컨대 정권에 대한 공격)의 맹목적 수단이었는지 하는 것이다. (참고로 나는 '개소리'냐 아니냐를 둘러싼 이 아이러니한 엇박자가 노무현의 자살과 현재까지의 우리 정치 현실에 인과적으로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친 것으로 본다. 그렇게 말할 만한 근거가 쌓여 있다.)

 

이런 난해한 사례를 통해 '개소리'에 대한 자세한 분석논리가 궁금해졌다면, 이제 이 책을 읽을 준비가 된 셈이다이 책의 저자 해리 G. 프랭크퍼트는 '개소리'의 본질을 이렇게 규정한다.

 

그것은 바로 진리에 대한 관심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 즉 사태의 진상이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한 무관심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개소리의 본질이라고 보는 것이다.(37.)

 

진실/거짓에 대한 무관심, 이것이 없어서는 안 될 개소리의 일차적 특징이다. 그럼 개소리의 관심은 뭘까?

 

그가 반드시 우리를 기만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그의 기획의도enterprise이다. 개소리쟁이에게 유일하게 없어서는 안 될 독특한 특징은, 그가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속셈을 부정확하게 진술한다는 사실이다.(56.)

 

따라서,

 

정직한 사람의 눈과 거짓말쟁이의 눈은 사실을 향해 있지만, 개소리쟁이는 사실에 전혀 눈길을 주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개소리를 들키지 않고 잘 헤쳐 나가는 데 있어 사실들이 그의 이익과 관계되지 않는 한, 그는 자신이 말하는 내용들이 현실을 올바르게 묘사하든 그렇지 않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기 목적에 맞도록 그 소재들을 선택하거나 가공해낼 뿐이다.(58~59.)

 

그 개념이 거의 드러났다. 이쯤에서 뭔가 연상되는 개념이 있을 것이다. 거짓말쟁이와 개소리쟁이의 차이는 도둑(강도)과 사기꾼의 차이와 흡사한 면이 있다. 도둑(강도)자신이 물건을 훔쳤는지 안 훔쳤는지(뺏었는지 안 뺐었는지)에 대한 사실관계 그 자체를 속이는 것에 관심이 있다. 하지만 사기꾼은 , 권력, 명예 등을 위한 속셈을 속이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 기만적 목적을 위해 그는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진실을 말할 수도 있고, 거짓을 말할 수도 있다. 즉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일련의 아무 말은 진실/거짓의 하이브리드이며, 그 하이브리드 아무 말의 진실/거짓에 대해서는 스스로 아무 관심도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나쁠까? 프랭크퍼트는 (그가 생각하는 진리라는 관점에서)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훨씬 더 큰 진리의 적이다”(63)고 주장한다. 물론 동의하지 못 할 수도 있다. 특히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을 위해 내로남불을 거리낌 없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이들이라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들에겐 아마도 프랭크퍼트의 다음과 같은 경고도 절대 들리지 않을 것이다.

  

말하는 사람의 입맛에 맞는 것 외에는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마구 주장하는 개소리 행위에 과도하게 탐닉하다 보면, 사태의 진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정상적 습관은 약화되거나 잃어버리게 된다.(62.)

 

사태의 진상에 무관심한 기만적 목적의 진영논리’, 즉 사기꾼 식 개소리에만 탐닉할 경우 정확성correctness’이 아닌 진정성sincerity’(66~67)을 내세워 무조건 나(우리)만 잘났다고 이전투구할 수밖에 없다. 진실/거짓(정확성)이 어떠하든, 우리는 진정성이 있고 상대는 진정성이 없으니(우리는 사기꾼이 아니고 상대는 사기꾼이니), 우리는 선하고 상대는 악하다는 맹목적이고 공허한 상호비방만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상 고정불변한 확정적 사기꾼/비사기꾼은 없다는 근거에서, 프랭크퍼트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사실이 이런 한, 진정성 그 자체가 개소리다.(68.)

 

이제 이 리뷰도 결론을 내려야 한다. 우리는 모두 다소간 개소리를 할 수 있다. 심지어 '광우병 쇠고기' 사례에서 보듯, 개소리 아닌 진술이 개소리로 인식될 수도 있다. 이런 어지러운 사태 속에서 만약 진정성, 즉 개소리에 지나치게 심취할 경우 그 결과가 무엇일까? 그 과실이 언제까지나 달콤하다면 우리는 천년만년 개소리를 즐겨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진실/거짓에 무관심한 정치경제사회문화가 역사 속에서 가혹한 대가를 치르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 개소리쟁이들이 진정한 개소리쟁이들이라면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의 진실/거짓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영을 막론하고) 개소리와 개소리쟁이들이 유래 없이 활개 치는 지금 우리 현실을 몹시 우려한다.

 

사족: 책값이 (팸플릿 크기인데) 분량에 비해 너무 비싸다고 느낄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듯한 가격에 내놓은 수많은 개소리 책들보다 이 반개소리’  책이 (그 내용을 제대로 소화할 수만 있다면) 훨씬 더 상큼하게 철학분야 책읽기 애피타이저 역할을 해줄 것이다. 애피타이저야 원래 양이 적은 게 당연하니, 다른 이유라면 몰라도 책값에 비해 분량이 적다는 이유로 외면하지는 말기 바란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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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핑을 하다 난민문제에 관해 날카로운 한 댓글과 마주쳤다. (제주도 예멘) 난민문제에 대한 찬반토론이야 흔하디흔한 논쟁거리인데, 내가 특별히 날카로운이라고 말한 건, 그 논리 전개 때문에 한 말이다. 사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드루킹 수준을 벗어난 댓글을 만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 편견 없이 읽어보기 바란다. 필자 ID‘Al Mohamed Salam; ㄷㆍㄱ로 돼 있는 댓글 전문을 (문장이 깔끔하진 않지만) 그대로 인용한다.

만화가가 의도하는 바가 역지사지를 통해 난민을 받자 같은데 작가는 애초에 난민을 받지 않는 주장자체를 악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게 문제. 난민을 왜 무조건 받아야 하는가? 물어본다면 현실적 문제 상황은 무시하고 과소평가하며 십중십은 불쌍하고 인류애로써라고 할 것임.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일관성 있게 일상생활에서도 인류애를 발휘하여 현실적 여건 문제를 무릅쓰고 고아를 입양한다거나 노숙자를 자신의 집에서 재워줄까? 한 명도 없다고 자신함. 이런 사람들은 난민에 관해서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생각보단 사회를 공유재로서 인식하여 피해가 있어도 자신이 아니라 남이 볼 거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임. 결국 이런 생각이 바탕에 있기 때문에 쉽게 쉽게 난민을 받자고 주장하며 이런 모습을 통해 나는 이런 주장을 하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인간이란 척을 하고 싶을 뿐임. http://www.ziksir.com/ziksir/view/6601

애초에 난 난민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내 주장보다는 단지 관련 주제의 인상적인 논거를 마주한 단상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관련 주제에 대해 뭔가 코멘트하려니 우선 내 입장부터 밝혀두는 게 순리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단지 난민문제에 대해, ‘인류애 정신을 실현하되, 국제사회에서 각국은 (제국주의가 원인이든,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원인이든) 난민발생 책임과 능력에 비례해 난민수용을 해야 한다는 법 이전의 원칙만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위 댓글 이야기다. 댓글처럼 난민문제는 궁극적으로 인류애(헌법전문엔 인류공영으로 표현돼 있다)’의 문제가 맞다. 여기서 댓글은 찬성론자들의 이 인류애가 사회를 공유재로 인식사용함으로써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1968년에 개릿 하딘에 의해 이슈화된 공유재 문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이미 그 이전에도 인식하고 있던) 오래된 학문적 주제인데, 엘리너 오스트롬은 관련 주제로 2009년에 여성으로서는 첫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댓글의 사회를 공유재로 인식한다는 명제는 아마도 대한민국 구성원이 사회체제나 복지제도를 (흔히 인용되는 개릿 하딘의 사례인) 목초지 공유재처럼 이용해 자신의 어떤 사익을 극대화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 경우, ‘난민수용 찬성자들은 사회라는 공유재를 합리적개인적극한적으로 이용해 뭔가 사익을 극대화해야 하는데, 그 극대화되는 사익이 뭘까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댓글은 명쾌하게 도덕적 우월감이라고 대답한다. 즉 난민수용 찬성자들은 공유재인 사회를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자신은 1/n(5천만)의 대가만 치르면서 도덕적 우월감을 극대화시키지만, 이런 게임의 법칙이 장기화되면 공유재인 사회는 피폐화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이 논리에 따르면 난민수용 반대자들은 특이하게도 공유재의 피폐를 걱정해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사적 이익의 극대화를 꾀하지 않은 셈이다.)

 

사실 내가 이 댓글에서 가장 날카롭게 느꼈던 건, ‘사회를 공유재로 인식한다는 명제 자체보다는 그 논거였다. 댓글은 난민수용 찬성자들이 사회를 공유재로 인식해 그런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면, 공유재 아닌 자신의 사유재를 이용해 고아나 노숙자를 상대로 똑같이 자신의 그런 인류애를 실현해보라고 요구한 것이다.

 

, 그렇다면 앞으로 (쟁점이 각각 상당히 다르지만 그만한 공통점도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귀화이민, 외국인 노동자, 난민인도적 체류 등의 관대한 수용이 정말 사회를 공유재처럼 이용하는 현상이어서 사회가 피폐화될 것인지, 아니면 우리 사회 스스로의 필요(사회공동체 규모의 급속한 와해방지라는 이익) 때문에라도 불가피하게 지금보다 더 관대하게 그런 정책을 수행해야 하는지, 이 고도의 지난한 숙제를 우리 사회는 풀어야 한다.

 

위에서 나는 각국의 난민수용은 난민발생 책임과 능력에 비례해 난민수용을 해야 한다는 나름의 원칙만을 제시했지만, 더 구체적인 생각이 있더라도 짧은 지면에 자세히 언급하긴 힘들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댓글의 지적처럼, 이런 문제를 단순히 선악의 문제로 재단하는 건 지극히 위험하다는 것이다. 만약 선악의 문제가 아닌 경제주체의 입장으로만 생각한다면 그 경제주체가 취하는 각각의 상이한 태도를 의외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각 경제주체가 (귀화 이난민합법불법체류자를 포함해) 외국인 노동자 유입문제를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들과 일자리를 경쟁하는 노동자가 반대하는 건 결코 악은 아니다. 당장 일자리를 경쟁하지 않는 직업군에 종사하는 중산층의 경우 자신들의 복지비용 증가와 소비지출 감소가 균형을 이룬다면 (댓글의 주장처럼) 찬성론으로 도덕적 우월감을 추구할 수도 있다. 한편 상호주의 없는 자본과 상품의 무관세 무한 개방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자본가가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에는 관대한 반응을 보여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이런 차원에서 말한다면, 우리는 찬반주장자들의 도덕적 우월감 획득 성향보다 우선 계급계층적인 물질적 이해관계부터 따져보는 게 순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렇게 따질 때는 국내적 복지(확대)논쟁도 사회의 공유재 인식과 도덕적 우월감 획득이라는 정신적 차원보다는 계급계층적인 이해관계와 착취제도의 안정적 유지라는 물질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게 우선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가장 뜨거운 논쟁일수록 가장 차가워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위 댓글의 주인공이 남긴 화두를 열심히 더 연구해봐야겠다. 사회적 논쟁이 합리적 결론으로 이끈다 치고, 그것으로 우리 모두가 사회적 이득을 얻는다면 논쟁이라는 골치 아픈 과정에 참여하지 않는 건 공공재의 무임승차일 수도 있겠다는 부질없는 생각도 든다. 읽고 싶은 아무 책을 읽기도 힘든 무더운 여름, 알지도 못 하는 댓글러의 무뚝뚝한 댓글까지 운 없이 눈에 띄어 그 화두를 덤터기 쓰려니 더 무더운 여름이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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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죽음은 산 자의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인류의 역사를 굳이 길게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우리의 최근 현대사만 살피더라도 그 흔적은 차고 넘친다. 아직도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남아 있을 김지하의 1991년 칼럼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조선닷컴, 199155)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는 발언은 상징적이다. 심지어 그는 죽음을 찬양하고 요구하는가?”라고까지 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당대 죽음의 행렬을 그저 어떤 세력의 요구라고 본 김지하의 관점에 온전히 동의하진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의 관점은 죽은 자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지하의 세상을 보는 이런 시각이 자신의 개인적 경험의 반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의 아내 김영주는 이런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 세력은 김 시인을 소위 민족의 제단에 바치는 제물로 삼으려고 했지요. 박정희 체제에 더 극렬하게 저항하는 문건을 옥중에서 계속 쓰도록 요구했어요. 박정희로 하여금 김 시인을 죽이도록 해 김 시인을 투사영웅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지요. 그 동력으로 박정희 체제를 엎어버리려고 했습니다. ([최보식이 만난 사람] 박경리의 딸·김지하의 아내김영주 토지문화관 관장, 조선닷컴, 2011228(수정1025.))

세월이 지나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시절이 됐다. 그때도 유사한 죽음이 있었다. 그리고 죽음의 바라보는 유사한 시각도 여전했다. 대통령 노무현은 한 노동자의 분신자살을 이렇게 바라봤다.

 

노 대통령은 정부담화에 대해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자살로 인해 목적이 달성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노대통령, "노동담화 어정쩡" 관계장관 질타, 인터넷 한겨레, 2003115.)

 

노무현은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애도가 아닌 질타를 한 셈이다. 자신의 시대에는 막다른 삶의 절망적 표현인 분신자살을 할 이유가 없으므로, 그렇게까지 하는 건 오직 (산 자들을 위한) 투쟁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권력자의 냉혹한 오만이다. ‘죽음의 요구운운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노무현의 편향적 시각이 김지하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어떻게 다른 건지 나는 잘 모른다.

 

 

정치적 죽음을 죽은 자의 것이 아닌 산 자의 것으로 만드는 정치적 모습은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박정희의 피격 원인을 승복하지 못 한 자들은 박근혜를 만들었고, 노무현의 자살 원인을 승복하지 못 한 자들은 문재인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노회찬의 죽음 원인에 승복하지 못 하는 자들도 있는 듯하다.

 

사실 노회찬의 죽음은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오마주로 읽힐 법도 하다. 그들이 남긴 유서엔 공히 자신들의 행위가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세력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절하다. 자살 직전 노무현은 홈페이지에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민주주의-진보-정의 말할 자격 이미 잃었다. 헤어날 수 없는 수렁... 여러분은 저를 버려야", 오마이뉴스, 2009422(최종23))라는 말을 남겼으며, 노회찬은 유서에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전문] 노회찬 유서"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연합뉴스, 2018723)는 말을 남겼다.

 

한데 그들의 유지는 실현되지 않는다. 그들 공히 부끄러움으로 함께 갈 수 없어 자살한 셈이지만, 산 자들은 노무현을 비극적 영웅으로 재탄생시키고, 정의당 대표 이정미는 원통한 죽음에 대한 책임운운하며 난해한 정치적 발언을 시작하고 있다. 한편에선 죽음이라는 결과에 불복하며 호명하고, 다른 한편에선 그 죽음의 원인을 상기시키며 호명한다. 이렇게 산 자의 정치적 욕망은 죽은 자의 부끄러움을 소환한다.

 

하고 싶은 말의 요지는 이것이다. 한탄스럽게도 이명박박근혜가 이 나라 정치수준을 한 없이 낮춘 기준선이 돼버렸다. 문재인 정부의 포퓰리즘이 이명박박근혜의 타락수준보다 훨씬 낫다며 기고만장하는 세상이 돼버렸다. 마찬가지로, 노회찬이 인정한 비리가 살아 있는 정치인들의 짐작 가는 타락수준보다는 훨씬 낫다며 원통해하는 퇴행적 논리가 당당히 머리를 쳐들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정치의 위기는 차악의 정치를 부끄러워하며 최악의 정치를 소멸시키려는 대신, 최악의 정치를 핑계로 차악의 정치를 합리화하려는 데 있다. 대한민국 정치가 노회찬의 명복을 비는 최선의 방법을 찾길 바란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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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의 핵심 측근이었던 김병준이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으로 선임되자 (당연한 반응이지만) 그의 이력이 주된 관심이 됐다. 사실 지난 총선 때 더불어민주당이 위기에 처해 김종인의 건너편 이력을 이용했듯이 자유한국당도 김병준의 그런 이력을 최대한 이용하고 싶을 것이다. 복마전 같은 이런 정치판 속에서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김병준은 다음과 같은 친절한 발언([문답]김병준, 친노향해 노무현정신 왜곡말라여기도, 저기도 대한민국, 인터넷 머니투데이, 2018717)을 해줌으로써 그에 대한 이슈를 최대한 활용했다.

 

Q. 문재인대통령과 참여정부에서 같이 일하셨는데 지금 어찌 보면 대척점에 서게 됐다
A. 대척이라고 보지 말고 서로 좋은 경쟁관계라고 봐야한다. 서로 보완하는 관계가 될 수 있다.
Q. 일부 친노인사들이 노무현 대통령 입에 올리지 말라고 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
A. 그건 노무현 정신 왜곡하는 거다. 노무현 정신은 여기도 대한민국 저기도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우선 '노무현 정신'이 뭘까? ‘지역주의 양비론 정신이다. 노무현은 우리 현대 정치사를 지배한 지역모순을 영남의 패권주의와 호남의 반영패투쟁의 관점에서 파악한 것이 아니라, 당시까지 한나라당을 찍어왔던 영남이나, 새천년민주당을 찍어온 호남이나 모두 정치인들의 지역감정 선동에 잘못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봤다. 그래서 둘 다 잘못했다는 이 지역주의 양비론’으로 새천년민주당의 법통을 끊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해 영남에 지지를 호소했지만 거의 무시당했다.

 

그럼 노무현은 한나라당에 대한 정통성정당성은 인정했을까? 인정했다. '지역주의 양비론'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순간 한나라당을 부정해야 할 이유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호남이 그 특별한 대상일 수밖에 없는데) 개헌을 목적으로 하는 대연정을 위해 한나라당을 인정하자고 호소까지 했다. 다음이 그 주요 발언이다.

  

노무현은 대연정을 제안하면서 “[한나라]당의 역사성과 정통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대타협의 결단으로 극복하자”(노무현, 지역구도 등 정치구조 개혁을 위한 제안: 당원동지 여러분께 드리는 글, 프레시안, 2005728)고 주장했고, “국민들이 약 30% 가까운 지지를 보내고 있는 한나라당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상대이고 정책조율하고 합의하고 할 수 있는 파트너”(노대통령 권력 통째로 내놓는 것도 검토”(종합), 연합뉴스, 2005825)라고 말했으며, 말년엔 정치가 제대로 된다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양대산맥이 계속 유지돼 가야 한다”(노대통령 선거에 걸림돌 된다면 당 비판 감당, 연합뉴스, 2006827)고까지 주장했다.

 

이것이 김병준이 노무현 정신은 여기도 대한민국 저기도 대한민국이라고 말한 근거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절반만 맞는 말이다. 노무현이 아무리 지역주의 양비론 정신으로 무장했다곤 하지만 김병준처럼 자유한국당으로 입당 혹은 합당을 기도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태는 오히려 민주정의당과 3당합당을 감행한 김영삼 정신에 더 가깝다.

 

그런데 노무현 정신김영삼 정신은 얼핏 큰 차이를 보임에도 핵심적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영남패권주의다. 2002, 노무현은 경선 승리 후 김영삼을 찾아가 그에게서 받은 시계를 보여주며 좋게 해석하면 3당합당 이전의 야당을 복원(신민주대연합)(-YS ‘80분 밀담내용 촉각, 인터넷 동아일보, 2002430)하려 했는데, 노무현의 이런 퇴행적 역사관은 자신의 지지율을 떨어뜨리며 후단협 등장의 계기가 됐을 뿐이다. 오히려 김영삼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노무현이 제안한 부산시장 후보천거를 거절함으로써 영남패권주의적 역사의 퇴행을 거기서 끝냈다.

 

결국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주된 정치적 대립의 한 축은 뭔가? ‘노무현 정신’, 즉 지역주의 양비론 정신이고, 한나라당의 역사성과 정통성을 인정하자는 정신이고, 호남의 절대적 지지를 배신했던 정신이며, 김병준이 아이러니하게 활용하고 있는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투항 정신이다.

 

호남은 왜 비난받()는가? 이런 노무현 정신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신과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 호남 정신은 현대 정치사를 지역주의 양비론이 아닌 영남패권주의와 그 저항으로 봐야 한다는 정신이고, 광주학살을 감행한 전두환의 영남파시즘을 수행한 민주정의당(과 그 계승 정당)의 정당성정통성은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 표를 줄 수 없다는 정신이고,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이 잘못됐다는 문재인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정신이고, 지금도 반영패투쟁을 한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호남지역주의자들이라고 비난을 받는 정신이다.

 

진실은 뜻하지 않은 시간,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도 얼마든지 밝혀진다. 김병준이 자신의 권력욕을 합리화하기 위해 '노무현 정신'을 들먹임으로써 노무현을 신화로 만들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진실을 덮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줬다. 자유한국당이 원하는 해결책이 바로 노무현 정신’=‘양대산맥 정신으로 함께 가자는 것인지 모른다. 가히 노무현 정신의 역습이라 할 만하다.

 

매우 한탄스럽지만, 앞으로도 대한민국 정치는 영남패권주의 정신, 영남패권주의에 투항한 노무현의 지역주의 양비론 정신, 그리고 호남의 반영패 정신의 3각 투쟁이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 지역투쟁은 계급투쟁을 무력하게 할 만큼 강력하다. 심지어 허위의식 속에서 진실을 위장하고 싶은 드루킹족들의 준동과도 싸워야 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역사의 진실과 싸워서 승리한 영원한 권력은 없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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