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별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 듯하지만, 사실 영화 <기생충>의 '난제'는 그 결말 부분에서 드러난다. 기택의 아들 기우는 반지하집에서 저택의 기생충으로 갇힌 기택에게 "아버지! 저는 오늘 계획을 세웠습니다"라며 '환상'적인 편지를 쓴다. 그 편지의 요지는 이렇다.


"돈을 벌겠습니다. 아주 많이. 돈을 벌면 이 집부터 사겠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계단만 올라오시면 됩니다."


그것은 기우에게 '근본적인 계획'이었다. , 그러니 이제 우리는 그 '근본적인 계획'에 대해 물어야 한다. 기우의 근본적인 계획이 '돈을 아주 많이 벌어 그 집을 사는 것'이라면 그 계획이 이뤄졌을 때 세상은 뭐가 달라졌을까? 크게 달라진 건 없을 것이다. 기생충이 성공해 숙주가 됐을 뿐이고, 그 숙주에겐 새로운 기생충이 들어와 살 것이다. 한 가지 소소한 희망이 있다면, 기우가 숙주가 된 세상은 조금 더 좋은 세상이기를, 즉 숙주인 기우가 조금 더 좋은 숙주이기를 바랄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절망일까, 희망일까? 혁명을 원한다면 나쁜 절망일 것이고, 혁명을 두려워한다면 좋은 희망일 것이다. 봉준호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말한다.


"오히려 혁명으로부터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아요, 세상이. 혁명의 시대가 많이 지나가고, 혁명이라는 것은 뭔가 부숴뜨려야 될 대상이 있어야 되는 것인데, 그게 뭔지 혁명을 통해 깨트려야 되는 게 뭔지 파악하기가 되게 힘들고 복잡한 세상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복잡한 상항을 표현하는 것 같아요, <Parasite>(<기생충>)는 오히려."

-Santa Barbara Film Festival(산타바바라 영화제), Award for Outstanding Director(감독상) 수상 직후 인터뷰, Jan 23, 2020. 중에서-


봉준호는 혁명의 희망도, 반혁명의 절망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영화 곳곳에서 그랬다. 가난한 자가 곧 착한 자도 아니고, 부자가 곧 악한 자도 아니다. 다만 상층 선 안의 사람들은 안전한 곳에서 하층 선 밖의 사람들에게 관대할 수 있을 뿐이다. '기생충'이란 제목부터 하층에 대한 익숙한 우호적 은유라기보다는 대담한 역설적 은유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투쟁은 계급투쟁으로만 일어나지 않고, 계급 내 갈등이 더 사나울 수 있다. 주인공 기택은 달관한 듯한 철학으로 세상을 향해 냉소한다.


"계획을 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 되거든, 인생이. 그러니까 계획이 없어야 돼, 사람은. 계획이 없으니까 뭐가 잘못될 일도 없고, 또 애초부터 아무 계획이 없으니까 뭐가 터져도 다 상관없는 거야, 사람을 죽이건, 나라를 팔아먹건."


상층일수록 인생을 계획대로 살 수 있겠지만, 하층일수록 계획대로 살기는커녕 위에서 부르면 부르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나라가 흥하면 흥하는 대로, 망하면 망하는 대로, 즉 닥치는 대로 살 수밖에 없다. 차라리 아무 계획이 없는 편이 부질없는 꿈을 꾸며 계획에 얽매이는 것보다 마음이라도 편할 수 있다.


하지만 단지 꿈(환상)이라 해도 계획 없이 살기에는 너무 젊은 기우는 부자, 즉 숙주가 되는 '근본적인 계획'을 세웠다. 기태의 말처럼 그 계획은 "반드시 계획대로 안" 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지만, 설령 그 계획이 이루어진다 해도 세상이 혁명적으로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과거엔 '공산주의라는 근본적인 계획'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세상에 갇혀 계획 없이 출구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봉준호의 전작 <설국열차>에서 과감하게 열차 밖 세상으로 걸어 나가 본 이념적 장면을 상기한다면, <기생충>은 그보단 훨씬 더 뒤로 움츠러든 현실적 모습이다. 아마도, 그래서! 세상을 향해 날 선 경고를 날린 <조커>에 비해 이른바 주류사회가 덜 불편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혁명으로부터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세상은 봉준호의 잘못이 아니다. 그는 단지 우리에게 숙제를 남겼을 뿐이다. 혁명이 아니더라도 뭔가를 해야만 한다. 그게 '더 착한 숙주'가 지배하는 세상을 향한 '익숙한 틀 안에서의 쩨쩨한 전진'이라 할지라도 뭔가를 해야만 한다. 그것이 공생이라면 공생을 해야 한다. 봉준호는 우리에게 그 해묵은 숙제를 참신한 방식으로 절실하게 상기시켰고, 그것이 그를 거장의 반열에 올렸다.


*사족: 나는 프랑스 칸영화제가 2019년에 '이미' 평가한 <기생충>을 미국 아카데미가 2020년에 재평가한 것을 미디어와 대중이 훨씬 큰 이슈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조금 어리둥절했다. 이해되는 측면은 있지만, 프랑스인들에겐 조금 서운한 현상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김욱, https://twitter.com/GhimWook, 2020. 0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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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커>의 주제는 주인공 아서=조커가 자신의 노트에 왼손으로 삐뚤빼뚤 적었던 다음과 같은 문장에 모두 녹아 있다.

 

정신질환의 가장 나쁜 점은 당신이 정상인 것처럼 행동하기를 사람들이 요구한다는 것이다.

The worst part about having a mental illness is people expect you to behave as if you don’t.

 

이 문장이 왜 <조커>의 주제인가? 이 영화가 우리들 사는 세상에 대한 은유가 아니라면 문장 그대로 정신질환자의 삶에 관한 고통 정도로만 읽힐 것이다. 한데 이 영화는 은유다. 그것도 아주 냉혹한 은유다. 그런 의미에서 위 문장을 조금 풀어서 해석하면 이렇게 된다.

 

'정상적인 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들 만큼 열악한 환경 속에 놓여 있는 당신의 가장 큰 고통은 당신에게 심지어(!) 착한 시민 이데올로기까지 세상은 요구한다는 것이다.'

 

착한 시민 이데올로기가 뭔가? 우선 부자는 자신의 계층적 환경 때문에 세상을 향해 울고 싶거나 분노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열악한 계층적 환경에 던져진 아서는 얼마나 세상을 향해 울고 싶거나 분노할 때가 많겠는가? 하지만 최악의 문제는 그때마저도 웃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언제나 웃는 착한 모습으로 사회질서에 순응해야 한다. 이렇게 마음속에선 '울면서'도 세상을 향해선 '웃어야 하는' 것이 바로 착한 시민 이데올로기다.

 

'울면서 웃어야 하는' 아서의 삶은 어쩔 수 없는 망상적 삶이다. 자신을 학대한 부모로부터 '해피(Happy)'로 불리며 사는 망상! 자신을 두들겨 패는 청소년을 어른답게 용서해야 한다는 망상! 자신에게 관심 없는 복지상담사로부터 치료 받을 수 있을 거란 망상! 총을 건네며 덫을 만드는 자를 동료로 생각한 망상! 밑바닥 남자지만 여자와 사랑할 수 있을 거란 망상! 하찮아서 우스운 인간을 찾아내 방송소재로만 이용하는 유명 코미디언에게서 꿈을 찾는 망상! 자신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정치인에게서 가족 같은 애정을 찾는 망상!

 

 

영화는 아서가 조커로 변신해가는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면, 세상이 끊임없이 아서를 조커로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하지만 조커의 폭력이 정당화될 만큼 그 세상 사람들이 특별히 나쁜 사람들도 아니다. 세상은 그저 아서에 냉정하고 무관심했을 뿐이다. 회자되는 호아킨 피닉스의 계단 춤 장면은 아서에서 조커로 완전히 변신한 모습을 인상적으로 담았다. 참고로 영화 <기생충>에선 계단이 부유한 세계에서 빈곤한 세계로 하락하는 은유였는데, <조커>에선 달동네의 착한 망상세계에서 냉혹한 현실세계로 전락하는 은유가 된다.

 

조커는 잔혹하고, 무자비하게 망상을 쳐부순다. 물론 그 무자비함은 의도된 불편함을 불러일으킨다. 당연히 우리는 불편해 해야 한다. 한데 이 불편함에 대해 '폭력미화' 영화라고 비난만 하고 끝내는 건, 값비싼 영화를 아주 값싸게 소모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태(논란)가 자주 반복되곤 하는데, 나쁜 조커를 만든 건 나쁜 영화가 아니라 나쁜 현실이다. 그러니 '영화=거짓'을 불편해 하지 말고 '=진실'을 불편해 해야 한다.

 

 

조커는 (채플린의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란 명언을 오마주해) '내 인생이 비극인줄 알았는데, 희극이었다'고 내뱉는다. 우리는 생계가 달린 광고판을 비극적으로 빼앗긴 아서가 희극적인 조커복장으로 사력을 다해 뒤쫓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웃는다. 마지막 장면은 가까이서 보면 살인의 흔적인 피 발자국을 남기며 걷는 조커의 비극적 모습이지만, 멀리서 복도 끝부분만을 보면 정신질환자를 붙잡으러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희극적 모습일 뿐이다. 가까운 비극을 멀리서만 보고 희극을 보듯 웃고만 있을 순 없잖은가?

 

 

 

'울면서 웃어야 하는' 아서의 삶은 체화된 이데올로기적 삶이다. 심지어 우리는 패륜적 권력으로부터 학살을 당해도 질서 있는 비폭력저항만 허용된다는 이데올로기를 체화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언젠가 이 평화로운 질서에 억눌려온 삶들이 임계점에 도달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지금 아서=조커는 냉정하고 무관심한 세상을 향해 호소하고 있다. 자신의 희극을 좀 더 가까이서 봐주기를, 그래서 자신의 비극을 좀 더 가까이에서 이해해주기를.

 

영화가 묻는 질문에 우리는 대답해야 한다. <조커>의 '정당화되지 않은 폭력'이 불편한가? 어쩌면 머잖아 '폭력의 정당화'라는 입증책임에서 벗어난 수많은 조커들의 탄생을 눈앞 현실 속에서 보게 될 수 있는데도, 오직 영화 속 조커만 불편한가? 내일의 나쁜 조커들을 감당하기 싫다면아직 오늘까지는 착한 아서들이 '정당화되지 않은 폭력은 안 된다'고 믿고 있을 때, 그들의 '울면서 웃어야 하는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그럴 준비가 돼 있는가? 이 세상은 지금 소중한 시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김욱, https://twitter.com/GhimWook, 2019.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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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전>. 이 영화는 좀 특별하다. 리메이크 판인 이 영화가 오리지널 판 <마약전쟁>의 그저 그런 스토리를 빌려 철학적으로 완전히 다른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더 놀라운 것은 수준 높은 철학적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들이대지 않고 단순한 범죄 스릴러 영화 같은 일종의 착시효과를 통해 관객동원까지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품의 완성도를 갖춘 영화가 대중적 성공까지 거두는 것은 모든 영화인의 소망일 것이다.

 

<독전>이 선생이 누구냐는 데 재미의 초점을 맞추라고 제안한다. 뭐 그렇게 어려운 수수께끼는 아니다. 하지만 그 수수께끼를 모두가 맞힌 순간 정작 다른 문제가 제기된다는 점이 핵심이다. 그 문제는 이렇다. ‘모두가 이 선생이라고 생각하는 이 선생이 진짜 이 선생이 맞는가?’ 드러난 이 선생, 즉 락이 이 선생인 건 맞다. 하지만 그 락이 원호가 인생을 걸고 추적한 이 선생일까? 원호가 추적한 이 선생은 락의 실상이 아닌 허상이었다. 원호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실재한다고 믿었던 락의 허상,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 문제의 핵심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왜 이 선생의 실상이 아닌 허상이 세상을 지배하는가?’ 조금 다른 식으로 변주하면, ‘왜 이 선생도 이 선생의 허상을 필요로 하는가?’ 이 화두의 철학적 문제의식은 생각보다 깊고, 넓고, 심지어 불온하기까지 하다. 아마도 많은 이들은 이 철학적 문제의식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불쾌해 하거나, 피하거나, 공격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모두가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이 선생의 허상을 필요로 하는 우리 삶에 대한 각자의 (거부) 반응을 다음 명제를 통해 직접 확인해보기 바란다.

 

나는 명품의 치장을 통해 나의 허상이 존재하는 걸 원한다.’ ‘회사 대표인 나는 내 실제 능력보다 훨씬 더 큰 능력과 권력 네트워크를 가진 것처럼 보이고 싶고, 그런 허상을 활용하고 있다.’ ‘나는 예수나 부처의 실상에는 별 관심 없고, 인간이 믿는(만든) 그 신적 허상에만 관심이 있다.’ ‘나는 노무현의 실상엔 별 관심 없고, 그 허상(이미지)에만 열광한다.’ ‘연예인인 나는 대중이 나를 바라보는 허상을 즐기기도 하고, 그 때문에 고통스럽기도 하다.’ ‘나는 전쟁이나 스포츠에서는 상대를 속이거나 겁먹게 할 허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독전>의 감독 이해영은 누구보다 이런 모순을 더 절감하며 살았는지 모른다. 그는 성소수자임을 고백한 사람이다. 성소수자는 자신의 겉모습, 즉 바깥으로 드러난, 그리고 모두가 실상이라고 간주하는 허상이 내면의 실상과 모순을 빚는다. 남의 삶을 대신 산 락이 그 남의 어릴 적 사진을 보며 원호에게 말한다. “저 아니에요. 근데 저 맞아요.” 원호가 창밖을 내다보며 눈물을 그렁거리다 락에게 너는 살면서 행복했던 적 있냐?”고 묻는 엔딩 대사는 락의 진실에 대한 뒤늦은 반응이자, 허상을 쫒아온 자신의 공허한 삶에 대한 회한이다.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면 허상과 실상의 모순에 대한 그런 개인적 질문이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현상을 놓고 보면 다른 관점의 질문이 훨씬 더 심각해진다. 우리는 과연 사회적 실상에 관심이 있긴 한가? 세상은 오히려 허상의 메커니즘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닐까? 허상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쉽고 편리하게 허상이 지배할 수 있도록 순응해야 하는 건 아닌가? 그건 우리가 실상보다는 허상을 통해 우리를 위로하고, 조작하고, 지배하고, 이익을 얻고, 만족하려는 속내가 본능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은 아닌가?

 

<마약전쟁>빌리는 허수아비로 밝혀지는 실재 인물이었다. 이런 맥거핀적 발상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한데 <독전>의 이해영은 이 평범한 기법을 실재하는 이 선생부재하는 이 선생’, 즉 실상과 허상의 모순이라는 모티브로 비범하게 변경했다. 그리고 이 모티브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로 담아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마약전쟁>과는 아예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거의 찾기 힘든 특별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독전>의 영어 제목은 친절하게도 <Believer>. 그러므로 우리는 그 제목이 함축하고 있는 진지한 질문에 잠시라도 정색하며 대답하는 게 예의다. 우리가 믿는 것은 실상인가, 허상인가? 아니,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것은 실상인가, 허상인가? 실상이 아닌 허상으로 살아가는 자, 혹은 그 허상을 실상으로 믿고 (싶어 하며) 살아가는 자,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도 행복할 수 있는가? 어차피 그것이 삶이고, 세상인가? 엔딩에서 외롭고 차갑게 울리는 한 방의 총소리가 우리의 맹목적 삶을 소스라치게 각성시킨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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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 박해영에 대하여

 

그녀가 재능 있는 작가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지에 오른 작가란 건 미처 몰랐다. 무협지엔 이해 불가능한 내공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생을 마감하는 절정 고수로부터 불공평하게 내공을 전수받은 행운아다. 나는 박해영도 분명히 그런 은밀한 사연을 갖고 있는 무림 고수라고 의심한다.

 

2. 연출 김원석에 대하여

  

김원석 역시 이름 있는 연출자이긴 하다. 하지만 적어도 난 그의 전작에서 보여준 영상에 별 관심이 없었다. 즉 그의 작품 완성도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번엔 달랐다.

 

  

 

 

나는 그가 연출한 후계동 밤의 '정희네' 앞길에서 고흐의 <아를 포룸광장의 카페 테라스> 밤 분위기를 느꼈다. 우리가 보는 고흐의 이 그림 속 공간 색감은 일반적으로 묘사되는 객관적 감각이 아니다삭막한 세상에서 고흐의 그림을 보는 우리는 비현실적인 푸른 하늘에서 터지듯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과 빛나는 노란색 테라스가 감싸주는 아늑한 따뜻함 속으로 꿈을 꾸듯 빨려 들어간다. 김원석은 악조건 속 한국 드라마에서도 악착같이 그런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작품 속 출연자들의 연기가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마치 생활 속 다큐를 보는 듯 자연스러웠다면 김원석의 공이 컸을 것이다. 특별히 이지안 역을 맡은 이지은은 대체불가능한 연기를 보여줬다.

 

3. 작품에 대하여

 

이 작품은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유토피아 장르에 속한다. 사실 이 포맷을 승화시킨 건 캐릭터의 대사가 그 주제를 짜임새 있게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구도를 잘못 다루면 권선징악이라는 전근대적인 진부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졸작이 될 수도 있었다. 한데 이 드라마가 훌륭한 건 그런 전근대적 진부함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드라마 속 캐릭터 모두!’는 이 세상에 대해 할 말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현실 속 악당 도준영도 분명히 할 말이 있으며, 바람피운 아내 강윤희도 태산처럼 할 말이 있다. 심지어 사채업자 이광일의 눈빛에도 나름의 사연이 있다.

 

할 말 있음이 바로 단순하고 전근대적인 권선징악적 선악구도를 해체한다. 우리는 모두 할 말을 가지고 있는 그 중 누군가일 뿐이다. 그러니 드라마 속 누군가를 간단하게 선/악으로 재단하고 섣부른 비난 혹은 상찬을 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우리가 드라마 속 삼안E&C라는 현실세계와 후계동이라는 가상세계(유토피아)의 모순을 한없이 상념하고 느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후계동의 가족주의가 미국식 가족주의와는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미국식 가족주의는 소가족주의지만 후계동의 가족주의는 대가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 한국식 대가족주의 유토피아에서 고통스럽게 좌절한 인물이 강윤희다. 그녀는 삼안E&C라는 현실과 후계동이라는 유토피아 사이에서 그 모순을 실감하게 해주는 인물이다. 그녀 덕에 우리는 후계동 유토피아의 중심 인물 박동훈이 왜 불쌍하게느껴지는지, 즉 유토피아 그 자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돌이켜 묻게 만든다. 마지막 회, 홀로 있는 집 안에서 서럽게 우는 박동훈은 왜 우는 것일까? 유토피아가 결국 누군가의 묵묵한 희생을 필요로 한다면 그 유토피아의 본질은 무엇인가?

 

후계동 유토피아에서 현실 삶 속으로 출근하는 박동훈과 현실 삶 속에서 후계동 유토피아를 방문한 이지안은 서로를 연민한다. 이지안은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살아가는 박동훈을 이해했고, 박동훈은 상처받아 너무 일찍 커버린위악적인 그녀를 이해했다. 유토피아를 이해하는 자만이 지옥 같은 현실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지옥 같은 현실을 이해하는 자만이 유토피아를 진정으로 꿈꿀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를 연민한다. 두 세상은, 박동훈과 이지안은, 아니 내 마음 속에서 공존하는 나와 너는, 그렇게 서로를 연민한다.

 

4. O.S.T.

 

맑고 애절한 목소리에 담아 들려주는 <어른>(Sondia)의 가사는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현실 속에서 '나는 내가 될 수 없다.' 오직 꿈 속에서만 '나는 내가 된다.' 철학자는 이런 사태를 '소외'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나의 작은 세상'이 현실 속에서도 그녀와 이 땅의 청춘들을 향해 웃어주기를 <나의 아저씨>는 소망했다. 아울러 <아득히 먼 곳>과 <백만 송이 장미>의 가사가 그렇게 절묘하게 인용된 것에 대해서도 감탄한다.

 

5. 덧붙이기 싫은 사족

 

이 드라마를 둘러싼 부질없는 논란은 우리나라 문화비평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예술적 은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눈앞의 이야기를 주입식 도덕관념에 맞춰 파편적으로 재단하는 능력 밖에 없다. 예컨대 주인공이 담배 피웠다’, ‘미성년자가 술 마셨다’, ‘불법 U턴했다’, ‘폭행했다’, ‘바람피웠다’, ‘의상이 불량했다’, ‘쓰레기 무단투기했다’, ‘길거리에서 똥 쌌다등등. 그런 것들이 그들 이슈의 거의 전부다! 이 드라마도 예외가 아니다. 이번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나이 차가 많다’, ‘남자가 여자를 심하게 때렸다는 비난이 주제를 삼키는 화두로 등장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소란스런 대중들의 예술에 대한 도덕적 자기 검열시대가 아닌가 한다.

 

 

우선, 남자 이광일의 여자 이지안에 대한 폭력? 그 불편한 폭력 없이 이지안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가능한가? 이 현실의 비정함에 쫓기듯 살아가는 가진 것 없는 인생, 여성, 청춘에 대한 은유적 배경 설명이 불필요한가? 그런 장면을 문제 삼는 건 마치 노동자가 착취당하는 모습을 담은 화면에 맹목적으로 분노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폭력적 영상을 통해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도 있고, 아름다운 영상을 통해 모순을 위선적으로 감출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의도다!

 

다음, 나이 많은 남자 박동훈과 어린 여자 이지안의 관계? 권컨대 나이 많은 남자와 어린 여자의 허구 속 정신적 불륜조차 못마땅한 사람들(놀랍지도 않지만 이런 비난을 선동한 미디어 기사도 많다)은 이 드라마에 대한 같잖은 도덕적 비난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소설(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더 리더를 읽으며 분을 풀기 바란다. 은유는 모르겠고, 파편적 이야기 자체만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아주 잘 보일 것이다. 나이 많은 여자(36)와 어린 남자(15)육체적 불륜관계가 거리낌 없이 그려진다.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두 사람의 나이 차이를 언급하는 것은 오직 미국에서만 있는 현상이라며, 독일이나 프랑스 등 유럽의 독자들에게서는 한 번도 그와 같은 질문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원하는 게 딱히 나이 많은 여자와 어린 남자의 육체적 불륜 이야기도 아니라면 다른 방법이 없다. ‘부도덕한 허구를 배경 삼는 불편한 소설영화보다는 아예 올바른 이데올로기로만 가득 찬 도덕책을 보며 마음 편히 즐기기 바란다. 대중 예술 생산자들은 대중적 소비에 편승하기 위해 하찮은 비난조차 힘들어하며 이야기의 전개를 왜곡시킴으로써 그 완성도를 추락시킬 수 있다. 그나마 종종 훌륭한 비평이 있어서 안도하기도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의 치졸한 문화 비평수준이 매우 위험하고 슬프게 느껴질 때가 많다. 대중 예술은 곧 대중의 수준이다. 대중인 내 수준을 한껏 높여준 <나의 아저씨>에 감사한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5. 19(수정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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