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커>의 주제는 주인공 아서=조커가 자신의 노트에 왼손으로 삐뚤빼뚤 적었던 다음과 같은 문장에 모두 녹아 있다.
정신질환의 가장 나쁜 점은 당신이 정상인 것처럼 행동하기를 사람들이 요구한다는 것이다.
The worst part about having a mental illness is people expect you to behave as if you don’t.
이 문장이 왜 <조커>의 주제인가? 이 영화가 우리들 사는 세상에 대한 은유가 아니라면 문장 그대로 정신질환자의 삶에 관한 고통 정도로만 읽힐 것이다. 한데 이 영화는 은유다. 그것도 아주 냉혹한 은유다. 그런 의미에서 위 문장을 조금 풀어서 해석하면 이렇게 된다.
'정상적인 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들 만큼 열악한 환경 속에 놓여 있는 당신의 가장 큰 고통은 당신에게 심지어(!) 착한 시민 이데올로기까지 세상은 요구한다는 것이다.'
착한 시민 이데올로기가 뭔가? 우선 부자는 자신의 계층적 환경 때문에 세상을 향해 울고 싶거나 분노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열악한 계층적 환경에 던져진 아서는 얼마나 세상을 향해 울고 싶거나 분노할 때가 많겠는가? 하지만 최악의 문제는 그때마저도 웃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언제나 웃는 착한 모습으로 사회질서에 순응해야 한다. 이렇게 마음속에선 '울면서'도 세상을 향해선 '웃어야 하는' 것이 바로 착한 시민 이데올로기다.
'울면서 웃어야 하는' 아서의 삶은 어쩔 수 없는 망상적 삶이다. 자신을 학대한 부모로부터 '해피(Happy)'로 불리며 사는 망상! 자신을 두들겨 패는 청소년을 어른답게 용서해야 한다는 망상! 자신에게 관심 없는 복지상담사로부터 치료 받을 수 있을 거란 망상! 총을 건네며 덫을 만드는 자를 동료로 생각한 망상! 밑바닥 남자지만 여자와 사랑할 수 있을 거란 망상! 하찮아서 우스운 인간을 찾아내 방송소재로만 이용하는 유명 코미디언에게서 꿈을 찾는 망상! 자신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정치인에게서 가족 같은 애정을 찾는 망상!
영화는 아서가 조커로 변신해가는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면, 세상이 끊임없이 아서를 조커로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하지만 조커의 폭력이 정당화될 만큼 그 세상 사람들이 특별히 나쁜 사람들도 아니다. 세상은 그저 아서에 냉정하고 무관심했을 뿐이다. 회자되는 호아킨 피닉스의 계단 춤 장면은 아서에서 조커로 완전히 변신한 모습을 인상적으로 담았다. 참고로 영화 <기생충>에선 계단이 부유한 세계에서 빈곤한 세계로 하락하는 은유였는데, <조커>에선 달동네의 착한 망상세계에서 냉혹한 현실세계로 전락하는 은유가 된다.
조커는 잔혹하고, 무자비하게 망상을 쳐부순다. 물론 그 무자비함은 의도된 불편함을 불러일으킨다. 당연히 우리는 불편해 해야 한다. 한데 이 불편함에 대해 '폭력미화' 영화라고 비난만 하고 끝내는 건, 값비싼 영화를 아주 값싸게 소모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태(논란)가 자주 반복되곤 하는데, 나쁜 조커를 만든 건 나쁜 영화가 아니라 나쁜 현실이다. 그러니 '영화=거짓'을 불편해 하지 말고 '삶=진실'을 불편해 해야 한다.
조커는 (채플린의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란 명언을 오마주해) '내 인생이 비극인줄 알았는데, 희극이었다'고 내뱉는다. 우리는 생계가 달린 광고판을 비극적으로 빼앗긴 아서가 희극적인 조커복장으로 사력을 다해 뒤쫓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웃는다. 마지막 장면은 가까이서 보면 살인의 흔적인 피 발자국을 남기며 걷는 조커의 비극적 모습이지만, 멀리서 복도 끝부분만을 보면 정신질환자를 붙잡으러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희극적 모습일 뿐이다. 가까운 비극을 멀리서만 보고 희극을 보듯 웃고만 있을 순 없잖은가?
'울면서 웃어야 하는' 아서의 삶은 체화된 이데올로기적 삶이다. 심지어 우리는 패륜적 권력으로부터 학살을 당해도 질서 있는 비폭력저항만 허용된다는 이데올로기를 체화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언젠가 이 평화로운 질서에 억눌려온 삶들이 임계점에 도달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지금 아서=조커는 냉정하고 무관심한 세상을 향해 호소하고 있다. 자신의 희극을 좀 더 가까이서 봐주기를, 그래서 자신의 비극을 좀 더 가까이에서 이해해주기를.
영화가 묻는 질문에 우리는 대답해야 한다. <조커>의 '정당화되지 않은 폭력'이 불편한가? 어쩌면 머잖아 '폭력의 정당화'라는 입증책임에서 벗어난 수많은 조커들의 탄생을 눈앞 현실 속에서 보게 될 수 있는데도, 오직 영화 속 조커만 불편한가? 내일의 나쁜 조커들을 감당하기 싫다면, 아직 오늘까지는 착한 아서들이 '정당화되지 않은 폭력은 안 된다'고 믿고 있을 때, 그들의 '울면서 웃어야 하는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그럴 준비가 돼 있는가? 이 세상은 지금 소중한 시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김욱, https://twitter.com/GhimWook, 2019. 10.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