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소리에 대하여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이윤 옮김 / 필로소픽 / 201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개소리에 대하여>의 원제는 <On Bullshit>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개소리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조리 없고 당치 않은 말을 비속하게 이르는 말이다. 이 비속적 번역어가 좀 자극적이라는 느낌을 줄 수도 있겠지만 그 의미를 곱씹다보면 오히려 잘 선택된 용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2008 봄, 광화문을 휩쓴 '미국산 쇠고기 수입 위생조건 협의는 광우병 쇠고기에 대한 위험을 완전히 차단하지 못 했다'는 주장은 개소리’였을? 이 주장이 단지 진실/거짓 차원의 다툼이었다면 개소리가 아니다. 반면 이명박은 “1만 명의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하라”(인터넷 <조선일보>, 2008년 5월 31일)는 차원에서 접근했는데, 이는 그 주장을 '개소리'로 들었다는 말이다.

 

양측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문제는 광화문의 외침이 진실/거짓 차원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속셈(예컨대 정권에 대한 공격)의 맹목적 수단이었는지 하는 것이다. (참고로 나는 '개소리'냐 아니냐를 둘러싼 이 아이러니한 엇박자가 노무현의 자살과 현재까지의 우리 정치 현실에 인과적으로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친 것으로 본다. 그렇게 말할 만한 근거가 쌓여 있다.)

 

이런 난해한 사례를 통해 '개소리'에 대한 자세한 분석논리가 궁금해졌다면, 이제 이 책을 읽을 준비가 된 셈이다이 책의 저자 해리 G. 프랭크퍼트는 '개소리'의 본질을 이렇게 규정한다.

 

그것은 바로 진리에 대한 관심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 즉 사태의 진상이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한 무관심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개소리의 본질이라고 보는 것이다.(37.)

 

진실/거짓에 대한 무관심, 이것이 없어서는 안 될 개소리의 일차적 특징이다. 그럼 개소리의 관심은 뭘까?

 

그가 반드시 우리를 기만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그의 기획의도enterprise이다. 개소리쟁이에게 유일하게 없어서는 안 될 독특한 특징은, 그가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속셈을 부정확하게 진술한다는 사실이다.(56.)

 

따라서,

 

정직한 사람의 눈과 거짓말쟁이의 눈은 사실을 향해 있지만, 개소리쟁이는 사실에 전혀 눈길을 주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개소리를 들키지 않고 잘 헤쳐 나가는 데 있어 사실들이 그의 이익과 관계되지 않는 한, 그는 자신이 말하는 내용들이 현실을 올바르게 묘사하든 그렇지 않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기 목적에 맞도록 그 소재들을 선택하거나 가공해낼 뿐이다.(58~59.)

 

그 개념이 거의 드러났다. 이쯤에서 뭔가 연상되는 개념이 있을 것이다. 거짓말쟁이와 개소리쟁이의 차이는 도둑(강도)과 사기꾼의 차이와 흡사한 면이 있다. 도둑(강도)자신이 물건을 훔쳤는지 안 훔쳤는지(뺏었는지 안 뺐었는지)에 대한 사실관계 그 자체를 속이는 것에 관심이 있다. 하지만 사기꾼은 , 권력, 명예 등을 위한 속셈을 속이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 기만적 목적을 위해 그는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진실을 말할 수도 있고, 거짓을 말할 수도 있다. 즉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일련의 아무 말은 진실/거짓의 하이브리드이며, 그 하이브리드 아무 말의 진실/거짓에 대해서는 스스로 아무 관심도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나쁠까? 프랭크퍼트는 (그가 생각하는 진리라는 관점에서)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훨씬 더 큰 진리의 적이다”(63)고 주장한다. 물론 동의하지 못 할 수도 있다. 특히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을 위해 내로남불을 거리낌 없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이들이라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들에겐 아마도 프랭크퍼트의 다음과 같은 경고도 절대 들리지 않을 것이다.

  

말하는 사람의 입맛에 맞는 것 외에는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마구 주장하는 개소리 행위에 과도하게 탐닉하다 보면, 사태의 진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정상적 습관은 약화되거나 잃어버리게 된다.(62.)

 

사태의 진상에 무관심한 기만적 목적의 진영논리’, 즉 사기꾼 식 개소리에만 탐닉할 경우 정확성correctness’이 아닌 진정성sincerity’(66~67)을 내세워 무조건 나(우리)만 잘났다고 이전투구할 수밖에 없다. 진실/거짓(정확성)이 어떠하든, 우리는 진정성이 있고 상대는 진정성이 없으니(우리는 사기꾼이 아니고 상대는 사기꾼이니), 우리는 선하고 상대는 악하다는 맹목적이고 공허한 상호비방만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상 고정불변한 확정적 사기꾼/비사기꾼은 없다는 근거에서, 프랭크퍼트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사실이 이런 한, 진정성 그 자체가 개소리다.(68.)

 

이제 이 리뷰도 결론을 내려야 한다. 우리는 모두 다소간 개소리를 할 수 있다. 심지어 '광우병 쇠고기' 사례에서 보듯, 개소리 아닌 진술이 개소리로 인식될 수도 있다. 이런 어지러운 사태 속에서 만약 진정성, 즉 개소리에 지나치게 심취할 경우 그 결과가 무엇일까? 그 과실이 언제까지나 달콤하다면 우리는 천년만년 개소리를 즐겨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진실/거짓에 무관심한 정치경제사회문화가 역사 속에서 가혹한 대가를 치르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 개소리쟁이들이 진정한 개소리쟁이들이라면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의 진실/거짓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영을 막론하고) 개소리와 개소리쟁이들이 유래 없이 활개 치는 지금 우리 현실을 몹시 우려한다.

 

사족: 책값이 (팸플릿 크기인데) 분량에 비해 너무 비싸다고 느낄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듯한 가격에 내놓은 수많은 개소리 책들보다 이 반개소리’  책이 (그 내용을 제대로 소화할 수만 있다면) 훨씬 더 상큼하게 철학분야 책읽기 애피타이저 역할을 해줄 것이다. 애피타이저야 원래 양이 적은 게 당연하니, 다른 이유라면 몰라도 책값에 비해 분량이 적다는 이유로 외면하지는 말기 바란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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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투쟁이든 투쟁의 논리는 조금 아이러니한 데가 있다. 궁극적으로 투쟁 대상자를 박멸시킬 것이 아니라면(역사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자들도 종종 있었다), 그 투쟁 대상자와의 관계를 궁극적으로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아주 중요한 핵심 의제가 된다. 예컨대 페미니즘은 남성을, 반영패투쟁은 영남인을, 계급투쟁은 자본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헌법을 보자. 1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4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로동자, 농민, 군인, 근로인테리를 비롯한 근로인민에게 있다고 규정한다. 무슨 말인가? 북한의 근로인민이 주권을 가지고, 남북한 전체 인민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의미다.

 

, ‘북한이 남북한 전체 인민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논리야 우리도 그런 식의 논리로 싸워 왔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한 가지 의문이 있을 것이다. 왜 북한의 주권은 북한 전체 인민이 아닌 근로인민이 가지는 걸까? 예컨대 심신이 허약해 노동을 못 하는 병약자나 노인에겐 주권이 없단 말인가?

 

알랭 바디우는 <알랭 바디우, 공산주의 복원을 말하다>에서 간단한 표현으로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마르크스가 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보편적인 것이라고 했던 의미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어떤 개별적인 속성도 갖고 있지 않은, 이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따라서 부정의 보편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북한 헌법은 20세기 공산주의 실험이 모두 그랬던 것처럼,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태껏 (역사적인 의미로는 거의 절망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로 진보해가지 못했다는 고백이다. 이는 20세기 공산주의는 결국 뭔가 다시,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논리를 갖춰, 새로운 역사를 향해, 새로운 출발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최근 대한민국의 많은 이들이 페미니즘의 극단적 변이 현상에 놀라고 있는 듯하다. 역사 경험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투쟁에나 이런 극단적 변종은 항상 있었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 변종이 영구적으로 승리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문제는 이런 식의 극단적 변종의 속물적 언행을 이념적으로 어떻게 제압하느냐가 사실상 모든 운동의 성패를 좌우한다.

 

근원적으로 우리 사회가 이런 어그로 소동에 당황하는 건 우리나라 주류 페미니즘 철학의 빈곤함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모든 투쟁에서 철학의 빈곤함이 역사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철저히 숙고해야 한다.

 

모든 투쟁은 그 투쟁을 야기한 적대자를 박멸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 지역, 계급 등등, 모든 투쟁의 궁극적 목적은 각 범주의 불평등부정의를 로 만드는 데 있다. 물론 투쟁의 주체와 대상자, 혹은 투쟁 주체의 이념과 대상자의 반이념을 구분하는 것은 투쟁과정에서 필수 요건이다. 하지만 불평등부정의가 무가 된다면 투쟁을 위한 적대적 구분이 왜 영구적으로 필요하겠는가? 무가 돼야 한다는 건 결국 투쟁 주체와 대상자의 적대적 구분을 지양하고 보편성을 확립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투쟁도 투쟁의 주체가 무로 지양될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하지 못 하는 한 궁극적으로는 실패를 예정한 것이다. 앞으로도 더 나은 삶을 위해,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여러 범주의 투쟁 주체로서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 모두는, 스스로, 언젠가, 반드시, ‘로 지양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 희망 없는 모든 투쟁은 불온하다. 투쟁 대상자가 역사적으로 불온했던 그만큼, 아니 어쩌면 열악한 처지에 있는 자들의 피눈물을 오도오용하는 그만큼 더, 불온하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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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22일, 대한민국 교육부 정책기획관 나향욱이 파면징계됐다. '개돼지'에 관한 철학적 담론을 '민중'에게 기념비적으로 제기하고, 얼떨결에 '살신성인'한 셈이다. 사실 이 이슈에 관한 논쟁은 아주 까마득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나향욱이 '기여'한 게 있다면 이 이슈를 '민중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부각시켰다는 것뿐이다. 나는 이 '개돼지론'의 역사가 철학 그 자체의 역사라고 확신한다.

 

이 세상은 어쩌다 인간/개돼지로 나뉘었을까? 인간의 일일까, 신의 뜻일까?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일이라고 설파한 사람이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다.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고, 모든 것의 왕이다. 그것이 어떤 이들은 신으로 또 어떤 이들은 인간으로 드러내며, 어떤 이들은 노예로 또 어떤 이들은 자유인으로 만든다. (249쪽.)

 

전쟁은 상호대립하는 두 인간집단이 상호의존하며 일체가 돼 적대적 모순을 극단적으로 폭발시키는 현상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개돼지를 만들어내는 원리가 인간 외부에서 작동하는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간의 문제임을 설파한 것이다.

 

반면 소크라테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의 관심은 개인의 영혼으로 향한다. 그것은 인간을 지배하는 지혜와 이성이며, 궁극적으로는 신으로 향한다. 그의 가장 유명한 경구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소크라테스: (...) 속 편한 친구, 부디 나의 말과 델피에 있는 글귀를 받아들여 자네 자신을 알도록 하게. (...) 자신을 알라고 명하는 자는 우리에게 혼을 알라고 시키는 걸세. (124b. 87~88쪽, 130e. 106쪽.)

 

위작논란이 있지만 소크라테스 주장의 일관성에 정확히 부합한다. 그런데 혼을 아는 것은 또 무엇인가? 현실적으로 개인의 처지에 따른 지혜와 이성을 초월하여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계급을 바라보는 소크라테스 다음과 같은 시선이 이어진다.

 

 

그러니까, 트라시마코스 선생, 그 밖의 다른 어떤 통솔(다스림: archē)을 맡은 사람이든, 그가 통솔자(다스리는 자)인 한은, 자신에게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통솔(다스림)을 받는 쪽 그리고 자신이 일해 주게 되는 쪽에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오. 또한 그가 말하는 모든 것도, 그가 행하는 모든 것도 그 쪽을 염두에 두고서 그 쪽에 편익이 되고 적절한 것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고 행하오. (342e. 92~93쪽.)

 

소크라테스는 계급체제의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1%가 99%를 위하고 있다는 논리다. 그러니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의 다음과 같은 논리가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건 성향에 있어서 제화공인 사람은 구두 만드는 일을 하되 다른 일은 결코 하지 않는 것이 옳고, 목공은 목공의 일을 하는 것이, 그리고 그 밖의 경우에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것이었네. (…) 그러니까 다시, ‘올바름을 생기게 함은 곧 혼에 있어서 여러 부분이 서로 지배하며 지배받는 관계를 성향에 따라확립함이요, 반면에 올바르지 못함을 생기게 함은 곧 서로 다스리며 다스림을 받는 관계를 성향에 어긋나게확립함이 아니겠는가? (443c. 307~308쪽, 444d. 310~311쪽.)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식 지배/피지배체제의 핵심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것이다. 1%는 1%의, 99%는 99%의 처지=이성=혼을. 하지만 이런 생각이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분석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제화공의 성향을 타고 태어난 왕, 왕의 성향을 타고난 제화공을 어떻게 할 것이며, 누군가 그런 성향을 타고 태어났다고 누가 판단할 것인가?

 

이상국가를 향한 이런 식의 대책없는 발언이야말로 현실을 합리화하는 지름길을 아주 쉽게 터준다. 그것이 현실 속에서 합리화될 때, 성향에 따른 1%의 지배인간이 99%의 피지배인간을 이성에 따라 먹여살려주겠다며, 1%의 인간이 99%의 인간을 개돼지 취급하며 착취하는 사회가 합리화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므로 강단 있게 '이것 말고 뭣이 중헌디?'라고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1. 지배/피지배는 왜 일어나는가? 신의 뜻? 인간의 일?

2. 지배/피지배를 가르는 사유는 무엇인가? 인간적 성향? 사회구조?

3. 지배자는 피지배자를 위한 지배를 하는가 아니면 자신들을 위한 지배를 하는가? 양을 위한 목자? 목자를 위한 양?

4. 지배/피지배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신분제강화? 계층이동과 세속적 지배통제 혹은 혁명?

 

삼척동자도 어렴풋이 답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철학사가  이런 손쉬운 문제를 둘러싸고 현학적으로 싸워온 역사라는 걸 알면 누구라도 철학에 대한 경외심이 웬만큼은 사라질 것이다. 바로 그때가 철학을 공부하기 가장 좋은 때일 것이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6.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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