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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죽음은 산 자의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인류의 역사를 굳이 길게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우리의 최근 현대사만 살피더라도 그 흔적은 차고 넘친다. 아직도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남아 있을 김지하의 1991년 칼럼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조선닷컴, 199155)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는 발언은 상징적이다. 심지어 그는 죽음을 찬양하고 요구하는가?”라고까지 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당대 죽음의 행렬을 그저 어떤 세력의 요구라고 본 김지하의 관점에 온전히 동의하진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의 관점은 죽은 자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지하의 세상을 보는 이런 시각이 자신의 개인적 경험의 반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의 아내 김영주는 이런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 세력은 김 시인을 소위 민족의 제단에 바치는 제물로 삼으려고 했지요. 박정희 체제에 더 극렬하게 저항하는 문건을 옥중에서 계속 쓰도록 요구했어요. 박정희로 하여금 김 시인을 죽이도록 해 김 시인을 투사영웅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지요. 그 동력으로 박정희 체제를 엎어버리려고 했습니다. ([최보식이 만난 사람] 박경리의 딸·김지하의 아내김영주 토지문화관 관장, 조선닷컴, 2011228(수정1025.))

세월이 지나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시절이 됐다. 그때도 유사한 죽음이 있었다. 그리고 죽음의 바라보는 유사한 시각도 여전했다. 대통령 노무현은 한 노동자의 분신자살을 이렇게 바라봤다.

 

노 대통령은 정부담화에 대해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자살로 인해 목적이 달성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노대통령, "노동담화 어정쩡" 관계장관 질타, 인터넷 한겨레, 2003115.)

 

노무현은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애도가 아닌 질타를 한 셈이다. 자신의 시대에는 막다른 삶의 절망적 표현인 분신자살을 할 이유가 없으므로, 그렇게까지 하는 건 오직 (산 자들을 위한) 투쟁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권력자의 냉혹한 오만이다. ‘죽음의 요구운운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노무현의 편향적 시각이 김지하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어떻게 다른 건지 나는 잘 모른다.

 

 

정치적 죽음을 죽은 자의 것이 아닌 산 자의 것으로 만드는 정치적 모습은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박정희의 피격 원인을 승복하지 못 한 자들은 박근혜를 만들었고, 노무현의 자살 원인을 승복하지 못 한 자들은 문재인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노회찬의 죽음 원인에 승복하지 못 하는 자들도 있는 듯하다.

 

사실 노회찬의 죽음은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오마주로 읽힐 법도 하다. 그들이 남긴 유서엔 공히 자신들의 행위가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세력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절하다. 자살 직전 노무현은 홈페이지에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민주주의-진보-정의 말할 자격 이미 잃었다. 헤어날 수 없는 수렁... 여러분은 저를 버려야", 오마이뉴스, 2009422(최종23))라는 말을 남겼으며, 노회찬은 유서에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전문] 노회찬 유서"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연합뉴스, 2018723)는 말을 남겼다.

 

한데 그들의 유지는 실현되지 않는다. 그들 공히 부끄러움으로 함께 갈 수 없어 자살한 셈이지만, 산 자들은 노무현을 비극적 영웅으로 재탄생시키고, 정의당 대표 이정미는 원통한 죽음에 대한 책임운운하며 난해한 정치적 발언을 시작하고 있다. 한편에선 죽음이라는 결과에 불복하며 호명하고, 다른 한편에선 그 죽음의 원인을 상기시키며 호명한다. 이렇게 산 자의 정치적 욕망은 죽은 자의 부끄러움을 소환한다.

 

하고 싶은 말의 요지는 이것이다. 한탄스럽게도 이명박박근혜가 이 나라 정치수준을 한 없이 낮춘 기준선이 돼버렸다. 문재인 정부의 포퓰리즘이 이명박박근혜의 타락수준보다 훨씬 낫다며 기고만장하는 세상이 돼버렸다. 마찬가지로, 노회찬이 인정한 비리가 살아 있는 정치인들의 짐작 가는 타락수준보다는 훨씬 낫다며 원통해하는 퇴행적 논리가 당당히 머리를 쳐들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정치의 위기는 차악의 정치를 부끄러워하며 최악의 정치를 소멸시키려는 대신, 최악의 정치를 핑계로 차악의 정치를 합리화하려는 데 있다. 대한민국 정치가 노회찬의 명복을 비는 최선의 방법을 찾길 바란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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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의 핵심 측근이었던 김병준이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으로 선임되자 (당연한 반응이지만) 그의 이력이 주된 관심이 됐다. 사실 지난 총선 때 더불어민주당이 위기에 처해 김종인의 건너편 이력을 이용했듯이 자유한국당도 김병준의 그런 이력을 최대한 이용하고 싶을 것이다. 복마전 같은 이런 정치판 속에서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김병준은 다음과 같은 친절한 발언([문답]김병준, 친노향해 노무현정신 왜곡말라여기도, 저기도 대한민국, 인터넷 머니투데이, 2018717)을 해줌으로써 그에 대한 이슈를 최대한 활용했다.

 

Q. 문재인대통령과 참여정부에서 같이 일하셨는데 지금 어찌 보면 대척점에 서게 됐다
A. 대척이라고 보지 말고 서로 좋은 경쟁관계라고 봐야한다. 서로 보완하는 관계가 될 수 있다.
Q. 일부 친노인사들이 노무현 대통령 입에 올리지 말라고 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
A. 그건 노무현 정신 왜곡하는 거다. 노무현 정신은 여기도 대한민국 저기도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우선 '노무현 정신'이 뭘까? ‘지역주의 양비론 정신이다. 노무현은 우리 현대 정치사를 지배한 지역모순을 영남의 패권주의와 호남의 반영패투쟁의 관점에서 파악한 것이 아니라, 당시까지 한나라당을 찍어왔던 영남이나, 새천년민주당을 찍어온 호남이나 모두 정치인들의 지역감정 선동에 잘못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봤다. 그래서 둘 다 잘못했다는 이 지역주의 양비론’으로 새천년민주당의 법통을 끊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해 영남에 지지를 호소했지만 거의 무시당했다.

 

그럼 노무현은 한나라당에 대한 정통성정당성은 인정했을까? 인정했다. '지역주의 양비론'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순간 한나라당을 부정해야 할 이유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호남이 그 특별한 대상일 수밖에 없는데) 개헌을 목적으로 하는 대연정을 위해 한나라당을 인정하자고 호소까지 했다. 다음이 그 주요 발언이다.

  

노무현은 대연정을 제안하면서 “[한나라]당의 역사성과 정통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대타협의 결단으로 극복하자”(노무현, 지역구도 등 정치구조 개혁을 위한 제안: 당원동지 여러분께 드리는 글, 프레시안, 2005728)고 주장했고, “국민들이 약 30% 가까운 지지를 보내고 있는 한나라당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상대이고 정책조율하고 합의하고 할 수 있는 파트너”(노대통령 권력 통째로 내놓는 것도 검토”(종합), 연합뉴스, 2005825)라고 말했으며, 말년엔 정치가 제대로 된다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양대산맥이 계속 유지돼 가야 한다”(노대통령 선거에 걸림돌 된다면 당 비판 감당, 연합뉴스, 2006827)고까지 주장했다.

 

이것이 김병준이 노무현 정신은 여기도 대한민국 저기도 대한민국이라고 말한 근거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절반만 맞는 말이다. 노무현이 아무리 지역주의 양비론 정신으로 무장했다곤 하지만 김병준처럼 자유한국당으로 입당 혹은 합당을 기도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태는 오히려 민주정의당과 3당합당을 감행한 김영삼 정신에 더 가깝다.

 

그런데 노무현 정신김영삼 정신은 얼핏 큰 차이를 보임에도 핵심적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영남패권주의다. 2002, 노무현은 경선 승리 후 김영삼을 찾아가 그에게서 받은 시계를 보여주며 좋게 해석하면 3당합당 이전의 야당을 복원(신민주대연합)(-YS ‘80분 밀담내용 촉각, 인터넷 동아일보, 2002430)하려 했는데, 노무현의 이런 퇴행적 역사관은 자신의 지지율을 떨어뜨리며 후단협 등장의 계기가 됐을 뿐이다. 오히려 김영삼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노무현이 제안한 부산시장 후보천거를 거절함으로써 영남패권주의적 역사의 퇴행을 거기서 끝냈다.

 

결국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주된 정치적 대립의 한 축은 뭔가? ‘노무현 정신’, 즉 지역주의 양비론 정신이고, 한나라당의 역사성과 정통성을 인정하자는 정신이고, 호남의 절대적 지지를 배신했던 정신이며, 김병준이 아이러니하게 활용하고 있는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투항 정신이다.

 

호남은 왜 비난받()는가? 이런 노무현 정신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신과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 호남 정신은 현대 정치사를 지역주의 양비론이 아닌 영남패권주의와 그 저항으로 봐야 한다는 정신이고, 광주학살을 감행한 전두환의 영남파시즘을 수행한 민주정의당(과 그 계승 정당)의 정당성정통성은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 표를 줄 수 없다는 정신이고,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이 잘못됐다는 문재인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정신이고, 지금도 반영패투쟁을 한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호남지역주의자들이라고 비난을 받는 정신이다.

 

진실은 뜻하지 않은 시간,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도 얼마든지 밝혀진다. 김병준이 자신의 권력욕을 합리화하기 위해 '노무현 정신'을 들먹임으로써 노무현을 신화로 만들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진실을 덮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줬다. 자유한국당이 원하는 해결책이 바로 노무현 정신’=‘양대산맥 정신으로 함께 가자는 것인지 모른다. 가히 노무현 정신의 역습이라 할 만하다.

 

매우 한탄스럽지만, 앞으로도 대한민국 정치는 영남패권주의 정신, 영남패권주의에 투항한 노무현의 지역주의 양비론 정신, 그리고 호남의 반영패 정신의 3각 투쟁이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 지역투쟁은 계급투쟁을 무력하게 할 만큼 강력하다. 심지어 허위의식 속에서 진실을 위장하고 싶은 드루킹족들의 준동과도 싸워야 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역사의 진실과 싸워서 승리한 영원한 권력은 없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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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선을 앞두고, 전 대통령 김영삼은 현 대통령 박근혜에게 이런 막말을 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11일 새누리당 대권주자인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에 대해 "박근혜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서울 상도동 자택으로 자신을 예방한 김문수 경기지사가 당 대선후보 경선참여 계획을 알리며 "사력을 다하겠다"고 말하자 이같이 답했다김 지사가 "지금은 토끼가 사자를 잡는 격"이라며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밀리는 자신의 위치를 비유하자 김 전 대통령은 "(박 전 위원장은) 사자가 아니다. 아주 칠푼이다. 사자가 못 돼"라고 혹평했다. <연합뉴스>, 2012년 7월 11일.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칠푼이란 "조금 모자라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다. 참고로 팔푼이는 "생각이 어리석고 하는 짓이 야무지지 못한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말하자면 칠푼이는 팔푼이보다 더한 놀림이다. 그런데 김영삼은 박근혜를 팔푼이도 아닌 칠푼이라고 비하한 것이다.

 

나는 김영삼처럼 박근혜를 칠푼이라고 놀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의 막말은 당시 총선에서 자신의 아들 김현철이 낙천한 이후에 불거진 다분히 사심 가득한 반응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인신공격이다. 그리고 박근혜가 칠푼이라는 인신공격을 하면서 김영삼은 최소한의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근거도 없이 그냥, 그것도 "아주" 칠푼이라고 비하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나는 (나만 그런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김영삼의 이 중독성 있는 막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도는 것까지 어찌하진 못 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내 머릿속을 더 뱅뱅 돌고 있는 건 영화 <간첩 리철진>에 나오는 이런 대사다. 고정간첩 오준익이 남파간첩 리철진을 복귀시키며 차 속에서 푸념처럼 하는 말이다.

 

 

근데 이놈의 나라가 좋은 게 있지. 그 어떤 것이든, 뭐든, 쓰면 없어진다는 거야. 투쟁도, 그것이 풍미했던 시절도, 이념도 다 써버렸다. 쓰니까 다 없어지더라구. 리철진 동무! 내가 공산주의자로 보이나?

 

 

 

박근혜는 박정희의 유령이다. 사실 우리는 지금 박근혜가 아닌 박정희를 소비하고 있다. 그것이 아무리 시대착오적인 소비라 할지라도 그 소비를 다 끝내야 한다. 그렇게 박정희가 대한민국에서 지긋지긋해질 때 박정희의 역사가 제대로 정리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박정희 소비는 아직 멀었다. 박정희 생가에서 열린 제37주기 추도식 뉴스를 보며 실감하기 바란다.

 

추도식을 마친 후 참석자들은 인근에 위치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 앞으로 가 추모를 하기도 했다. 일부 주민은 절을 하고[http://www.ohmynews.com/NWS_Web/View/img_pg.aspx?CNTN_CD=IE002040911#IE002040911]일부 주민은 머리를 숙여 추모한 뒤 동상 주위를 둘러보거나 사진을 찍었다. 추도식에 참석한 한 주민은 지난해보다 참가자들이 적은 이유에 대해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처지가 그러니까 참가자들도 적은 것 같다""하지만 우리가 대통령을 지켜줘야 할 것 아니냐"고 말했다. <오마이뉴스>, 2016년 10월 26일.

 

대가가 아무리 커도 역사가 요구한다면 감수할 수밖에 없다. 최순실의 반복적 희극 없이 김재규의 일회적 비극만으로 역사가 효율적으로 진전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기어이, 끝까지, 아직도 부족하다는 '지역'이 있다면 어쩔 수가 없다. 계속 그렇게 현대 영남패권주의의 원조 박정희의 유령 박근혜는 열심히 버티고, 그 지지자들은 열심히 지키기 바란다. 그 때문에 대한민국이 아무리 나락으로 떨어져도 원한다면 아무쪼록 그렇게 하기 바란다.

 

한마디로 나는 여전히 비관적이다. 즉 나는 대한민국이 박정희를 여전히 더 소비하려 할 것이고, 불가피하게 더 소비할 수밖에 없으며, 원 없이 더 소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웬만한 영남패권주의자들 입에서도 "내가 박정희주의자로 보이나?"는 대사가 체념과 함께 흘러나올 때까지 끝장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냉혹한 '역사의 간지'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다. 고통스럽지만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게 역사는 너무나 가혹하고 지루하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6.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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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은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나는 독립적인, 그러나 고립되지는 않은 주체로서, 호남인으로서의 내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특권을 원하는 게 아니라 평등을 원한다. 지역집단의 수준에서 하는 말이다. 왜냐고? 내가 호남 사람이기 때문에? 극히 부분적으론 그렇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내가 소박한 수준의 정의에 깊이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고종석, https://twitter.com/kohjongsok, 2016년 1월 20일.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수많은 여자남자사람이 추호의 의심도 없이 '노무현 이데올로기=지역주의 양비론=친노 문재인 지지'를 자랑스러워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그들 사이비 페미니스트들은 '친노(노무현) 이데올로기 신봉이 자랑스럽다면 논리적으로 페미니즘이 아니라 남여성주의 양비론 신봉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 한다. 이런 집단지성(?)의 나라가 대한민국이니 때를 만나면 혹여나 '마초 페미니즘'도 유행하지 않을까 궁금하다.

 

친노는 호남의 반영남패권주의 투쟁을 의미 없는 '지역/지역'의 개싸움으로 비하한다. 만약 친노 이데올로기를 닮은 '남여성주의 양비론'이라는 게 있다면 (과문한 나는 그런 이데올로기적 족보가 있다는 얘길 듣지 못했다) 페미니즘 투쟁을 의미 없는 '성/성'의 개싸움으로 비하할 것이다. 그렇게 친노는 그들의 '지역주의 양비론'을 시대적 정의의 왕좌에 앉힌다.

 

가상의 논리라 해도 '남여성주의 양비론'은 긍극적으로 남성패권주의 체제를 도울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다. '지역주의 양비론'도 영남패권주의 체제에 투항하여 물심양면으로 그것을 도울 수밖에 없다. 친노가 장악한 거짓 정의의 폐해가 그러하므로 고종석은 구태여 '진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상식을 상기시킨 것이다. 그것은 영남패권사회가 아니라 지역평등사회가 정의라는 상식이다.

 

한데 내겐 고종석의 위 트윗이 양심의 자유가 내지르는 슬픈 비명처럼 들린다. 단지 그 관점의 옳고 그름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한 개인의 "소박한 수준의 정의"감조차 설명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 설명할수록 더 이해하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부정의 그 자체다. 말하자면 '남여성주의 양비론'이 아니라 '반남성패권주의'가 정의 아니냐고 설명(실천이 아니다!)하느라 우선 진을 다 빼야 하는 사회는 대체 얼마나 미개한가?!

 

이달 상순, 고종석은 자신의 트위터를 폐쇄했다. 그의 트위터를 1인 뉴스미디어로 생각했던 나는 여간 헛헛한 게 아니다. 사실 나는 그에게서 이젠 시대의 기억도 희미해진 지난 문인들의 향기를 느낀다. 아무나 흉내내기 힘든 대체 불가능한 문재를 느끼게 하는 그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건 청중으로선 거의 날벼락에 가깝다. 그가 언젠가 말의 기력을 회복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가 보는 상식적 세상을 함께 볼 수 있는 날을 고대한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6.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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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시니스트(김선웅)는 <시사인> 만화가다. 그는 그림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특정 저서에 대한 비판을 만화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예컨대 인터넷 <시사인> (제441호, 2016년 2월 29일)의 <아주 쉬운 상식>이 그런 경우로 보인다. 그가 내 책 <아주 낯선 상식>을 직접 거명하며 이 만화를 그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명백히 내 책의 주장을 비판 조로 패러디한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 글로 내 주장을 반박하면 나도 글로 반박하면 된다. 한데 만화가가 만화로 내 주장을 반박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략 난감한 일이다. 만화가가 아닌 나는 그림을 그려 그의 반박에 대응할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쨌든 그의 그림 속 글을 바로잡는 일뿐이다.

 

그런데 굽시니스트(김선웅)는 패러디한 만화에서 심각한 인격적 문제를 노출시키고 있다. 그는 (자신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영남에서 호남을 '홍어'라고 비하한다는 것을 핑계삼아 만화 속에서 호남을 마음 놓고 '홍어'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런 비하적 용어('홍어'뿐만 아니라 예컨대 과메기, 원숭이, 낙타, 니그로, 조센징 등 유사한 용어는 아주 많다)를 한두 컷도 아니고 전체적인 기조 속에서 키워드로 활용하고 있다면 상식적으로 좀 문제가 있지 않은가?

 

그나마 거기까진 변명이 가능하다. 그런데 중간의 한 컷에서는 호남인(대변자)이 "으음… 호남의 자원으로 영남 짝뚱 홍어들이 저리 나대는 건 좀 거시기한데… 누가 저런 끔찍한 혼종을 만들어냈단 말인가…!"라고 탄식하는 글을 적어 놓고 있다. 내 상식으론 호남인이 호남인 스스로를 '홍어'라고 비하하는 경우는 없다. 더군다나 "끔찍한 혼종"이라니?! 이는 명백히 굽시니스트(김선웅)의 인종주의적 자의식의 발로다.

 

그의 "끔찍한 혼종"이라는 표현은 얼핏 <아주 낯선 상식>이 무슨 인종주의적 영남배척을 주장하는 것처럼 오해를 야기시킨다. 이는 명백한 모함이다. 아니 개인적 모함 여부를 떠나 어떻게 이런 인종주의적 발상으로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하는가? 나는 굽시니스트(김선웅)뿐만 아니라 그에게 지면을 줘 활약케 하는 <시사인>도 이런 식의 인종주의적 표현에 대해 함께 책임지고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굽시니스트(김선웅)의 수준에서 이해한 <아주 낯선 상식>의 주제는 그야말로 가관이다. 그는 <아주 낯선 상식>의 주장을 기껏 "호남당 잡아먹은 영남놈들 극혐!!! 저기 붙어먹은 호남놈들은 배신자다! No more 퍼주기!!" 하면서 기관총을 갈기는 수준이다. 그리고는 "영남 스파이들을 제거했습니다!"라고 환호한다. 그의 눈에는 "이것이 [<아주 낯선 상식>이 주장한] 영패주의 척결!"인 것이다. 내 상식으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정파적 이해력이다.

 

글이 아닌 만화를 글로만 설명하며 반박하려니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서로 답답한 노릇이다. 어쩔 수 없이 나도 굽시니스트(김선웅)가 패러디한 <아주 쉬운 상식> 속 만화 그림을 재활용해 다시 패러디로 돌려주려 한다. 그래서 그가 지어내고, <시사인>이 널리 퍼뜨린 명백한 왜곡과 모함을 바로잡고자 한다. 다음이 내가 <아주 낯선 상식>에서 담아내려 했던 왜곡 없는 주장이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6.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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