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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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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벌써 5년 전 일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였나? 친구 녀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라는 소식을 들었던 것도.. 그렇게 그렇게.. 그 친구가 존재하지 않은 세상도 여전히 잘 흘러가고 있었다. 그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입시 전쟁이 원망스러웠고, 너무 나약했던 그 친구, 그리고 그 친구의 손을 잡아 주지 못한 나도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 시절 버텼고, 20대에는 뜨거운 열정을 불사르리라 했지만, 지금도 역시 그렇게 뜨겁지도 미지근 하지도 않다. 가끔 그 친구를 생각할 때, 그 친구의 영혼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 친구가 맞지 못한 20대의 뜨거운 바람을 내가 대신 더 열정적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죄책감이 들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 셸리 케이건 교수는 죽음을 3가지 부분으로 바라 볼 수 있다고 했다. 영혼의 관점에서, 물리주의적 관점에서, 인격의 관점에서 말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영혼주의자 였던 거다. 그렇다. 나는 영혼이 존재를 믿었다. 나는 물리주의자의 말대로 사랑을 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기능을 하는 기계처럼 인간을 바라보고 싶진 않았다. 죽으면 끝이라는 것도 동의하고 싶지는 않았다.  

 종교적 관점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참고로 나는 종교가 없다) 영혼의 존재가 없다면, 신의 존재없다면, 인생을 조금 막 살 것 같았다. 나쁜 짓을 해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고, 착한 짓을 해도 아무런 댓가를 받지 못한다면 (물론 댓가를 바라고 착한 짓을 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 얼마나 비극이겠는가?  

 

  1장부터 6장까지 셸리 케이건 교수는 영혼이 없다는 물리주의자의 의견에 동의를 구하기 위해 지루한 논증을 끌고 간다. 그 논증에서 내가 느낀 것은, '영혼이 있던 없던 그게 그렇게 큰 문제라는 말인가.' 1장부터 6장까지 지루한 논증을 끌고 갈 만큼.

 1장부터 6장까지를 읽는 동안, 셸리 케이건 교수에게 설득 당한건지 내가 영혼이라고 느껴왔던 것이, 나의 머릿 속에 존재하고 있는 기억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친구에 대한 기억, 죽은 누군가에 대한 기억 때문에 더 열심히 살아야 겠다는 끝없는 자기검열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이 사랑하고, 누군가를 기억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영혼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하나의 기능이라고 해도 나한테 그다지 큰 상관이 없는 문제다.

 

 

 

 내가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은 9장 '죽음은 나쁜 것인가' 와 14장 '자살에 관하여' 였다. (물론 관심이 갔던 이유가 그 친구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좋은 것들을 박탈 당하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는 박탈이론도 공감이 갔지만, 더 공감이 갔던 것은 에피쿠로스의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가장 끔직한 불행인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p.306)

 

 이와 비슷한 또 다른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하자면,

 

“죽음은 세 가지 종류가 있다. 1인칭의 죽음인 나의 죽음, 그리고 3인칭의 죽음인 그들의 죽음, 마지막으로 2인칭의 죽음, 바로 너의 죽음이다. 1인칭의 죽음은 걱정할 것 없다. 죽으면 고통이 없으니까. 죽은 후에는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3인칭의 죽음인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얼마 전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나고 핵발전소에서 사고가 나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 그 소식을 듣고 슬펐던 사람 손을 들어 보라. 별로 없다. 이것이 ‘그들’의 죽음이다. 예를 들어 뉴스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230여 명이 죽었다고 할 때 어떤 느낌이 드나. 그냥 ‘230’이라는 숫자로만 느껴질 것이다. 이런 것이 ‘그들’의 죽음이다.

 중요한 것은 2인칭의 죽음인 ‘너’의 죽음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슬픈 게 바로 ‘너’의 죽음이다. ‘너’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들’의 죽음과 뭐가 다른지 알거다. 학기 초에 친구들이 처음 만났을 때는 모두 ‘그들’이었다. 그런데 한 학기가 지난 후에는 ‘너’가 돼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두고 떠나는 건 가장 큰 고통이다"

 

<생각해 봤어? 인간답게 산다는 것 - 교육공동체벗> 中 에서>

 

  셸리 케이건 교수는 마지막 14장에서는 공리주의적 관점, 의무론적 관점에서 자살을 다루고 있다. 나는 자살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생존방식이고 (물론 의미와는 거리가 먼 방식이지만), 살아있음 그 자체가 고통일 때 행하는 것이기에 결국 죽음으로라도,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을 탈출해 생존하고 싶은 욕망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자살에 대한 철학적 논쟁보다는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을 '너'란 존재로 극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한테 '너'가 없으면 '나'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자살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은 '너'가 없는 사람이 아닐까? 가족이든, 친구든 말이다.

 

 그 친구에게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그 친구에게 '너'라는 존재가 아닌 '그들'의 존재였다는 생각이, 그 죄책감이,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나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나는 괴롭게도 이 책을 읽는 동안에 죽음에 대해서 깊게 생각 해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나에게 수 많은 철학적 논제들을 던졌고, 나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는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삶이 귀하고,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삶이 더 가치있는 것이니까. 카프카의 말대로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니까. 그 때문에 이 삶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내 마음 속에 반짝일 뿐이다. 내가 그 친구에게 '너'의 존재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아직도 '너'의 존재를 찾지 못한 '나'에 대한 연민으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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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닦고 스피노자 -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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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 1632-1677)는 철저히 이성적인 삶을 지향하였다. 그는 우주를 필연적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생각하였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원인과 결과로써 필연적으로 서로 맺어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관조하는 데서 오는 평온한 행복이야 말로 인간에게 가능한 유일한 최고의 선이라고 보았다.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 나오는 스피노자에 관한 부분이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유명한 말을 남긴 철학자로, 또, "신은 곧 자연"이라고 주장한 '범신론자' 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 철학을 대신했던 이 단순화된 이미지들조차도 사실은 허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스피노자가 했다고 알려진 사과나무 이야기는 스피노자의 말이 아닌 종교 개혁가인 마르틴 루터의 말이라는 설도 있고, '범신론자 스피노자'라는 해석 역시 그 근거가 의심스러울 뿐이기 때문이다.

  이 책 <눈물닦고 스피노자>는  이제 자칫하면 오해할 여지가 있는 스피노자에게 쉽게 다가간다.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보여준 다소 난해한 기하학과도 같은 문장들을 이 책의 저자는 이해하기 쉽게 치유의 방법론으로 재구성 한다. 스피노자의 치유의 방법론, 그는 불안증, 우울증, 피해망상, 신경증, 기타 등등의 마음의 병들을 어떤 이야기로 치유 했을까?

 

 

#. 불안에서 벗어나는 방법 - 사랑과 변용

 

 사랑은 변용의 다른 말입니다. 말 그대로 변용은 되기(becoming)을 의미 합니다.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신체의 모든 관계와 감정을 만드는 모든 합성과 소통 과정을 의미합니다. 제가 주장하는 범신론은 사랑의 능력이 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자연 속에 있는 신적 본성의 정체이기 때문이지요.

종교든 돈이든 간에 모든 종류의 권력의 시선은 신체를 싸늘하게 경색시킵니다. 그러나 사랑과 욕망이 신체를 부드럽게 만들지요. 일단 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영역에 대해서 신체를 변용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이 요구하는 하나의 신분, 하나의 이름, 하나의 인물로 전락하고 말지요. 모든 영역을 횡단하면 신체 변용의 역량은 상승하게 됩니다. 옆방 사람과 경쟁자 관계로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친구, 형, 조언자의 관계를 넘나들어 보세요.

 

 그가 처음으로 제시한 방법은 사랑과 변용이다. 원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들을 찾고, 내가 가진 그 욕망을 부정하지 않고 끌어 안으며, 이질적이고 낯선 상황 속으로 뛰어 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 상황이 굉장히 불안해서 기존에 내가 가진 것들을 지키고 나 자신을 끌어안기에 급급하겠지만, 마음을 열고 낯선 상황 속으로 뛰어들어, 뒤섞이고 외부의 상황을 변화 시킬 수 있는 능력을 자기 안에서 발견한다면, 불안과 신경증적인 현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 새로운 관계 맺기, 자유인의 공동체.

 

우울증에서 벗어나려면 우울감을 만들어내는 관계로 부터 벗어나거나 색다른 관계를 맺어야 할 겁니다. 슬픔의 감정을 만드는 것은 관계의 차원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우울함이 마치 자신의 천성적인 성품으로 생각될 겁니다.

 

 그렇다면 우울증은 어떻게 해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울증 역시 사랑하는 대상을 찾으면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우울은 개인이 문제가 아닌, 관계의 문제이다. 억압하는 관계로 부터 벗어나라.. 이 말은 너무 이상적으로 들린다. 부모가 억압을 한다면 부모로 부터 벗어나야 하고, 직장 상사가 억압을 한다면 직장 상사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래 직장 상사는 그렇다 치자. 좀 힘들더라도 이직을 하면 되니까. 하지만 우리는 부모, 가족 에게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스피노자는 단순히 가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뿐만 아니라 가족의 의미를 뛰어 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유인의 공동체적 질서.  아버지, 어머니, 아들과 같이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미리 분배받고 할당 받기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특이한 역할을 만들어 가면서 언제든 그 배치를 바꿀 수 있는 자유인. 예속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자유인의 공동체속에서 특이성을 발휘할 수 있는 공동체.

 과연 이 자유인의 공동체가 현실에서 가능 할 수 있을까? 색다른 관계를 구상하는 혁명은 가능한 것일까? 그저 먹고 살기도 급급한 요즘. 그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찾고, 낯선 외부의 상황에서 꿋꿋하게 변용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너무 이상적인 것일까?

 

 

#. 그렇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등의 세상과의 색다른 관계 맺기도 혁명입니다. 평생 부엌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한 남성이 부엌일에 나서는 것도 혁명입니다. 기쁨의 관계는 민주적이고,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는 긍정과 생성의 관계입니다. 색다른 관계를 구상한다는 의미에서 혁명인 셈이죠.

 

 하지만, 이상주의자만이 현실주의자일 수 있는 법이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 하는 순간, 이상주의자는 그 것을 방해하는 현실에 직면할 수 밖에 없고, 냉정한 현실을 응시할 수 있는 현실주의자의 힘도 그가 품고 있는 꿈이 없다면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꿈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극복해야 하는 현실이 아니라 순응해야만 하는 현실만이 남게 된다. 희망은 더 이상 없다. 조금 이상적으로 보이는 스피노자의 철학. 사랑과 변용 그리고 자유인의 공동체.. 그렇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꿈을 꾸어야만 하는 이유가 아닐까? 우리가 세상과의 색다른 관계맺기의 혁명을 일으켜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 포기해선 안 된다.

세상은 결코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에릭 홉스봄의 미완의 시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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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노동 - 꼭꼭 숨겨진 나와 당신의 권리
은수미 지음 / 부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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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 사실 별 관심 없었다. 스펙 쌓기에 몰두하는 여느 대학생들처럼 나 역시도 내 일이 바빴다. 내 앞가림 하느라 다른 사람의 노동에 신경 쓸 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노동하면 생각나는 것은 그저 막노동’, ‘노가다라는 부정적인 느낌이 강했다. 사실 대학생인 나는 지금까지도 노동에 대해 누군가에게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대한민국에서 교육과정을 밟아 온 사람이라면 아마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교육과정에서 인생에 가장 중요한 노동에 대해 배우지 않은 이유는 뭘까? 선생들은 학생에게 중립적으로 가르쳐야 하고, 이러한 이야기는 자칫 잘못 들으면 한 쪽으로 기울어져 보여서 일까? 요즘도 여전히 '노동'이라는 말을 들으면, '노동권','사회주의','데모'를 생각하는 사람들, 노동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진보’ ‘좌파’, ‘좌빨이라고 이름 붙이고 색깔론의 틀에 맞춰 비난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보면, 꽤나 설득력 있는 주장 아닌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매일매일 노동을 하며 살아가지만, '노동'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볼 기회는 별로 없었던 듯 싶다.

 

 그러던 내가 노동에 관심 갖게 되었던 이유는 쌍용 자동차 사건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얼마 전 시청 근처에서 본 쌍용 자동차 분향소의 선명한 이미지가 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들을 그리 화나게 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이렇게 깊은 상처를 남겼을까 싶었다. 뉴스나 신문에서 접한 '쌍용 자동차 사건' 얘기 보다 그 분향소의 이미지는 선명했고, 향을 피우는 냄새에 내 코는 찌릿 했고, 내 눈은 매워서였는지, 안쓰러워서였는지는 조금 빨개져 있었다.

 비단 쌍용 자동차 뿐만은 아니리라. 그 이후로 갖게 된 관심, ‘노동’, 노동과 관련된 많은 책과 다큐멘터리. 그리고 날아라 노동이라는 이 책을 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노동권을 존중 받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물론 그것과 맞물려 실제로 노동권이 존중받지 못하는 현장에서 있어 본 경험이 더욱 '노동'에 대한 관심에 불을 지폈다. 내가 뉴스와 신문에서 접했던 쌍용 자동차 사건와 실제로 보았던 그 분향소의 느낌의 차이처럼, 책으로 보는 느낌과 직접적인 현장에서 지켜 본 느낌의 차이는 컸다.

 

병원의 서비스가 불친절하다는 느낌이 들면 서비스 품질 개선만큼이나 고용의 질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사용자를 제자리에 앉혀 실질적인 사용자로서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 노동권이 제대로 지켜지는지 살펴야 한다. 그래야 환자들에게도 양질의 의료서비스가 제공된다. (p,103)

 

 나는 요즘 병원에서 실습을 하는 간호학과 학생이다. 간호사 일이 힘들다는 것은 익히 들었지만, 생각보다 업무강도는 심했다. 연장근무는 물론 이거니와, 한 사람 당 간호하는 환자 수가 너무 많아 일이 끝나면 다들 녹초가 된다. 일하는 시간 동안 거의 단 한 순간도 앉아 있지도 못하고, 밥은 10분 만에 먹고 해 치우기 일 수였다.

 병원에서는 고용의 질을 개선하려하기 보다는 더 많은 수를 뽑아서 나가면 대체하고, 나가면 대체하는 식이다. 그렇게 다들 얼마 지나지 않아 나가다 보니, 경력 있는 간호사들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양질의 의료서비스는 더더욱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내가 실습 하면서 느낀 것은, 의사든, 간호사든, 간호조무사든, 지위가 높든지, 낮든지 노동권이 많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 다른 곳도 아마 마찬가지 일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역시 야근을 자주 하셨고, 우리 어머니는 역시 그랬으니까..

 

 노동문제를 생존권문제로 좁혀 온 것은 잘못이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노동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노동권을 생존권의 테두리에만 가두는 것은 중대한 오류다. 노동권을 생존권으로 바라보면 저임금 노동자에게는 먹고 살 만하게 해 줄 테니 노동권을 포기해라고 말할 수 있고, 고임금 노동자에게는 먹고살 만한데, 왜 파업이냐?”라고 말할 수 있다. (p.65)

 

 어떤 사람들은 적성이 어떻든 간에, 대우가 어쨌든 간에, 오로지 취업이 잘 된다는 기준으로 전공을 선택한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그 일에 대한 적성과, 그 이의 노동권보다, 어떤 일이라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 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노동권을 생존권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상, 더 이상의 노동 환경의 발전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좋지 않은 노동 환경에서 일 하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갈 것이다. 만약 노동권을 먹고 살기 위한 생존권으로 노동권을 폄하해 버리면 경쟁력이나 효율성 앞에서 노동권은 사라지고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마저 흔들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청년 스스로가 스펙 쌓는 것 이상으로 노동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노동조합 가입이나 유사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비중이 늘어나면 최저임금과 근로기준 준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것이고, 목소리가 커지는 만큼 관행으로 정착되는 것도 쉬워진다. (p.158)

 

일을 해도 가난한 이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는 어떤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답은 어찌 보면 분명하다. 저임금-실직-근로 빈곤의 악순환을 깨고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한편, 보편적 복지를 확대하여 시민이면 시민답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존엄하고 행복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적어도 꿈을 꿀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이다. (p.192)

 

 역시 뻔한 이야기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관심이다. 우리가 노동권을 생존권의 문제로 국한시키지 않고 지속적으로 많은 관심을 가져야한다. ‘노동이라는 말을 들으면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기보다, '노동'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당연한 권리인 노동권을 위해 많은 관심과 노력을 해야 한다. 사회적인 제도 역시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극복해야 할 현실의 벽은 너무 높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보편적 복지, 행복할 수 있는 권리 역시 현실 가능성이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지금도 바뀌여야 할 사회적 제도들은 너무 많다. 하지만, 항상 제자리에서만 맴도는 것처럼 보인다. 그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인식 또한 바뀌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꿈을 꾸어야 한다. 현실의 벽이 높을지라도, 우리는 계속 꿈을 꾸어야만 한다. 보편적 복지가 확대되고, 모든 이가 꿈을 꿀 수 있는 기회를 갖는 사회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앞으로 노동권을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로 서서히 변화 시켜가야 할 것이다.
과연 노동은 날 수 있냐고? 날 수 있다. 우리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한, 노동은 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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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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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모던라이브러리 선정 '20세기 100대 영문학' 2, 2005년 타임 선정 '20세기 100대 영문 소설'로 선정된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이 책에는 많고, 긴 수식어들이 붙는다. 또한,'위대한 개츠비를 3번 읽은 사람이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 라고 말한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많은 소설가들이 이 책을 미국 현대문학의 거대한 지평을 불멸의 걸작, 명작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조금 지루했다. 20세기 100대 영문학이라고 하는데, 다들 그렇게 명작이라고 이야기하는 데, 왜 그럴까? 사실 소설 속 배경인 1920년대 미국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소설에 대한 이해는 소설 속 배경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최인훈의 '광장'을 6.25전쟁, 남북의 분단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완전히 이해하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 외국인들이 '광장'을 보고 느끼는 생소함과 우리가 '위대한 개츠비'를 보고 느끼는 생소함이 비슷하지 않을까?

 

 

위대한 개츠비에서 1920년대를 들여다보다

 

 

황금모자를 써라. 그것으로 그녀를 움직일 수 있다면.
그녀를 위해 높이 뛰어라, 그럴 수만 있다면.
그녀가 이렇게 외칠 때까지.
"오, 내 사랑, 황금모자를 쓴, 높이 뛰어오르는 내 사랑이여, 내가 당신을 차지 하리라"
                                                                               - 토머스 파크 딘빌리어스 -

위대한 개츠비에서 1920년대를 들여다보다

<위대한 개츠비>에 서문으로 나오는 시. 그는 왜 이 책에 이 시를 서문으로 썼을까? 아마 이 시가 이 책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1914~ 1918, 4년간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경제적인 번영의 시대를 맞이 하였다. 사실 20년대 미국이 누리는 경제적 번영은 전쟁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국내의 상황으로 자동차 산업 같은 상당한 기술의 발전도 한 몫을 더했다. 그런데, 1920년대의 경제적 번영 그리고 그로 인한 물질주의의 우세는 개인들의 획일화 또는 표준화를 가져왔다.

 

“너무, 너무 아름다운 셔츠들이야.” 그녀가 흐느꼈다. 두터운 셔츠 더미에 파묻힌 그녀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너무 슬퍼. 한 번도 이렇게,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들은 본 적이 없거든"
내 생각에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동자가 보이는 반응에 따라 그 집의 모든 것들의 가치를 재 산정 할 작정인 것 같았다. 가끔씩 그는, 그녀라는 놀라운 존재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 그 무엇이 되어버렸다는 듯, 멍한 눈초리로 자신의 소유물을 둘러보곤 했다. (p.117)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젊은 작가들이 소외와 환멸을 문학에 담았다. 1914년 이전 미국 문학의 특징이었던 풍요와 낙관주의가 사라지고, 허무주의의 근원인 무가치한 삶의 무목적성 및 죽음, 순간적인 쾌락을 내용으로 한 작품이 등장했다. 피츠제럴드의 작품에 등장하는 쾌락주의자들 역시 도덕적인 갈등을 겪고, 구시대의 의무와 새로운 욕망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새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라는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한 도덕적 갈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였을까?

 

 

위대한 개츠비에서 '사랑'을 들여다보다.

 

 

5년 전, 개츠비는 데이지라는 여인을 매우 사랑한다. 그것은 잠깐의 사랑이 아니며, 가난했지만 정말로 순수했던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 때의 개츠비는 육군 중위로 가난했기 때문에 부유했던 데이지의 집안의 반대로 그들의 사랑은 비련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잃어버린 사랑을 찾기 위하여 청춘의 전부를 돈벌이에 바쳤고, 그는 주식 사업으로 성공하여 부자가 된다. 그는 부자가 된 후, 그는 데이지의 집 건너편 호화로운 저택에서 그녀의 집을 바라보고, 그의 저택에서 거의 매일 밤 파티를 연다. 혹시 데이지가 보지 않을까. 파티에 오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에.

 

안개만 없었다면 해협 너머에 있는 당신 집도 보였을 텐데." 개츠비가 말했다.
"당신 집 잔교 끝에는 언제나 초록색 등이 켜 있더군"
데이지가 갑자기 팔짱을 껴왔다. 하지만 개츠비는 조금 전에 자신이 한 말에 푹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 초록빛의 심대한 의미가 영원히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자신과 데이지를 갈라놓았던 그 광대한 거리에 비하면, 그 초록빛은 거의 데이지를 만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로 느껴졌을 것이다. 달 주위에서 반짝이는 별처럼 말이다. 이제 그것은 그냥 잔교 끝의 초록색 등으로 돌아 와 있었다. 찬탄의 대상 중 하나가 줄어든 것이다. (p.118)

 

눈 앞의 데이지가 그가 꿈꾸어왔던 데이지에 턱없이 못미치는 순간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그녀의 잘못 만은 아닐 것이다. 오래도록 품어왔던 너무나도 어마어마한, 환상의 생생함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를 넘어서고 모든 것을 넘어섰다. 그는 독보적인 열정을 가지고 그 환상 속에 뛰어들어, 하루하루 그것을 부풀리고 자신의 길에 날리는 온갖 밝은 깃털로 장식해왔던 것이다. 아무리 큰 불도, 그 어떤 생생함도, 한 남자가 자신의 고독한 영혼에 쌓아올린 것에 견줄 수 없다. (p.121)

 

그리고 개츠비는 데이지의 사촌오빠 닉의 도움으로 데이지를 만난다. 하지만, 개츠비는 데이지를만나고 나서 찬탄의 대상 중 하나가 줄어들었다고 말한다. 5년 동안 품어왔던 너무나 어마어마한 환상 때문일까? 그녀가 개츠비의 환상을 충족시켜주지 못했던 것일까? 그가 오랜 시간동안 환상으로 만들어 낸 그녀의 존재가 실제 데이지와 완전히 일치할 수 없으며, 모든 환상을 충족시켜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데이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의 머릿 속에 존재하는 데이지의 이미지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개츠비는 데이지를 진짜 사랑한 것일까? 사실 진짜 사랑, 가짜사랑이라고 정의를 내릴 만한 그 어떤 것도 없다. 나는 개츠비가 데이지 대한 사랑을 끝까지 추구했으며, 그가 그녀를 사랑했기에 했던 그녀를 위한 희생이 그를 행복하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데이지와 개츠비의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데이지가 개츠비의 환상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결국 비극적으로 끝났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만약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데이지가 개츠비의 환상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지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선택한 그 행복감이 그 무엇보다도 크기 때문에, 그것은 해피 엔딩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사랑은 어떤 형식도, 방식도 없는 어렵고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느낀다. 그저 다양한 사랑이 존재하고, 다양한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존재하는 것을 재확인 하게 된다. 

 

20세기 개츠비가 21세기 우리에게 주는 교훈.

 

 

20세기 개츠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뭘까? 사랑에 대한 정의와 가치관은 다 다를지라도, 순수한 사랑에 대한 갈망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20세기 개츠비는 5년 동안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원하는 남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청춘의 전부를 돈벌이에 바쳐 부자가 되었고, 마지막에는 그녀를 위해 희생한다. 21세기 현재 우리가 열광하는 늑대소년의 '철수' 역시 47년동안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그녀를 원하는 남자가 되기 위해 글을 익힌다. 이처럼, 20세기든 21세기든지 무모하고, 순수한 사랑, 조건없는 사랑에 대한 열망은 그대로 인 듯 싶다.

 

개츠비는 데이지가 자기 자신이 아닌 자신이 가진 것을 사랑하는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사랑할 가치가 없는 여자, 무가치한 존재를 무모하고, 지독하게 사랑했기 때문에 위대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20세기 개츠비와 21세기 철수처럼 무모하고,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을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돈, 외모, 어떠한 외적 조건과 필요가 아닌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 어쩌면 개츠비의 순수하고 무모한 사랑, 또 영화 늑대소년의 철수의 사랑이 실현 불가능한 사랑이기에 조금 더 아름다워지도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건적인 사랑이 아닌 무조건적인 순수한 사랑. 그 순수한 사랑에 대한 갈망.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한 처절하기까지한 개츠비의 노력. 그것을 통해 우리는 21세기 우리의 사랑을 되돌아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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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 / 시공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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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옛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글이다. <육식의 종말>을 읽을 때 이 말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육식의 종말>의 저자 제레미리프킨은 미국의 세계적 경제학자이자, 문명 비평가이다. <육식의 종말>은 쇠고기의 숨겨진 이면을 잘 보여 준다. 저자는 우리가 쇠고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많은 문제가 파생 되었고, 그것은 여러 분야에 걸쳐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고 말한다. 이 책이 나온 지 꽤나 되었으나, 채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리고 대학생 기자단 활동으로 채식에 대한 컨텐츠(http://blog.besunny.com/1188 관심 있으면 읽어 보시길) 를 쓰게 되면서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그 전에는 그저 그려러니 하고 훑어보았지만, 채식과 동물해방에 대한 관심을 갖고 나서부터 읽었던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이나 피터싱어의 <동물해방> 같은 책과 언뜻 언뜻 비교하며 읽기도 했다.

  

   사실 이 책은 한국어 번역처럼 육식의 종말이라는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정확히 말해 이 책은 육식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소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고찰이 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서양 문화권에서 형성된 소에 대한 가치와 태도를 훑어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미국 역사에서 드넓은 목초지가 추악한 자본에 의해 소떼로 점령당하게 되는 과정이 환경을 어떻게 황폐화시켰는지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인용해 육식을 즐기는 사람들의 의식구조와 호전적 문화까지 분석한다. 저자는 서부 개척에 대한 신화 이면에는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한 잔인한 살육과 추방, 버팔로 학살, 공유지를 사유지로 만드는 강제적인 인클로저, 중남미에 대한 착취 같은 추악한 진실이 숨어있다고 말한다. 또한 구조주의 분석을 통해 육식을 즐기는 사람들, 육식을 즐기는 문화의 호전성과 남성 우월주의, 계급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 책은 미국 내 소고기 산업과 햄버거 산업의 유착을 파헤치고, 추악한 자본의 이기심이 지구 환경을 얼마나 오염시키고 있는지를 논한다. 현대문명에서 쇠고기 산업은 각종 제도와 시설로 포장하여 실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차가운 악(cold evil)이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잘게 부수어져 내가 고기를 먹고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게 가공하고 포장한다.

  

   쇠고기를 먹음으로 인해 야기된 문제는 마치 나비효과와 흡사하다. 전혀 연관되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많이 연관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기아문제를 예로 들 수 있다.

 

농업분야에서 대풍작을 기록했던 1950년부터 1985년 사이에 미국과 유럽에서 2/3나 증가한 곡물 생산은 사료 곡물 재배에서 이루어 졌고, 그 중 대부분은 소 사육에 사용되었다. 곡물 재배에 사용되는 1 에이커 토지는 육류 생산에 사용되는 1에이커 토지보다 5배 많은 단백질을 생산 할 수 있다. 콩류(대두, 완두콩, 렌즈콩)을 심으면 10배 많은 단백질을 생산하며, 잎이 많은 야채를 심으면 15배 많은 단백질을 생산하고, 시금치를 심으면 쇠고기 생산에 사용되는 1에이커의 토지에 비해 무려 26배나 많은 단백질을 생산할 수 있다.

 

 

저자는 기아의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소 사육으로 인해 생태계는 파괴되고, 인간은 온갖 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21세기에는 인류가 이러한 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끝을 맺는다. 지구상에서 축산 단지들을 해체시키고 인류의 음식에서 그 것을 제외하는 것이야말로 향후 수 십 년 동안 우리가 이루어야 할 중요한 과업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가 소 도축을 금해야하는 이유를 지극히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인간이 병에 시달리지 않으며 생태계를 보존하여 조금 더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쇠고기의 도축, 아니 더 나아가 육식을 금해야 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생명 존엄성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게는 여자를 불태워 죽이는 것, 흑인을 때려죽이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시대가 있었다. 또한 지금 우리는 돼지 한 마리 죽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피터싱어의 견해를 빌려 말한다면 첫 번째는 성(sex)차별주의, 두 번째는 인종(race)차별주의, 세 번째는 종(species)차별주의이다. 우리는 여자에게도 흑인에게도 존엄성이 있다는 당연한 진리를 우리가 이해하고 실천하는데 수 백 년이 걸렸다. 이제 우리는 언젠가는 당연한 진리가 '' 동물의 존엄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물 역시 감정을 갖는다. 기뻐하고, 슬퍼하며 때로는 눈물을 보인다. 인간이 조금 더 똑똑하다는 이유로 동물의 생사여탈을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면 수 있는가? 도대체 어떠한 명분으로 이러한 행동이 정당화 될 수 있는가? 남자라는 이유로, 백인이라는 이유로 어떤 존재가 존엄성을 획득할 뿐만 아니라, 여자와 흑인의 생사여탈을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면, 우리는 그것은 불의이고, 가장 끔찍한 차별이라며 항거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이유로, 지능이 높다는 이유로 우리는 존엄성을 획득할 뿐만 아니라, 동물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왜, 이것을 불의라고 말하지 않으며, 우리는 왜, 이것은 끔찍한 차별이므로 항거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어떤 사람들은 식문화에 대해 본인의 가치관과 생각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굉장히 진보적인 발언인 것처럼 들리고 다원주의를 존중하는 문명인의 모습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커다란 오류가 숨어 있다. 다원주의는 다른 존재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는 관용(tolerantia)의 정신을 전제로 한다. 관용(tolerantia)이란 나와 다른 존재, 사상, 견해, 종교, 삶의 방식들에 대하여 그 가치와 정당성을 존중해주는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과연 관용의 한계는 어디인가? 여기에 아주 정확한 대답이 있다. "다른 모든 것을 관용(Tolerance)해도 불관용(Intolerance)을 관용할 순 없다. 바로 이것이 다원주의의 대전제이다. 다른 존재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배제하며 핍박하는 정신까지 관용하는 것은 결코 다원주의가 아니다. 육식은 동물의 자유와 삶의 권리를 명백하게 억압 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없다. , 앵똘레랑스는 똘레랑스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우리 스스로의 발명품은 아니였을까? 그 대신 우리는 그것을 생명 존엄성이라 표현하는 것은 어떠한가?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말에는 그 어떤 단서가 붙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인간 종(human species)이라는 오래된 의식의 벽을 부수고 보다 많은 존재를 향해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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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3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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