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

-내가 누구인지 말 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Prologue...

 

욕망하는 자아 

 

대학시절 때 참으로 내가 좋아했던 소설가가 있었다. 그 소설가는 이인화였다. 이인화의 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영원한 제국이 나오기 전에 이인화가 처음으로 평론이 아닌 소설로 발표한 작품이었다. 그 책 첫 부분에는 William Shakespeare‘King Lear'14장에서 나오는 대사

 

 

아아, 나는 잠들었는가, 깨어 있는가 누구,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느냐

 

 

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라는 소설을 2번 정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만큼 그를 많이 좋아했던 것이다. 그 작품 속에서 작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희미하게 그 해답을 욕망하는 자아로 표현하고 있다.

 

욕망하는 자아...’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 중에 이 화두에 정확한 대답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스스로 자기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면서 삶을 영위하리라. 나는 여기서 이인화가 이야기했던 욕망하는 자아의 안경glasses(New paradigm)을 의도적으로 착용하고서 이 작품 ‘A Streetcar named Desire'를 살펴보고자 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작품은 블랑쉬의 삶의 한 단면을 담고 있다. 하나뿐인 혈육인 동생 스텔라에게서 잠시 안식을 취하기 위해-그것이 잠시인지 영원인지 알 수 없지만-뉴올리언즈로 오는 광경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블랑쉬
: 사람들이 제게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서, 묘지란 이름의 전차로 갈아 탄 다음 여섯 블록을 가서 내리면 이상향이라던데.

유니스: 여기가 바로 그곳이예요.

블랑쉬: 이상향이란 말인가요?

유니스: 바로 이곳이 이상향이예요. '

 

블랑쉬는 사람들의 말에 따라 이상향이라는 지명으로 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블랑쉬의 의식적, 무의식적 삶의 행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블랑쉬에게 있어서 죽음의 반대는 욕망”-이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블랑쉬의 발언이다-이었다. 블랑쉬는 동생이 살고 있는 이 작은 아파트로 오기 전에 한 번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 결혼은 잘못된 결혼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였던 사람 엘런이 다름아닌 성도착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결혼은 곧 엘런의 권총자살로 막이 내리고 만다. 엘런은 블랑쉬와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결국 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소년 소녀가 결혼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에 엘런과 블랑쉬, 엘런이 성도착자라는 불명예는 두 사람 상호간에 결코 견딜 수 없는 하나의 딜레마dilemma였다.

 

참고로 블랑쉬라는 이름의 의미는 ‘white'이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일종의 순수성innocence'을 나타낸다고 본다. 이런 innocent한 블랑쉬에게 남편이 성도착자라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블랑쉬의 순수성은 남편의 성도착증과 그에 따른 자살로 말미암아 충격과 상처를 입게 된다. 자신의 남편 앨런은 삶을 욕망하기 보다 삶을 포기하는 죽음 즉 묘지를 선택했다. 그러나, 블랑쉬는 묘지가 아닌 욕망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녀의 삶을 보더라도 이해하기가 좀 힘든 구색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상처받은 순수성의 비극적 면모라고 묘사할 수도 있으리라. 앨런이 죽은 후, 그녀는 어쩌면 요즈음 10대들이 여관에서 생활하면서 매춘을 하는 것처럼 여러 낯선 남자들과의 성적인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울려고 했다.


'그래요
, 낯선 사람들하고 많은 관계를 가졌어요. 엘란이 죽은 후-낯선 사람들과의 관계만이 나의 빈 가슴을 채워 줄 수 있을 것처럼 여겨졌어요. 내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옮겨 다니면서 어떤 보호를 받으려고 했던 것은 두려움, 바로 두려움 때문이었어요-여기 저기를 전전하다가 마침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곳, 바로 열 일곱 살짜리에게도...'

 

 

카톨릭에선 성수(Holy Water)라는 것이 있다. 여기에 만약 파리가 빠졌다고 가정을 하자. 그러면 여기에 빠진 파리가 거룩해지는가? 아니면 성수가 더러워지는가? 그것은 당연하게 성수가 더러워질 수밖에 없다. 블랑쉬의 순수성은 이렇게 세상과 맞물리면서 성적인 관계를 통해, 이를테면 욕망을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존재를 타락시키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그녀의 욕망은 그녀를 더 외롭고 불안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서 그 로우렐이란 도시에서 쫓겨나게 된다.

 

돈도 없고, 젊음도 이제는 시들어져가는 블랑쉬는 하나뿐인 혈육인 스텔라에게 의지하게 되지만, 스텔라 역시 스탠리의 욕망에 기묘하게 얽힌 여자일 뿐이었다. 스탠리는 남근적 욕망의 symbol인 셈이다. 그는 스텔라가 출산을 위해 집을 잠시 비운 사이에 블랑쉬를 강간하고 마는 동물적인 욕망의 남성이다. 욕망하는 자아들이 들끓는 사회 속에서 치이고 치이다 결국은 그 사회 속에서 또 다시 방출되고 마는 블랑쉬의 초상화는 작품 초반에 볼 수 있었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서, 묘지란 이름의 전차를 갈아 탈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의 여신의 모습이다.

 

Tennessee Williams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욕망이란 것은, 우리의 삶 전체에 나타나는 그 모든 욕망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성()이라는 아주 개체적인 욕망에만 몰두하고 있음을 밝힌다. 또한 그 욕망의 끝이 묘지임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듯 하다.

    

 Epilogue...

 

나는 누구인가

 

이 작품에선 제각기 욕망하는 자아들의 움틀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에 대한 나의 견해는 욕망하는 자아만큼은 그 해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욕망 즉 Sex를 통해서 얽히고 설킨 블랑쉬의 기묘한 인생의 비극만으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의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분명 성급한 견해임을 전제로 하면서 말이다.

우리의 생에 있어 건전한 욕망은 가정을 세우고, 그 가정의 뿌리를 내리고 삶의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하지만 그 욕망이 전차’(Streetcar)-‘전차는 누구나가 다 탈 수 있는 차이다. 그러나 욕망sex는 그럴만한 속성이 아니라고 밝히고 싶다-를 타게 되었을 때 한 사람의 인생에서 더 나아가 사회를 무너지게 한다는 것임을 은근히 밝히고 싶다.

 

 

우리 사회는 블랑쉬가 가진 innocencedesire의 두 얼굴을 다 가지고 있다고 본다. 지금의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와 시대상은 desire가 아주 강조되는 시대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이 사회와 세계가 아직도 건재한 한 것은 desire가 아닌 innocence가 여전히(yet)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신약성경 야고보서 1장 15절엔 이런 구절이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여담....야고보서 1장 15절을 보니, 윤태호의 <이끼>가 생각이 납니다. 욕망에 미쳐간 이장과 사투를 벌이는 주인공, 류해국!

 

 

 

 

미미 여사의 <화차>는 욕망에 관한 현대인의 증후를 다룬 스토리이다.

 

"돈도 없지. 학력도 없지. 딱히 이렇다 하게 내세울 능력도 없어요. 얼굴 하나로 먹고 살만큼 예쁜 것도 아니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삼류 이하 회사에서 묵묵히 사무나 봐야 하죠. 그런 인간의 마음 속으로 텔레비전이나 소설이나 잡지에서 보고 듣는 풍요로운 생활을 그려보는 거예요. 옛날에는 그나마 꿈을 꾸는 선에서 끝났어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꿈을 이룰 수는 없다. 그렇지만 포기하긴 억울하다. 그러니 꿈을 이룬 것 같은 기분이라도 느껴보자....쇼코의 경우는 어쩌다 그게 쇼핑이나 여행처럼 돈을 쓰는 방향으로 나갔을 뿐이예요. 그런 상황에서, 분별없이 쉽게 돈을 빌려주는 신용카드나 신용대출이 나타난 것 뿐이죠."(343-344.p)

 

"...그러니깐, 자기 돈 없이 '빚'이라는 형태로 군자금을 만드는 사람은 쇼코처럼 되는거예요."(345.p)

블랑쉬: 사람들이 제게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서, 묘지란 이름의 전차로 갈아 탄 다음 여섯 블록을 가서 내리면 이상향이라던데.
유니스: 여기가 바로 그곳이예요.
블랑쉬: 이상향이란 말인가요?
유니스: 바로 이곳이 이상향이예요.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18-08-15 18: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 대학로 소극장에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봤던 기억이 나네요. 영화와 또 다른 연극만의 매력을 느꼈던 작품이었습니다.^^:)

카알벨루치 2018-08-15 19:38   좋아요 2 | URL
연극은 또다른 느낌일텐데 외국배우와 한국배우의 차이도 있을것이고 ~좋으셨겠어요 ㅎ

북프리쿠키 2018-08-15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 책과 히로시마내사랑 2권을 들고 견주다가 히로시마를 선택했네요 ㅎ 꼭 읽고 싶어지는 글입니다ㅎ 저~어기 저 등짝 포스터도 한몫하네요^^

카알벨루치 2018-08-15 23:22   좋아요 0 | URL
ㅎㅎ 고전은 다 읽을가치가 있으니 천천히 읽으세요~자본주의의 섹슈얼리티는 상품성이 다분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