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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르니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 -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간절히 필요한 순간, 두뇌에 신선한 자극을 주는 지적 유희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정란 옮김 / 예담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신간평가단에 들어오기 전의 리뷰들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퀄리티있도록 쓴 글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것이 엄청나게 심혈을 기울여 한 편, 한 편 작성했고 그것을 여러번 읽어보고 수정했기에 눈에 거슬리는 곳도 얼마 없는 글들이 나왔었다. 비록 그것들을 지금 다시 읽는다면 민망함에 고개를 들 수 없을 지경이겠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뿌듯했던 글이었다. 하지만 신간평가단에 들어오면서 나는 점점 내 글에 탐탁치 않음을 느꼈다. 신간평가단으로 인해서 알라딘 서재에 입성하게 되었고 수많은 애장가분들의 글을 읽게되었다. 내공이 탄탄하신 분들의 놀라운 글들을 많이 접하게 되자 나는 내 스스로가 작아져감을 느꼈다. 그것이 굳이 알라딘 탓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글에 자신도 없어져서 어느샌가 대충대충 글을 쓰게 되더라. 전에는 쓰지않던 다이어리도 몇줄 간단히 적고 끝낼때도 많고. 그렇다고 작아져간다는 것은 아니지만 다이어리를 끄적이는 내 스스로에게 아직 청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건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나는 전부터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는 일을 통 하지 못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시도때도 없이 도서실을 드나들며 책을 읽고, 빌리고 한 탓에 매번 다독상 1위에 올라 한 번은 사서 선생님께서 너는 많이 해먹었으니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라,하고 말씀하신적도 있었다. 그랬던 세월이 엊그제 같은데 중학교에 들어오면서부터 책 구입의 맛을 알아버린 필자는 도서관을 그리 좋아하지 않게되었다. 새책의 부드러우면서 텁텁한 종이냄새와 빳빳한 새 표지에 익숙해져버린 나는 눅눅해진 책꺼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평소에, 좋게 말하면 자유로운(나쁘게 말하면 게으른) 성격이기에 어떤 일에 제한을 두면 그 시간내에 절대 어떠한 일을 완수해내지 못한다. 절대 자랑은 아니지만(이런 성격탓에 미술수행평가를 항상 늦게 냈지만 후에는 미술선생님께서도 포기하시고 그림으로만 보았다.) 이 성격이 책을 빌려보는것에도 적용되더라. 초등학교때의 습성을 물려받아서 중학 입학 초기에는 줄창 도서관을 들락거렸다. 게일포먼의 책도 몇권 빌리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도 빌리며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물론 그때는 작가들은 몰랐고 그저 제목과 표지만 보고 골랐었다. 그런데 그 책들이 안 읽히는거다. 분명히 제목은 흥미로운데 도저히 책 표지로 손이 가질 않더라. 그래서 한 문장읽고 반납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었다. 항상 책의 반납일은 연체되기 일쑤였고. 이래선 안되겠다, 하고 생각해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한 달 후부터 책 수집을 시작하면서, 프리한 독서생활을 하는 방법까지 깨닫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는 주로 어린이를 위해 쓰여진 책이나 성적호기심을 다룬 책을 읽었다면 중학교에 들어서는 그보다는 조금 더 성숙해진 책들을 읽었다. 책이라기 보다는 작품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들을 많이 접했다. 책을 구매하기 시작하면서 인터넷 검색으로 여러 작가와 그 작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고 그로인해서 눈과 입으로만 독서에 대한 지식들이 늘어갔다. 이상하게도 책을 구매하면 할수록 마음은 뿌듯하고 편해지는데 책은 안 읽히더라. 그저 책장에 빼곡히 들어앉은 책 먼지냄새만 맡아도 좋다. 지금도 그렇다. 마음 내키면 읽고 그렇지 않을때는 안일하게 지낸다. 나는 책읽을 때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기에, 또 그것이 엄청난 시간의 갭을 두고 떨어져 있기에 요새는 책을 많이 못읽고 있다. 내가 내키지 않을 때 책을 펼쳐들면 엄청난 잡생각으로 단 한글자도 읽지 못하고 덮기 일쑤이기에 꼭 내킬때만 읽었다. 요새는 신간평가단이 겹치며 억지로라도 읽으려고 들지만 역시 억지로하는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성숙된 작품들을 읽으며 문장력 또한 성장해 나갔다. 늘 작문대회에 출전하면 선생님들께 듣는 이야기는 "문장력은 좋은데..."였다. 한번은 군에서 주최하는 창작 작문대회에 나갔는데 글감이 '교실'이었다. 대회 출전 얼마 전에 동성애를 다룬 작품을 감명깊게 읽었기에 나도 교실을 배경으로 동성애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하지만 한국 작품보다는 번역된 작품, 그리고 고급스러운 인터넷 소설(이모티콘이 전혀 쓰이지 않은 진짜 소설다운 인터넷 소설)만 읽던 내게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라는 전개 방식은 물론이고 줄거리 정렬의 방식은 어렵기만 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엄청나게 잘 썼다고 생각했고 당당하게 냈다. 사실 1분을 남기고 3줄이 남은 상황에서 검토할 생각따위는 전혀 들지 않았고. 결과는 참담했다. 장려라고는 하지만 못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 나는 내가 못썼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바로 선생님께 항변했다. 선생님께서 심사위원을 하셨기에 따지고 들었다.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내가 창작은 심사를 안해서 모르겠는데 다른 선생님들이 이렇게 말하더라. 이진이는 문장력은 좋은데 이야기가 이리갔다 저리갔다 정신없다고" 아, 나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내 스스로 내 글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유리심장이 탁하고 깨어지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여러번의 고비를 겪으며 꿈을 국어교사로 잡게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글을 좋아하는 친구와 친해지게 되었다. 나와 가장 친한 친구 중 장래희망이 시인인 자가있다. 참 많은 면에서 나와 닮은 아이인데 책을 좋아한다는 것, 글 쓰는 일을 즐긴다는 것,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 피아노를 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등등 이것말고도 오랜시간동안 친구로 지내온 탓에 서로 비밀을 터울없이 이야기하는 편이다. 그리고 우리 둘이서 들어간 동아리는 수학반이었는데 인원도 적고 친한친구들끼리 모였기에 선생님께서도 우리 이야기에 가끔 동참하시고는 한다. 선생님께서 참가하실 때마다 우리는 항상 미래이야기를 한다. "선생님, 저는요 시인이 될건데요. 엄머는 계속 음악쪽으로 가라고 하시네요""선생님, 제가 수의사가 괜찮을까요 국어교사가 괜찮을까요. 정말 수의사하고싶은데 도저히 이과쪽으로는...(접니다, 후후)" 하는 둥 선생님께서 우리 말을 경청해주시고 답변해주시고는 한다. 그리고 이 동아리 선생님과는 미래이야기를 하는 반면 국어 선생님과는 문학 쪽 미래이야기를 한다. 선생님께서는 너희 둘처럼 글 쓰는일에 대해 의욕을 가진 사람은 요즘 시대에 별로 없다며 한 번 투지를 가지고 신춘문예같은 곳에 글을 내보라고 했다. 시인이 꿈인 친구는 당연히 그러리라 하였고, 나도 결코 꿈꾸어 보지 않은 일은 아니었기에 마음에 새겨들었다. 국어선생님께는 작문 특강도 받으리라 예약해둔 상태인데 연락이 없다.
그렇게 시인이 꿈인 친구와 친해지다보니 그가 쓴 시도 많이 읽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에는 두각을 나타낸 아이였기에 대회만 나갔다하면 장원은 식은 죽 먹기였다. 시를 새발의 때만큼도 모르는 나에게는 꼬부랑 글자 몇 개 조합해 놓은 듯한 글처럼 보였지만, 또 그냥 단어 몇마디 씨부리면 되는 글처럼 보였지만 그에게는 오랜시간 고민을 해가며 썼던 글이리라. 시를 쓰기위해서 시인들은 단어 하나하나에 혼을 담아 쓴다고한다. 최명희 작가는 글을 쓸 때 바위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새기는 마음으로 임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소설가뿐만이 아니라 시인에게도 적용되는 말일것이다. 아니, 오히려 시가 소설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소설은 공지영 작가가 말하기를 구상만 끝내면 글이 술술 나오는 때가 많다고 하였다. 그 구상이라는 것이 오래 걸리기는 하지만 한 번 탄탄히 짜두면 결코 틀어질 일이 없다. 하지만 시는 그렇지 못하다. 구성을 다 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함축하기 위해 어떠한 단어를, 어떠한 비유를 써야할지 또 고민하여야 하고 또 그것에 생각과 사상을 담아내기 위해 또 고민해야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시를 어려워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읽는다. 어쨌든, 그의 시 중에 [시작始作]이라는 시를 아주 감명깊게 읽었다. 예전에는 약간의 질투심으로 그의 시마다 뚱한 마음으로 읽었는데 이 작품은 아주 걸작이더라. '보라/그리하면 느낄 수 있다/느끼라/그리하면 경험할 수 있다'하는 식의 시였는데 외우고 있지는 않은터라 일단은 내가 생각나는대로 적어보았다. 너무 좋은 나머지 그 친구에게 이 시를 액자에 넣어서 내게 주면 안되겠냐고 물었다. 그 친구는 웃으며 알아서 해라고했고. 그리고 한가지를 더 물었다. "대체 이 시는 어떻게 쓴거니?"하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는 나의 진지한모습에 웃음이 터졌는데 입에 자그마한 미소를 머금으며 답해주었다. "시는 생각해야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깊이 생각하고 얕게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그것에 대해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어. 그러면 시를 쓸 수 있게 되는거고. 그렇게 해서 쓰인 시는 소위 망작이 나올수가 없지."
그렇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깊이, 혹은 얕게 생각한다는 것은 깊이 파고든다는 것이며 깊이 파고든다는 것은 그것을 느낀다는 것이다. 느껴야만이 나의 것으로 만들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비로소 글을 쓸 수 있다. 작가는 한 가지 사물만으로 책 한권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이야기 꾼이어야 한다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이야기꾼을 판별하는 척도가 아닌 얼마나 사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생각하고 파악하고 느꼈는가의 정도를 판별하는 것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은 훌륭하다. 글을 쓰기위해 그 사물을 엄청나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파악하고 느꼈는지 단번에 느껴진다. 첫 글인 '남자와 여자'에서는 성경의 말씀을 사용하여 남성이 모성에 대한 향수를 갖는 이유를 알 수 있게 하였고, 여성의 남성성또한 설명했다. 이 글 외에도 여러곳에서 성경말씀이 인용되어 이야기의 이해를 돕는다. 또 작가는 자신의 여러 지식들을 사용하고 적절한 어휘를 선택해서 글을 좀 더 고급스럽게 꾸몄다. 하지만 전혀 멋을 내려는 듯 보이지는 않는다. 작문 초보자라면 쓸데없이 미사여구를 사용하거나 고급 어휘를 사용한다고 글을 망치는 경우가 종종있는데 이 작가는 그렇지 않다. 역시 프랑스 최고의 지성답게 어려운 단어로써도 우리에게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알린다. 탁월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작가의 상상력도 무척이나 돋보인다. 버드나무와 오리나무를 통해서, 그리고 돈후안과 카사노바를 통해서 이토록 수준 높은 글을 써냈다는 것은 작가의 사고력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를 방증해주는 것이며 상상력또한 무한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조롱과 찬양'이라는 주제로 표현주의를 생각해내는가 하면 '샘물과 가시덤불'로 성경의 모세를 생각케한다. 이런 면에서 작가의 모든 생각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작가와의 수준차이가 너무 클 뿐더러 그의 상상력을 따라가기가 힘들다. 그래도 책을 읽으며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는게 이리 좋은지는 몰랐다. 요새는 생각하는 것, 창의력이 중요시되고 있다. 고뇌하고 또 고뇌해야 첫 줄을 써낼 수 있는 논술이 판을 치고 있는 사회의 흐름에서 이 책은 생각하는 것, 상상하는 것의 중요성을 밝혀준다.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이 되기는 힘들지만 스스로가 만족할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