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e - 시즌 3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3
EBS 지식채널ⓔ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인터넷에서 '스티븐 제라드 빌딩'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내용인즉슨, 두바이에 세워지는 주거 전용 빌딩에 리버풀의 세계적인 축구선수 스티븐 제라드가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기로 했고, 그 대가로 고급 아파트 한 채를 받기로 했다는 것. 뭐, 고작 닳지도 않는 이름을 빌려주는 대가가 아파트 한 채라는 게 꽤나 부럽고, 제법 레어 축에 끼는 내 이름은 아무도 빌려가지 않는 현실이 유감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큰 불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스티븐 제라드라는 이름 자체는 별 게 아니라지만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간단한 게 아니고, 무엇보다도 스티븐 제라드는 내가 좋아하는 축구선수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기사를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조금씩 읽어오던 <지식e-시즌3>에서 '두바이의 꿈' 편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씌어져 있었다.

"이곳이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삶은 악몽입니다. 사람들은 과연 누가 이 건물을 지었는지 기억이나 할까요?" (p264)

물론, 이런 문구를 보고 새삼스레 '스티븐 제라드 빌딩'이라는 이름이 터무니없이 잘못되었다거나, 혹은 정작 그 건물을 짓느라 고생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못내 궁금해졌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냉정한 현실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아니 최소한 나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팍팍한 삶보다는 이름 있는 어떤 특정한 사람의 화려하고 부유한 삶을 접하게 되는 쪽을 차라리 더 선호하고, 이는 비록 가닿을 수는 없을지언정 여전히 꾸고 싶은 '꿈'의 한 자락을, 이른바 '스티븐 제라드 빌딩'이 펼쳐 보이고 있기 때문일 터다. 그렇지만 적어도,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뻗어가는 초고층 빌딩들이 즐비한 '두바이의 꿈' 속에, 힘든 노동을 기꺼이 감내하면서 그저 소박한 바람만을 가질 뿐인 '노동자의 꿈'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제 알아야만 했다. 3일에 1층씩 올리는 '버즈 두바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의 하루 평균임금은 4달러. 그들은 각자의 소박한 '꿈'을 좇아 '두바이의 꿈'에 동참하기 위해 빚을 내어 '기회의 땅' 두바이를 찾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참담한 현실과 냉혹한 무관심일 뿐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니라, 그저 누구나 마다하고 싶은 '악몽'에 다름 아니었으리라.

소위 '기사'라는 건 기본적으로 읽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에 '기사'는 모든 '사실'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는 것만을 다루려는 경향이 있는 한편, 때로는 사람들에게 읽혀지기 위한 특정한 목적을 위해 '사실'을 드러내는 듯하면서도 '진실'을 교묘히 가리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식e>는 그러한 '기사'와는 대척점에 서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즉, 설령 누구나 읽기를 원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알아야만 할 '사실'에, 오직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사실'에 <지식e>는 천착하는 것이다. 예컨대 <지식e-시즌3>에서라면, 누구나 바라는 '꿈'이라 할 수 있는 '스티븐 제라드 빌딩'이 아니라 이름 없는 누군가의 소박한 '꿈'이 '악몽'으로 변하는 현실을, 권위와 명성을 자랑하는 '노벨상'이 아니라 풍자와 철학이 담긴 '이그노벨상'을, 자랑스러운 한국인 리더인 UN사무총장 반기문의 삶이 아니라 '아시아의 슈바이처'라 불린 WHO사무총장 이종욱의 삶을 담담히 보여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지식e>는 언제나 '진실'을 지향하고 있는 셈이다.

이미 1권과 2권을 읽었을 때도 그러했던 것처럼, <지식e-시즌3>에서 드러내주는 '진실'들을 접하면 어쩐지 나와는 어울리지 않게 사뭇 감상적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감정일 터이고, 그렇기에 "이 시대의 아방가르드와 함께 나이를 먹고, 몇 달에 한 번씩 출간되는 발간물을 보는 재미가 최소한 환갑까지는 갔으면 좋겠다."는 우석훈의 이 책에 대한 '찬미'처럼, 나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저 이런 책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렇다면 아주 조금쯤은 '진실'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인터넷에서 넘치는 '기사'의 홍수가 가져다주지 못하는 <지식e>의 진실한 '아픔'과 '슬픔'과 '분노'가, 그래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쪽으로 튀어! 1 오늘의 일본문학 3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에게 "하루씩 걸러서 다녀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아버지가 있다면, 나는 우리 아버지와 바꾸자고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일 텐데, 정작 그런 아버지를 둔 초딩 우에하라 지로에게 아버지는 그리 달가운 존재가 아니다. 물론, 프리라이터랍시고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한다거나, 케첩과 미제국주의를 '주적'으로 간주하며 요란을 떤다거나, 가끔 우악스러운 힘으로 레슬링 기술을 걸어오는 것쯤은 차라리 괜찮은 편이다. 그러나, 연금독촉을 나온 세무 공무원에게 국민연금 따위는 못 내겠다고 동네가 떠나가라 큰소리로 항변한다거나, 가정방문을 온 담임선생님에게 국기에 대한 경례와 기미가요 제창의 부당함을 지적한다거나, 심지어 국민 따위는 관두겠다고 말하는 아버지란 확실히 초딩이 쉽게 감당할 만한 아버지가 아닌 것이다.

아니, 어디 초딩뿐이겠는가. 과거 혁공동(아시아 혁명 공산주의 동맹)의 전설적인 투사였으며, 좌익 진영의 내홍에 염증을 느껴 홀연히 동맹을 빠져 나온 이후에는 좌익과 우익 모두 탐탁지 않게 여기고 아나키스트를 자처하는 아버지 우에하라 이치로는, 심지어 국가가 감당하기에도 결코 만만치 않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체제에 빌붙은" 공무원을 보면 도무지 그냥 지나칠 줄을 모르고, 특히나 경찰을 향해서는 "국가의 개들"이라며 노골적인 적개심을 감추지 않으며, 더욱이 "야스쿠니 신사에 불을 지르겠다."는 발언조차도 서슴지 않는 그는, 그러니까 한 마디로 위험천만한 인물인 셈이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를 두고서도 달리 어찌할 수 없는 초딩의 무기력함은, 실은 반국가,반자본주의를 맹렬히 주창하는 우에하라 이치로가 국가와 자본주의의 거대함 앞에서 느끼는 무기력함과 사뭇 닮아있다. 대단한 소설을 내겠다는 그의 야심은 우익의 압력에 가로 막히고, 185cm에 이르는 당당한 체격과 가라데 능력도 모든 경찰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걸핏하면 "남쪽으로 가겠다."는 말을 내뱉지만 '남쪽'에 가는 것도 그리 쉽지 않아 보이거니와, 설사 간다고 하더라도 과연 '남쪽'이 '이곳'과 얼마나 다를지 그저 의심스럽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실제로 지로네 가족이 '남쪽'으로 떠나게 되면서 상황은 일변한다. 여느 아이들의 아버지와 같은 평범한 아버지를 원하는 지로의 바람과 여느 국민들과는 달리 국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이치로의 바람은, 급작스럽게 떠나서 안착한 '남쪽의 섬'인 이리오모테 섬에서 잠시 충족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남쪽 섬에 도착했지만, 그곳에는 빈 집의 수리를 도와주고 가재도구와 음식을 나누어주는 등,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로 넘쳐나서 살아가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이것은 지역 유지인 상라 어른과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외국인 베니의 존재는 '국가'와 '자본주의'라는 두 거대한 축이 한 '개인의 삶'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국가와 자본주의의 거대하고 교묘한 시스템은 평화롭고 여유로운 남쪽의 섬조차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잠시나마 평온한 생활을 영위하는 듯하던 지로네 가족의 삶은, 이리오모테 섬에 리조트를 건설하려는 건설회사와 맞부딪치면서 다시 급격하게 요동친다. 국가와 자본주의를 등에 업고 법과 규칙을 주장하는 건설회사의 횡포에 우에하라 이치로는 분연히 맞서고자 하지만, 그것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은 우에하라 이치로 자신은 물론, 초딩인 지로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이길 수 없는 싸움에 기꺼이 나서며, 우에하라 이치로는 이렇게 말한다.

"지로,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노예제도나 공민권운동 같은 게 그렇지.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 날 아침에 거저 내준 것이 아니야. 민중이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어렵사리 쟁취해낸 것이지.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아버지는 그 중 한 사람이다. 알겠냐?" (p245)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정책과 제도를 끊임없이 밀어붙이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미친 소'를 먹이기 위해 광고조차 마다하지 않으며, 심지어 하고 싶은 말까지도 통제하려는 '국가'를 현실에서 수시로 마주하는 게 일상이고 보면 "나도 남쪽으로 튀고 싶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지만, 실은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남쪽'으로 가는 방법을 몰라서도, '남쪽'이 결단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 지어서도 아니다. 기실 그것은 어쩌면 이미 어린 시절, 일찍 일어나고 서로 돕는 '새나라의 어린이' 따위는 기필코 마다하고 싶어 하면서도, 여전히 '헌나라의 어린이'가 아닌 '새나라의 어린이'로 남을 때 느꼈던, 그러한 '안도감'의 연장선 위에서 이루어지는 '두려움' 혹은 '체념'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사회란 건 싸우지 않는 사람들을 위안해줄 뿐이야."라는 지로의 엄마 사쿠라의 말은, 그래서 '위안'으로 족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위안'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이 책의 작가인 오쿠다 히데오는 우에하라 이치로라는 과격한 인물을 등장시켜서 '국가'와 '자본주의'를 비롯한 사회체제에 대해 다분히 비판적 면모를 보여주고, 더하여 마치 일찍 일어나고 서로 돕고 거짓말을 안 하고 쌈을 하지 않고 몸은 튼튼한 '새나라의 어린이'처럼,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애국가를 부르며 국가와 자본주의에 '긴박'된 삶을 살면서 '안도'하는 사람들을 향한 비판도 잊지 않지만, 오로지 우에하라 이치로만이 '정의'가 아님은 초딩인 우에하라 지로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에하라 이치로의 거침없는 행보가 의미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삶'에 대한 가능성과 신뢰 그 자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의문을 품었거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잊지 말고 가슴 속에 간직해주세요. 그리고 어른이 되었을 때, 자신의 머리로 판단하여 정의의 편에 서는 사람이 되어주세요."라는 교장 선생님의 말에서 드러나듯, 그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둔 각 '개인'의 선택에 대해 지지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뿐이다. 그러니까, 오직 '새나라'만이 유일한 선택은 아니고, 반드시 '새나라의 어린이'여야 할 필요도 없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헌나라의 어린이'라도 괜찮다고.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히 싸워. 져도 좋으니까 싸워. 남하고 달라도 괜찮아.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해해주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라는 우에하라 이치로의 말을 곱씹으며 문득 생각해보았다. 만약 이런 사람이 내 아버지였다면 나는 과연 '헌나라의 어린이'가 될 수 있었을까? 글쎄,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랬다면 적어도, '초등학교 6년 개근상' 따위를 받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뭐, 꼭 '개근상'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6년 내내 단 한 번도 학교를 빼먹은 일이 없는 '초딩의 삶'이란 꽤나 재미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아내가 결혼했다.'는 발칙한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오히려 그 발칙함이 너무 지나쳐서 감히 발칙하게는 생각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아내가 결혼했다고? 아, 그래. 아내는 사람이고, 사람이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는거지, 그게 뭐. 아무려나 남편이 임신했다는 것보다야 훨씬 정상적이지 않은가'하고 말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 '아내'는 그냥 아내가 아니라 '나'(소설 속 주인공인 덕훈)의 '현재' 아내이고, '나'와 이혼을 한 것이기는커녕 앞으로도 이혼할 생각이 없단다. 그런데도 '또' 결혼을 하겠다고?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소린가. 이쯤 되면, 차라리 남편이 임신했다는 게 더 정상적인 것은 아닌가.

누구나 투톱을 꿈꾼다
그러나, "우리 팀은 투톱 시스템이야."라고 선언하는 아내(인아)의 말에는 묘한 욕망의 끌림이 있다. '무결점 스트라이커'라고 불리던 셰브첸코가 잉글랜드 무대에서 실패를 경험하며 '무결점 스트라이커'란 명성 자체가 심각한 결점임을 드러냈었던 데서 보듯이, 완벽한 스트라이커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즉, 강건한 신체를 이용한 헤딩력, 빠른 발을 바탕으로 한 드리블 능력, 원샷 원킬의 골 결정력은 물론, 우아하고 세밀한 개인기와 어느 무대에서나 최상의 능력을 보일 수 있는 꾸준함과 적응력 등, 이 모든 것을 갖춘 원톱을 보유한 팀이란 있을 수 없다는 의미다. 하기에 많은 팀들은 이러한 원톱의 불완전함을 보완하기 위해, 서로의 장점을 부각시키고 단점을 상쇄시킬 수 있는 투톱 시스템을 선호한다. 적어도, 골을 넣기 위한 적극적인 욕망이 있는 한은 말이다.

신성한 '사랑'에 있어서 '선택'이란 단어를 쓰는 게 온당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건 특정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선택의 하나임을 부인할 수 없다면, 사랑을 선택하는 것은 '베스킨라빈스31'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것과 조금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스크림 가게의 수많은 아이스크림이 하나같이 달콤한 것처럼 어떤 사랑이라도 달콤할 것임은 물론이지만, 단 하나의 아이스크림만을 골라야할 때의 아쉬움과도 같이 사랑하는 단 한 명의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도 일말의 아쉬움을 남기는 일이다. 바로 그런 때에, 마치 '레인보우 샤베트'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함께 고르는 것처럼, 두 명의 상대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떨까. 가령, '섹시한 여자 한 명과 상냥한 여자 한 명'이라거나, 혹은 '잘생긴 남자 한 명과 재미있는 남자 한 명',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랑이 달콤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또 다른 선택의 달콤함을 굳이 외면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리라.

골키퍼에게 자유를 허하라
이에 대해, "골키퍼를 두 명 두는 것은 반칙이야."라고 항변하는 덕훈의 말은, 불행히도 미약하기만 하다. 언뜻 생각하기에, 골키퍼는 한 명으로 제한하는 게 절대불변의 진리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골키퍼는 존재 자체가 반칙인 것인지도 모른다. 1992년에 FIFA가 백패스를 골키퍼가 손으로 잡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을 신설한 것도 발로 하는 축구를(종종 머리 혹은 그 밖의 부위도 쓰지만) 손이 수시로 맥 빠지게 만들었던 탓이 크거니와, 더욱이 실상 1863년 처음 영국축구협회가 설립됐을 당시에는 골키퍼란 포지션 자체가 없기도 했다(<포포투10월호> 참조). 그래서 그 무렵에는 필드에 있는 누구나 손을 사용할 수 없었음을 물론, 심지어 전술조차 2-9 시스템이 대세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무려 나인톱 체제.

'투톱'을 부르짖는 아내는 그에 비하면 양호한 수준이다. 하지만 투톱이든 나인톱이든지간에,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 시스템을 자신의 독점적 혜택으로 간주하지 않는 데에 있다. 애초에 인아는 덕훈에게 상대의 외도에 대해 묵인할 것을 규칙으로 정하자고 했고, 자신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점을 미리 밝혀두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인아는 골키퍼를 두 명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골키퍼에게 골라인을 벗어나서 마음껏 공격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고 있는 셈이라고 해야 옳다. 단지, 실제로 덕훈도 다른 여자를 만나보기도 했지만 아내만큼의 혹은 아내와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 여자를 만나지 못했고, 반면 아내는 그러한 또 한 명의 남자를 찾았을 뿐인 것이다.

그 즐겁던 동네축구는 누가 다 내쳤을까?
어린 시절 주로 즐겼던 축구는, 말 그대로 동네축구였다. 골대에만 붙어있어야 하는 골키퍼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어서 골키퍼는 대체로 '자유킵'이었고, 그래서 누구나 공을 발로 차다가도 골대 부근에서는 손으로 공을 잡는 게 허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때로 축구골대는 반드시 직사각형의 반듯한 기둥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서, 그저 말뚝 같은 기둥 하나나 쓰레기통은 물론, 신발주머니 두 개를 벌려 놓는 것으로 축구골대를 대신했으며, 그럴 때는 아예 골키퍼가 필요 없기도 했다. 당연히 포메이션이나 인원수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공을 향해 달리는 것이 전부였건만, 그럼에도 한결같이 축구는 즐겁기만 했다.

어린 시절의 즐겁던, 그러나 제멋대로였던 축구는 당연히 공식경기로 인정될 수 없고, 이제 더 이상 언제 어디서나 수월하게 허용되는 방식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두 명의 남편과 결혼생활을 이어가려는 인아의 삶 또한 공개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는 아니다. 비록 티베트나 모수족의 경우처럼, 현실 속에서도 일처다부제(혹은 일부일처제가 아닌 다른 모든 형태)가 영위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그들이 사는 사회의 전통과 관습에 따른 것일 뿐, 21세기 대한민국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기만 한 것이다. 하지만, 다르다는 것이 곧 틀렸다는 의미가 될 수 없음 또한,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단지 '다름'과 '낯섦'에만 집착하는 와중에, 어쩌면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축구공의 진실.
축구공 안에 담겨 있는 위대함이란 행복과 관련된 어떤 것이다.
축구공이란 행복과 가까운 데 있는 무엇이다.
축구공이란 바로 행복이다.
자본가들이 선수들을 축구 노동자로 만들어 축구라는 상품을 화려하게 포장해서 소비자들에게 판매하더라도, 정치가들이 축구 열기를 이용해서 표를 훔쳐 가고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축구공 속에 깃든 행복만은 그들이 독점할 수도, 팔아먹을 수도, 훔쳐 갈 수도 없다.

또 하나의 진실.
어떤 사람이건 사랑을 하게 마련이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한다.
어린아이도, 어른도.
결혼을 한 사람도, 하지 않은 사람도.
노동자도, 자본가도.
좌파도, 우파도.
그리고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p351)

어떤 다양한 형태의 축구와 사랑이든지간에 가장 중요한 진실은 언제나 한 가지일 뿐이라고, 이 소설은 말한다. 축구는 '행복한 것'이고, 사랑은 '함께 하고 싶은 것'이라는 '진실' 이외에 더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 물론, 여전히 안정적이고 공식적이며 보편적인 규칙은 준수되어야 마땅하지만, 즐거움이 거세된 축구는 더 이상 축구가 아니며, 그럴 때 지켜야할 규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도, 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닐까. 

자살골은 '너'의 운명
축구에서 종종 벌어지는 자살골 중에는 웃긴 장면이 많지만 그게 '우리 팀' 이야기라면 전혀 우습지 않고, 축구를 하다보면 자살골도 나오게 마련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역시 그게 '우리 팀' 이야기라면 쉽게 수긍하기 힘들다. 매력적이고, 요리에 능하고, 살림을 잘 살며, 시댁에 싹싹하기 그지없으며, 남편에게도 지극정성이며, 무엇보다도 축구를 좋아하는 여자란, 남자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최선의 선택임에 틀림없고, 더하여 상대의 외도는 물론이고 중혼도 허용하자는 그녀는 멋지고 진취적이며 화끈하기까지 하지만, 설령 그렇다할지라도 그런 여자가 '내 아내'가 되는 건 재고의 여지없이 사양이다.

아무리 다른 모든 관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덕훈과 재경의 선택은 '자살골'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이 발칙한 소재를 가지고 상당히 흥미롭고 설득력 있게 독자를 이끌어감에도 불구하고, 정작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축구'도 좋고 '사랑'도 좋고 '진실'은 더욱 좋지만, 솔직히 '자살골'은 최악이니까. 그러니 아무쪼록, '자살골'만은 언제나, 그저 '너'의 운명이기를 삼가 바라고 바랄 따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주 올레 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
서명숙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햇살이 따사롭고 바람이 선선한 어느 오후, 야외에서 바비큐를 즐긴 사람의 바비큐 맛 예찬은 조금쯤 가려들을 필요가 있다. 비록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저 바비큐의 '맛'일 뿐일지라도, 거기에는 '야외'라는 공간이 가져다 준 행복감이 적잖이 포함되어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 책 <제주걷기여행>에 대한 나의 평가 역시 조금쯤 가려 듣는 것이 나을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는 이 책을, 완도에서 제주도로 이동하는 배 안에서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나는 이 책을 제주도, 좀 더 정확하게는 '제주올레'와 도저히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다.

아닌 게 아니라, <제주걷기여행>은 '제주올레'와 동의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사저널>과 <오마이뉴스>의 편집장을 역임했던 저자 서명숙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영감을 얻고 돌아와 자신의 후반부 인생을 '제주올레' 길을 만드는 데에 바치기로 결심하였고, 이 책은 바로 그러한 현재진행형의 과업에 얽힌 만만치 않았던 여정과 그 중간결과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이 책은 단순한 여행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신념과 노력에 대한 감동적인 보고서이고, 동시에 '제주올레' 길을 포함하고 있는 제주에 관한 가장 내밀한 안내서이며, 또한 '걷기'라는 지극히 여유롭고 인간다운 행위를 향한 예찬서이기도 한 셈이다.

<제주걷기여행>이 '제주올레'에서 비롯된 만큼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단연 '제주올레' 길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제주올레'를 통해 저자가 오랜 세월 반목하던 동생과 화해하고 동생이 가장 든든한 동지가 된 사연, 길을 찾아내고 잇는 데에 따르는 어려움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도움의 손길들에 관한 이야기는 무척이나 신선하고도 감동적이다. 해병대의 병사들이 동원되어 4코스 조른모살 해안의 평탄화 작업을 했다는 부분에서는 '만만한 게 군인이지.'라며 잠깐 툴툴거리기도 했지만, 그 길을 '해병대 길'이라고 부르기로 했고, 그 길로 인해 그곳을 지나다니기 편해진 인근의 해녀 할망들이, 감사의 표시로 4코스 개장행사 때 유죽을 올레꾼들에게 대접했다는 이야기에 금세 가슴이 짠해졌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나는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잔잔한 바다를 바라다보곤 했다.

사실 이 책을 '떠난 길' 위에서 급히 사게된 것은, 그저 이제 내가 곧 걸을 '제주올레'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는 측면이 컸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이 책은 '제주올레'에 대한 안내와 설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 코스가 정해지고 연결되는 과정에 관한 소소한 감동들을 아울러 담아내고 있었고, 하기에 제주도로 향하는 배 안에서 내가 걸을 코스를 선정하는 것은 퍽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제주올레의 시작이자 말미오름과 알오름의 목장을 경유하는 1코스에 대해 읽으면 1코스가, 불운했던 천재화가 이중섭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 2코스에 대해 읽으면 2코스가, 또 김수봉의 노고가 깃든 수봉로와 제주의 전통적인 배 '테우'가 있다는 3코스에 대해 읽으면 3코스가, 그러다가도 송악산 절경을 둘러 볼 수 있는 6코스에 대해 읽으면 6코스가 못내 걷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1코스와 6코스를 걷고 돌아와, 나는 이 책을 마저 읽었다. 저자의 산티아고 순례기도 꽤 흥미로웠고, 제주도와 얽힌 사람 이야기와 먹거리 이야기도 나쁘지 않았다. '제주올레'를 걸은 사람들이 겪은 치유와 변화의 과정을 소개하는 부분은, 솔직히 여느 때의 나라면 어쩐지 너무 특별한 케이스를 골라 과장된 광고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직접 '제주올레'를 경험한 후의 나로서는 그게 그저 과장된 광고가 아니라 실제로 '제주올레'를 경험하며 느낀 행복의 한 유형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저자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를 알리려는 간절한 진심의 발로라는 것을 감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 역시, 이제 '제주올레'와 이 책의 강력한 신봉자가 된 것이다.

미리 밝혔듯, 이 책에 대한 내 객관적ㅡ그래봤자 어차피 주관이 섞인ㅡ평가는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더라도, '제주올레'를 걸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행복감이, 진실로 '제주올레'의 길 위를 풍요롭게 감싸고 있었다고는 단호히 확언할 수 있다. 책 속에서 양희은이 이미 명쾌하게 결론내린 대로, '제주올레'는 정말이지, "죽이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어느 때가 되었든 '제주올레'는 필경 다양하되 한결같은, 평화롭고 넉넉한 아름다움과 행복으로, 놀며 쉬며 걸으려는 사람들을 기꺼이 반겨 맞아줄 것이다. 그러하니, 그 '죽이는 길'로 언제고 꼭 떠나 보시기를. 그리고 그 '죽이는 길'로 떠나는 와중에, 아마도 이 책은 대단히 유용하고도 즐거운 동행이 되어 주리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탱이 2008-10-21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죽이는 길'을 관광버스를 타며 다녔으니...잘 봤어요^^

Fenomeno 2008-10-21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다시 찾을 이유가 생긴 셈이지요. ^^
 
움베르토 에코와 축구 이제이북스 아이콘북스 17
피터 페리클레스 트리포나스 지음, 김운찬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기본적으로 내가 책을 읽는다는 건 대체로 '오독'을 의미하지만, 이 책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특히나 심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두어야겠다. <움베르토 에코와 축구>는 본문만 따지자면 70여 페이지에 불과한 얇은 책이지만, 가장 집중이 잘 된다는 화장실에서 주로 읽었음에도 어려운 단어들의 나열에, 과연 내가 지금 읽는 게 한글인지를 의심했던 적이 수차례일 정도였다. 하기는 이 책은 움베르토 에코가 스포츠, 특히 축구에 대해 여기저기에 썼던(분명 이탈리아어로) 글들에 대해 피터 페리클레스 트리포나스라는 이름조차 어려운 영국 사람이 기호학적 해석을 곁들여 분석했고(아마도 영어로), 이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니 어렵지 않다고 느끼는 게 비정상인지도 모르겠다(라는 건 어디까지나 오독에 대한 나의 변이다).

변명은 이쯤 해두고 기꺼이 오독에 기초해서 말하자면, 일단 움베르토 에코에게 있어 축구가 그리 우호적인 대상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아니, 엄밀히 말해 축구는 그저 축구 그 자체일 뿐이지만, "축구라는 매개를 통해 인간이 행하는 것들이 지니는 미묘한 차이와 과잉"에 대해 에코는 경계와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다시 말하면, "스포츠는 좋은 것으로 생각된다. 축구는 스포츠다. 그러므로 축구는 좋은 것이다."로 끝나는 삼단논법과 달리, 에코는 스포츠로서의 축구가 아니라 축구가 매체에 의한 재현을 통해 사람들에게 지각되고 소비되는 양태와 관련되는, 즉 하나의 기호로서의 축구에 대해 주목하는 것이다.

에코의 비판은 특히 훌리건이라고 칭할 만한 열성적인 팬들에게 신랄해지는데, 그는 매주 일요일마다 축구장을 찾는 팬들을 대리만족을 위해 매주 성교하는 커플들을 정기적으로 보러가는 관음증 환자에 비유한다. 그들에게 축구를 대체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따라서 그들은 좌절된 섹스광처럼 축구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에코는 그들과 대화하는 것은 "마치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도 하는데, 이것은 이른바 "팬"과 "안티팬" 사이에 서로 '교감적 말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결과로 그들 사이의 대화는 '사회적 의사소통'의 기능을 전혀 가지지 못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한편, 스포츠를 직접 몸으로 즐기지 않는 팬들은 스포츠를 말함으로써 자신도 거기에 동참하고 있다고 혼동하며 무책임을 전제로 하는 '스포츠 잡담'에 손쉽게 참여하는데, '스포츠 잡담'은 '사회적 의사소통'의 기능을 가지지 못한 채 '공허한 논의'로 귀결되기 일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무용한 '스포츠 잡담'이 "정치적 논쟁에 대한 가장 손쉬운 대용품"이 되는 데 있다. 팬들은 재무부 장관이 하는 일을 판단하거나 의회기록을 검토하는 대신, 코치가 하는 일에 대해 논의하거나 운동선수의 기록을 검토하는 데 집중하면서 '민주적 논쟁'에 참가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결국 이것은 실제 정치적 부분에 시민이 개입할 가능성을 낭비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축구는, "인민의 아편"처럼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축구ㅡ다른 프로 스포츠도 포함해서ㅡ에 대해 지니는 에코의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축구팬을 자처하는 한 사람으로서 전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비록 에코가 '팬'과 '훌리건'을 구분하고 축구의 장점도 마지못해 인정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에코는 축구의 밖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어린 시절 자신의 축구 실력이 형편없어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는 에코의 고백이 순전히 과장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축구를 제대로 좋아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겉보기와는 반대로, 팬이 된다는 것은 대리 만족이 아니며, 구경을 하느니 직접 축구를 하겠다는 사람들은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라는 닉 혼비의 말을 에코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축구팬의 입장에서 에코와 이야기하는 것 역시 "마치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이 될 가능성이 농후할 뿐이다.

그러나, "축구경기가 열리는 일요일에 과연 혁명이 가능한가?"라는 에코의 물음은 축구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차와 애정의 크기와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기억되어야만 하는 경구다. 왜냐하면, 사실상 에코의 질문에서 방점은 '축구경기'가 아니라 '혁명'에 찍혀야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축구팬과 안티팬 사이의 접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축구가 그저 축구가 아니라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축구가 모든 것이 될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고 믿는 한은 말이다. 그러므로, '예외적 승인'으로서 인정되는 아편(물론, 축구가 아편이라는 데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의 효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하는 아편의 폐해를 경계해야한다는 당위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축구경기'의 뒤에 가리어지는 '혁명'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축구팬은 축구에 악의적이기까지 한 움베르토 에코와도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뭐, 썩 내키지는 않겠지만.

얘야팔유팔파오림픽이열리며는우리덜은뭐시그리좋다냐소값이나쌀값이나객지서노동일허는니동생임금이라도올라간다냐 (중략) 그나저나오림픽이끝나며는저텔레비전속사람들이나왼갖치사와축사속의사람덜은무신소리로안정된선진조국과정의복지를위하여침을튀길까그러고우리덜은무신재미로살끄나무신희망으로와와절망하끄나. 해가떠도오림픽달이떠도오림픽빚이져도오림픽소값개값되야도오림픽죽으나사나오림픽인디아아아아아그때는참말이제무슨절망으로아아대한민국아아대한민국허여무신재미로살끄나    

ㅡ김용택 <팔유팔파 中>ㅡ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