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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아내가 결혼했다.'는 발칙한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오히려 그 발칙함이 너무 지나쳐서 감히 발칙하게는 생각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아내가 결혼했다고? 아, 그래. 아내는 사람이고, 사람이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는거지, 그게 뭐. 아무려나 남편이 임신했다는 것보다야 훨씬 정상적이지 않은가'하고 말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 '아내'는 그냥 아내가 아니라 '나'(소설 속 주인공인 덕훈)의 '현재' 아내이고, '나'와 이혼을 한 것이기는커녕 앞으로도 이혼할 생각이 없단다. 그런데도 '또' 결혼을 하겠다고?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소린가. 이쯤 되면, 차라리 남편이 임신했다는 게 더 정상적인 것은 아닌가.
누구나 투톱을 꿈꾼다
그러나, "우리 팀은 투톱 시스템이야."라고 선언하는 아내(인아)의 말에는 묘한 욕망의 끌림이 있다. '무결점 스트라이커'라고 불리던 셰브첸코가 잉글랜드 무대에서 실패를 경험하며 '무결점 스트라이커'란 명성 자체가 심각한 결점임을 드러냈었던 데서 보듯이, 완벽한 스트라이커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즉, 강건한 신체를 이용한 헤딩력, 빠른 발을 바탕으로 한 드리블 능력, 원샷 원킬의 골 결정력은 물론, 우아하고 세밀한 개인기와 어느 무대에서나 최상의 능력을 보일 수 있는 꾸준함과 적응력 등, 이 모든 것을 갖춘 원톱을 보유한 팀이란 있을 수 없다는 의미다. 하기에 많은 팀들은 이러한 원톱의 불완전함을 보완하기 위해, 서로의 장점을 부각시키고 단점을 상쇄시킬 수 있는 투톱 시스템을 선호한다. 적어도, 골을 넣기 위한 적극적인 욕망이 있는 한은 말이다.
신성한 '사랑'에 있어서 '선택'이란 단어를 쓰는 게 온당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건 특정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선택의 하나임을 부인할 수 없다면, 사랑을 선택하는 것은 '베스킨라빈스31'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것과 조금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스크림 가게의 수많은 아이스크림이 하나같이 달콤한 것처럼 어떤 사랑이라도 달콤할 것임은 물론이지만, 단 하나의 아이스크림만을 골라야할 때의 아쉬움과도 같이 사랑하는 단 한 명의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도 일말의 아쉬움을 남기는 일이다. 바로 그런 때에, 마치 '레인보우 샤베트'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함께 고르는 것처럼, 두 명의 상대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떨까. 가령, '섹시한 여자 한 명과 상냥한 여자 한 명'이라거나, 혹은 '잘생긴 남자 한 명과 재미있는 남자 한 명',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랑이 달콤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또 다른 선택의 달콤함을 굳이 외면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리라.
골키퍼에게 자유를 허하라
이에 대해, "골키퍼를 두 명 두는 것은 반칙이야."라고 항변하는 덕훈의 말은, 불행히도 미약하기만 하다. 언뜻 생각하기에, 골키퍼는 한 명으로 제한하는 게 절대불변의 진리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골키퍼는 존재 자체가 반칙인 것인지도 모른다. 1992년에 FIFA가 백패스를 골키퍼가 손으로 잡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을 신설한 것도 발로 하는 축구를(종종 머리 혹은 그 밖의 부위도 쓰지만) 손이 수시로 맥 빠지게 만들었던 탓이 크거니와, 더욱이 실상 1863년 처음 영국축구협회가 설립됐을 당시에는 골키퍼란 포지션 자체가 없기도 했다(<포포투10월호> 참조). 그래서 그 무렵에는 필드에 있는 누구나 손을 사용할 수 없었음을 물론, 심지어 전술조차 2-9 시스템이 대세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무려 나인톱 체제.
'투톱'을 부르짖는 아내는 그에 비하면 양호한 수준이다. 하지만 투톱이든 나인톱이든지간에,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 시스템을 자신의 독점적 혜택으로 간주하지 않는 데에 있다. 애초에 인아는 덕훈에게 상대의 외도에 대해 묵인할 것을 규칙으로 정하자고 했고, 자신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점을 미리 밝혀두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인아는 골키퍼를 두 명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골키퍼에게 골라인을 벗어나서 마음껏 공격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고 있는 셈이라고 해야 옳다. 단지, 실제로 덕훈도 다른 여자를 만나보기도 했지만 아내만큼의 혹은 아내와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 여자를 만나지 못했고, 반면 아내는 그러한 또 한 명의 남자를 찾았을 뿐인 것이다.
그 즐겁던 동네축구는 누가 다 내쳤을까?
어린 시절 주로 즐겼던 축구는, 말 그대로 동네축구였다. 골대에만 붙어있어야 하는 골키퍼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어서 골키퍼는 대체로 '자유킵'이었고, 그래서 누구나 공을 발로 차다가도 골대 부근에서는 손으로 공을 잡는 게 허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때로 축구골대는 반드시 직사각형의 반듯한 기둥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서, 그저 말뚝 같은 기둥 하나나 쓰레기통은 물론, 신발주머니 두 개를 벌려 놓는 것으로 축구골대를 대신했으며, 그럴 때는 아예 골키퍼가 필요 없기도 했다. 당연히 포메이션이나 인원수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공을 향해 달리는 것이 전부였건만, 그럼에도 한결같이 축구는 즐겁기만 했다.
어린 시절의 즐겁던, 그러나 제멋대로였던 축구는 당연히 공식경기로 인정될 수 없고, 이제 더 이상 언제 어디서나 수월하게 허용되는 방식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두 명의 남편과 결혼생활을 이어가려는 인아의 삶 또한 공개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는 아니다. 비록 티베트나 모수족의 경우처럼, 현실 속에서도 일처다부제(혹은 일부일처제가 아닌 다른 모든 형태)가 영위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그들이 사는 사회의 전통과 관습에 따른 것일 뿐, 21세기 대한민국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기만 한 것이다. 하지만, 다르다는 것이 곧 틀렸다는 의미가 될 수 없음 또한,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단지 '다름'과 '낯섦'에만 집착하는 와중에, 어쩌면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축구공의 진실.
축구공 안에 담겨 있는 위대함이란 행복과 관련된 어떤 것이다.
축구공이란 행복과 가까운 데 있는 무엇이다.
축구공이란 바로 행복이다.
자본가들이 선수들을 축구 노동자로 만들어 축구라는 상품을 화려하게 포장해서 소비자들에게 판매하더라도, 정치가들이 축구 열기를 이용해서 표를 훔쳐 가고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축구공 속에 깃든 행복만은 그들이 독점할 수도, 팔아먹을 수도, 훔쳐 갈 수도 없다.
또 하나의 진실.
어떤 사람이건 사랑을 하게 마련이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한다.
어린아이도, 어른도.
결혼을 한 사람도, 하지 않은 사람도.
노동자도, 자본가도.
좌파도, 우파도.
그리고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p351)
어떤 다양한 형태의 축구와 사랑이든지간에 가장 중요한 진실은 언제나 한 가지일 뿐이라고, 이 소설은 말한다. 축구는 '행복한 것'이고, 사랑은 '함께 하고 싶은 것'이라는 '진실' 이외에 더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 물론, 여전히 안정적이고 공식적이며 보편적인 규칙은 준수되어야 마땅하지만, 즐거움이 거세된 축구는 더 이상 축구가 아니며, 그럴 때 지켜야할 규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도, 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닐까.
자살골은 '너'의 운명
축구에서 종종 벌어지는 자살골 중에는 웃긴 장면이 많지만 그게 '우리 팀' 이야기라면 전혀 우습지 않고, 축구를 하다보면 자살골도 나오게 마련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역시 그게 '우리 팀' 이야기라면 쉽게 수긍하기 힘들다. 매력적이고, 요리에 능하고, 살림을 잘 살며, 시댁에 싹싹하기 그지없으며, 남편에게도 지극정성이며, 무엇보다도 축구를 좋아하는 여자란, 남자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최선의 선택임에 틀림없고, 더하여 상대의 외도는 물론이고 중혼도 허용하자는 그녀는 멋지고 진취적이며 화끈하기까지 하지만, 설령 그렇다할지라도 그런 여자가 '내 아내'가 되는 건 재고의 여지없이 사양이다.
아무리 다른 모든 관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덕훈과 재경의 선택은 '자살골'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이 발칙한 소재를 가지고 상당히 흥미롭고 설득력 있게 독자를 이끌어감에도 불구하고, 정작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축구'도 좋고 '사랑'도 좋고 '진실'은 더욱 좋지만, 솔직히 '자살골'은 최악이니까. 그러니 아무쪼록, '자살골'만은 언제나, 그저 '너'의 운명이기를 삼가 바라고 바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