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으로 튀어! 1 오늘의 일본문학 3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에게 "하루씩 걸러서 다녀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아버지가 있다면, 나는 우리 아버지와 바꾸자고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일 텐데, 정작 그런 아버지를 둔 초딩 우에하라 지로에게 아버지는 그리 달가운 존재가 아니다. 물론, 프리라이터랍시고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한다거나, 케첩과 미제국주의를 '주적'으로 간주하며 요란을 떤다거나, 가끔 우악스러운 힘으로 레슬링 기술을 걸어오는 것쯤은 차라리 괜찮은 편이다. 그러나, 연금독촉을 나온 세무 공무원에게 국민연금 따위는 못 내겠다고 동네가 떠나가라 큰소리로 항변한다거나, 가정방문을 온 담임선생님에게 국기에 대한 경례와 기미가요 제창의 부당함을 지적한다거나, 심지어 국민 따위는 관두겠다고 말하는 아버지란 확실히 초딩이 쉽게 감당할 만한 아버지가 아닌 것이다.

아니, 어디 초딩뿐이겠는가. 과거 혁공동(아시아 혁명 공산주의 동맹)의 전설적인 투사였으며, 좌익 진영의 내홍에 염증을 느껴 홀연히 동맹을 빠져 나온 이후에는 좌익과 우익 모두 탐탁지 않게 여기고 아나키스트를 자처하는 아버지 우에하라 이치로는, 심지어 국가가 감당하기에도 결코 만만치 않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체제에 빌붙은" 공무원을 보면 도무지 그냥 지나칠 줄을 모르고, 특히나 경찰을 향해서는 "국가의 개들"이라며 노골적인 적개심을 감추지 않으며, 더욱이 "야스쿠니 신사에 불을 지르겠다."는 발언조차도 서슴지 않는 그는, 그러니까 한 마디로 위험천만한 인물인 셈이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를 두고서도 달리 어찌할 수 없는 초딩의 무기력함은, 실은 반국가,반자본주의를 맹렬히 주창하는 우에하라 이치로가 국가와 자본주의의 거대함 앞에서 느끼는 무기력함과 사뭇 닮아있다. 대단한 소설을 내겠다는 그의 야심은 우익의 압력에 가로 막히고, 185cm에 이르는 당당한 체격과 가라데 능력도 모든 경찰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걸핏하면 "남쪽으로 가겠다."는 말을 내뱉지만 '남쪽'에 가는 것도 그리 쉽지 않아 보이거니와, 설사 간다고 하더라도 과연 '남쪽'이 '이곳'과 얼마나 다를지 그저 의심스럽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실제로 지로네 가족이 '남쪽'으로 떠나게 되면서 상황은 일변한다. 여느 아이들의 아버지와 같은 평범한 아버지를 원하는 지로의 바람과 여느 국민들과는 달리 국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이치로의 바람은, 급작스럽게 떠나서 안착한 '남쪽의 섬'인 이리오모테 섬에서 잠시 충족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남쪽 섬에 도착했지만, 그곳에는 빈 집의 수리를 도와주고 가재도구와 음식을 나누어주는 등,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로 넘쳐나서 살아가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이것은 지역 유지인 상라 어른과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외국인 베니의 존재는 '국가'와 '자본주의'라는 두 거대한 축이 한 '개인의 삶'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국가와 자본주의의 거대하고 교묘한 시스템은 평화롭고 여유로운 남쪽의 섬조차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잠시나마 평온한 생활을 영위하는 듯하던 지로네 가족의 삶은, 이리오모테 섬에 리조트를 건설하려는 건설회사와 맞부딪치면서 다시 급격하게 요동친다. 국가와 자본주의를 등에 업고 법과 규칙을 주장하는 건설회사의 횡포에 우에하라 이치로는 분연히 맞서고자 하지만, 그것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은 우에하라 이치로 자신은 물론, 초딩인 지로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이길 수 없는 싸움에 기꺼이 나서며, 우에하라 이치로는 이렇게 말한다.

"지로,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노예제도나 공민권운동 같은 게 그렇지.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 날 아침에 거저 내준 것이 아니야. 민중이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어렵사리 쟁취해낸 것이지.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아버지는 그 중 한 사람이다. 알겠냐?" (p245)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정책과 제도를 끊임없이 밀어붙이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미친 소'를 먹이기 위해 광고조차 마다하지 않으며, 심지어 하고 싶은 말까지도 통제하려는 '국가'를 현실에서 수시로 마주하는 게 일상이고 보면 "나도 남쪽으로 튀고 싶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지만, 실은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남쪽'으로 가는 방법을 몰라서도, '남쪽'이 결단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 지어서도 아니다. 기실 그것은 어쩌면 이미 어린 시절, 일찍 일어나고 서로 돕는 '새나라의 어린이' 따위는 기필코 마다하고 싶어 하면서도, 여전히 '헌나라의 어린이'가 아닌 '새나라의 어린이'로 남을 때 느꼈던, 그러한 '안도감'의 연장선 위에서 이루어지는 '두려움' 혹은 '체념'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사회란 건 싸우지 않는 사람들을 위안해줄 뿐이야."라는 지로의 엄마 사쿠라의 말은, 그래서 '위안'으로 족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위안'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이 책의 작가인 오쿠다 히데오는 우에하라 이치로라는 과격한 인물을 등장시켜서 '국가'와 '자본주의'를 비롯한 사회체제에 대해 다분히 비판적 면모를 보여주고, 더하여 마치 일찍 일어나고 서로 돕고 거짓말을 안 하고 쌈을 하지 않고 몸은 튼튼한 '새나라의 어린이'처럼,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애국가를 부르며 국가와 자본주의에 '긴박'된 삶을 살면서 '안도'하는 사람들을 향한 비판도 잊지 않지만, 오로지 우에하라 이치로만이 '정의'가 아님은 초딩인 우에하라 지로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에하라 이치로의 거침없는 행보가 의미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삶'에 대한 가능성과 신뢰 그 자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의문을 품었거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잊지 말고 가슴 속에 간직해주세요. 그리고 어른이 되었을 때, 자신의 머리로 판단하여 정의의 편에 서는 사람이 되어주세요."라는 교장 선생님의 말에서 드러나듯, 그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둔 각 '개인'의 선택에 대해 지지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뿐이다. 그러니까, 오직 '새나라'만이 유일한 선택은 아니고, 반드시 '새나라의 어린이'여야 할 필요도 없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헌나라의 어린이'라도 괜찮다고.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히 싸워. 져도 좋으니까 싸워. 남하고 달라도 괜찮아.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해해주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라는 우에하라 이치로의 말을 곱씹으며 문득 생각해보았다. 만약 이런 사람이 내 아버지였다면 나는 과연 '헌나라의 어린이'가 될 수 있었을까? 글쎄,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랬다면 적어도, '초등학교 6년 개근상' 따위를 받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뭐, 꼭 '개근상'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6년 내내 단 한 번도 학교를 빼먹은 일이 없는 '초딩의 삶'이란 꽤나 재미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