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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
서명숙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햇살이 따사롭고 바람이 선선한 어느 오후, 야외에서 바비큐를 즐긴 사람의 바비큐 맛 예찬은 조금쯤 가려들을 필요가 있다. 비록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저 바비큐의 '맛'일 뿐일지라도, 거기에는 '야외'라는 공간이 가져다 준 행복감이 적잖이 포함되어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 책 <제주걷기여행>에 대한 나의 평가 역시 조금쯤 가려 듣는 것이 나을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는 이 책을, 완도에서 제주도로 이동하는 배 안에서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나는 이 책을 제주도, 좀 더 정확하게는 '제주올레'와 도저히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다.
아닌 게 아니라, <제주걷기여행>은 '제주올레'와 동의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사저널>과 <오마이뉴스>의 편집장을 역임했던 저자 서명숙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영감을 얻고 돌아와 자신의 후반부 인생을 '제주올레' 길을 만드는 데에 바치기로 결심하였고, 이 책은 바로 그러한 현재진행형의 과업에 얽힌 만만치 않았던 여정과 그 중간결과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이 책은 단순한 여행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신념과 노력에 대한 감동적인 보고서이고, 동시에 '제주올레' 길을 포함하고 있는 제주에 관한 가장 내밀한 안내서이며, 또한 '걷기'라는 지극히 여유롭고 인간다운 행위를 향한 예찬서이기도 한 셈이다.
<제주걷기여행>이 '제주올레'에서 비롯된 만큼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단연 '제주올레' 길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제주올레'를 통해 저자가 오랜 세월 반목하던 동생과 화해하고 동생이 가장 든든한 동지가 된 사연, 길을 찾아내고 잇는 데에 따르는 어려움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도움의 손길들에 관한 이야기는 무척이나 신선하고도 감동적이다. 해병대의 병사들이 동원되어 4코스 조른모살 해안의 평탄화 작업을 했다는 부분에서는 '만만한 게 군인이지.'라며 잠깐 툴툴거리기도 했지만, 그 길을 '해병대 길'이라고 부르기로 했고, 그 길로 인해 그곳을 지나다니기 편해진 인근의 해녀 할망들이, 감사의 표시로 4코스 개장행사 때 유죽을 올레꾼들에게 대접했다는 이야기에 금세 가슴이 짠해졌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나는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잔잔한 바다를 바라다보곤 했다.
사실 이 책을 '떠난 길' 위에서 급히 사게된 것은, 그저 이제 내가 곧 걸을 '제주올레'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는 측면이 컸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이 책은 '제주올레'에 대한 안내와 설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 코스가 정해지고 연결되는 과정에 관한 소소한 감동들을 아울러 담아내고 있었고, 하기에 제주도로 향하는 배 안에서 내가 걸을 코스를 선정하는 것은 퍽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제주올레의 시작이자 말미오름과 알오름의 목장을 경유하는 1코스에 대해 읽으면 1코스가, 불운했던 천재화가 이중섭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 2코스에 대해 읽으면 2코스가, 또 김수봉의 노고가 깃든 수봉로와 제주의 전통적인 배 '테우'가 있다는 3코스에 대해 읽으면 3코스가, 그러다가도 송악산 절경을 둘러 볼 수 있는 6코스에 대해 읽으면 6코스가 못내 걷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1코스와 6코스를 걷고 돌아와, 나는 이 책을 마저 읽었다. 저자의 산티아고 순례기도 꽤 흥미로웠고, 제주도와 얽힌 사람 이야기와 먹거리 이야기도 나쁘지 않았다. '제주올레'를 걸은 사람들이 겪은 치유와 변화의 과정을 소개하는 부분은, 솔직히 여느 때의 나라면 어쩐지 너무 특별한 케이스를 골라 과장된 광고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직접 '제주올레'를 경험한 후의 나로서는 그게 그저 과장된 광고가 아니라 실제로 '제주올레'를 경험하며 느낀 행복의 한 유형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저자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를 알리려는 간절한 진심의 발로라는 것을 감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 역시, 이제 '제주올레'와 이 책의 강력한 신봉자가 된 것이다.
미리 밝혔듯, 이 책에 대한 내 객관적ㅡ그래봤자 어차피 주관이 섞인ㅡ평가는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더라도, '제주올레'를 걸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행복감이, 진실로 '제주올레'의 길 위를 풍요롭게 감싸고 있었다고는 단호히 확언할 수 있다. 책 속에서 양희은이 이미 명쾌하게 결론내린 대로, '제주올레'는 정말이지, "죽이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어느 때가 되었든 '제주올레'는 필경 다양하되 한결같은, 평화롭고 넉넉한 아름다움과 행복으로, 놀며 쉬며 걸으려는 사람들을 기꺼이 반겨 맞아줄 것이다. 그러하니, 그 '죽이는 길'로 언제고 꼭 떠나 보시기를. 그리고 그 '죽이는 길'로 떠나는 와중에, 아마도 이 책은 대단히 유용하고도 즐거운 동행이 되어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