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와 축구 이제이북스 아이콘북스 17
피터 페리클레스 트리포나스 지음, 김운찬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기본적으로 내가 책을 읽는다는 건 대체로 '오독'을 의미하지만, 이 책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특히나 심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두어야겠다. <움베르토 에코와 축구>는 본문만 따지자면 70여 페이지에 불과한 얇은 책이지만, 가장 집중이 잘 된다는 화장실에서 주로 읽었음에도 어려운 단어들의 나열에, 과연 내가 지금 읽는 게 한글인지를 의심했던 적이 수차례일 정도였다. 하기는 이 책은 움베르토 에코가 스포츠, 특히 축구에 대해 여기저기에 썼던(분명 이탈리아어로) 글들에 대해 피터 페리클레스 트리포나스라는 이름조차 어려운 영국 사람이 기호학적 해석을 곁들여 분석했고(아마도 영어로), 이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니 어렵지 않다고 느끼는 게 비정상인지도 모르겠다(라는 건 어디까지나 오독에 대한 나의 변이다).

변명은 이쯤 해두고 기꺼이 오독에 기초해서 말하자면, 일단 움베르토 에코에게 있어 축구가 그리 우호적인 대상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아니, 엄밀히 말해 축구는 그저 축구 그 자체일 뿐이지만, "축구라는 매개를 통해 인간이 행하는 것들이 지니는 미묘한 차이와 과잉"에 대해 에코는 경계와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다시 말하면, "스포츠는 좋은 것으로 생각된다. 축구는 스포츠다. 그러므로 축구는 좋은 것이다."로 끝나는 삼단논법과 달리, 에코는 스포츠로서의 축구가 아니라 축구가 매체에 의한 재현을 통해 사람들에게 지각되고 소비되는 양태와 관련되는, 즉 하나의 기호로서의 축구에 대해 주목하는 것이다.

에코의 비판은 특히 훌리건이라고 칭할 만한 열성적인 팬들에게 신랄해지는데, 그는 매주 일요일마다 축구장을 찾는 팬들을 대리만족을 위해 매주 성교하는 커플들을 정기적으로 보러가는 관음증 환자에 비유한다. 그들에게 축구를 대체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따라서 그들은 좌절된 섹스광처럼 축구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에코는 그들과 대화하는 것은 "마치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도 하는데, 이것은 이른바 "팬"과 "안티팬" 사이에 서로 '교감적 말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결과로 그들 사이의 대화는 '사회적 의사소통'의 기능을 전혀 가지지 못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한편, 스포츠를 직접 몸으로 즐기지 않는 팬들은 스포츠를 말함으로써 자신도 거기에 동참하고 있다고 혼동하며 무책임을 전제로 하는 '스포츠 잡담'에 손쉽게 참여하는데, '스포츠 잡담'은 '사회적 의사소통'의 기능을 가지지 못한 채 '공허한 논의'로 귀결되기 일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무용한 '스포츠 잡담'이 "정치적 논쟁에 대한 가장 손쉬운 대용품"이 되는 데 있다. 팬들은 재무부 장관이 하는 일을 판단하거나 의회기록을 검토하는 대신, 코치가 하는 일에 대해 논의하거나 운동선수의 기록을 검토하는 데 집중하면서 '민주적 논쟁'에 참가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결국 이것은 실제 정치적 부분에 시민이 개입할 가능성을 낭비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축구는, "인민의 아편"처럼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축구ㅡ다른 프로 스포츠도 포함해서ㅡ에 대해 지니는 에코의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축구팬을 자처하는 한 사람으로서 전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비록 에코가 '팬'과 '훌리건'을 구분하고 축구의 장점도 마지못해 인정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에코는 축구의 밖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어린 시절 자신의 축구 실력이 형편없어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는 에코의 고백이 순전히 과장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축구를 제대로 좋아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겉보기와는 반대로, 팬이 된다는 것은 대리 만족이 아니며, 구경을 하느니 직접 축구를 하겠다는 사람들은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라는 닉 혼비의 말을 에코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축구팬의 입장에서 에코와 이야기하는 것 역시 "마치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이 될 가능성이 농후할 뿐이다.

그러나, "축구경기가 열리는 일요일에 과연 혁명이 가능한가?"라는 에코의 물음은 축구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차와 애정의 크기와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기억되어야만 하는 경구다. 왜냐하면, 사실상 에코의 질문에서 방점은 '축구경기'가 아니라 '혁명'에 찍혀야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축구팬과 안티팬 사이의 접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축구가 그저 축구가 아니라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축구가 모든 것이 될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고 믿는 한은 말이다. 그러므로, '예외적 승인'으로서 인정되는 아편(물론, 축구가 아편이라는 데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의 효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하는 아편의 폐해를 경계해야한다는 당위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축구경기'의 뒤에 가리어지는 '혁명'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축구팬은 축구에 악의적이기까지 한 움베르토 에코와도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뭐, 썩 내키지는 않겠지만.

얘야팔유팔파오림픽이열리며는우리덜은뭐시그리좋다냐소값이나쌀값이나객지서노동일허는니동생임금이라도올라간다냐 (중략) 그나저나오림픽이끝나며는저텔레비전속사람들이나왼갖치사와축사속의사람덜은무신소리로안정된선진조국과정의복지를위하여침을튀길까그러고우리덜은무신재미로살끄나무신희망으로와와절망하끄나. 해가떠도오림픽달이떠도오림픽빚이져도오림픽소값개값되야도오림픽죽으나사나오림픽인디아아아아아그때는참말이제무슨절망으로아아대한민국아아대한민국허여무신재미로살끄나    

ㅡ김용택 <팔유팔파 中>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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