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북] 책의 날 기념, 10문 10답 이벤트!

1. 개인적으로 만나, 인생에 대해 심도 있게 대화를 나누고픈 저자가 있다면?

닉 혼비. '소설가' 닉 혼비는 잘 모르겠고 인생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를 원하지도 않지만, "잉글랜드는 나의 팀이 아니다."라고 말한 위트 있는 '축구팬' 닉 혼비와 대화를 하면 꽤나 즐거울 것 같다. 그가 한국말을 할 줄 안다는 가정하에 만난다면, "아스날이 역사적인 무패우승을 달성했을 때의 느낌이 어땠는지?"라거나 "아스날의 아름답지만 반드시 승리를 담보하지는 못하는 경기 스타일과 아름답지는 않지만 대체로 승리를 담보하는 경기 스타일 중 하나를 택하라면 무엇을 택할 것인지?"와 같은 질문들을 하고 싶다.

2. 단 하루, 책 속 등장 인물의 삶을 살 수 있다면 누구의 삶을 살고 싶으세요?

<구운몽>에 나오는 양소유의 삶. 2처 6첩을 거느리고 부귀공명을 얻는 삶이란 남아라면 한 번쯤 꿈꿔볼 만한 삶이다. 다만, 양소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타이밍이 중요한데, 행여나 성진이 꿈을 깨버리면 이쪽도 산통이 다 깨지니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자칫하면 하루 웬종일 불경만 외어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3. 읽기 전과 읽고 난 후가 완전히 달랐던, 이른바 ‘낚인’ 책이 있다면?

나는 최근 십수 년 간, <퍼거슨 리더십>보다 더 실망스런 책은 읽은 기억이 없다.

4. 표지가 가장 예쁘다고, 책 내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책은?

기본적으로 표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편이고 내 심미안이란 것도 형편없지만, <야구란 무엇인가>가 괜찮았다. 하얀 바탕에 야구공 하나가 박힌 게(야구공은 엠보싱(?) 처리가 되어 있다!) 심플하면서도 품격이 있어 보였다. 책장만 널찍하다면 앞표지가 나오게 꽂아 놓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 정도였다. 게다가 내용까지 최고!
반면에ㅡ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만ㅡ그리 산뜻한 느낌은 아닌 축구 경기장을 바탕에 깔고 불에 타는 듯한 축구공 하나가 박힌 <피버 피치>의 표지는 좀 아니었다. 솔직히 그런 표지를 가진 책의 제목으로는 <불꽃 슈터 통키> 정도가 어울리지 않나 생각한다.


 
 

 

 

 

 

 


5. 다시 나와주길, 국내 출간되길 학수고대하고 있는 책이 있다면?

사이먼 쿠퍼가 지은 <축구 전쟁의 역사(원제: Football against the enemy)>. 나는 이 책을 대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었는데, 나 말고는 이 책을 아무도 안 읽는 것 같았다. 그때 이미 이 책은 품절 상태라 살 수는 없었고 도서관에는 한 3권쯤 있어서, 나는 이 책을 소유하고픈 욕심에 일단 이 책을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도서관 측에 변상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 하지만 '희귀본'은 정가의 몇 배 이상을 변상해야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혹 '품절본'도 '희귀본'에 속할까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대학에 갖다 바친 돈을 생각하면 이런 아무도 안 읽는 책 한 권쯤은 내게 그냥 줄만도 한데, 유감스럽게도 대학이란 녀석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이 다시 국내에 출간될 일은 없을 것 같다. 여전히 이 책을 읽을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 그저 이제는 사이먼 쿠퍼의 다른 책이나마 국내에 출간되기를 바랄 뿐이다.

 

 

 

 

 

 

 


6. 책을 읽다 오탈자가 나오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요.

내가 글을 쓸 때 오탈자를 주의하는 만큼 오탈자를 쉽게 찾는 편이긴 한데, 그렇다고 특별히 어떤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꽤 마음에 들었던 책에 오탈자가 많다면 출판사에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물론, 실제로 그러지는 않는다).

7. 3번 이상 반복하여 완독한 책이 있으신가요?

하루키의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를 3번 가량 읽었던 것 같다. 이런 일은 무척 이례적인 경우인데, 사실 그렇게나 읽었던 이유는 그 책이 무지 마음에 들어서는 아니었다. <상실의 시대>를 읽은 이후, 독서에는 그닥 관심이 없던 내가 하루키의 책 몇 권을 의욕적으로 찾아 읽었었는데,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를 읽고 나서는 외려 하루키를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고, 나는 그 뜻밖의 변심에 나름대로 해명을 하기 위해 이 책을 여러 번 읽었다. 하지만 끝내 이유를 알 수 없었고, 그쯤 해도 어떤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제 그것으로 되었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책을 한 3번쯤 읽은 이유는 헤어지는 상대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다고 해도 좋겠다.



 

 

 

 

 

 


8. 어린 시절에 너무 사랑했던, 그래서 (미래의) 내 아이에게 꼭 읽어주고 싶은 책?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으로는 기껏해야 셜록 홈즈나 괴도 루팡 시리즈 정도인데, 이것들은 지가 직접 읽으면 모를까 별로 읽어줄 만한 책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이 질문을 조금 바꿔서, 내 아이에게 꼭 물려주고 싶은 책으로 나는 아다치 미츠루의 <터치>를 꼽겠다.
나는 모든 스포츠 중에서 축구를 가장 사랑하기에 나의 아이도 축구를 좋아하길 바라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이가 야구에 대해서도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야구를 모른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재미가 조금 줄어들 수도 있기 때문이며, 말할 필요도 없이 <터치>를 제대로 즐길 수 없다는 것도 그중의 하나다.



 

 

 

 

 

 


9. 지금까지 읽은 책 가운데 가장 두꺼운(길이가 긴) 책은?

단권으로 치면 아마도 <야구란 무엇인가>가 가장 두꺼웠던 것 같다. 단권이 아니어도 괜찮고 만화책이어도 괜찮다면 <메이저>. 나는 <메이저>를 52권쯤까지 본 것 같은데, 지금 검색해 보니 <메이저>는 73권까지 나왔고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 같다. 아마도 그 책을 모으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언젠가 파산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모을 생각은 없으니 한 200권을 넘겨도 상관은 없지만, 아무쪼록 내가 죽기 전까지는 완결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51권까지 나온 <열혈강호>도).

10. 이 출판사의 책만큼은 신뢰할 수 있다, 가장 좋아하는 출판사는?

딱히 좋아하는 출판사는 없지만, 굳이 꼽으라면 <돌베개>와 <한겨레출판>의 책들이 좀 더 믿음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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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완결판 - 못다한 이야기>를 보기에 앞서 나는 내 나름대로 마음의 무장을 했다. 제목에서부터 언뜻 짐작되는, '국가'로 귀결되는 다분히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감정들에는 결코 내 마음을 쉽사리 내주지 않을 참이었다. 태극기가 자랑스레 휘날리고, 애국가가 감동적으로 울려 퍼지고, 함께 얼싸안으며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혹 영화가 비추기라도 할 양이면, 나는 오만하게 팔짱을 끼고서 기꺼이 냉소해주리라 마음을 단단히 여미고 있었다. 물론, 딱히 '국가'가 밉다거나, 그런 감정들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다. 단지 너무나 노골적인 듯한, 그래서 애초부터 이미 어떤 정형화된 '국가'의 이미지를 연상케하는 제목을 지닌 영화가 별다른 고민 없이 그 이미지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관객에게도 또한 마찬가지의 이미지를 강요하는 데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면서, 나는 싸울 상대를 찾지 못했다. 당연하다는 듯 태극기가 나왔고, '어글리 코리아'를 말하는 미국 선수들과의 싸움이 있었고, 한국 대표팀을 소리 높여 응원하는 사람들이 존재했지만, 정작 그 한가운데에 있는 '국가대표'는 지레 짐작했던 '국가'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엄마를 찾기 위해, 군대를 면제 받기 위해, 집을 사기 위해, 또 감독의 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들이 국가대표가 된 순간, '국가'와 '국가대표'가 지니는 견고하고 답답한 이미지들은 우수수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국가대표라면 마땅히 지니어야 한다고 믿어지는 사명감과 애국심을 '국가대표'의 선수들은 누구도 지니지 못했고, 그래서 그들이 '국가대표'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차 보였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국가대표'가 그 각 '개인'의 선수들을 감당하기에 버거웠다고 말하는 게 더 합당한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선수들이 순수하게 국가대표로서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대표 역시 선수들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동계 올림픽 유치를 위해 전략적으로 급조된 스키점프 대표팀은 유치 실패 이후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전혀 기대를 받지 못하던 스키점프 대표팀이 의외로 활약을 하자 갑자기 자랑스러운 한국팀으로 변모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아쉬움 속에서 귀국할 때 그들을 반기는 건 위로와 격려가 아닌, 오직 승자에 대한 환호와 대비되는 씁쓸한 무관심일 뿐이다. 국가대표와 선수들은 그렇게 서로를 배반하기 일쑤고, 그래서 국가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선수'들과 선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자랑스러워할 만한 대한민국'일 때만 의미가 부여되는 '국가대표'의 조합은 다분히 공고화된 이미지를 전복시키고, 영화는 수시로 전복되는 이미지들을 무심한 듯 내어 놓는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은 '국가'나 '국가대표'를 향한 감정들이 철저히 논리와 이성의 영역 밖에 놓여 있음을 조용히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대표'를 둘러싼 감정들의 찰나적이고 급작스러운 면모에 대해 날을 세우기보다는, 외려 한 발 물러나 오직 감정의 영역에서만 걸음을 옮기며 단지 감정을 분출해내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듯 보인다. 가령, 길러준 엄마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순간에도 낳아준 엄마를 찾으러 돌아다닌다든지, 역할이 모호한 말썽쟁이 딸과 끝내 모질게 인연을 끊어내지 못한다든지, 골프채를 휘두르며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던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다든지 등, 영화는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거나 혹은 관객을 정교하게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 대신, 순간적인 감정의 향연들로 관객을 웃기고 울리고 감동시킨다. 그 감정들은 단계를 거쳐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다만 찰나적으로 소비되고 곧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영화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다분히 과장되고 극대화된 감정의 분출이고, 그런 이유로 영화는 '비판' 대신 '배설'을 선택했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영화의 선택은 영화 속에서 비 내리던 어느 날,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들의 선택과 사뭇 닮은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나고, 약에 취해 거리를 돌아다니고, 절망에 채여 비틀거리던 그 순간, 그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보고는 하나같이 스키점프가 주는, 아찔한 속도감과 하늘을 나는 듯한 쾌감을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거기에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국가에 대한 사명감도, 현실에 대한 냉철함도 없이, 그저 즉각적인 감정의 분출만이 넘쳐날 뿐이었다. 물론 그러한 그들의 선택과 나아가 영화의 선택은 관객에게 충분한 감정적 고양을 선사하지만, 마치 스키점프 선수가 하늘을 나는 순간이 영원일 수 없듯이, 고양된 감정은 끝내 오래 지속되지는 못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스키날이 대지를 디딛는 순간, 애써 외면했던 논리와 이성과 현실을 마주하는 일은 피할 수 없고, 하늘을 나는 듯한 짜릿함도 점차 사그라지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감정의 분출을 끝낸 영화는, 싸울 상대를 찾지 못한 관객을 총총히 집으로 돌려보내는 듯하다. 시원한, 그러나 조금쯤 허랑한 기분을 안긴 채. 이제 쇼는 모두 끝났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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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까지 집결이란 것쯤은 물론 잘 알고 있지만, 그 시간에 정확히 가봐야 어차피 기다려야 될 것은 더욱 잘 아는 바라 결국 1시도 넘어서 슬슬 집을 나섰다. 날씨는 무진장 더웠고, 내가 아는 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뛰어난 기능성 옷인 '군복'은 그 망할 놈의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의 발을 위한 신발이라고는 볼 수 없는 '군화'까지 사람을 힘겹게 하여 마음속으로 '이 신발'이랄지 '이런 신발'이랄지 하는 단어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중, 문득 신분증을 안 가지고 온 게 생각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 신분증을 챙겨 나와야만 했다. 신분증 따위, 어차피 본인 확인에도 별무소용인 형식적인 절차를 위한 것일 뿐이지만, 그 놈의 형식이 특히 중요한 데가 바로 '군'인 데야 별 수 없는 노릇이다.

집결 장소에 1시 25분쯤 도착하고 보니 놀랍게도 이미 인원파악까지는 마친 모양인데, 별로 상관은 없다. 그냥 소대장으로 선임된 예비군에게 좀 늦었다고 이름만 말하면 그뿐이다. 일단 첫 시간에는 신종 인플루엔자 때문인지 귀에다가 뭔 조그마한 기계를 들이 밀고는 체온을 재서 확인시켜 준다. 백 명에 가까운 인원을 일일이 다 해주는데, 따분하긴 해도 화낼 필요는 없는 일이다. 딱히 날 생각해서 그리 해주는 건 아닌 듯해도, 어쨌든 해될 건 없으니까. 그런데 그걸 하고 나서 용지를 나눠주고 이메일과 연락처를 적도록 하는 데는 분명 화를 낼 필요가 있다. 이 짓은 훈련을 받으러 올 때마다 반드시 하는데, 바뀌지 않은 연락처와 이메일을 왜 1년에 몇 번씩 꼬박꼬박 적어줘야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가끔씩 오는 스팸 문자의 정보 획득 루트가 바로 이곳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쨌든 그렇게 하는데 한 30분쯤이나 걸렸으려나, 그게 끝나면 한 20분 가량은 쉰다. 물론, 이때 '첫 시간'과 '쉬는 시간'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양쪽 모두 더위 먹은 개처럼 헥헥거리며 그늘에 앉아 있기는 마찬가지니까.

해가 움직이며 그림자의 위치를 바꿔줌에 따라 예비군들도 집결지 건물 뒤편의 그늘로 이동했다. 이동도 역시 교육의 일환이기 때문인지, 이동 후에는 당연히 휴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잠시 후, 이날 들어 본격적이라 할 만한 교육이 한 15분쯤 진행되었다. 물론, 이 교육은 매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일 뿐인데, 어차피 듣는 쪽에서 매번 제대로 듣지 않아 항상 새로우니 그 점은 문제 될 게 없다. 잠도 안 오고 가만히 있기도 따분해서 오랜만에 대충 귀 기울인 바에 따르면, 북한군이 어느 쪽으로 침투할 것을 대비해서 우리 중대가 어쩌고, 또 몇 소대가 저쩌고 하는 이야기다. 유비무환이라 했으니 일단은 훌륭하다. 다만, 대체 내가 몇 소대인지도 매번 헛갈리는데, 그래서 나보고 뭐 어쩌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뭐, 물론 이건 순전히 내 탓이겠지만.

잠깐의 교육 후 또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총기를 실은 차량이 도착하자 드디어 총기분출이 시작되었다. 이때 나눠주는 총으로 말하자면, 현역에서는 한 번도 만져볼 일이 없는 칼빈 소총. 과연 총알이 나가기나 할까 의심스럽지만, '군'에서는 이 녀석을 꽤 애지중지 하는 모양인지 나눠주는 데 30분쯤 소요되는 수고에도 불구하고 줬다가 또 금세 회수하는 일을 꺼리지 않는다. 물론, 도대체 왜 굳이 훈련에 소용도 되지 않는 걸 악착같이 나눠주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예비군들은 의자나 베개 대용으로 사용할 뿐인데,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의자나 베개 대용으로도 그리 유용하지는 않다. 아무튼 예비군 훈련에서는 오로지 실내에서만 교육을 해야 할 때도 1시간 가량을 반드시 총기를 나눠줬다가 다시 회수하는 데 사용하고, 이것은 예비군 훈련의 '뻘짓'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식'과도 같다.

총기분출이 끝나면 당연한 휴식을 취하고, 곧이어 자신의 근무지(?)로 투입되는 훈련(?)을 했다. 이 훈련은 소대장이 소대를 인솔하여 집결지 부근의 요소요소에 3-4명을 배치하는 게 요체인데, 달리 말하면 다 함께 모여서 앉아 있다가 몇몇으로 분산해서 앉아 있게 된다,가 이 훈련의 유일한 특이점이다. 그러고 보면 이 훈련에서도 알 수 있듯, 아마도 예비군 훈련의 목적이란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끈기와 진득함의 향상이 아닐까 싶은데, 이와 관련해서 예비군 훈련에서는 첨단장비ㅡ예컨대 DMB tv나 아이팟 따위ㅡ를 장착한 예비군들이 특히 강점을 보인다는 데에서 군의 첨단화가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를 새삼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군'에서 예비군에게 직접 그런 장비를 마련해주지는 않아서, 나는 2년 전쯤에 휴대폰 게임 하나를 다운로드 받으며 최소한의 무장을 하는 데 만족해야만 했다(나는 군 가산점 따위는 필요 없으니, 예비군에게는 휴대폰 게임 다운로드 무료 쿠폰이나 달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그러니까 대체 6시간짜리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가서 한 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휴대폰 게임만 죽어라고 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데, 물론 누구도 내게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가서 휴대폰 게임 따위를 하라고 얘기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나는 추호도 호도할 생각이 없다. 그렇기에 그 흔한 휴대폰 게임 하나 다운로드 받지 않고 그럭저럭 살다가 순전히 예비군 훈련을 위해 요금을 지불하게 된 것도, 그렇게 접한 휴대폰 게임을 꽤 자주 심심풀이로 하다가 배터리의 소모를 진척시킨 것도, 무엇보다도 숫자 패드를 열나게 누른 탓에 숫자 패드가 약간 망가진 것도 나는 모조리 내 탓이라는 점을, 심히 불만이긴 해도 부인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끝끝내, 대관절 신성한 예비군 훈련을 왜 그따위로 받느냐고 추궁한다면, 나는 억울한 심정이 되어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오직 지루함과의 이길 수 없는 싸움만을 강요하며,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게 하는 예비군 훈련에서 난들 달리 어쩌란 말인지. 진심으로 말하건대, 나는 끔찍하게 무의미하고 지루한 시간을, 열악한 장비에 의존하며 6년이나 꿋꿋이 버텨낸 스스로가 제법 대견할 따름이다.

ps1. 현재의 예비군 훈련이 지닌 문제점 때문에 예비군 훈련을 좀 더 강도 높게 개편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있다면(나는 그 사람이 예비군이 아니라는 데 내 예비군 훈련 2년치를 기꺼이 걸 수 있다), 핵심을 잘못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은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예비군 제도가 필수불가결한 제도라면 몰라도 예비군 제도가 박정희 시대의 유산으로서 고작 30여 년 밖에 안 된 것이고 보면, 예비군 제도는 존폐 여부부터 새로이 따져봐야 마땅하다.

ps2. 예비군들은 다른 지역으로 출타 시에 동대에 꼭 연락을 하라고 하는데(이것은 비상소집 시에 지역 내에 있는 예비군들은 6시간 내에 집결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로 웃기는 노릇이다. 식구들에게도 말 안하고 어디 다른 지역으로 무시로 갈 수도 있는 판에 동대에다가는 꼬박꼬박 알리라니, 빈집털이범의 정보 획득 루트가 심히 의심스러워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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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8-31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말할 것도 없이 동감입니다. 끝난건지 일년 더 해야하는건지 모르겠지만, 저도 그간 경험한 바로 이건 쓸데 없는 시간 낭비, 돈 낭비입니다.

Fenomeno 2009-08-31 14:22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이제 이 쓸데 없는 짓을 끝내서 한시름 덜었지요(사실은 자랑 페이퍼였다, 랄까요. ^^;). 뭔가 근본적으로 바뀌었으면 싶지만, 이 정부 들어서는 무엇이든 그저 나빠지지만 않으면 다행이니 아마도 나중을 기약해야겠지요.
 



매를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매의 발에 줄을 묶어둔 채 그 줄의 길이를 조금씩 늘여가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마침내 두 날개를 활짝 편 매가 그를 부르는 소리를 향해 거침없이 날아오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매의 발에 묶은 줄을 없애야 한다고, 소년은 설명한다. 소년의 이름은 빌리. 무엇 하나 관심을 가진 것이 없는 허약하고 소심한 소년 빌리는, 그러나 자신이 유일하게 잘 할 수 있는, 매를 훈련시키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할 때 드물게도 당당하게 빛난다. 그리고 그 순간, 빌리를 향한 선생님과 아이들의 관심과 주의가 집중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소년을 둘러싼 환경도 마치 매가 날 때의 고요와 사뭇 닮아 있다. 

배리 하인즈의 소설 <케스ㅡ매와 소년>을 원작으로 한 켄 로치 감독의 1969년 작 <케스>는 날개를 펴지 못하는 소년의 모습과 날개를 활짝 펴는 매의 모습을 의미심장하게 대조시켜 보여주는 영화다. 되풀이 되는 엄마와 형의 날 선 대립과 가정 내에서 겪는 소외, 선생님의 묵인 혹은 선동 하에 자행되는 학교 아이들의 따돌림과 괴롭힘, 그리고 일방적이고 폭압적인 교육 속에서 생기를 잃어버리는 소년의 모습은, 소년이 훈련시킨 매가 여전히 야생성을 간직한 채 화려하게 비상하는 모습과 뚜렷하게 대비되고, 이를 통해 영화는 과연 가정과 학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또는 교육의 궁극적인 가치와 목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집요하게 묻는 것처럼 보인다. 

소년이 자신의 현재에 진저리를 치고 감히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이유를 소년을 둘러싼 환경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면, 소년의 날개를 펼쳐 주기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소년이 매를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소년에게로 향하는 날카로운 대화와 소리 높인 훈시와 매서운 체벌에 근본적으로 결여된 어떤 가치들은, 소년이 교육의 주체가 되어 매를 훈련시킬 때 매를 매개로 하여 고스란히 빛을 발하는 까닭이다. 자신의 위엄을 손상시키지 않고 하늘을 나는 매의 모습은 그 완벽한 증거다. 그리고 그 가치란 곧, 매를 훈련시키는 소년의 입을 통해 분명하게 제시된다. "세상에 길들이다니! 매는 길들지 않아요. 훈련될 뿐이죠." 좀 더 직관적으로 말해서, 소년에게 필요하고 매에게 투영된 것, 그것은 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하는 '존중'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소년이 매를 훈련시키며 체득하고 증명한 몇몇 가치의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매처럼 화려하게 비상하는 소년의 모습을 쉽사리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아니, 외려 영화는 소년의 날개가 그저 움츠러드는 데만 그치지 않고, 심지어 완전히 날개가 꺾일 수도 있다는 끔찍한 예견조차도 서슴지 않는 것처럼도 보인다. '날개가 꺾인 소년이 시련을 계기로 성장하여 날개를 활짝 편다.'라는 일반적인 성장영화의 도식을 <케스>는 단호히 거부하고, 도리어 현실의 극한을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데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뜻밖의 결말을 제시하는 <케스>의 마지막 장면이 다소 허무하고 급작스러운 느낌을 남기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한편으로 그 개운치 않은 뒷맛의 적나라함은 소년을 둘러싼 완고한 현실을 거듭 상기시켜 준다. 그리고 그 현실이란, 소년의 발에 묶인 '줄'에 다름 아니다.

소년이 매를 훈련시키는 방법에 대해 설명할 때 칠판에 적은 줄(leash)이라는 단어가 '구속'과 '속박'을 아울러 의미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화는 발에 묶은 줄을 없앤 매가 하늘을 나는 모습과의 대비를 통해 날지 못하는 소년에게 묶인, '구속'과 '속박'이라는 '현실'을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단순히 소년의 '성장'이 아니라 소년을 둘러싼 완고한 '현실'ㅡ가정과 학교와 교육의 문제와, 나아가 인간에 대한 존중의 결여ㅡ을 똑바로 응시한다. 물론 그 시선의 끝에서 마주하는 결말은 끝내 마냥 희망적이지만은 않지만, 적어도 <케스>는 '줄에 묶여 있는 한 매는 날 수 없는 법'이라는 '진실'을 결코 외면하려 하지 않고, 그런 이유로 비극적 결말을 서슴지 않는 <케스>의 의연한 시선은 또한 믿음직하기만 하다. 설령 어떤 희미한 희망을 꿈꾸든, 그것은 여전히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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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

오늘 걸을 '제주올레' 6코스는 화순 해수욕장에서 시작하여 하모 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14km의 길이다. 해수욕장에서 시작하는 만큼, '길'은 바닷가 모래사장을 사뿐히 밟아주며 시작했다. 이미 해수욕 시즌이 끝났기 때문인지 이 아름다운 바닷가에도 걷는 사람은 우리뿐이었고, 날씨는 여전히 좋았다. 다만, 날씨가 좋은 근본적인 원인인 해는 꽤 따가웠는데, 그래서 더운 거야 기꺼이 감내한다지만 얼굴을 빨갛게 익혀서 화끈거리게 만드는 것은 조금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과연 나보다 조금 더 오래 살았구나, 하는 느낌을 아주 드물게 받게 만드는 누나의 조언(선크림을 챙겨가라던)을 따르는 편이 나았었는데, 언제나 그렇듯 '오뉴월 하룻볕'의 무서움을 인정하는 것은 너무 때늦은 일이 되고 말았다. 뭐,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매우 '드문 경우'가 하필 '지금'이라는 게 좀 더 유감스런 일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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