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사장을 잠깐 지나치던 길은 뜻밖에도 바닷가의 암석군들 쪽으로도 거침없이 이어졌다. 오직 두발을 이용해서만 지나다닐 수 있는 길에 괜히 기분이 우쭐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암석들 사이사이에 어김없이 그려진 파란색 화살표를,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는 것 마냥 세심하게 찾는 일은 사뭇 즐겁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 길을 따라 걸으며 때로 오른편에 서있는, 바다가 깎아낸 퇴적암의 절묘함에 감탄하고, 때로 왼편에 위치한 바다의 잔잔한 여유로움을 즐기는 일은 실로 행복하기 그지없는 경험이었다.
암석들을 지나 다시 나타난 모래사장은 야트막한 언덕으로 이어졌고, 곧 높이 395m의 산방산이 나타났다. 산방산을 끼고 시계방향으로 도는 길은 양쪽으로 오가는 차들 때문에 걷기에 그리 좋은 길은 아니었는데, 그쪽으로 계속 걷다가 우리는 표지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알았다. 그리고 갈림길에 맞닥뜨려서도 표지를 만나지 못하고서야, 비로소 우리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부근의 휴게소에 들러 잠시 쉬면서 제주올레 사무실에 전화로 문의를 했다. 그러자 전화를 받으셨던 분은 매우 친절하게 서쪽 바닷가 쪽으로 가면 곧 표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셨고, 모르겠거든 언제고 다시 전화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과연, 우리는 바닷가 쪽으로 조금 가서 곧 표지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본래라면 산방산 쪽으로 이어진 도로가 아니라, 그 밑의 해안가의 길을 계속해서 걸으면서 하멜 기념관도 둘러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걸 그냥 도로를 걷느라 지나친 셈이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다시 되돌아갈 마음까지는 없었다. 아침을 샌드위치로 때운 우리는 그리 배가 든든한 상태가 아니었고, 여전히 갈 길은 멀었으며, 무엇보다도 짊어진 배낭의 무게 때문에 심하게 허덕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번 여행 최대의 그리고 유일한 적은 배낭이었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제주올레' 길을 걸으며 즐거워하고 감탄하며 감흥을 받는 와중에도, 배낭의 무게는 끊임없이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래서 심지어는, 그저 배낭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상점가의 부서진 의자는 다른 어떤 절경만큼이나 반갑고 아늑하게 느껴지기도 할 정도였다. 그런데 실로 억울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상 배낭 안에는 뭔가 대단한 것들이 없다는 사실이다. 배낭에는 그저 갈아입을 옷과 간단한 세면도구와 수건, 그리고 책 두권이 들었을 뿐, 야영지에 설치할 텐트도, 혹시라도 마주칠 야생짐승과의 혈투를 대비한 야구 방망이도, 행여라도 나타날 여자 치한을 퇴치하기 위한 전기충격기도 맹세코 없었다. 그런데도 배낭은, 무지막지한 무게로 어깨와 허리와 두 다리를 내내 압박했던 것이다.
배낭의 무게에 치열하게 대항하며, 다시 찾은 파란색 화살표를 따라 바다를 끼고 계속해서 걷다보니 웬 잔디구장이 하나 나왔다. 제주올레를 걸으며 그렇지 않아도 제주도의 새삼스런 아름다움에 완전히 빠지고 있는 중인데, 이거야말로 내게는 '금상첨화'에 '화룡점정'이라 할 만했다. 물론, 어느 도시를 가든 이제 더 이상 잔디구장이 매우 드문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제주도를 잠깐 둘러봤을 뿐인데도 잔디가 깔린 학교를 몇 개 보았고, 무엇보다도 날씨가 따뜻한 곳이니 왠지 잔디구장과 제주도는 무척이나 어울리는 조합으로 보였다.
잔디구장을 꿈꾸듯 바라보며 지나치다가 보니 부근에 정차되어 있는 포터 한 대가 있었다. 안에 타고 있는 한 아저씨를 무심히 일별하며 지나치려는데, 아저씨가 웃으시며 손짓을 하셨다. 대체 왜 그러실까를 잠시 생각하던 내 눈에 아저씨가 들고 계신 귤이 또렷하게 박혔다. 낯선 사람, 그것도 맛있는 것을 건네는 낯선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쯤은 이미 8살쯤에 마스터한 내용이지만, 나는 '평화의 섬' 제주를 믿기로 했다기보다는, 역시 귤이 탐났다. 아마도 '제주감귤'일 확률이 가히 99%에 이르는 귤을 보고 냉큼 아저씨에게 다가갔지만, 불행히도 아저씨는 불문곡직 소주를 권하셨고, 불행 중 다행으로 내가 "귤은 없어요?"라고 기대를 품고 여쭙자 아저씨는 황급히 반 밖에 남지 않은 귤을 내어 주셨다. 그러나 그 약간의 다행이 무색하게도, 우리는 아저씨에게 감사를 표하고 헤어져서는 결국 귤을 먹지 못했다. 호의를 베풀어 주신 아저씨에게는 정말로 죄송스러운 일이었지만, 귤에는 기름때가 묻어 있어서 도저히 입에 넣을 수 없었다.
차마 먹지 못한 귤 때문에 뱃속의 아우성이 심해지고, 덩달아 배낭의 무게도 천근만근이 될 즈음, 바닷가 주변에 위치한 한 음식점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내심 오래 걸리는 '백숙'을 시켜놓고 여기서 좀 편안하게 누워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냥 좀 더 싸고, 생긴 건 비슷하며, 빨리 요리되어 나오는 '삼계탕'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삼계탕'도 역시 황송한 음식이어서 K와 나는 대화 나눌 입조차 아끼며, 그저 묵묵히 '삼계탕'에만 탐닉했다.
생기를 되찾아 다시 길을 나서서, 얼마 지나지 않아 송악산에 도착했다. 1코스와 마찬가지로, 6코스에서도 걷는 내내 눈과 마음이 즐겁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그래도 굳이 그중에서도 최고의 하이라이트를 꼽으라면 6코스에서는 단연 송악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절경이라고 할 만했다. 한쪽으로는 우리가 지나온 길과 그 끝에 서있는 산방산이 보이고, 또 한쪽으로는 남쪽의 섬들을 포함하고 있는 아름다운 바다가 보이고, 또 다른 쪽으로는 완만하게 이어진 제주 땅의 평화로움이 보이며, 더하여 붉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송악산 정상 분화구의 기이함마저도 엿볼 수 있는 송악산 정상은, 가히 전 방위적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뿐이랴, 송악산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대단히 수월한 데다 달리 돈을 받는 것도 아니니, 송악산은 실로 동네 뒷산의 정겨움조차도 아울러 겸비하고 있는 셈이었다.
송악산 정상에 서서 먼 바다로부터 맹렬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걷느라 덥혀진 몸을 시원하게 식히고, 다시 표지를 찾아 이어진 길로 향했다. 그리고 이내 우리는, 다시 한 번 말들과 조우했다! 이미 어제 경험해보아서 우리는 말들과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했고, 해서 이번에는 처음부터 조심조심 그 곁을 멀찍이 떨어져서 지나갔다. 그런데, 그렇게 무사히 말들을 지나치는가 했더니, 진퇴양난의 난관이 곧 나타났다. 우리가 지나가야 하는, 파란색 화살표가 선명히 표시된 '길' 바로 앞에 말 한 마리가 떡하니 버티고 선 것이다. 마치 장판교 앞을 가로 막고선 장비의 위용이 이러할까. 하늘을 날거나 땅을 파는 재주가 없는 이상, 남은 건 정면 돌파뿐이었다.
그러나 정면 돌파를 하기에 '장비'는, 아니 '말'은 실로 무서운 존재였다. 우리는 길과, 길을 가로막은 말 앞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상의했으나, 달리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일단 제주올레 사무실에 다시 전화를 걸어 제주올레 길을 걷던 와중에 혹시 말에게 '습격'을 당해 다친 사람이 있는지, 만약 있다면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를 물을까 하는 생각을 아주 잠시 했지만, 사전에 얻은 정보에 말과 관련한 경고를 보지 못했으니 다친 사람은 없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말 한 마리가 무서워서ㅡ비록 '장비' 같은 말이긴 해도ㅡ두 남자가 쩔쩔매는 꼴을 굳이 전화로 광고하기란 꽤나 민망한 노릇일 터였다.
헌데 바로 그때, 무슨 생각인지 말이 움직였다. 녀석이 우리가 길을 지나갈 수 있도록 앞쪽으로 몇 걸음을 옮긴 것이다. '아니, 이 녀석이 우리말을 알아들었나?'하는 놀라움과 기특함은 잠시, 두려움은 한층 더 커졌다. 녀석이 비킨 탓에 길은 열렸지만, 대신에 그 길을 지나기 위해서는 말의 뒷다리 바로 뒤쪽을 지나야만 했다. 아, 그리고 나는, 행인지 불행인지 실제로 '말의 뒷다리에 맞을 뻔한 사람'이라는 동영상을 본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제목조차 범상치 않은 그 동영상에서, 한창 말을 옆에 두고 깝죽거리던 한 남자가 갑자기 말이 제자리에서 도약한 후 비호같이 내뻗은 뒷다리에 정통으로 안면을 가격당할 뻔했던 걸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말의 '날아서 뒷발차기'는 굉장히 멋졌고, 그 남자는 애초부터 깝죽대는 게 바보 같아서 저러다 얻어맞지 싶었었는데, 말할 것도 없이 지금, 행여나 우리 앞의 말이 '날아서 뒷발차기'를 한다면 멋있기는커녕 치명적인 공포일 터이고, 그렇다면 '바보'는 우리가 될 게 뻔했다. 아니, '바보'로만 끝난다면 차라리 다행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러한 대단히 두렵고 위협적이며 치명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는 당당했다(고 적어두고 싶다). 우리는, 아니 나는, K를 앞세우고 발걸음도 살금살금, 실은 아무런 생각도 없을지 모르는 말의 뒷다리 뒤를 통과하기로 단호히 결의했고, 앞장선 K에게 비장하게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시선도 돌리지마. 그냥, 천천히 자연스럽게 내려가는 거야."
우리의 결연한 기세에 눌린 탓인지 말은 K가 지나칠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무사히 말의 뒷다리 뒤를 통과한 K가 문득 입을 열었다.
"얘는 되게 착하네. 길도 비켜주고."
K의 말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고등학교 야자시간에 내가 줄창 읽고 권하던 무협지를 그리도 외면하더니, K는 과연 강호의 기본적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언제나 마음을 놓는 바로 그 순간이 '습격'을 당하기에 최적의 순간이라는 것을. 나는 감히 고함도 지르지 못한 채, 나직하나 날카롭게 K에게 경고를 주었다.
"야, 입 다물고 빨리 내려가. 나는 아직, 사정권이란 말이다."
그리고 말은, 끝내 아무 말도, 어떠한 행동도 없이, 그저 무심할 따름이었다(* '제주올레' 길을 걸은 분들이 인터넷에 올린 사진 중에는 말과 함께 흥겨운 한때를 보내는 듯한 사진도 있으니, 말에 대한 나의 두려움은 조금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어쨌거나 말이 무지하게 튼튼한 뒷다리를 가졌다는 것과, 그 다리에 맞으면 무지하게 아플 것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나는 다만 그 사실에만 유독 주목했을 뿐이다).
가장 위험했던(?) 일촉즉발(?)의 상황을 넘기니, 길은 여전히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우거진 소나무 사이의 멋진 길을 통해 송악산을 내려온 뒤에는 다시 바닷가 쪽으로 길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흑사장을 발로 밟기도 하고, 가지각색의 퇴적층들을 지나치며, 조용해서 조금은 심심할 수도 있는 바닷길을 마냥 걸었다. 굳이 K와 나란히 속도를 맞추며 걷기보다는, 나는 나의 속도와 시간으로, 그리고 K는 K의 속도와 시간으로. 그것은 함께 하면서도 혼자 하는 K와 나의 방식이었고, 우리는 둘 다 그러한 방식을 조금도 불편해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6코스의 '끝'에 도착하여 우리는 환호성을 내뱉었다. 물론, 궁극적으로 이 '길'은 멈춤 없이 이어지길 소망한다는 것도, 결국 우리의 '길' 또한 그와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저 동그라미와 화살표가 조합된, 다소 볼품없는 '끝' 표시 하나에 우리가 환호했던 까닭은, 어쩌면 '길'을 걸었기에 이 작은 표시를 볼 수 있었다는 것과, 그러므로 우리는 똑바로 '길'을 찾아 왔다는 그 명백한 사실을, 우리의 앞으로의 '삶의 길'에 슬쩍 대입해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내가 꽤나 갑작스럽게 '제주올레'를 찾아 나섰던 것도, 오히려 느리게 걸음으로써 좀 더 행복하고 평화로울 수 있는 '길'을 내 두 발로 꼭 확인함으로써 받고 싶었던 '위안'을 기대해서였을 것이며, 나는 이 '길'에서 그것을 조금은 깨달은 것이 아닐까, 하고 불현듯 생각했다.
<발칙한 유럽산책>에서 빌 브라이슨이 말했던 대로,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내일은 비행기로 돌아가기로 한 터라 마음만 먹으면 내일 낮 동안을 좀 더 제주에서 보낼 수도 있었지만, 나는 굳이 그러지 않기로 했다. 걷지 못한 다른 코스에 대한 아쉬움이 크지만, "모든 여행은 결국 집으로 향하는 길"이라면 집으로 향하는 것은 결국 또 다른 여행의 시작을 의미할 것이고, 그때 아마도 '제주올레'는 다시 길을 떠날 충분한 이유가 되어줄 터였다. 그 정도면 족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내 길지 않은 인생에서 가장 길고도 자유로웠던 '여행'은 기쁘게 막을 내렸다.
* ps. 이제 K는 'K의 길'로, 나는 '나의 길'로 다시 되돌아갔다. 잠시 함께 했던 그 '길'은 이제 각자의 '길'로 나누어졌지만, 함께 했던 그 기억만큼은 오래도록 공유될 것이다. 부디 앞으로의 각자의 '길'도 '제주올레'의 그 여유와 평화와 행복과 무관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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