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까지 집결이란 것쯤은 물론 잘 알고 있지만, 그 시간에 정확히 가봐야 어차피 기다려야 될 것은 더욱 잘 아는 바라 결국 1시도 넘어서 슬슬 집을 나섰다. 날씨는 무진장 더웠고, 내가 아는 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뛰어난 기능성 옷인 '군복'은 그 망할 놈의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의 발을 위한 신발이라고는 볼 수 없는 '군화'까지 사람을 힘겹게 하여 마음속으로 '이 신발'이랄지 '이런 신발'이랄지 하는 단어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중, 문득 신분증을 안 가지고 온 게 생각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 신분증을 챙겨 나와야만 했다. 신분증 따위, 어차피 본인 확인에도 별무소용인 형식적인 절차를 위한 것일 뿐이지만, 그 놈의 형식이 특히 중요한 데가 바로 '군'인 데야 별 수 없는 노릇이다.

집결 장소에 1시 25분쯤 도착하고 보니 놀랍게도 이미 인원파악까지는 마친 모양인데, 별로 상관은 없다. 그냥 소대장으로 선임된 예비군에게 좀 늦었다고 이름만 말하면 그뿐이다. 일단 첫 시간에는 신종 인플루엔자 때문인지 귀에다가 뭔 조그마한 기계를 들이 밀고는 체온을 재서 확인시켜 준다. 백 명에 가까운 인원을 일일이 다 해주는데, 따분하긴 해도 화낼 필요는 없는 일이다. 딱히 날 생각해서 그리 해주는 건 아닌 듯해도, 어쨌든 해될 건 없으니까. 그런데 그걸 하고 나서 용지를 나눠주고 이메일과 연락처를 적도록 하는 데는 분명 화를 낼 필요가 있다. 이 짓은 훈련을 받으러 올 때마다 반드시 하는데, 바뀌지 않은 연락처와 이메일을 왜 1년에 몇 번씩 꼬박꼬박 적어줘야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가끔씩 오는 스팸 문자의 정보 획득 루트가 바로 이곳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쨌든 그렇게 하는데 한 30분쯤이나 걸렸으려나, 그게 끝나면 한 20분 가량은 쉰다. 물론, 이때 '첫 시간'과 '쉬는 시간'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양쪽 모두 더위 먹은 개처럼 헥헥거리며 그늘에 앉아 있기는 마찬가지니까.

해가 움직이며 그림자의 위치를 바꿔줌에 따라 예비군들도 집결지 건물 뒤편의 그늘로 이동했다. 이동도 역시 교육의 일환이기 때문인지, 이동 후에는 당연히 휴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잠시 후, 이날 들어 본격적이라 할 만한 교육이 한 15분쯤 진행되었다. 물론, 이 교육은 매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일 뿐인데, 어차피 듣는 쪽에서 매번 제대로 듣지 않아 항상 새로우니 그 점은 문제 될 게 없다. 잠도 안 오고 가만히 있기도 따분해서 오랜만에 대충 귀 기울인 바에 따르면, 북한군이 어느 쪽으로 침투할 것을 대비해서 우리 중대가 어쩌고, 또 몇 소대가 저쩌고 하는 이야기다. 유비무환이라 했으니 일단은 훌륭하다. 다만, 대체 내가 몇 소대인지도 매번 헛갈리는데, 그래서 나보고 뭐 어쩌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뭐, 물론 이건 순전히 내 탓이겠지만.

잠깐의 교육 후 또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총기를 실은 차량이 도착하자 드디어 총기분출이 시작되었다. 이때 나눠주는 총으로 말하자면, 현역에서는 한 번도 만져볼 일이 없는 칼빈 소총. 과연 총알이 나가기나 할까 의심스럽지만, '군'에서는 이 녀석을 꽤 애지중지 하는 모양인지 나눠주는 데 30분쯤 소요되는 수고에도 불구하고 줬다가 또 금세 회수하는 일을 꺼리지 않는다. 물론, 도대체 왜 굳이 훈련에 소용도 되지 않는 걸 악착같이 나눠주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예비군들은 의자나 베개 대용으로 사용할 뿐인데,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의자나 베개 대용으로도 그리 유용하지는 않다. 아무튼 예비군 훈련에서는 오로지 실내에서만 교육을 해야 할 때도 1시간 가량을 반드시 총기를 나눠줬다가 다시 회수하는 데 사용하고, 이것은 예비군 훈련의 '뻘짓'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식'과도 같다.

총기분출이 끝나면 당연한 휴식을 취하고, 곧이어 자신의 근무지(?)로 투입되는 훈련(?)을 했다. 이 훈련은 소대장이 소대를 인솔하여 집결지 부근의 요소요소에 3-4명을 배치하는 게 요체인데, 달리 말하면 다 함께 모여서 앉아 있다가 몇몇으로 분산해서 앉아 있게 된다,가 이 훈련의 유일한 특이점이다. 그러고 보면 이 훈련에서도 알 수 있듯, 아마도 예비군 훈련의 목적이란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끈기와 진득함의 향상이 아닐까 싶은데, 이와 관련해서 예비군 훈련에서는 첨단장비ㅡ예컨대 DMB tv나 아이팟 따위ㅡ를 장착한 예비군들이 특히 강점을 보인다는 데에서 군의 첨단화가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를 새삼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군'에서 예비군에게 직접 그런 장비를 마련해주지는 않아서, 나는 2년 전쯤에 휴대폰 게임 하나를 다운로드 받으며 최소한의 무장을 하는 데 만족해야만 했다(나는 군 가산점 따위는 필요 없으니, 예비군에게는 휴대폰 게임 다운로드 무료 쿠폰이나 달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그러니까 대체 6시간짜리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가서 한 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휴대폰 게임만 죽어라고 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데, 물론 누구도 내게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가서 휴대폰 게임 따위를 하라고 얘기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나는 추호도 호도할 생각이 없다. 그렇기에 그 흔한 휴대폰 게임 하나 다운로드 받지 않고 그럭저럭 살다가 순전히 예비군 훈련을 위해 요금을 지불하게 된 것도, 그렇게 접한 휴대폰 게임을 꽤 자주 심심풀이로 하다가 배터리의 소모를 진척시킨 것도, 무엇보다도 숫자 패드를 열나게 누른 탓에 숫자 패드가 약간 망가진 것도 나는 모조리 내 탓이라는 점을, 심히 불만이긴 해도 부인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끝끝내, 대관절 신성한 예비군 훈련을 왜 그따위로 받느냐고 추궁한다면, 나는 억울한 심정이 되어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오직 지루함과의 이길 수 없는 싸움만을 강요하며,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게 하는 예비군 훈련에서 난들 달리 어쩌란 말인지. 진심으로 말하건대, 나는 끔찍하게 무의미하고 지루한 시간을, 열악한 장비에 의존하며 6년이나 꿋꿋이 버텨낸 스스로가 제법 대견할 따름이다.

ps1. 현재의 예비군 훈련이 지닌 문제점 때문에 예비군 훈련을 좀 더 강도 높게 개편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있다면(나는 그 사람이 예비군이 아니라는 데 내 예비군 훈련 2년치를 기꺼이 걸 수 있다), 핵심을 잘못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은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예비군 제도가 필수불가결한 제도라면 몰라도 예비군 제도가 박정희 시대의 유산으로서 고작 30여 년 밖에 안 된 것이고 보면, 예비군 제도는 존폐 여부부터 새로이 따져봐야 마땅하다.

ps2. 예비군들은 다른 지역으로 출타 시에 동대에 꼭 연락을 하라고 하는데(이것은 비상소집 시에 지역 내에 있는 예비군들은 6시간 내에 집결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로 웃기는 노릇이다. 식구들에게도 말 안하고 어디 다른 지역으로 무시로 갈 수도 있는 판에 동대에다가는 꼬박꼬박 알리라니, 빈집털이범의 정보 획득 루트가 심히 의심스러워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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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8-31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말할 것도 없이 동감입니다. 끝난건지 일년 더 해야하는건지 모르겠지만, 저도 그간 경험한 바로 이건 쓸데 없는 시간 낭비, 돈 낭비입니다.

Fenomeno 2009-08-31 14:22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이제 이 쓸데 없는 짓을 끝내서 한시름 덜었지요(사실은 자랑 페이퍼였다, 랄까요. ^^;). 뭔가 근본적으로 바뀌었으면 싶지만, 이 정부 들어서는 무엇이든 그저 나빠지지만 않으면 다행이니 아마도 나중을 기약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