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지개를 빨/주/노/초/파/남/보의 일곱 가지 색으로 봅니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빨/주/노/초/파/보의 여섯 가지 색으로 보고, 독일 사람들은 빨/노/파/검/회의 다섯 가지 색으로 봅니다. 언어마다 무지개색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무지개에서 무지개색을 달리 봅니다. 우리는 이처럼 각자의 모국어가 그어놓은 선에 따라서 세계를 봅니다. -p182-









---------------------------------------------------------------------------------

언어가 생각을 제한한다는 '언어결정론'을 설명하기 위해 예시를 든 문장인데, 당연하다고 생각한 무지개의 일곱 가지 색의 스펙트럼이 다르게 해석된다는 것이 이채롭다. 미국의 경우 남색과 보라색을 보라색으로 분류한 점은 쉽게 수긍이 가지만 독일의 경우 빨강과 주황을 빨강의 범주로 묶은 분류 외에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언어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일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연장선상에서 작가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나온 특정 단어를 없앰으로써 생각을 제한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유'라는 단어를 없애버리면 사람들이 자유를 갈망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 일련의 사태와 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 2023-09-05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언자가 누구인지 어떤 의도인지에 따라 자유를 너무 강조하는 것도 본래 의미를 왜곡시킬 수 있는것 같아요.

잉크냄새 2023-09-05 20:41   좋아요 1 | URL
자유란 단어만큼 중의적인 의미로 해석되는 단어는 없을것 같네요.

감은빛 2023-09-19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다보면 같은 단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이해한다는 걸 깨닫곤 해요. 서로 기본 전제가 되는 개념에 대한 이해가 다르니 합의에 이르기는 쉽지 않죠.
이럴 때에 논의가 계속 공회전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답답하기만 한데, 딱히 해답을 찾기가 어렵더라구요.

잉크냄새 2023-09-20 09:31   좋아요 0 | URL
배가 산으로 가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되죠.
 

이 전략(펀치 업 punching up)이 성공하려면 비판하는 자와 비판받는 자가 동일한 규범을 받아들이고 관련 사실에 동의해야 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근본 가치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을 때, 권력자의 무분별한 행동이 부인하기 힘들 만큼 명확하고 근거가 확실할 때, 수치심 자극은 결실을 맺는다. -p236-









------------------------------------------------------------------------------------

저자는 비만, 가난, 중독 등 다방면에 걸친 왜곡된 수치심이 알고리즘을 통해 구조화되고 상업적으로 활용되는 수치심 머신을 고발한다. 또한 수치심 머신을 역으로 이용하여 유익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길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펀치업 전략은 간략히 말하면 권력자의 수치심을 건들어 유익한 결과를 끌어내는 전략이다. 그 성공 사례로 소개되는 간디의 국민 저항 운동은 영국의 문명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역으로 이용하였고 미투의 경우 남성의 성적 수치심을 폭로하여 결과를 이끌어내었다.


펀치업 전략의 전제 조건으로 기술되는 '비판하는 자와 비판받는 자가 동일한 규범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에 특히 주목하게 되는데, 펀치업 전략의 필요충분조건은 최소한 수치심을 느끼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제국주의 영국이든, 미친 수컷 하비 와인스타인이든 최소한 수치심의 범주 안에는 분류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펀치업 전략의 대상을 국내로 돌려보면 절망하게 되는데, 조선 총독 윤가과 영혼의 단짝 김가에게는 절대 적용할 수 없는 전략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개나 줘버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치적 언어는 사실에 바탕하지도 않았고 의견에 바탕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흔히 욕망이나 이득에 바탕하고 있었다. 욕망과 이득에 바탕한 말들은 사실을 지운다. -p66-










--------------------------------------------------------------------------------------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가 한참인 요즘, 살신성인(?)의 자세로 수산 시장의 바닷물을 몸소 퍼마신 (도대체 왜? ) 국회의원의 행위도 나름의 고도화된 정치적 언어로 볼 수 있을까? 멍게가 아닌 사람이 행한 행위라는 것이 영 마뜩치 않지만, 무엇보다도 그 멍게가 5선이라는 사실에 절망하게 된다. 정치도 좀 세련되게 하자!!!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3-08-29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29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29 1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9-01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9-01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중책衆責은 불벌不罰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벌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다 처벌해야 하는 법은 법이 아닙니다. 모든 통행 차량이 위반할 수밖에 없는 도로는 잘못된 도로입니다. 그것을 지키면 딱지를 끊을 것이 아니라 도로를 고쳐야 합니다. 다수가 정의라는 사실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p136-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한 말입니다. “땅을 갈고 파헤치면 모든 땅들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 피우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사실입니다. 아름다운 꽃은 훨씬 훗날의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물며 열매는 더 먼 미래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씨앗과 꽃과 열매의 인연 속 어디쯤 놓여 있는 것이지요. -p200-


그러나 차이와 다양성은 그것을 존중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어야 합니다. (중략) 차이는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출발이어야 합니다. 차이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感謝)의 대상이어야 하고, 학습의 교본이어야 하고, 변화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목주의입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노마디즘입니다. 이 유목주의가 바로 탈근대의 철학적 주제임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톨레랑스는 은폐된 패권 논리입니다. 관용과 톨레랑스는 결국 타자를 바깥에 세워 드는 것입니다. 타자가 언젠가 동화되어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강자의 여유이기는 하지만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탈주와 노마디즘은 아닙니다. -p232-


미셀 푸코는 감옥을 다르게 정의합니다. ‘감옥은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는 착각을 주기 위한 정치적 공간’입니다. 역설적 진리입니다. -p272-


-------------------------------------------------------------------------------------

십여년만에 다시 꺼내들어 읽었다. 밑줄 그은 내용들은 가물가물 하지만 여전히 끄덕거리게 되는 것은 세상을 보는 큰 틀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이유라 여겨진다. 불신의 시기에 책을 다시 펼치게 되는 것은 큰 어르신의 글에서 희망을 더듬어 보기 위함이 아닐런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다시 그날 저녁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거리에서 이 작은 책을 펼치고 나서 겨우 처음 몇 줄을 읽어 보고 다시 덮고는 가슴에 꼭 끌어 안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신없이 읽기 위해 내 방에 까지 달려왔던 그 날 저녁으로. 나는 아무런 마음의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책을 열어보게 되는 저 알지 못하는 젊은 사람을 너무나도 열렬히 부러워한다.-p20~21-








(인생에서처럼) 책을 읽을 때에도 인생 항로의 변경이나 돌연한 변화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 있다. 의식 깊이 빨려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직접 글을 쓰는 사람에게 이 병은 축복, 거의 필수적인 조건일 수 있다. 그것은 위대한 문학 작품이 꼼짝 못하게 불어넣은 경외심 앞에서 그를 지켜 주고, 표절의 문제도 복잡하지 않게 해준다. 그렇지 않다면 독창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p88-




독서는 그 자체로 삶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지 기억을 하느냐 못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건 일상과 오버랩되는 것. 그리고 고전의 내용들이 신체와 융합하여 나의 언어가 되는 일이다 그게 바로 지성이고 수행이다. -p239-










----------------------------------------------------------------------

나이가 들수록 책을 읽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끔은 '기억도 못하는데 왜 책을 읽을까?' 라고 스스로 자문해보기도 하는데, 자꾸 앞을 다시 들추어보는 건망증을 변호하기 위하여 작년 가을부터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으리라고 생각되는 작가들의 글을 메모해보았다. 나도 저들의 고민 어딘가를 서성이고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