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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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란 건 아무래도 이상한 것이다. 거기에 실제로 내가 있었을 때 나는 그런 풍경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특별히 인상적인 풍경이라는 느낌도 없었고, 더구나 18년 후에 그 풍경을 선명하게 기억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때 나에겐 그런 풍경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37쪽

누구에겐가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예요. 누구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자 책상 앞에 앉아서 펜을 들고,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입니다. 물론 글로 써놓고 보면,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것의 아주 일부분밖에 표현하지 못한 것 같지만 그래도 괜찮다 싶어요. 누구에게 뭔가를 적어 보고 싶다는 그 기분이 든 것만으로도, 지금의 나로서는 행복합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당신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답니다.-166쪽

시간마저도 그러한 나의 걸음걸이에 맞추어 느리게 뒤뚱뒤뚱 흐르고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이미 저만큼 앞장서서 가고 있었으나, 나와 나의 시간만은 진칭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386쪽

자기 자신에게는 동정하지 말아. 하고 그가 말했다. 자신을 동정하는 건 비열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393쪽

비스킷 통에 비스킷이 가득 들어 있고, 거기엔 좋아하는 것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요?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자꾸 먹어 버리면 그 다음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되죠. 난 괴로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 이걸 겪어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통이다, 라고. -408쪽

느긋하게 기다리는 게 제일이에요. 희망을 잃지 말고 엉킨 실을 하나하나 풀어 나가는 거예요. 사태가 아무리 절망적일지라도 실마리는 어딘가에 있기 마련이죠. 주위가 어두우면 잠시 가만히 있으면서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듯이 말예요.-418쪽

나는 그런 아무 뜻 없는 신문의 지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난 대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나를 둘러싼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불쑥불쑥 내 주위에서 세계가 두근두근 맥박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431쪽

오늘 하루 일에 대해 나는 전혀 후회가 없었다. 오늘을 다시 한 번 산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431쪽

우리는(우리란 정상인과 비정상적인 사람을 다 포함한 총칭이에요)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들이에요. 자로 깊이를 재고, 각도기로 각도를 재서 은행 예금처럼 빡빡하게 살아나갈 순 없어요. -434쪽

그런 식으로 고민하지 말아요. 내버려둬도 만사는 흘러갈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상처 입을 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입게 마련이지요. 인생이란 그런 거예요. 대단한 것을 말하는 것 같지만, 와타나베 군도 그런 인생살이를 슬슬 배워도 좋을 때라고 생각하세요-4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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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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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생각하는게 아니예요. 느낌으로 오는거지요. -27쪽

아시다시피 우리 몸 안에도 인을 생산할 수 있는 물질이 있어요. 그보다 더한 것도 있죠.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걸 알려드릴까요? 우리 할머니는 아주 재미있는 이론을 가지고 계셨어요.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없다고 하셨죠. 방금 한 실험에서처럼 산소와 촛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산소는 사랑하는 사람의 입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촛불은 펑 하고 성냥불을 일으켜줄 수 있는 음식이나 음악, 애무, 언어, 소리가 되겠지요. 잠시 동안 우리는 그 강렬한 느낌에 현혹됩니다. 우리 몸 안에서는 따뜻한 열기가 피어오르지요. 이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사라지지만 나중에 다시 그 불길을 되살릴 수 있는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그 불꽃이 일면서 생기는 연소 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다시 말해 불꽃은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자신의 불씨를 지펴줄 뭔가를 제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서 한 개비의 불도 지필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영혼은 육체에서 달아나 자신을 살찌워 줄 양식을 찾아 홀로 칠흑같이 어두운 곳을 헤매게 됩니다. 남겨두고 온 차갑고 힘없는 육체만이 그 양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말입니다.-124~5쪽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게 진짜 진실이야. 진실은 보는 사람의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거다.-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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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강 밤배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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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자고 있어도 애인의 전화벨 소리는 알아듣는다. 그가 건 전화는 벨 소리가 전혀 다르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 차이를 안다. 다른 온갖 소리는 밖에서 들려오는데, 그가 건 전화벨 소리는 마치 헤드폰을 끼고 있는 것처럼 머리 안 쪽에서 기분 좋게 울린다. -10쪽

만약 지금 누가,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보장해 준다면 나는 안도감에 그 사람의 발치에 무릎을 꿇으리라.-11쪽

실은 나 자신이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데, 만약 이 사랑이 끝나면, 하고 생각하면 손발이 떨릴 정도인데. 하지만 언제 끝나도 무관할 형태로 줄곧 만나왔고, 그럼에도 내 마음은 차분하게 불타오르고 있는데. -20쪽

요시히로는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 같은 사람이야. 눈을 뗄 수가 없어. 그냥 에너지가 넘치는 게 아니라, 내면에서 샘솟는, 메마르지 않는 무엇, 굉장히 지적인 느낌이야. 같이 있기만 해도 내가 점점 변할 것 같은 기분.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먼 데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84쪽

우리의 지난 일 년은 정말 이상했던 것 같아. 인생의 흐름 속에서, 그 기간동안만 공간도 속도도 달랐지. 닫혀 있었고 그리고 아주 조용했고. 훗날 되돌아보면 아마 독특한 색으로 보일거야, 한 덩어리로. -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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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 - Blu 냉정과 열정 사이
쓰지 히토나리 지음, 양억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11월
구판절판


인간이란 잊으려 하면 할수록 잊지 못하는 동물이다. 망각에는 특별한 노력 따위는 필요도 없는 것이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새로운 일들 따윈, 거의 모두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잊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게 보통이다. 어느 때 문득,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떠올리기도 하지만 그걸 또 머리 속에 새겨 두지 않으니, 기억이란 덧없는 아지랑이의 날개처럼 햇살 아래 녹아 내려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12쪽

"미래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아 늘 우리를 초조하게 해. 그렇지만 초조해 하면 안 돼. 미래는 보이지 않지만, 과거와 달리 반드시 찾아오는 거니까." 선생의 눈동자를 가만히 엿보았다. "그렇지만 그 미래에는 희망이 별로 없어요." 선생은 미소를 거두었다. "내게는 고통스런 미래지요." "...희망이 적건, 고통스럽건,가능성이 제로가 아닌 한 포기해선 안 돼. " -50쪽

나는 후회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것. 점점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갈 뿐이다.-54쪽

사랑이라는 말 그 자체가, 전형적인 사기 수법인 것처럼 생각되었다.-63쪽

후회없는 인생이 있을까. 나는 후회만 계속해 왔다. 평생, 후회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런 생각을 하면 갑자기 다리가 무거워진다. -63쪽

누구에게도,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해도,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두운 그림자 한둘은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90쪽

사람은 모두 미래를 향해 살아가야만 하는 걸까. -140쪽

가슴이 아려 왔다. 내가 고통받는 것처럼 메미도 괴로워하고 있다. 고통을 나눠 가지는 것 또한 사랑의 또 다른 결말인 것이다.-194쪽

과거밖에 없는 인생도 있다. 잊을 수 없는 시간만을 소중히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이 서글픈 일이라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뒤쫓는 인생이라고 쓸데없는 인생은 아니다. 다들 미래만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나는 과거를 그냥 물처럼 흘려 보낼 수 없다.-206쪽

너무도 길게 느껴지는 기다리는 시간, 그것은 깨달음의 시간이기도 하다. 기다림의 저 앞에 기다림을 받아들이는 현실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사람은 기다림의 시간에 몸을 담근다-229쪽

하늘은 늘 변한다. 구름은 늘 자유롭게 모습을 바꾸어 간다. 하늘을 올려다본다는 것은 마음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나는 하늘을 그릴 때면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여러가지 하늘이 있듯이, 여러가지 인간이 있다. 그렇다. 이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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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 - Rosso 냉정과 열정 사이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11월
구판절판


언제부터인가 생일은 행복한 날도 특별한 날도 아니다. 언제부터일까.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다. 나이 따위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40쪽

쥰세이는 내가 처음 섹스를 한 남자는 아니었지만, 이런 식의 표현이 허용된다면, 진심으로 몸을 허락한 - 모든 것을 허락한 - 첫 남자다. 처음이고, 그리고 유일한.-98쪽

나는 쥰세이를, 헤어진 쌍둥이를 사랑하듯 사랑했다. 아무런 분별도 없이.-99쪽

쥰세이는 동사의 보고였다. 만진다. 사랑한다. 가르친다. 외출한다. 본다. 사랑한다. 느낀다. 슬퍼한다. 사랑한다. 화를 낸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더욱 사랑한다. 운다. 상처 입는다. 상처 입힌다.-109쪽

*"쥰세이."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리자, 그 이름은 어두운 부엌에 엄청난 위화감을 가져다 주었다. 엄청난 위화감과, 눈사태 같은 그리움을. -177쪽

아오이. 그 한마디에 쥰세이의 목소리가 되살아난다. 쥰세이는, 늘 쥰세이밖에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 이름을 발음하였다. 모든 언어를. 성실하게, 애정을 담아. 나는 그가 이름을 불러 주면 좋아했다. 아오이. 아주 조금 주저하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그 목소리의 온도를 좋아했다. 쥰세이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지금 당장 듣고 싶었다. 세월 따위 아무 소용 없었다. -194쪽

나는 돌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 돌아갈 장소. 줄곧 그런 장소를 찾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들지만, 한 번도 없었다. 쥰세이가 보고 싶었다. 기묘한 열정으로, 그냥 그렇게 생각한다. 만났다고 해서 뭐가 어떻게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다만 쥰세이와 얘기하고 싶었다. 내 말이 통하는 사람은 쥰세이밖에 없다.-203쪽

돌아갈 장소. 사람은 대체 언제, 어떤 식으로 그런 장소를 발견하는 것일까. 잠 못드는 밤, 나는 사람을 그리워함과 애정을 혼동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매사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8쪽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는 것이란다.-210쪽

비 냄새 나는 싸늘한 공기를 들이키며, 나는 생각한다. 나는 누구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내 가슴속에는 누가 있는 것일까. 누가, 있는 것일까.-211쪽

내내, 쥰세이와 함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인생은 다른 곳에서 시작됐지만, 반드시 같은 장소에서 끝날 것이라고. -225쪽

언어가 기호 같았다. 기호이기에, 그렇게 쉽사리 입에서 미끄러져 나오는 것이리라. 소중한 것은 무엇 하나 말하지 못한 채. -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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