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치(인상)라는 운동에 푹 빠진 지 몇 해가 지났다. 올해는 한 번도 바벨 스내치를 시도해보지 못했다. 여러번 핏니스 클럽을 가입하려고 생각했지만,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집 근처와 일터 근처 열다섯 곳 이상을 살펴봤지만, 프리웨이트로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여분의 바벨이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추가로 케틀벨이나 로잉머신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더 먼 얘기였다.


그렇다고 마음에 들지도 않는 곳에 비싼 돈을 내고 등록하기도 아까웠다. 난 머신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데, 머신만 가득한 핏니스 클럽에 비싼 돈을 내는 건 너무 아닌 것 같다. 결국 대안은 집에서 혼자 운동하는 것 뿐. 바벨을 살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주먹쥐고 푸쉬업, 오버헤드 푸쉬업


혼자 살아서 좋은 점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옷을 벗은 채로 운동할 수 있다는 거다. 애들 엄마는 내가 집에서 옷 벗고 운동하는 걸 못 마땅하게 여겼다. 운동을 하면 땀을 흘릴 수 밖에 없고, 땀을 흘리면, 옷이 젖는다. 그러면 빨래가 더 생기고, 젖은 옷은 입고 있는 건 기분이 좋지 않다. 차라리 운동할 때는 옷을 벗고 하고, 주위에 흘린 땀을 걸레로 닦은 후, 씻을 때 걸레만 빠는 것이 훨 편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내가 옷 벗고 운동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거추장스럽더라도 옷을 입고 운동해야 했고, 젖은 옷을 그냥 빨래통에 던져넣고 씻어야 했다.


지금은 옷을 벗고 편하게 운동한다. 땀을 정말 많이 흘리는 쉐도우 복싱이나 이미지 트레이닝을 할 땐 실오가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케틀벨이나 덤벨을 들고 운동을 할 때는 팬티만 입고 운동한다. 거울을 보며 내 몸과 내 자세와 내 근육의 모양을 제대로 보면서 운동하는 건 중요하다. 특히 나처럼 고립운동이 아닌 전신운동을 하는 입장에선 특히 그렇다. 자세에 따라 힘을 쓰는 부위가 달라진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잘 깨닫기 힘들다. 가령 오버헤드 스퀏을 할 때 바벨을 쥔 양 팔이 앞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각도를 유지하며 앉는 자세가 중요한 데, 거울을 보지 않으면 그 자세를 유지하기 어렵다. 거울을 보고 상박의 근육 긴장도를 살피며 서서히 내려가는 것이 이 운동을 잘 하는 방법 중 하나다. 거울도 거울이지만, 옷을 벗고 근육의 긴징도를 살필 수 잇어야 제대로 이 운동을 익힐 수 있다.


따로 핏니스 클럽을 끊지 않은 대신, 집에서 꾸준히 운동을 했다. 한 때는 푸쉬업에 완전 몰입해서 다양한 자세와 각도로 푸쉬업을 했다. 지금을 알라딘 서재를 하지 않은 지 제법 되는 것 같지만, 알라디너 노이에자이트님과 나의 공통점은 주먹 쥐고 푸쉬업을 한다는 거였다. 손바닥을 대고 하는 것보다 주먹을 쥐고 하는 자세가 팔목 힘을 기르는데 더 도움이 되고, 주먹을 단련하는데도 더 도움이 된다. 노이에자이트 님이 어느 글에서 굳은살이 박힌 손등을 여고생이 만졌다고 쓴 기억이 난다. 내 경우에는 여성이 보고 눈치채거나 만진 적은 없고, 한 후배가 보고 또 무슨 사고 친 거 아니냐고 걱정한 적은 있다. 어렸을 때 폭력전과를 달았던 걸 아는 후배여서, 주먹에 박힌 굳은 살을 보고 무슨 사고를 쳤다고 생각했나 보다. 나는 푸쉬업을 해서 그렇다고 계속 얘기했지만, 그 친구는 믿어주지 않았다. 그래. 직접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거다. 나도 푸쉬업을 한다고 손에 그렇게 굳은 살이 박힐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나중엔 그냥 푸쉬업을 하는 건 재미가 없었다. 아무리 자세와 각도를 바꿔가며 긴장이 되는 부위를 달리해봐도 지겨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헤드스탠드 푸쉬업을 해봤다. 말 그대로 물그나무 서듯 거꾸로 서서 팔을 굽혔다 폈다 하는 건데, 이거 생각보다 운동효과가 엄청났다. 동영상을 보면 아무데도 의지하지 않고 순전히 홀로 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나는 벽에 발을 기대고 물그나무를 서서 푸쉬업을 했다. 생각만으로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의외로 쉽지 않았다. 유연성과 자세가 중요한데, 무턱대고 힘만으로 하려던 나는 생각했던 숫자의 반도 못 채우고 쓰러졌다. 이후로도 쉽게 횟수가 늘지 않았다. 


또 집중했던 운동은 버피였다.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는 운동이라고 불러야 할까? 짧은 시간에 가장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운동이자만, 그만큼 힘든 운동이다. 버피는 항상 타바타 인터벌로 하는데, 4분만 운동해도 1시간을 운동한 것 보다 더 큰 효과를 얻는다. 막상 8라운드를 뛰고 나면 그렇게 상쾌하고 기분이 좋지만, 하기 전에는 죽을 만큼 하기 싫은 운동이기도 하다. 초기엔 엑셀 파일에 각 라운드의 횟수를 기록하고, 총 8라운드의 합계를 기록해서 얼마나 횟수가 늘었는지를 체크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 두번이지. 나중엔 귀찮아서 횟수를 제대로 세지도 않고 운동했다.


기본은 맨손 운동을 하지만 마무리는 늘 케틀벨 운동으로 했다. 스윙과 데드리프트와 클린앤저크(용상). 클린앤저크는 바벨 운동도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 케틀벨로도 많이 하진 않았다. 주로 스윙을 했고, 가끔 데드레프트를 했다. 내가 산 케틀벨은 18킬로그램 짜리 인데, 스윙을 하기에 적절한 무게이지만, 데드리프트를 하기에는 상당히 적은 무게다. 24킬로그램 짜리 케틀벨을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늘 돈에 허덕이는 입장에서 쉽지 않다.


혼자 살게 되면서 생각했던 건 바벨을 구매하는 거였다. 애들 엄마는 내가 벤치를 샀을 때도 못마땅한 눈치였다. 사실 큰 맘먹고 벤치를 지를 때 바벨도 함께 지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큰 맘을 먹을만큼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다. 결국 싸구려 벤치를 샀고, 그건 오랫동안 애들 장난감에 덮혀 있어 앉아보지도 못했고, 요즘은 컴퓨터와 모니터를 놓아 두어서 벤치로서의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


스내치를 하고 싶어!


바벨을 사지 못하고, 근처에 갈만한 핏니스 클럽도 없으니 내가 좋아하는 스내치 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니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덤벨로 바벨을 들 듯이 스내치 운동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케틀벨 스내치를 하는 거였다.


처음에 시도했던 건 덤벨 스내치였다. 간단했다. 양손에 같은 무게의 덤벨을 쥐고 스내치 동작을 시연하믄 되는 거였다. 다만 바벨이 아닌 만큼 훨씬 쉬운 운동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바벨을 든다는 느낌으로 해야 했다. 한가지 단점은 내가 그동안 덤벨 운동을 위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 있는 덤벨의 무게가 너무 적었다. 스내치를 한다는 느낌을 살릴만큼의 무게가 나오지 않았다. 다만 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스내치의 감각을 다시 살린다는 점에서 운동 자체는 재미있었다. 좀 더 무게가 있었다면 운동 자체로 효과를 거둘 수 도 있었겠다 싶다.


두번째 시도는 케틀벨 스내치였다. 이건 아무리 동영상을 보고 연구해봐도 쉽지 않았다. 케틀벨로 클린 앤 저크 까지는 종종 해봤다. 그런데 스내치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마지막 케틀벨이 돌아가는 손동작이 어렵다. 케틀벨을 들어올리는 과정은 스윙이나 클린 앤 저크와 큰 차이점이 없어서 별로 어렵지 않다. 마지막 손을 비틀어 케틀벨을 들어올리는 그 과정이 생각보다 어렵더라.




언젠가 소개한 적이 있는 러시아 케틀벨 스내치 챔피언 크세이나 데듀크히나의 동영상이다. 이 영상에서 그는 10분에 200번의 횟수를 채워 챔피언에 오르지만, 이후 다른 동영상에선202회를 들어 올린다. 케틀벨의 무게는 무려 24킬로그램이다. 이 여성의 동영상을 본 이후로 따라해보기 시작한 게 벌써 1년이 훌쩍 지났다. 그간 집에 있는 18킬래그램의 케틀벨로 연습을 꾸준히 했지만, 아직 양손을 번갈아가며 해도 20회를 채 넘기지 못한다. 연습을 반복해도 늘 자세가 불안정하다. 특히 마지막에 케틀벨을 돌려쥐는 손이 불안하다.


검색을 통해 크세니아가 훈련하는 방법을 봤다. 평소 32킬래그램 케틀벨로 스윙을 연습하더라. 손동작은 아무리 찾아보려 해도 자세히 알려주는 곳이 없더라. 32킬로와 24킬로 짜리 케틀벨을 사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당장은 아니고, 지금 쓰는 18킬로 짜리로 클린만이라도 좀 익숙해진 이후에 사야겠지.


어려워~!


몇 번을 자세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상태로 시도하다가 왼쪽 어깨가 아파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을 때 다시 진지하게 케틀벨 스내치에 대해 찾아봤다. 


http://egloos.zum.com/hamlet1/v/920752


누군가 블로그에 자세히 정리를 해 놓았다. 그 글을 읽으며 '겟업'이라는 운동을 처음 알았다. 나름 운동을 오랫동안 해 왔고, 운동법에 대해서도 늘 공부한다고 생각했는데, 겟업이란 운동은 처음 알았다. 딱 보자마자 재미있을 것 같아서 따라해봤는데, 쉬운 운동이 아니더라. 지금 집에 있는 케틀벨로는 엄두도 못 내겠더라.




다른 건 별로 바라지 않는데, 운동할 수 있는 공간과 운동하기 위한 기구를 마련하기 위한 돈은 좀 있었으면 좋겠다. 늘 바랐던 건 바벨과 벤치와 샌드백과 케틀벨인데, 이번에 케틀벨을 좀 자세히 배우기 시작하면서 무게가 다양해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한 12킬로그램짜리 두 개와 24킬로그램짜리 한 개와 32킬로그램짜리 한 개가 있으면 딱 좋겠다. 그리고 바벨도 한 80킬로그램까지 조합할 수 있도록 플레이트를 샀으면 좋겠다. 바가 20킬로니까 플레이트는 최대한 봤을 때 20킬로짜리 3개면 되겠지. 제법 오랫동안 80킬로 이상은 들을 일 자체가 없을 것 같다.


바벨 스내치를 잘 하기 위해 제법 오랫동안 오버헤드 스퀏과 데드리프트 운동에 매진했던 만큼, 이제 케틀벨 스내치를 잘 하기 위해 한동안 겟업이란 운동에 매진해야 할 것 같다. 우선은 덤벨로 시작하고, 나중에 케틀벨을 들만큼 실력을 늘려야겠지. 그리고 크세니아가 했듯이 32킬로 스윙을 마무리 운동으로 꾸준히 해야겠다. 그래야 언젠가 24킬로그램 케틀벨로 스내치를 10분에 202번 할 수 있을 거 아닌가.


저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난 아직 멀었다. 18킬로로 10분동안 최대 횟수가 아니라 열댓번 남짓 들고 더이상 들어올릴 힘이 없었다. 스내치는 바벨운동도 그렇고 케틀벨 운동도 그렇고 힘으로 드는 것이 아니다. 기술과 스피드로 드는 것이다. 빨리 기술을 익혀 점점 횟수를 늘려가는 재미에 빠져보고 싶다. 바벨 스내치가 공간의 제약이 다소 있는 운동이라면, 케틀벨 스내치는 훨씬 좁은 공간에서 가능한 대중적인 운동이라 볼 수 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케틀벨 스내치는 얼마나 할 수 있을까? 과연 바벨 스내치는 시도해 볼 수 있을까? 역시 힘을 쓰는 입장에선 바벨 스내치가 제일 재미있다. 언젠가 마당이나 옥상이 있는 집으로 이사간다면, 아니 그럴 것도 없이 여분의 방이 있는 집으로만 이사할 수 있어도 그 방을 샌드백과 바벨과 벤치와 케틀벨 등으로 채워놓을 텐데.


목표가 있어서 사는 것이 즐겁다. 목표가 더이상 멀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건 순전히 내 몫이다. 일단 케틀벨부터 사야겠지. 역시 돈이 시간보다 더 문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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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9 0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0 14: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빠가 울면 무서워


1년에 손녀들을 몇 번 보지도 못하는 부모님을 위해 해마다 휴가는 고향으로 간다. 부모님은 혼자 아이들 데리고 오는 게 힘들다고 뭐하러 오냐고 말씀하시지만, 사실 기다리고 계시다는 걸 안다. 그렇게 고향에 내려가면 여동생네 식구들도 시간을 맞춰 온다. 명절을 포함해서 3번 밖에 못 보는 오빠를 보러 오는 건 물론 아닐테고, 아이들이 서로 어울려 놀 수 있게 시간을 만들어 주는 거겠지.


지난 여름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가 재밌게 놀려고 노력을 했고, 여동생네 식구들도 와서 집안은 시끌벅적했다. 갑자기 무언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무슨 일이냐고 아이들을 불러 봤더니, 큰 아이와 큰 조카가 장난으로 작은 아이의 머리카락에 무언가를 발랐다. 아, 왜 그게 뭔지 기억이 나지 않는지 모르겠다. 당시엔 왜 아이들이 그걸 머리에 발랐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게 뭔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 왜 내가 화를 냈는지도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암튼 작은 아이의 머리칼은 온통 그 무언가 때문에 달라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여동생과 어머니는 빗으로 빗어가며 아이의 머리칼을 살려보려 했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달라붙은 머리칼을 빗으로 억지로 떼내려 하니 작은 아이는 아프다고 울었고, 그 울음을 들는 나는 아이가 너무 안쓰러웠고, 또 화가 났다. 여동생은 도저히 방법이 없다며 가위로 머리칼을 잘라야 한다고 했고, 난 그건 싫다고 최대한 해보자고 했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봤지만, 결국 머리칼의 일부를 잘라야 했다.


요즘도 아침에 작은아이의 머리를 묶어주다 보면 꼭 왼쪽 앞 머리가 어중간하게 남는다. 그래서 화가 난다. 암튼 그때 고향에서 큰 아이와 큰 조카가 작은 아이의 머리칼을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화가 많이 났다.


큰 아이는 본인의 잘못을 알고 있었다. 내가 더 뭐라고 화를 내거나 혼을 낼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화가 나 있었고, 대체 이게 뭐냐고, 왜 그랬냐고 물었다. 그냥 했다고 답이 돌아왔다. 큰 아이를 작은 방으로 불러 따끔하게 혼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그때 큰 아이는 억울하다고 했다. 그럴 의도가 아니라고 했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아이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을 수 있도록 타일렀다. 결국 아이는 내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아이와 얘기를 하는 도중에 나도 모르게 울었다. 서러웠다. 큰 아이를 혼내야 하는 상황도, 작은 아이가 머리칼이 잘려 보기 싫은 모양이 된 상황도 싫었고, 짜증났고, 화가 났다. 큰 아이를 달래고 타이르면서 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큰 아이는 내가 우는 모습을 보면서 무섭다고 했다. 그 반응이 너무 의외였다. 왜 무섭지? 아이에게 아빠는 절대적인 강자이자, 무한한 지지자여야 하는데, 그래야 할 아빠가 울고 잇으니 그게 무서운 걸까? 나도 모르게 서러워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나에게 오히려 더 펑펑 울면서 아빠 울지 말라고, 아빠가 울면 무섭다고 말하는 아이를 보는 건 괴롭고 힘든 일이었다.


큰 아이가 3.5춘기가 되면서 반항이 심해졌다. 4춘기가 되고 나면 더 심해지겠지. 아이랑 함께 웃고 떠드는 게 삶의 거의 유일한 낙이라 생각하는데, 그럴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아이가 감정 기복이 심해지면서 괜한 짜증이나 화가 많아졌다. 작은 아이에게 가벼운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다른 건 다 그냥 모른 척 넘어갈 수 있는데, 폭력은 그냥 두지 못한다. 큰 아이를 혼내거나, 달래거나 하다보면 아이가 무척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울면서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면 안아주거나, 손을 꼭 붙들고 들어주는데,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아이는 내가 울 것 같은 표정을 보이면 무섭다고 한다. 아빠가 울면 무섭다고 한다. 그래. 아빠는 아이에게 늘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는 존재여야 할텐데, 바보처럼 우는 아빠라면 믿음이 가지 않을 것 같다.


눈물이 많아졌다


큰 아이는 내가 울음을 참는 모습을 보고, 울면서 "아빠 울지마. 아빠가 울면 무서워" 라고 했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 난 아이를 껴안고 울었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밀려들어 눈물이 그치지 않고 계속 흘렀다. 난 아이에게 "무조건 아빠가 널 지켜줄거야. 무서워하지마. 하지만 아빠도 울 수도 있어. 아빠가 널 사랑해서 그런거야" 라고 말했다.


[부산행] 영화를 혼자 봤던 날, 영화가 끝나고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딸 키우는 아빠가 보면 안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바보같았고, 부끄러웠지만 눈물을 어쩔 수가 없었다.


세월호 사고 직후 며칠째 제대로 된 구조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 때, 밤마다 기사를 읽으며 참 많이 울었다. 밀양 어르신들의 투쟁을 담은 다큐를 보면서도 울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곁에서 힘들게 바라보는 아이들의 글을 읽으면서도 울었다. 뭐든 아이와 연결되면 눈물이 흘렀다.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졌을까?


며칠 전 밤, 아이들을 재워놓고 혼자 잠이 오지 않아 술을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다.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 뿐 아니라 나도 모르게 엉엉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웠을까? 지금 다시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다. 그냥 온갖 감정이 폭발해버린 듯한 느낌.


그 순간 깨달았다. 혼자 술을 마시는 건 이래서 위험하구나. 나도 모르게 어떤 선택을 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살에 대한 동경


그게 몇 년이었는지, 몇 살때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버스를 타고 학교를 가고 있었으니, 아마 아침이었을 것이다. 항구 근처 외진 길이었다. 버스가 왼쪽으로 크게 돌고 있는데, 저쪽에서 커다란 컨테이너 트럭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순간 그 컨테이너 트럭이 이 버스를 들이받아 사고가 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아주 빠르게 머릿속에서 영상이 재생되었다. 트럭이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버스를 들이 받고, 방향이 바뀐 채 더 나아가 전봇대를 받은 후 건물에 부딪혀 쓰러지고, 컨테이너 상자 두 개가 넘어져 굴렀다. 버스는 옆구리가 크게 찢긴 상태로 뒤로 밀려나 넘어지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트럭은 정확하게 내가 탄 좌석을 들이 받고, 난 머리가 깨지고 얼굴이 흉측하게 망가져 피를 흘리며, 찢어져 구겨진 버스 바닥에 쳐 박혀 있었다. 즉사.


이렇게 상상하는 동안 버스는 빠르게 회전을 마치고 직진 구간에 들어섰고, 달려오던 컨테이너 트럭은 오른쪽으로 크게 돌아 내 시야를 벗어났다.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상상이 너무나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돋았다. 그때 그랬다.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았겠다. 그 상상이 현실이 되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춘기 무렵부터 나는 내가 매우 불행하다고 여겼다. 나 자신이 끔찍하게 싫었다.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그 무렵 어떤 영화를 봤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청소년인 남, 녀 주인공이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어떤 어려움 때문에 함께 목숨을 끊는 영화였다. 마지막에 두 사람이 서로를 꼭 껴안고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영화를 보고 자살에 대한 동경을 품었던 것 같다. 저런 죽음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문득 내가 지금 죽는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사람들을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가장 슬퍼할 사람들은 역시 가족들일 것이다. 그땐 결혼 전이었으니, 나의 죽음에 가장 마음 아파할 사람은 부모님과 여동생일 것이다. 친구들은? 그땐 친구가 별로 없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내 주위에 벽을 쌓고 살았던 것 같다. 가족 외에는 아무도 슬퍼하거나, 날 기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죽음을 택할 수 있는 용기


2년 전 봄이었다. 후쿠시마 핵사고 3주기였다. 시청광장에서 열리는 탈핵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버스를 타고 가다가 그 소식을 받았다. 당시에도 글을 썼지만, 처음에는 그 부고 문자가 부모님의 부고 소식일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가 '노동당 부대표 박은지'라는 걸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를 잘 알지 못했지만, 그의 죽음이 나에게 미친 영향은 컸다. 나는 당시 꽤 오랫동안 어떤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늦게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사람들은 계속 그의 삶을 이야기했다. 자리를 파하고 돌아와 혼자 책상앞에 앉아 그가 어떤 기분이었을지를, 나는 지금 어떤 기분인지를 곱씹어보곤 했다.


그때 내가 서재에 남긴 글을 보니 이렇게 써 놓았다.


 지금 나는 한때 같은 깃발 아래서, 같은 구호를 외쳤던 동지의 죽음을 보면서, 한편으로 내 마음을 들여다 본다. 그것은 하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더 열심히 살라고 말을 하는데, 나는 죽음을 택하는 용기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의 죽음이 미칠 영향을 생각한다면 그때는 또 다른 문제가 된다. 사실 생각으로는 수없이 해 봤지만, 현실에서는 그 만큼의 용기를 내지 못했다. 역시 나는 그 정도의 용기가 없는 그런 인간이다. 그저 내 마음을 차분히 들여다 봐야겠다.


그의 선택에 대한 내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때 이렇게 글을 남긴 이후로 남겨진 아이 생각을 많이 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아이를 떠올렸을까? 아이에게 어떤 마음이었을까? 죽음을 택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면, 남겨질 아이를 위해 다른 선택을 할 용기를 가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만약 내가 스스로 이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마음 먹는다면, 그 마지막 순간에 아이들에게 어떤 마음이 들까? 아이들을 떠올리고도 그 선택을 행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전공 수업 때문에 이 책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 읽었다는 기억이 날 뿐, 이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찾아보면 책장 어딘가 있을텐데. 아니 고향집 책장에 꽂혀 있겠구나. 기억나는 건 뒤르껨이 자살을 개인의 행위가 아닌 사회적인 현상으로 해석했다는 것 뿐이다. 자살은 개인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자살 사망률 1위로 악명이 높다. 몇 년 전 자료이긴 하지만, 언론 기사를 보면 하루에 약 40명이 자살했다고 한다. 하루에 40명이라니. 매일 4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나라에 살고있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문제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자살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게끔 사회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많은 이들이 계속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실행중일지 모른다. 왜 사람들은 그런 선택을 할까? 나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고 전부이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없다면 세상도 없다. 나를 없앤다면 세상이 없어지고, 괴로움도, 슬픔도, 억울함도, 고통도 모두 다 사라지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 그 선택까지는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남은 사람들은? 남겨진 사람들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들이 느낄 감정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또 다른 선택이 가능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나는 용기가 없다는 것이다. 


자살을 부르는 노래


한때 MP3 플레이어에 '글루미 썬데이'만 담아 듣고 다녔던 적이 있다. 유명한 노래인만큼 무척 많은 가수의 버전이 있었다. 그중 마음에 드는 곡들로만 다운받아 무한 반복으로 들었다. 이 노래의 마성에 제대로 빠져 있었다. 미치도록 아름다운 노래라고 생각했다. 들으면 들을 수록 어떤 매력이 느껴졌다.


하루는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 노래만 듣기도 했다. 밥도 먹지 않고, 씻지도 않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지도 않고 그저 멍하니 이 노래만 듣고 듣고 또 들었다.



영화를 본 후 에리카 마로잔이 부른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제 다른 가수의 곡은 듣지 않고, 계속 에리카의 목소리로만 이 곡을 듣는다. 내가 본 영화는 독일어 버전이었다. 노래를 잠시 멈추고 "슈필 퓌어 미히(나를 위해 연주해줘요)"라고 말하는 대사가 참 좋았다. 헝가리어 버전으로 들으니 또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이 곡을 하루종일 듣는다고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내가 이 노래만을 반복해서 듣는다는 사실을 안 친구는 무척 걱정을 했다. 난 그저 이 노래가 좋을 뿐. 이걸 듣고 뭘 어쩌려는 의도는 없었다. 아까도 말했듯 난 용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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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8 1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09 0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09 0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0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커피소년 2016-10-09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힘든 시간 잘 버티셨는지요..

글을 읽고 느꼈습니다..

아.. 이분이 정말 그 누구보다 굴곡진 삶을 살았다는 것을요..

정치.. 사회... 이런 부분에서만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에 우울과 슬픔이 묻어나 있다는 것을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은빛 2016-10-10 14:23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김영성님.

아, 정말 부끄럽네요.
누구나 다 자신만의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을 끌어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저는 남들보다 조금 더 예민하고,
그래서 남들보다 더 유난히 감성적이고 바보같았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과거형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그런 것 같아요.

말씀 남겨주셔서 무척 고맙습니다!

커피소년 2016-10-11 11:09   좋아요 0 | URL
예전에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예민하고.. 감성적인 것.. 바보 같다고 하는 그러한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 아닐까 싶더군요..

저는 지금 그대로의 감은빛님의 모습.. 변함없이 그 모습 그대로 끝까지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은빛님이 올려주신 여러 글을 읽으면서 감은빛님이 아주 섬세하고 마음이 아주 곱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국의 남성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무심하고 무뚝뚝한 차가운 이미지를 떠올리거든요.

냉혈한이라고 하죠..

그런데 감은빛님의 글을 쭉 둘러보면... 섬세하고 마음이 아름다우신 분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섬세하고 마음이 곱다고 여리다고.. 또 부조리에 저항하지 않는 것도 아니지요... 약자를 지키기 위해서는 또 마음 굳세지는.. 그런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을 끌어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 고통과 슬픔 외로움... 혼자 오롯이 감당해내야겠지요..

그래서 그런지 삶이란 것이 더욱 고되고 쓸쓸한 것 같긴 하네요..ㅎㅎ



진심이 담긴 댓글 정말 감사드립니다..^^

 

폭우를 뚫고


어제 저녁 아이들과 임진각을 다녀왔다.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문득 비 내리는 강가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왔으면 좋겠다 싶었다. 처음엔 바다를 생각했다. 그러다 비 오는 날엔 강이 더 어울리겠다 싶었다. 그럼 어디? 예전에 출판사 다닐 때 파주에 있는 거래처를 오가며 임진각이 여기서 멀지 않겠구나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임진각을 한번도 가 본적이 없어 거기 가면 바로 강이 보일거라고 생각했다. 오후 늦게 집을 나설 때는 비가 그리 많이 오진 않았다. 사실 비도 오고 아이들도 나가는 걸 귀찮아해서 좀 고민을 했다. 게다가 연휴 한 가운데 끼인 날이라, 나눔카 업체에 놀고 있는 차가 거의 없었다. 집 근처에 새로 생긴 대여존이 많았고, 차도 많이 늘었길래, 쉽게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하철 역을 기준으로 두세정거장 거리에 10여 개의 대여존 중에 놀고 있는 차가 없었다. 그래서 조금 멀리 이동하더라도 차를 빌릴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귀찮아서 가지 말자 생각을 했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자고 마음 먹었는데, 누군가 예약을 취소했는지 차가 하나 나왔다. 얼른 예약부터 해놓고, 아이들을 준비시키고, 나도 세수하고 옷을 입었다.


비가 오니 아이들과 나도 모두 방수가 되는 잠바를 입고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아이들은 집을 나서면서 배가 고프다고, 햄버거가 먹고 싶다고 했고, 평소라면 사주지 않았을 테지만, 이번만은 아이들 기분을 고려해 사줬다. 햄버거가 나오는 동안 근처 카페에서 아이들이 버거랑 마실 스무디를 사고,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샀다. 확실히 아이들과 움직이면 시간이 더 걸린다. 이동시간까지 고려해 시간을 예약했건만, 예약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주차장에 도착했고, 넓은 주차장에서 차를 찾는데 시간이 또 걸렸다. 흘러가버린 시간이 아깝긴 했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오늘 내 목표는 비가 내리는 강을 보는 것. 그걸 위해 사소한 건 따지지 말자.


아이들이 안전벨트를 매고 버거와 스무디를 먹기 시작했다. 차가 흔들리고, 움직일 때 스무디 쏟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를 하고, 라디오를 켜고 운전을 시작했다. 이건 경차의 새 모델이던가? 처음 몰아보는 차종. 계기판도 낯설고 뭔가 모르는 게 잔뜩이다. 비가 내리고 흐린 날씨라 라이트를 켜고 운전해야 했는데, 핸들 왼쪽 레버를 아무리 돌려도 라이트가 켜지지 않더라. 요즘 차들은 외부 밝기에 따라 자동으로 라이트가 켜졌다가 꺼지던데, 이 차종도 그런 줄만 알고 그냥 운전했다. 가면서 아무리 봐도 라이트가 들어온 것 같지 않은데, 이상하다는 생각만 계속했다. 와이퍼의 조작도 뭔가 어색했고, 뒤쪽 와이퍼 조작 버튼도 찾질 못했다.


낯선 차 운전에 조금 익숙해지면서 나도 배가 고파 내 몫으로 산 햄버거를 꺼내 한 입 물었다. 작은 아이가 갑자기 "아빠 운전하면서 햄버거를 드시면 어떡해요? 사고 날지도 모르잖아요!" 라고 말한다.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을까? 안전교육 같은 걸 받을 때 그런 말을 들었던 걸까? "아빠는 앞에서 눈을 안 떼고 먹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라고 아이를 안심시켰지만, 그닥 안심한 눈초리는 아니었다. 예전에 출판사에서 출장 다닐 때에는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즉 한 시라도 일찍 돌아오고 싶어서) 밥도 식당에서 사먹지 않고, 김밥이나 햄버거 따위를 사서 차를 몰고 고속도로 위에서 먹으며 운전하곤 했다. 김밥이 한 입씩 먹으면서 운전하기 좋지만, 햄버거라고 뭐 그리 어려울 일은 없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차 천장으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도로를 달리는 기분이 제법 괜찮았다.


예전에 자주 운전을 해야했을 때에는 빗길 운전이 그렇게 싫었다. 비가 오면 차가 잘 미끄러지기도 하고, 앞뒤좌우가 잘 안 보여 시야가 매우 좁아진다. 컨디션이 썩 좋지 않은 날 빗길 운전을 해야 할 때면, 좁디 좁은 감옥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든다. 잘 보이지 않아서 원하는 대로 차선 변경도 못하고 무조건 앞으로만 가야하는 듯한 느낌. 어딘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폭우가 내릴 때 운전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첫 기억은 시민단체 활동가였던 시절,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대회가 있어서 선배와 후배 활동가를 태우고 갔을 때였다. 장소가 아마 군산이었던가? 아침 일찍 나섰는데, 그때 이미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울을 빠져나가 서해안고속도로에 들어선 후부터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하더니, 경기도 남쪽 어딘가에서 부터 완전 물폭탄 같은 폭우로 바뀌었다. 와이퍼를 최고 속도로 해놓아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고속도로에 있던 모든 차들이 비상등을 켜고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역시 앞 차의 비상등이 깜빡이는 걸 간신히 알아보고 천천히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폭우 때문에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얼마나 그렇게 달렸을까? 아주 조금 비가 덜 온다 싶을 때(그래도 여전히 폭우)부터 차들이 조금씩 속도를 더 냈다. 시속 30미만이다가 한 60 정도로 속도가 올라갔다. 그리고 서해대교를 지난 이후로는 시속 80~100가량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비는 여전히 내렸지만, 그 순간에 비하면 안 내리는 거나 마찬가지 같은 느낌이었다. 그 순간은 정말 악몽이었다. 와이퍼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내리는 비라니! 


두번째 기억은 출판사에 다닐 때, 파주에 있는 거래처를 가는 길이었다. 자유로를 타고 올라가는데,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국도에 접어든 이후로는 폭우로 바뀌었다. 차가 많지 않은 길이라 부담은 별로 없었지만, 자주 다니지 않는 길이라 헷갈려하는 곳에서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답답했다. 게다가 거래처 약속 시간 안에 가야했기 때문에 부담감이 컸다. 순간적으로 확 퍼부울 때는 와이퍼를 최고 속력으로 해놓아도 잘 안 보였지만, 그 순간은 짧았고, 이후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수준은 아니었다. 어딘가 교차로를 지나자 철길 교차로가 나타났다. 갑자기 그 폭우 속에서 노란 비옷을 입은 아저씨들이 빨간 안전봉을 들고 나타나 길을 막았다. 차단막이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땡땡땡땡 종이 울리고 멀리서부터 열차의 진동과 소리가 느껴졌다. 나는 비가 많이 오고 있었음에도 창문을 내리고 비를 맞으며 그 빗속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아저씨들을 보았다. 그냥 차단막이 내려오기만 해도 차들이 멈추지 않나? 저 폭우 속에 저렇게 뛰어나왔다가 또 들어가야 하나? 저 분들은 어디서 비를 피하고 몸을 녹이다가 다시 또 뛰어나올까?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다.


마지막 기억은 폭우는 아니고 짙은 안개 때문에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날이다. 어차피 폭우 때문에 힘든 건 앞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는 자동차 안에 갇혀서 눈먼 상태가 되는 건 생각하기도 싫을만큼 끔찍한 일이다. 안개도 마찬가지다. 잡지사에 있을 때였다. 잡지 편집위원이었던 선배가 늦은 나이에 장가를 가는데, 결혼식 장소가 전북 고창이라 잡지사 식구들을 태우고 운전해서 갔다. 선배는 시인이었고, 가끔 르뽀 글을 쓰는 작가였고, 형수가 될 분은 소설가였다. 그 쑥맥인 선배가 어떻게 형수를 만났을까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암튼 우린 결혼식 전날 내려가서 장어와 복분자주를 마시고, 선운사 근처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아침에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올라왔다. 갑자기 짙은 안개 때문에 앞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된 건 고창 시내에서 선운사 쪽으로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우리 차는 연식이 오래된 프라이드였는데, 안개등이 따로 없었다. 낡아 빠진 차라서 라이트도 그리 밝지 않았던 터라, 안개가 짙어지니 발 밑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지금 구름 위를 달리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 였다. 비상등을 켜고 속력을 시속 30 미만으로 완전히 줄이고, 천천히 나가야 했다. 난 답답하고 무서웠는데, 동행했던 여성 편집자는 그 안개가 낭만적으로 느껴졌나보다. 갑자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무슨 노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난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고, 그는 한껏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만 기억난다.


어제는 출발할 때는 비가 많이 오진 않았다. 파주를 가로질러 북으로 달리는 중에 몇 차례 빗줄기가 굵어졌다가 잦아들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빗길을 달려 강을 보기 위해 나섰던 것이니. 예전에 자주 운전하던 날엔 조금이라도 비가 오면 신경이 예민해져 무척 싫었는데, 지금 이렇게 빗길을 달리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게 느껴질 수도 있구나 싶어서 신기했다. 그리고 일부러 느긋하게 달렸다. 아이들을 태우고 있기도 했고, 별로 서두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차선을 바꿔갔을 정도로 앞차가 답답하게 달려도 그냥 뒤따라 갔다. 속도가 느릴 때, 신호에 걸렸을 때 햄버거를 다 먹어치우고, 커피를 마시며 느긋한 마음으로 빗소리를 즐기며 차를 몰았다.


해가 저물어 어두어질 무렵 임진각에 도착했다. 아이들은 막판에 잠들었기에, 도착했다고 깨우니 좀 짜증을 냈다. 어두워서 뭔가 잘 보이질 않았다. 게다가 비가 다시 거세지고 있었다. 주차장과 도로는 물이 잘 빠지지 않아 곳곳에 물이 고여 있었다. 아이들과 나는 모두 신발과 바지가 다 젖은 채로 강을 볼 수 있는 곳을 찾아 움직였다. 마침내 전망대를 찾아 올라갔는데, 바람이 엄청 심하게 불었고, 비는 다시 폭우가 되었다. 아이들은 춥다고 건물 안에 머물렀고, 혼자 전망대 겸 옥상에 올라 북녁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와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저 너머 임진강이 흐르는 곳이라 짐작되는 곳으로 시선을 주고 한참을 서 있었다. 바람 때문에 우산이 소용이 없어, 그냥 폭우를 다 맞고 서있었더니 온 몸이 다 젖어버렸다. 그래도 좋았다. 하늘은 어두웠고, 비는 쏟아졌고,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이 시공간이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비 내리는 강을 보고 싶다고 무작정 찾아온 것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덜덜 떨리는 몸을 추스려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작은 아이는 아빠가 한동안 내려오지 않아 걱정이 되었던지, 계단에서 내가 보이자마자 큰 소리를 아빠를 불렀다. 난 계단을 뛰어 내려가 작은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아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젖은 머리칼을 넘겨줬다. 아이들을 화장실에 들여보내고, 아빠가 입구 바로 앞까지 차를 가져올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폭우를 뚫고 달렸다. 다 젖어버린 바지가 몸에 붙어 잘 뛰어지지 않았다. 차에 시동을 켜고 앞으로 나가려는데, 전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어두웠기 때문에 라이트를 켜야 했는데, 난 아직 라이트 작동법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왼쪽 레버를 밀었다가 당겨보기를 반복했다. 당겼을 때 상향등이 켜졌다. 하지만 레버가 고정되지 않고, 손을 놓으면 다시 어두워졌다. 난 왼손으로 레버를 당겨 상향등을 켠 채로 운전해서 아이들을이 있는 전망대 입구로 갔다.


아이들을 태우고 임진각에서 나오면서 도저히 상향등 레버를 당긴 채로는 운전을 못 하겠어서, 라이트 켜는 법을 찾고 가리라 맘 먹었다. 실내등을 켜고 차근차근 하나씩 운전대를 살폈다. 뒷 유리에 성에가 끼어 보이지 않았기에 뒷 유리 열선을 켜는 법도 찾아야 했다. 뒷 유리 와이퍼 조작 버튼을 먼저 찾고, 열선 켜는 법도 찾았다. 이제 라이트만 찾으면 되는데, 왼쪽 옆에 뭔가 동그란 버튼이 있어서 돌려봤더니 드디어 라이트가 켜졌다. 이걸 못 찾아서 그렇게 헤맸다니! 어이가 없어서 헛 웃음이 나왔다.


돌아오는 길도 느긋했다. 차량이 많지 않은 길이라 천천히 달려도 문제는 없었다. 올때 잠들었던 아이들은 갈 때는 눈이 말똥말똥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으며 돌아오는 길도 재밌었다. 마침 롤링스톤즈 잡지가 선정한 90년대 최고의 노래 100곡을 소개하고 있었는데, 내가 한창 좋아했던 음악들, 자주 들었던 음악들이 나와서 좋았다. 어느 교차로에 차가 멈췄는데, 배철수 아저씨가 셰릴 크로의 'If it makes you happy'를 틀어줬다. 나도 모르게 볼륨을 올리고,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고개를 까딱이고 있었다. 셰릴 크로의 2집은 테이프가 늘어나도록 반복해서 들었다. 



이 곡도 좋지만, 'hard to make a stand'도 좋고, 월마트에서 산 총으로 서로를 죽이는 이들을 조심하라는 가사 때문에 월마트에서 음반 판매를 거부해, 결국 흥행에 참패하게 만든 곡 'love is goodthing'도 정말 좋다.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끝날 때쯤 우리도 차를 빌렸던 주차장 근처에 도착했다. 네비로 정확하게 그 주차장을 찾아 찍을 수 없어서 근처 골목에서 좀 헤맸다. 일방통행에서 거꾸로 들어갔다가 비켜주기도 했고, 길이 이상하게 꼬여 있어서 다시 큰 길로 나갔다가 다른 골목을 찾기도 했다. 간신히 주차장 주 출입구 앞에 도착했는데, 철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이거 어떻게 하지? 난 이제 차를 반납해야 하는데, 주차장이 잠겨 있으면 어떻게 들어가지? 관리하는 아저씨도 퇴근해서 보이지 않았다. 혹시 다른 뒷문이 있는데 내가 못 본 걸까? 차를 몰고 주차장 근처를 한 바퀴 돌았는데, 찾지 못했다. 반납 예정시간이 이제 거의 다가왔다. 30분 단위로 연장이 가능한데, 그러려면 돈을 또 더 내야 한다. 다급했다. 우산도 안 쓰고 내려서 관리실 근처를 돌아보는데, 누군가 주차장 안쪽에서 담배를 피우며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큰 소리로 물었다. 거기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는 그는 친절하게 뒤쪽에서 들어오는 골목 입구를 알려줬다. 빠르게 차를 몰아 그 골목으로 들어왔다. 차를 주차시키고, 아이들에게 짐을 챙겨 내리게 하고, 반납 버튼을 누르고 보니 딱 반납 예정시간이었다. 반납이 완료되었다는 문자는 1분 후에 왔다. 휴~ 가슴을 한번 쓸어내리고 아이들 손을 붙잡고 나왔다.


근처 마트에서 먹고 싶은 걸 잔뜩 하고, 와인도 한 병 사서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큰 아이가 갑자기 모 뷔페식당 이름을 보고 가고 싶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큰 아이의 말을 듣고도 잠시 망설였다. 비싼 가격 때문이기도 했고, 온 몸이 다 젖은 이 상태로 거길 가야 하나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아이에게 물었다. "맛있는 것, 먹고 싶은 것 사서 집에가서 씻고 편하게 먹을면 안될까? 아빠가 다 사줄게." 이렇게 옷도 신반도 다 젖은 찝찝한 상태로 먹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 물었는데, 아이는 그래도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 오늘은 원하는 대로 해주자 싶었다.


아이들은 신나서 이것저것 먹었다. 난 사실 그리 입맛이 땡기는 음식이 없었다. 회 종류를 비롯한 해산물은 거의 없었다. 말라버린 훈제연어가 유일했다. 할라피뇨가 들어간 매운 파스타와 치킨을 비롯한 몇 가지로 배를 채울 생각이었다. 아이들 물을 떠 주려고 구석으로 갔다가 와인통을 발견했다. 돈을 좀 더 내면 와인을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다고 써있었다. 직원에게 물었더니, 영수증 한 장을 더 발급하고, 내 팔목에 흰색 테이프를 감고, 와인잔을 가져다 주었다. 처음에 화이트와인을 조금 따라 마셨는데, 무척 달았다. 그 옆에 있는 레드와인도 달았다. 곧바로 후회했다. 이렇게 달기만 한 와인인 줄 알았으면 안 마실 걸 그랬다 싶었다.


달디 단 와인을 마시며 와인을 좋아하는 이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곧바로 답이 왔다. 달지 않고 드라이 한 와인이 있으니 그걸 마시라고 했다. 내가 찾지 못했다고 답을 했더니 통이 두 개라고, 하나는 달고, 하나는 드라이한 거라고 했다. 남은 와인을 한번에 마시고 다시 가보니 과연 그렇더라. 처음엔 보지 못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작은 글씨로 설명을 다 붙여 놓았더라. 멜롯 어쩌구 하는 드라이 한 맛의 와인을 잔 가득 따라와서 마셨다.


와인을 서너잔 쯤 마셨는데,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 간다는 방송이 나왔다. 나는 빠르게 잔을 비우고 또 와인을 가득 채워왔다. 이미 배가 불러 다른 안주는 못 먹겠고, 할라피뇨 두 세 조각과 올리브 서너조각만 담아왔다. 아이들은 이미 달기만 한 케익 조각이나 쿠키 종류를 먹고 있었다. 딱 문 닫는 시간까지 와인을 다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젖은 옷을 벗으며 빨래가 걱정이 되긴 했지만, 하루를 잘 보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언젠가 아이들이 임진각이란 단어를 듣거나 보면, 어제를 떠올리겠지. 햄버거와 스무디와 폭우와 바람과 추위 그리고 맛있었던 음식을 기억할 지 모른다. 아빠가 문득 비 내리는 강을 보고 싶어서 다녀왔다는 말은 혹시 기억할까? 어쩌면 다 잊어버리고 왜 아빠가 우릴 비 맞히고, 추위에 떨게 했을까 원망만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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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6-10-03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와 와인에 방점 총총 :)

감은빛 2016-10-08 16:37   좋아요 0 | URL
비와 와인. 참 잘 어울리는 느낌이예요. ^^
 

흰머리가 늘었다


요즘 부쩍 흰머리가 늘었나보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흰머리를 지적한다. 오래전부터 왼쪽 귀 위쪽에 흰머리가 있었다. 오른쪽에는 많지 않은데, 왼쪽은 자꾸 늘어났다. 재작년이었던가? 부쩍 늘어난 것이 눈에 띄더니, 작년에는 나도 놀랄만큼 늘었다.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다. 어차피 늙어가는 처지에 흰머리 좀 있다고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가보다. 후배들은 염색 좀 하라고, 늙은이처럼 그게 뭐냐고 말한다. 어제 오랜만에 마주친 사람은 나보고 염색을 했냐고 물었다. 급한 일이 있어 제대로 대꾸도 못하고 그냥 지나쳤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그 말이 좀 이상했다. 분명 흰머리를 보고 말을 했을텐데, 그 말은 왼쪽 귀 근처만 흰색으로 염색했냐고 묻는 말이었나? 멋 부리려고 일부러 그 부분만 흰색으로 염색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런데 그 정도로 내 흰머리가 멋있나? 아니 그냥 우연히 마주쳤는데,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상황에서 흰머리가 눈에 띄었는데, 아무 생각없이 염색했냐고 말이 나왔을지도 모르지. 별것 아닌 말 한 마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시비


며칠 전 토론회에서 만난 선배가 툭 말을 던졌다. "넌 여기 무슨 일로 왔냐?" 10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지만, 진짜 정이 안가는 사람이다. 속으로 '이 인간 또 시비네!'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동안 잊을만하면 꼭 한번씩 만나는 이런 인연은 대체 뭐지? 왜 이런 인간을 계속 마주치며 살아야 하는 거지? 왜 난 급이 안 맞아서 당신이랑 같은 자리에 있으면 안 되나? 나랑 같은 자리에 있어서 불쾌하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딱 대놓고 하던가? 무슨 일로 왔냐고? 넌 무슨 일로 왔어? 아우 진짜! 확 들이받아 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래 뭐가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아,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 자신이 너무 싫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받아쳤어야 했는데,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어색한 웃음만 지었던 나 자신이 싫은 거다. 바보같이 왜 웃고 있었던 걸까?


이 놈의 불치병


며칠 전 회의에 참석했는데, 낯선 여성이 나를 보고 반가워하며 인사를 했다. 너무 반갑다고, 여기 계시냐고 물었다. 난 당황했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며 일단 반갑다고 답을 하고, 이 여성을 어디서 만났던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입은 반갑다는 말을 내뱉었으나, 얼굴 표정과 말투는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마 내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는 긴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어디서 어떻게 만난 인연이었을까를 고민했다. 어딘가 회의 자리에서 마주쳤을 것 같은데, 그 반가워하는 말투를 보면 그냥 단순히 스쳐갔던 건 아니었겠지? 뭔가 나와 공감대가 있었던 걸까? 그런데 난 왜 기억을 하지 못할까?


회의 시간 내내 그가 발언할 때마다 유심히 들으며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했다. 그리고 긴 회의가 끝나갈 때 즈음 기억이 났다. 우리 동네 녹색당 총회에 참석한 분이었다. 그날 처음 나왔고, 이후로 녹색당 모임에 나온 적이 없으니 딱 한 번 만났었다. 올해 총회였다. 그 총회는 내게 여러모로 힘든 행사였다. 나는 창당하기 전부터 운영위원을 맡아 여러가지 일을 함께 했다. 창당 후 지역에서 당원모임을 결성할 때, 당연한 듯이 운영위원이 되었고 우리 지역 녹색당을 대표해 수많은 회의에 참석하고, 여러 행사에서 발언을 하고, 기자회견을 하고, 많은 일들을 해왔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나는 좀 많이 지쳐있었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하지만, 생계를 위한 활동이 따로 있는 입장에서 녹색당 활동은 제 2의 직업이나 마찬가지였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회의를 하고, 회의 결정사항을 실행하고, 연대활동을 해야 했다.


언젠가 당내에서 누군가와 갈등을 겪을 때, 그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 욕을 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내가 지역에서 독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사람이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지역을 대표하는 운영위원을 맡고 있는게 문제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제발 부탁이니 내가 운영위원을 사퇴하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도 하고 싶어서 하는게 아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라서, 내가 계속 해왔던 일이라서, 사람들이 내가 하길 바라기 때문에 해왔다. 작년 연말부터 올해 초 총회를 준비하면서 이번에는 반드시 맡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분명 당원들은 또 맡아주길 바랄 것이다. 달리 할 사람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아니면 누가 할 수 있냐고 말할 것이다. 그럼에도 거절해야 했다. 그 총회는 그런 자리였다. 그걸 설명하고 설득하는 일이 너무 어려웠다.


그는 아마 그래서 나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도 활동가였고, 딱 보기에도 경력이 많고 일을 잘 할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처음 나온 총회에서 아주 예리한 지적과 질문을 던졌다. 당원들은 그에게 운영위원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지만, 본인이 활동하고 있는 단체에서 일이 너무 많아 맡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회의 도중에 그 사실이 기억났다. 그 회의에서 나는 10분 동안 발표를 맡았는데, 준비한 내용을 설명하다보니 정해진 시간을 훌쩍 지나 거의 15분 가량을 떠들었다. 당시 총회에서도 나는 당원들에게 효과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시간을 지체했다. 아마 내가 진행한 세 번의 총회 중에 가장 비효율적으로 시간만 질질 끌었던 총회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아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저 사람은 정해진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구나 라고.


하늘과 땅


엇그제는 좋아하는 옷을 꺼내 입었다. 황토색 면바지는 색깔 때문이 아니라 내 몸에 꼭 맞고, 편해서 좋아한다. 2년 전쯤 후배가 샀다가 작아서 입지 못하는 옷이라고 해서 내가 입어봤더니, 나에게 꼭 맞았다. 하늘색 티셔츠는 색감이 너무 좋아서 아끼는 옷이다. 정장을 입지 않기 때문에 조금 격식을 갖춰야 하는 날에는 칼라가 있는 티셔츠를 입는 편인데, 이 옷의 칼라와 단추 디자인을 좋아한다. 하지만 한 사오년 동안 이 옷을 입지 못했다. 몸에 붙는 옷이라 배가 나오면 보기 싫기 때문이다. 어느날 여러 사람들과 야외에서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실 때 이 옷을 입고 있었는데, 고기를 잔뜩 먹고 배가 뽈록 나온 나를 보고 누군가 비웃었다. 아, 진짜 티셔츠 아래단이 뽈록 나온 배에 걸쳐 있는 모습이 끔찍하게 보기 싫었다. 그 후로 이 옷은 계속 옷장 안에만 있어야 했다.


작년에 운동을 열심히 해서 뱃살이 좀 없어졌다 싶었을 때, 이 옷을 꺼내 입어봤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가도 아랫배에 아직 남은 살이 만져지니, 그때 그 비웃음이 떠올랐다. 다시 옷을 벗어 옷장에 쳐박아두었다.


올해는 운동 보다 탄소화물을 줄이는 식사 덕분에 뱃살이 많이 없어졌다. 드디어 자신있게 이 옷을 꺼내 입을 수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입지 못하고 있던 옷이 꽤 많았다. 예전에 즐겨입었던 몸에 딱 붙는 티셔츠와 민소매 셔츠들. 그 중에서도 아끼는 옷은 밴드 블랙홀에게 받았던 티셔츠다. 그 옷은 받고 나서 몇 번 입어보지도 못했는데, 배가 나오기 시작해서 계속 옷장에서 잠자고 있었다. 가끔 옷을 찾다가 그 옷을 비롯해 입지 못하는 옷들이 보이면, 한숨이 나왔다. 올해는 자신있게 그런 옷들을 입고 다녔다.


암튼 엇그제 그렇게 좋아하는 하늘색 티셔츠를 입고 출근했다가 회의에 참석해서 사람들을 만났다. 한 젊은 여성 활동가가 내게 "땅과 하늘의 형상화하는 스타일로 맞추셨군요. 역시 자연을 사랑하는 분이세요."라고 했다. 아니 정확히 저 문장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런 의미였다. 순간 좀 당황해서 뭐라 반응을 해야할 지 몰랐다. 이건 분명 뭔가 놀리는 느낌인데,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 여성은 평소에도 나를 만나면 놀리듯 말을 거는 경우가 많은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몰라서 번번히 제대로 대응을 못했던 것 같다. 이런저런 얘길 주고 받다가 그가 생각보다 더 어리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한때 일했던 단체에 그도 일했었는데, 나보다 10년이나 후배였다. 교육기수로 몇 기냐고 물었다가 앞자리가 예상치 못한 숫자가 나와서, 내가 이렇게 늙었구나 싶었다.


지긋지긋하게 싫다! 내가!


어제 중요한 설명회를 마치고 후련한 기분으로 뒤풀이를 갔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백남기 어르신 부검 영장이 발부되었단다. 다들 화가 나 있었고, 당장이라도 서울대 장례식장으로 달려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황당하고 참담한 심정이었다. 설명회 준비를 하느라 이틀동안 밤을 샜기 때문에 많이 피곤했고, 그래서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술이 많이 들어갔다. 다행히 조건부 영장이라 당장 집행을 하진 않을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그 조건부라는 것이 무척 치사하고 더러운 짓이라는 것에 대해 토론했다. 유가족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부검을 하겠다고 했고, 부검에 유가족이 들어와 참관하라고 했단다. 부검하는 장면을 모두 녹화할 거라고 했단다. 애초에 부검을 해야할 상황이 아님에도 말도 안되는 영장을 발부하면서, 유가족이 원하는 이라는 단서를 달아버림으로써 이 부검을 유가족이 원하는 것처럼 아니 원해야 하는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그럼 유가족이 끝까지 원하지 않는다면? 그럼 뭔가 캥기는 것이 있어서 응하지 않는 거라고 억지를 부리며 강제 집행을 하겠지. 


물대포에 맞고 쓰러져 317일 동안 의식 없이 병원에 누워 계시던 분이 돌아가셨는데, 부검을 한다고? 이렇게 사인이 명확한데 왜 부검을 해야하나? 그 인간들은 머리가 없나? 지능이라는 것이 없나? 그렇게 멍청한 인간이 어떻게 판사가 되었나?


일부 사람들이 서울대병원에 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나는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도 소주 한 병을 들이부었다. 그래. 마셨다가 아니라 들이부었다가 맞는 표현이다. 그리고 기절하듯 쓰러져 잠들었다.


아침에 해야할 중요한 일 두개를 놓쳤다. 서너개쯤 맞춰놓은 알람도 나를 깨우지 못했다. 부재중 전화가 10통이 찍혀있었다. 부랴부랴 씻고 집을 나섰는데, 도무지 술이 깨지 않았다. 시청에서 협약을 맺고 도장을 찍는데, 공무원에게 내가 아직 술이 덜 깼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공무원이 내게 도장을 조금 삐뚤게 찍었다고 한 소리 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왜 이러고 살고 있나? 늘 뭔가에 쫓기듯 살고 있는 내가 싫었다. 늘 뭐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늘 술에 쩔어 살고 있는 내가 싫었다. 지긋지긋하게 싫다! 내가!


어제가 마감이었던 기사 하나를 오늘로 미뤄두었다. 이제 그 기사를 써야한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아직 술이 덜 깬 머리를 굴리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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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9 16: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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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9 2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냥 그런 이야기


언제였던가, 아직 한참 더웠던 어느 날 동네 합창단 형들과 술을 마셨다. 형들은 동네 어느 허름한 라이브카페로 날 데려갔다. 그 자리엔 합창단에 아직 들어가지 않은 사람이 둘이었다. 나와 또 한 사람. 그는 노래방에 가면 밤새 마이크를 놓지 않는 사람, 노래를 제법 잘 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누구나 인정할만큼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었다. 형들은 그 전부터 우리 둘에게 합창단에 들어올 것을 권했다. 난 우선 노래를 그리 잘 하지 못하고, 합창을 연습하는데 투자할 시간이 없었으며, 연령대가 높은 그 합창단에 들어가 막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나보다 어린 30대 남성과 여성이 있지만, 불과 몇 달 전만해도 그렇지 않았다.


암튼 형들은 라이브 카페에서 우리 둘의 노래 실력을 시험해보고, 합격하면 들어오라고 했다. 그게 시험이던 아니던, 분위기에 취해 우린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멋지게 잘하는 그는 김광석의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그리고 합창단 사람들도 노래를 불렀다. 유일하게 나보다 어린 30대 친구는 이적의 <하늘을 달리다>를 불렀던가? 엄청난 가창력이었다. 남자가 들어도 반할 것 같은 목소리에 고음도 어마어마했다. 형들도 좋은 노래들을 잔뜩 불렀다. 시간이 많이 지나, 이젠 그게 어떤 노래들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도 분위기에 못 이겨 노래를 불렀다. 뭘 불러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18번이라 부를 만큼, 노래방을 갈 때마다 부르는 곡이 두세곡 가량 있는데, 왠지 그날 따라 자신이 없었다. 다들 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이니, 나도 잘 부르고 싶었다. 그리고 남들처럼 돋보이는 곡을 부르고 싶었다. 그런데 딱 이거다 싶은 노래가 없었다. 내가 잘 부를 수 있으면서, 남들이 듣기에 좋은 곡.


빨리 곡을 고르라고 독촉이 올 무렵, 오래전 가끔 불렀던 곡, 이 분위기를 이어가면서도 나쁘지 않게 부를 자신이 있는 곡이 떠올랐다. 이승환의 <그냥 그런 이야기>였다.




카스트라토? 카운터테너?


우리 팀이 한창 무대를 독점하고 난 후, 아저씨들이 몇 명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 뒤를 이어 무대를 장악했다. 드럼과 기타와 베이스를 연주하면서,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그 중 한 아저씨가 생글생글 웃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짧은 스포츠 머리에 허름한 청바지를 입었다. 이건 편견일지 모르지만 어디 막노동이라도 하다가 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야말로 깜짝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는 가성으로 블론디의 <마리아>를 불렀는데, 그 깨끗한 고음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어떻게 저 아저씨가 저런 미성의 고음을 낼 수 있을까? 게다가 그는 전혀 힘을 들이지 않고, 아주 쉽게 고음을 냈다. 마치 장난기 넘치는 표정인 듯 생글생글 웃으며 가성으로 노래를 부르는 그를 보며 우린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성으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 중 최고는 조관우 인 줄만 알았다.




우린 모두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노래가 끝났을 때, 노래를 들었던 모든 이들은 기립 박수를 쳤다. 그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앵콜곡을 불렀다. 유감스럽게도 다음 곡이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여전히 가성으로 높은 음역대의 여성 가수 노래를 불렀다. 두번째 곡을 들으면서 하나 깨달았던 건, 그가 맑고 깨끗한 가성으로 고음을 쉽게 올리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고, 음을 길게 지속하지는 못하더라는 거였다.


한편 나는 그날 이 노래를 들을 때까지만해도, 이 곡을 [미녀는 괴로워]에서 김아중이 부른 곡으로만 알고 있었다. 즉 블론디의 원곡을 몰랐다. 나중에 김아중의 곡과 블론디의 원곡을 찾아 들으니, 그 아저씨의 노래까지 셋 다 각각의 매력이 있다고 느꼈다. 물론 그래도 가장 좋은 건 블론디의 원곡인 것 같다.


시간이 조금 지나 다시 우리 팀이 무대를 장악했다. 이번엔 모두 팝송을 불렀다. 대부분 올드팝 위주였다. 난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이클 런스 투 락의 <25미니츠>를 골랐지만, 곡을 찾을 수 없어 부르지 못했다. 대학시절 여자 후배를 앉혀두고 기타를 튕기며 불렀던 곡이었지만, 그리고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다시 불렀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언젠가 이 노래로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엔 자주 들었던 팝송 가사를 모티브로 단편소설을 써보는 시도를 종종 했다. 테이크 댓의 <백 포 굿>이라던가, 컬러 미 배드의 <와일드 플라워>도 그랬다. 나중에 가장 소설로 옮겨 보고 싶은 노래는 로렌 크리스티의 <바넷사스 파더>였다. 다른 곡은 몰라도 이 노래는 언젠가 꼭 시도해 보고 싶다.



암튼 그날 내가 불렀던 <그냥 그런 이야기>는 합격점을 받았다. 합창단에 꼭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난 그냥 웃고 말았다. 솔직히 합창이라는 것이 들으면 아름답지만, 내가 그 속에서 노래를 부르기 위해 오랜 시간 연습을 이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생각 났던 건, 잠시 몸 담았던 노래패에서 노래를 배우며 힘들었던 기억이었다. 발음이 좋지 않다고, 발성이 좋지 않다고, 너무 기교를 섞었다며, 음을 끝까지 제대로 내라며, 계속 선배들에게 혼나던 기억 밖에 없었다. 단 한 번 올랐던 무대에서 첫 음을 놓치는 큰 실수를 저질렀고, 그 실수가 계속 남아 그 다음 곡도, 또 그 다음 곡도 계속 실수를 연발했던 최악의 기억까지 떠올랐다.


비록 합창단에 들어갈 생각은 없지만, 어느새 친해진 형들과 맘 편히 술을 마시는 일은 즐겁다. 또 언젠가 그 허름한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듣고 또 부르며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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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27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승환 1집 수록곡 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텅빈 마음`입니다. 진짜 서글프거나 가슴이 허한 느낌이 드는 날에 이 노래를 들으면 울컥합니다. ㅠㅠ

감은빛 2016-09-27 13:18   좋아요 0 | URL
<텅빈 마음> 참 좋은 노래죠.
그 노래도 오래전에 기타 치면서 자주 불렀던 곡이예요.

이승환 1집에서 <가을 흔적>과 <눈물로 시를 써도>를 참 좋아했구요.
<좋은 날>도 자주 불렀던 곡이예요.
그 특유의 꺾기 창법을 흉내내면서 불렀던 기억이 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