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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지음, 변광배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평점 :
글쓰기 책을 읽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책을 읽는 즐거움과 글을 쓰는 즐거움은 모두 사고의 사정인 동시에 생각의 흐름을 문자로 표현하는 글쓰기와 사고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생각의 흐름을 표현하는 것이 글쓰기이지만, 글쓰기는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와 달리 마지막까지 사고의 흐름을 짐작할 수 없다. 글을 쓰는 동안에 내면에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쓰기의 과정은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 사고의 흐름이 달라질 뿐 아니라 자신의 경험에 의한 글쓰기 사유는 글을 쓰는 이들에 따라서 모두 다르게 표현되어 질 수 있다. 20세기 후반 가장 훌륭한 프랑스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인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로 남겨진 이 책은 글쓰기를 완성하는 삶에 대한 강의다.
그의 강의를 들은 청중들은 롤랑바르트의 강의를 듣고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는 당신의 강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단지 사라졌던 영혼이 우리 안으로 다시 돌아왔을 뿐입니다.” 라고
사라졌던 영혼이 돌아올 정도의 강의라니 이보다 더한 극찬이 있을까.
롤랑바르트는 자신의 ‘글쓰기’ 강의를 통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글쓰기’는 변화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내면안에 중요한 변화 , 삶의 중간에서 발생한 동요에 어떤 내용을 부여하면서 시작되는 변화의 시작이 글쓰기의 재료라는 것이다. 지성의 욕망으로서 꿈꾸게 되는 환상이 글쓰기 시작의 신호다.
글쓰기의 환상은 글쓰기의 안내자 역할을 합니다. 입문 안내자로서의 환상이지요.
환상이 글쓰기의 재료가 되고 자신의 욕망하는 힘 속에서 표현하는 것, 소설의 준비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강의는 글쓰기의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욕망을 표현하기에 가장 쉬운 방법은 메모하는 것이다. 현재의 삶을 제재 삼아 소설을 쓰고 싶다면 메모하기(notation)의 실천이 중요하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메모에서 소설로 이행하는 과정 즉, 텍스트 연결하기이다. 바르트는 이 과정을 하이쿠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가 하이쿠를 예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집요한 욕망, 확실한 매력, 하이쿠와 더불어 나는 글쓰기의 최고선 안에 있습니다. 또한 세계의 최고선 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글쓰기의 수수께끼, 즉 글쓰기의 집요한 생명, 가능한 글쓰기 의지를 세계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글쓰기는 세계로부터 분리되지만, 많은 글쓰기는 우리를 세계로 이끈다.”
하이쿠란 붙잡으려고 하지 않는 벽 위의 가벼운 긁힌 상처입니다. 하이쿠에서 나는 아무것도 붙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감각적인 굽이들이 있고, 현실계의 섬광에 대한 행복한 동의, 감정적 굽이들에 대한 동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중함입니다. 하이쿠 작가, 하이쿠 인간이란 철저하지 못한, 관용적인, 어쩌면 노련한 불자입니다. 도교와 불교의 혼합인 것이죠.
하이쿠의 짧고 단편적이면서도 가장 전형적인 메모하기의 형식으로 글쓰기의 과정이 소개되고 하이쿠가 지닌 리듬, 활자의 배치가 문장에서 갖는 의미, 감각적인 空(공) 개념의 무위, 시간의 개별화, 날씨의 언어, 개별화, 뉘앙스, 우연성, 파토스, 정동, 공존재에서 바르트는 하이쿠의 '그것은 아무것도 맞춰지지 않습니다.' 라는 '정동의 진리'를 포착한다. 현재의 삶에서 찾은 재료의 메모들을 분할로서 남기고 그 분할 된 글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에 의해 글쓰기의 완성을 가져온다.
'우리로서는 최소한 올해에는 독립된 메모하기, 하이쿠에서 그 전형적인 형식을 볼 수 있는 짧은 형식을 볼 수 있는 짧은 형식에 머물고자 합니다. 메모하기의 단위는 어떤 차원에 속할까요? 달리 말해 메모 가능한 것에 대해 어떤 정당화가 가능할까요?
2편은 “미로의 은유”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였지만 교통사고로 강의를 하지 못한 채 바르트가 세상을 떠났다. 책에 실린 것은 강의를 하기 위한 요약된 텍스트이다.
마지막으로 이공과대학에서의 강연이 실려 있는데 글쓰기의 본론부분에 해당하는 장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글을 읽는 것에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을 느낀다. 거기에서 조금 나아가 그 감정을 글쓰기로 연장시키기 위해서 저자는 감정의 ‘강도’에 차이를 작동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텍스트를 읽는 기쁨과 글쓰기의 생산적 기쁨은 또 다른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그것을 '욕망의 전파’라고 부른다. 텍스트를 읽고 텍스트에 대한 강렬한 욕망은 주체에 따라 분산되며 다른 책들을 만들어내는 호소와 기회를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글쓰기의 희망이 태어난다. 글쓰기에서 찾을 수 있는 삶의 가치는 무한대이다. 글쓰기에 대한 철학자적 고찰이 담겨 있어 밀도 높은 작품이다. 프루스트와 라캉, 하이쿠에서 니체까지 굉장히 방대한 분량임에도 작품마다 주석을 달아 세세한 설명까지 달아 놓은 번역자의 노고가 느껴지는 책이다. (이 정도의 두께에 오타를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로 ^^)
현재를 메모하면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이 현재가 당신 위에, 당신아래에 떨어짐에 따라서 말입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접힌 부분 펼치기 ▼ (책내용 발췌
“각자에게 너무 오랫동안 사라졌던 영혼을 다시 발견하기 위한 긴 작업과 그 영혼의 귀환을 개시하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변화가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삶의 중간에서 발생한 동요에 어떤 내용을 부여하는 것, 즉 어떤 관점에서 삶프로그램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글을 쓰는 사람, 글쓰기를 선택한 사람, 다시 말해 글쓰기의 쾌락, 글쓰기의 행복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글쓰기의 발견 말고는 다른 새로운 삶이 없을 것입니다. 분명 내용, 강령, 이론, 철학, 방법, 신앙 등을 바꾸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는 것은 평범한 일입니다. 숨을 쉬는 것처럼 말이죠. 열중하고, 흥분을 진정시키고, 다시 열중하는 것, 그것은 충동 그 자체입니다. 지성이 욕망한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글을 썼던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의 장 역시 글쓰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글쓰기를 실천하는 것이죠. 새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다름과 같은 것뿐입니다. 글쓰기를 실천함으로써 과거의 지적 실천과 결별하는 것, 글쓰기가 과거 행동의 관리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주체는 이 글쓰기를 스스로 관리하도록 또 그것을 반복하면서 자기 작품을 잘 관리하도록 사회적 압력을 받습니다. 단절해야 하는 것, 그것은 정확히 이와 같은 단조로움입니다,
“한 인간의 삶에서-그러므로 모든 인간의 삶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는 순간이 있다. 책이 쓰이고, 우주가 조용해지고, 존재들이 휴식을 취하는 그런 순간 말이다. 남은 일이라고는 그 순간을 알리는 일뿐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보충되는 말 탓에 균형이 깨질까 봐- 그런데 어디에서 이 말을 하기 위한 힘을 발견할 수 있는가? 또한 이 말을 위한 자리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 사람들은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러면 그들의 임무는 미완성으로 남는다. 그들은 내가 방금 쓴 것을 반복할 따름이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그것조차도 쓰지 않는다.
아주 낡은 단어 두 개가 뇌리를 스쳤습니다. 문학에 입문하자, 글쓰기에 입문하자였습니다. 마치 지금가지 내가 전혀 글을 쓰지 않은 것처럼 말이지요. 그것만 하자. 그래서 우선 글쓰기의 삶을 단일화하기 위해 콜레주 드 프랑스를 떠나리고 갑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하는 것, 실제로 이것은 벌써 글쓰기의 재로 자체입니다. 따라서 문학작품들만이 이 글쓰기-의지에 대해 증언해 줍니다,
나는 오랫동안 글쓰기-의지 그 자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쓰다는 자동사니까요. 지금은 이 점에 대해 옛날만큼 확신하지 못합니다. 분명 글쓰기-의지=뭔가를 쓰고자 원하는 것→글쓰기-의지 =대상입니다. 다영한 글쓰기의 환상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하는 힘 속에서 표현하는 것, 그러니까 이것을 성적 환상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적 환상은 한 명의 주체와 전형적인 대상이 함께하는 하나의 시나리오, 쾌락을 낳는 결합입니다. 결국 글쓰기의 환상은 하나의 문학적 대상을 생산해 내는 나, 즉 그 대상을 쓰는 사람 또는 그보다는 오히려 그 대상을 끝마치려는 지점에 와 있는 사람입니다.
글쓰기의 환상은 글쓰기의 안내자 역할을 합니다. 입문 안내자로서의 환상이지요.
소설은 세계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소설은 세계를 혼합하고 또 포옹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에는 너그러움이 있고,쏟아 붓기가 있습니다. 이 쏟아 붓기는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개되었기 때문입니다.
문학이란 항상 삶과 같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으로 말이지요. 나의 문제는 결국 내가 내 과거의 삶에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나의 과거 삶은 안개 속에 있다는 것, 즉 강도가 약하다는 것입니다. 강도가 높은 것은 현재의 삶입니다. 글쓰기 욕망과 구조적으로 혼합된 현재의 삶 말입니다. 따라서 소설의 ‘준비’는 현재의 삶과 평행인 텍스트 , ‘동시대적’인 삶, 공존하는 삶에 대한 텍스트의 포착과 관련이 있습니다.
현재를 메모하면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이 현재가 당신 위에, 당신아래에 떨어짐에 따라서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메모하기(notation),'메모‘의 실천, 노타시오의 문제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메모에서 어떻게 소설로 넘어가느냐의 문제입니다.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미학적 표현 방식으로 존재를 향유할 것인가. 또는 윤리적 표현 방식으로 존재를 실현할 것인가. 하지만 내가 보이게 거기에는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에 따른 실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는 쇠렌 키르케고르의 머릿속에만 있었던 문제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윤리적이고 겸손한 경험을 통해서만 존재의 미학적 주이상스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글쓰기를 시작한 순간부터 글쓰기와 이상 자아 사이에는 재가동의 역학, ‘따라잡기’ 도는 ‘가치 올리기’의 역학이 정립됩니다. 이 역학은 항상 글을 쓰게 하고, 항상 멀리, 항상 앞으로 나아가면서 글을 쓰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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