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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배꼽, 그리스 -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ㅣ 박경철 그리스 기행 1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최근에 ‘르네상스 미술’을 읽으면서 르네상스가 가지고 있던 본연의 의미가 그리스 로마 문화로의 회귀라는 사실에 신선한 충격을 느꼈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알고 있던 인문학이 그리스 문학을 뜻한다는 것도 처음 안 사실이다. 인문학은 그리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 그리스가 품고 있는 문화유산들은 인문의 보고(寶庫)이다. 인문의 보고로서 그리스를 만나는 긴 여정이 바로 이 책이다. ‘시골의사’ 박경철이 지도 하나 달랑 들고 찾아간 곳 그리스에서 '인문탐험'이라는 대장정의 서막을 올린다.
이 책은 저자 박경철이 젊은 날,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첫 만남에서 시작된 문학의 열병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나라까지 동경하게 되고 그 동경이 꿈으로 실현된 기록과도 같다. 문학과 함께 그리스를 여행하는 꿈을 실현하는 모습은 저자가 누비는 여행지 곳곳에서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목소리를 듣는 형식으로 나타나는데 마치 예술과 문학이 잘 접목된 환상적인 패키지여행을 하는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인간과 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평생 자유를 찾기 위해 투쟁해왔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인간 본연의 가치를 담고 있는 그리스라는 매혹의 나라는 서로 너무도 닮아 있었다.
한때 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몹시 혐오한 적이 있다. 제우스를 여자만 보면 환장하고 덤벼대는 발정 난 수캐처럼 생각했고, 로맨스를 축으로 저주와 증오와 복수가 판을 치는 신화를 보며 무척이나 황당해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었던 것은 문화나 예술에 언제나 등장하는 신화였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리스 로마 신화를 모르면서 미술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이제와 다시 생각해보니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는 색다름이 있다. 바로 그리스 로마 신화가 욕망의 결정체라는 것. 인간이 욕망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보이지 않던 그리스인들의 특성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저자 박경철은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이런 그리스인들의 특성에 대해서 ‘안티시쥐지’ 라는 표현을 하는데 이 단어에는 물과 불처럼 서로 다른 극성을 지닌 이질적 특성들이 격렬하게 투쟁하고 있다는 함의가 있다.
그리스에는 지중해의 태양 같은 뜨거운 격정과 말라비틀어진 마른 풀 같은 무기력이 공존하고, 처음 만난 여행자를 집 안에 들여 재워주는 인류애적인 친절과 백주대낮에 불법체류자를 둘러싸고 돌을 던지는 야만이 공존한다.
그리스인들의 이러한 특성은 그리스를 여행하는 저자의 감정을 통해 그대로 전달된다.오랜 풍상을 겪으며 자리를 지켜온 고대 유적지에서 읽혀내는 그리스의 역사 또한 이런 이중성을 지닌다. 문명과 예술에서조차도 인간과 신의 조화로 완벽한 美(미)를 추구하려 했던 그리스인들의 특성은 그대로 문화로 뿌려져 싹을 틔웠다. 고대 코린토스의 영광 위에 세워진 로마인들의 시장과 페이레네 샘에 얽혀있는 전설. 비극적 드라마와 찬란했던 영광의 잔해가 남겨져 있는 제우스 신전. 완벽한 조형미를 자랑하는 헬레니즘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헤르메스상의 신화와 본질을 꿰뚫는 문학의 깊이는 여행이 가진 참 뜻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진정한 여행이란 이렇듯 땅이 전해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삶의 본질을 꿰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배꼽, 그리스》는 그리스라는 땅이 알려주는 소리를 그대로 담기 위해 고민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진리보다 더 진실한 것이 무어라 생각하나? 그것은 바로 전설이라네. 전설은 덧없는 진실에 영원한 의미를 부여하지.”
나는 가끔 그리스인들이 아름다움에 집착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편견은 헬레네라는 여인으로 인해 심어진 것 같다. 파리스와 사랑에 빠져 타국으로 도망한 뒤, 전쟁을 통해 다시 되찾은 여인 헬레나를 대하는 그리스인들의 자세에서 느꼈던 것은 그들에게 아름다움(美)이란 모든 것을 초월하는 ‘최고의 선善’이 아닐까하는 생각에서이다. 1권은 이렇게 코린토스를 시작으로 올림피아, 미케네, 스파르타, 아테네가 있는 아티카까지의 여정을 담고 있다. 이 여정이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것은 신화가 살아 숨 쉬는 유적지라는 사실이다. 헬레나와 파리스가 묵었던 숙박 지나 헬레나와 파리스가 떠날 배를 묶었던 쇠막대가 실존하는 곳이 바로 그리스이다.
코린토스는 다양성은 있었지만 그 내용이 문란하여 창조적 긴장이 발아하지 못했고, 스파르타는 진중했으나 획일성이라는 척박한 토양을 취했기에 문명의 씨앗이 잉태될 수 없었다. 더구나 스파르타인 들은 자신들이 정복하거나 이웃한 이들과 어울려 문화의 이종교배를 이루기보다는, 이들을 억압하고 순혈주의를 강조함으로써 문화의 동종교배에만 만족하여 더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스파르타의 오늘은 과거 잔혹한 군국주의가 배태한 초라한 결과에 다름 아니다.
시골의사에서 인문탐험가로 과감한 변신을 시도한 저자 박경철의 그리스 여행기는 이 책이 끝이 아니다. 각각의 여행은 제1부 펠로폰네소스 편 세 권, 제2부 아티카 편 네 권, 제3부 테살로니키 편 한 권, 제4부 마그나 그라이키아 편 두 권 등 모두 열 권이라는 대장정의 길이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과거를 통해 현재의 삶을 최선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 문명보다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국가부도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한 현재의 그리스가 둔중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차가운 지성과 따뜻한 감성이라는 만찬에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철학적 사유를 에피타이저로 곁들여 낸 아주 독특하고도 스페셜한 여행기이다. ^^
*책에서 건진 책 《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 《그리스 순례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