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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며칠 전부터 집에 텔레비젼이 생겼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물론 아이들이다.문제는 아이들이 텔레비젼을 보면서 무언가를 자꾸 사자고 조른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텔레비젼에서 소개하는 광고를 보며 무조건적인 신뢰를 가진다. 물론 미남미녀들만 등장하며 이쁘고 멋진 모습으로 소개하는 상품소개는 아이들에게 제품의 신뢰를 주기에는 충분하다. 문제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달라고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주어도 아이들은 맑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왜? 라고 순진한 얼굴로 되묻는다. 아이들과  한참을 소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나 역시도 쓸데없는 소비를 많이 하고 있는 과잉소비자였다. 

 

 

 

 
1,소비자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은 ..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끊임없이 소비해야 돌아가는 사회이다. 한마디로 소비자사회. 소비의,소비를 위한, 소비에 의한 사회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만들어지는 상품들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소비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상품들이다. 실제로 없어도 일상에 불편함은 없는 상품들이다. 소비를 목적으로 만든 상품은 강한 유혹으로 외관이 아름다워야 하며, 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야한다. 본질은 같음에도 말이다. 가만히 멈춰 있을 수 없고 오랫동안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없고 모든 것들이 계속해서 변해야 한다. 우리들이 좇으려고 안달하는 패션들과 우리의 주목을 받는 대상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 또한 우리가 꿈꾸는 것들과 무서워하는 것들, 우리가 욕망하는 것들과 몹시 싫어하는 것들, 심지어 희망을 품는 이유와 염려하는 이유조차도 계속해서 변화한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래야만 하는 지금의 이 시대를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라는 표현을 한다.

 

'유동하는 근대세계'는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저자 바우만의 독창적인 개념으로 , 기존 근대사회의 견고한 작동 원리였던 구조,제도, 풍속,도덕이 해체되면서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국면을 일컫는 용어다. 바우만은 인류가 고체처럼 견고한 사회를 지나 '유동하는 근대'를 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자가 예측 가능한 사회였고, 공동체가 존속했던 시대였다면, 후자는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보호막이 모두 사라져버린 시대이다. 바우만에게 '유동성'은 후기 근대의 불확실한 삶을 가리키는 것이자, 동시에 공포와 결부되는 개념이다. 바우만은 이처럼 근대를 '견고한 근대'와 '유동하는 근대'로 나누고 견고성에 유동성을 대비시킨다. 바우만은 유동성이라는 개념용어를 현대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데 적용했다. 우리 시대 세계의 질서와 제도가 고체성을 잃어버리고 끊임없이 유동한다는 것이 바우만의 생각이다.

 

2, 나는 보여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소비자사회는 이렇게 보여지는 것,모든 것이 전시의 목적을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의 판단기준은 미와 추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보여지는 것이 이제는 상품이 아닌 인간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사회를 '나는 보여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인간의 존재를 대변하게 된다고 한다. 소비자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웹서핑은 점차 확대되어 인간 상호간의 의사소통까지 장악하게 되었고 이제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사귀는 만남이 아니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접촉하게 되었다.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이런 것들로 의사 소통의 기회는 더욱 많아졌지만 이런 온라인으로의 의사소통은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아닌 피상적인 대화속의 피상적인 만남을 부추긴다. 오로지 보여지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온라인의 만남은 사람과 사람사이에 가지는 어떤 친밀함이나 심원함, 영속성에 상처를 주고 있다. 

 

"어째서 의사소통 기술이 개선을 거쳐 계속해서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동안 정작 다른 형태의 의사소통, 다시말해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을 이어주는 진정한 의사소통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려 이처럼 여전히 서로 엇갈리는 혼란 속에 빠져 있어야 하는가. 더구나 은폐되어 있는 측면뿐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측면에 있어서도 분명 정직하지 못하며 실상 참다운 의사소통의 환상에 불과한 그런 광장(인터넷광장)을 지니게 되었다고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말이다." -주제 사라마구-

 

주제 사라마구는 그의 소설에서 아무리 의사소통 기술이 계속해서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지속될 수 밖에 없는 인간 고유의 특성-진정한 미궁을 통해서 서로 대면하게 될 때의 당혹감-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며 가지는 독특한 특성들은 온라인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3,김씨표류기가 보여주는 잉여사회

영화 <김씨표류기>를 보면 소비자사회에서 버려진 불량소비자 남여 두 김씨가 나온다. 은둔형 외톨이의 여자는 오로지 온라인에서만 여왕대접을 받는다. 이 가상의 공간에서 아름답고 행복하며 완벽한 여자가 되지만, 현실에서는 부모에게 의존해 사는 은둔형 외톨이일 뿐이다. 미와 추의 기준으로 보면 소비자사회에서 버려진 추의 여자이다. 끊임없이 성형수술을 해야하고 온 몸을 아름답게 꾸며야하는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로서의 삶으로 실제로 그녀는  얼굴에 흉터가 있는 불량소비자일 뿐이다. 신용불량자인 남자가 한강에서 투신자살을 한 후 강물에 떠밀려 표류하게 된 곳은 밤섬이라는 외딴섬이다. 이 밤섬은 도시의 외딴 섬으로 도시의 쓰레기가 밀려와 도착하는 잉여의 공간이다. 김씨가 떠밀려온 것처럼..도시의 모든 쓰레기가 강물로 떠내려와 도착한다. 이 밤섬은 그렇게 쓰레기 즉 잉여의 공간이다.  현실이 아닌 가상의 공간에 살아가며 은둔형 외톨이로 살아가고 있는 여자와 잉여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한 남자. 이들은 모두 바우만이 말한 도시에서의 잉여적 삶의 형태 -불합격품,불량품,폐기물,찌꺼기- 이다. 그러나 이들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쓰레기의 재사용이다. 쓰레기는 다시 쓸수 없는 버려진 물건이다. 잉여의 삶인 두 주인공들에게 희망이란 쓰레기를 다시 재사용함으로써 보여주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세계를 구축'하는 사용자로서의 '독립된 면모'를 발휘할 때 잉여적 삶에 희망이 비춰진다는 메세지와 함께 두 주인공들의 삶은  비극이 아닌 희망으로 막을 내린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은 이 책의 저자 바우만이 명명한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운 편지와 같은 맥락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4, 집단적인 불확실성과 개인적인 불확실성

폴란드의 노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유동하는 근대에 띄운 44통의 편지는 노학자다운 삶의 혜안과 번뜩이는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사회학이자 철학이 숨쉬고 있다. 가장 먼저 온라인이 장악하게 된 사회에서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무분별한 정보에 휩쓸리게 되면서 거짓말과 환영,쓰레기, 폐기물 같은 껍질들을 분리해내서 읽을 만한 낟알과 진리의 낟알을 뽑아내도록 도와주는 탈곡기가 없음을 안타까워 하는 첫번째 편지를 시작으로 세대 차이,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주는 의사소통의 한계,점점 프라이버시가 없어지며 무분별하게 이루어지는 섹스, 부모와 아이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교육 문제 등을  냉철한 판단과 노학자의 근심어린 조언을 들을 수 있다.  노학자의 가장 큰 우려는 모두가 이 '유동하는 근대'의 모습을 바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유동하는 근대에 사는 우리들의 모습은 저자의 표현대로 하면 살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이런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위험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오로지 속도뿐이라고 한다. 저자는 앉아 있는 것보다는 걷는 편이 낫고, 걷는 것보다는 뛰는 편이 나으며, 뛰는 것보다는 오히려 서핑(파도타기)하는 편이 낫다고 한다. 어쨋거나 유동하는 근대에서는 어떤 한 형태가 언제 어떤 식으로 고체화될지 아무도 알 수 없으며 어떤 형태로 고체화된다하더라도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래는 이토록 집단적인 불확실성과 개인적인 불확실성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정보의 홍수속에서 살고 있으며, 언제든지 위험으로부터 구출해내줄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통신 수단은 최첨단을 걷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오히려 수많은 범죄에 노출되어 몸살을 앓고 있다. 나는 한편으로는 스마트폰이 우리의 정신을 뺏어갈 수는 있을지라도 우리의 일상에는 실질적으로 아무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위에 말했듯이 지금은 필요에 의한 상품들이 아닌 소비를 목적으로 하는 상품들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이름하여 소비자사회가 '유동하는 근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이들은 새로운 것들에 열광하며 넘쳐나는 물질문명에 익숙한 세대로 낡은 우리 부모세대들을 점점 더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사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과 일상에서 철학할 줄 모르는 사유가 쏙 빠진 고독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미래는 더욱 불확실해져 갈 것이다. 유동하는 근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지그문트 바우만을 읽는다는 것은 이런 불투명한 미래에  한줄기 투명한 희망의 빛 같은 것이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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