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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 

 모든 설움이 합펴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 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 보다.

 -<긍지의 날> 1955.2

 

 

나는 사실 김수영을 잘 모른다. 철학자 강신주를 좋아할 뿐이다. 그러나 그런 강신주를 오늘날까지 있게 한 사람은 김수영이라고 한다. 가끔 내가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사유하지 않고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젊은 날 김수영의 시보다는 테크니컬한 이미지의 아름다운 시만을 선호했었다. 한마디로 그냥 읽는 재미로 '시'를 읽었다. 나이가 들어 강신주의 철학이 가미된 김수영의 시는 거의 황홀한 지경이다. 강신주는 이 책을 통해 이제 김수영을 버렸다고 선언하지만, 나는 이제부터 김수영을 만나기로 했다. 짧은 사색의 시간으로 리뷰를 남기는 우를 범하지만, 내 내면에서는 언제나 이 시가 살아서 팔딱팔닥 뛰는 심장의 옆에 존재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덮은 후, 나도 모르게 흐르는 한줄기 눈물에 기대어 김수영을 기억해 보련다. 그렇게  김수영은 내 안에 들어왔다.

 

한 작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사상을 사랑한다는 것과 같은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사상은 작가의 삶과 분리할 수 없다. 그래서 신영복 교수님은 텍스트를 읽고, 저자를 읽고, 독자인 자기자신을 읽는 것이 독서라고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강신주의『상처 받을 권리』에서도 저자가 강조하는 인문정신은 이 책 『김수영을 위하여』에서 김수영이 깊이 뿌리 내린 인문정신과 똑같다.  저자는 거짓된 인문정신이 아닌 페르소나를 벗고 맨얼굴로 자신과 세계에 직면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인문 정신을 말하고 있는데 그런 저자의 인문정신은 김수영에 깊이 뿌리를 내려 잎을 무성히 드리우고 철학의 열매들을 대중에게 열려주고 있다.  우리는 그 열매를 먹음으로써 삶을 조금 더 깊이 성찰할 수 있게 된다. 나같이 시에 문외한이 김수영의 시에 다가갔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김수영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시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시인이 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한 번뿐인 자신의 삶을 타인의 흉내를 내지 않고 제대로 살아 내려고 했음을 말한다. 따라서 저자가 이 책으로 인해 김수영을 떠났다고 하는 것은 이제까지 김수영이 삶의 전반에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하며 이제는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의지와 같다. 삶을 살아 내는 것은 이런 절절한 의지가 바탕이 되어야 하고 그 소망을 타인에게 관철시키려고 했고, 끝내 그럴 수 있었기에 우리에게 위대한 시인으로 기억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제대로 된 시인이 되는 것은 김수영 본인으로서는 사활을 건 문제였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폭포 중에서 -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 의심하는 고독의 순간에, 시인들의 시는 우리 귀에 들려오기 시작한다.  시인이기 때문에 살 수 있는 삶을 살아내려는 결단의 순간,

자신보다 먼저 그런 결단을 실행했던 시인들,

 세상으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를  두어야만 폭포가 내는 소리가 들리듯이 폭포를 이루는 거대한 물줄기에 합류하고자 했던 소망은

자신 스스로가 곧은 시가 되고 그 시가 곧은 시를 부르기를 원하는 소망이 엿보인다.

이처럼 모든 글다운 글에는 절망 속에 다시 강해지려는 희망과도 같은 것, 혹은 되찾은 희망속에서도 현재의 절망이 더 몸서리쳐지도록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어야만 한다.

 자신의 소리,즉 제스처를 만들어 살아가는 것,

이것을 시인의 숙명이자 시인이 그토록 바랐던 것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인문정신은 태어나면서 누군가를 위해 살게 끔 교육받았기에 타인에 의해 길들여져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는 것이다. 자기만의 스타일로 살지 못하고 남의 스타일을 답습하며 살아가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내지 못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야 한다는 타성에 젖은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채찍질 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삶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을 '팽이'를 본 순간 깨달은 김수영의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시를 읽으면 팽이처럼 끊임없이 돌아야 스스로 설 수 있듯이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여 스스로 설 수 있을때  시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내려는 '삶의 방식'임을 말한다. 이것은  한마디로 김수영의 사상은 시나 삶 어느 경우이든 '단독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단독성은 김수영의 사상이다.더 쉽게 말하자면,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내려는 사람은 예술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삶이란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는 통찰의 결여,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삶 혹은 다른 누구의 삶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나의 포즈' , '자기만의 포즈' 로 살아야 한다.

여기서 저자는 제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내면

 '자신만의 포즈'는 저절로 만들어질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자신의 삶을 자기 스타일대로 정직하게 살아 낸다면, 우리는 타인의 삶에 공명하는 보편성을 확보한다. 들뢰즈가 '단독성만이 보편성에 이를 수 있다고 했듯이 김수영의 사상은 단독성이다. 시에서 중요한 것은 삶을 살아 내야만 하는 ' 나 자신, '나의 온몸'이다. 김수영은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비솝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메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그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 애 못 낳는 여자 ,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거대한 뿌리 중에서 >

 

낙후된 현실을 낙후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절망의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사태에 대한 냉혹한 진단이자, 낙후된 현실을 넘어서겠다는 의지의 선언이다. 며칠 전 진중권이 "우리나라 진보는 죽었다" 고 한 말이 생각난다. 김수영 또한 독재정권에 반한 자유주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좌절한다. 그러나 우리는 넘어진 자리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넘어졌다는 자각이 없다면, 일어서려는 마음도 가질 수 없다. 이처럼 낙후된 현실의 자각은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굴곡 많은 역사의 흔적과 지우고 싶은 더러운 역사 그리고 더러운 진창으로부터 일어나기 위한 위해서는 과거를 제대로 보아야 하고 정리해야 한다. 어쩌면 소위 진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결국 제자리 걸음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과거를 제대로 보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결국 진정한 아름다움은 새로운 삶의 국면을 포착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껏 김수영을 그저 시인중의 하나로만 느껴왔다. 그러나 김수영은 진정한 자유주의자이자 혁명가였다. 카프카가 우리 영혼에 깊이 상처를 남기는 책이 있어야 한다고 했듯이 이 책은 내게 커다란 상처로 다가온다. 지금 이 땅에 진보가 사라지고 있는데도 아무도 분노하지 않는 것처럼, 억압된 자유에 길들여진 무서움을 본다. 한 시인이 전생을 바쳐 투쟁한 개인의 단독성이라는 자각이 필요한 이유 또한 아마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 땅에 온 몸으로 시를 노래하는 시인이 없고 자유를 향한 외침이 없다면 이미 진보는 죽어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단독성을 위해 나는 이제부터 김수영을  만나기로 했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을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 시여, 침을 뱉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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