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로버트 제임스 월러 지음, 공경희 옮김 / 시공사 / 2002년 10월
평점 :
일시품절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로버트 제임스 월러, 공경희 옮김, 시공사, 1991

 

1. 아마도 책 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든 동명의 영화를 본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었다. 영화는 120여쪽의 중편 소설의 줄거리와 인물의 감정을 잘 표현했다. 책을 읽으면서 영화의 장면이 떠올랐고, 영화는 독서가 그려내는 이미지를 방해하지 않았다.

 

2. 1965년 늦은 여름, 아이오와 주 메디슨 카운티를 방문한 50대 사진작가와 군인을 따라 20대에 바다를 건넌 결혼한 이탈리아 여자의 나흘간의 사랑이 담긴 책이다. ‘불륜, 간통’은 이 책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마지막 카우보이, 유성 꼬리 위에 탄 표범’같은 남자가 프란체스카의 심장 속에 꽁꽁 숨어있던 열정을 기어이 끄집어냈고, 그들은 스스로 재가 될 때까지 사랑하고 그와 그녀가 아닌 제3의 존재로 산화했다.

 

 

- 그가 마당에 들어서자 현관문 앞에 어떤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곳은 시원해 보였고, 여자는 그보다 훨씬 더 시원해 보이는 뭔가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가 현관에서 내려와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섰다. 킨케이드는 트럭에서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더 자세히 그녀를 보았다. 아름다웠다. 적어도 예전에는 아름다웠을 얼굴이었고, 다시 아름다워질 수 있는 얼굴이었다. 그는 예전부터 조금이라도 끌리는 여자를 만날 때면 늘 겪게 되는 다루기 힘든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32쪽

 

3. 나흘간의 사랑이 빚어낸 빛과 파동은 그와 그녀가 살다간 시간의 울림통 안에 퍼졌고, 그것들은 조금도 새어나가지 않은 채 상자에 보관되었다. 한정된 시간과 이제는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아는 그녀, 그녀안의 냉정이 열정을 이겼다. 지독한 책임감이 타오르는 에로스를 꺼뜨렸다.

 

- 목요일 오후

그래요, 이렇게 사는 것은 지겨워요. 내 인생 말이에요. 낭만도, 에로티시즘도, 촛불 밝힌 부엌에서 춤을 추는 것도, 여자를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남자의 멋진 감정도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아요. 무엇보다도 이 생활에는 당신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내게는 지독한 책임감이 있어요. 리처드에게, 아이들에게. 내가 그냥 떠나버리면, 내 육체적인 존재가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리처드에겐 너무나 힘들거에요. 그것만으로도 그를 파멸시킬지도 몰라요. 그보다도 더 나쁜 것은, 그가 여생을 이곳 사람들의 속닥거림 속에서 살아가야만 할 거라는 점이에요. 142쪽

 

4. 그들은 그녀의 말처럼 헤어졌기 때문에 영원히 같이 있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는 말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떠났기 때문에 사랑을 간직했다.

 

- 모순은 이런 점이야. 만일 로버트 킨케이드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오랜 세월을 농촌에 머무를 수 있었을 것 같지가 않구나. 1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유진의 할 말은 합시다 - 정의가 부재한 사회에 던지는 통렬한 질문
노회찬.유시민.진중권 지음 / 쉼(도서출판)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유진의 할말은 합시다, 노회찬 유시민 진중권, 쉼, 2016

#노유진의할말은합시다




1. 예약구매자에 한해 친필 사인본을 준다는 말에 충동적으로 구매했다. 팟캐스트 프로그램 '노유진의 정치까페'의 방송내용을 담은 전작 '생각해봤어'(웅진지식하우스)가 좋았고, 즐겨듣는 프로그램에 대한 확신 때문이기도 했다. 이 책 또한 2014년 부터 2016년 2월까지의 에피소드 가운데 뽑은 방송분의 녹취 내용을 담았다. 대부분을 팟캐스트로 들었었지만 인쇄된 글자로 다시 읽으니 놓쳤던 내용과 전체적인 흐름이 정리되는 효과가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건 오디오 북이라는 생각도 든다. 




2. 정말 정치,사회,경제,문화 여러 분야들(특수활동비, 성완종리스트, 교과서 국정화, 화폐전쟁, 파시즘, 보육대란)을 다루었지만 개인적으로 재밌게 보았던 에피소드는 2015년 9월 15일 분 '초등학생이 받은 채권추심 편지'였다.



 법원의 업무영역은 크게 재판업무, 집행업무, 기타 민원업무로 나눌 수 있는데 집행업무는 다시 경매, (가)압류 업무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내가 은행에서 돈을 못 갚으면 은행이 나를 상대로 소송을 해서 판결을 받은 다음 판결에 기해 내 통장에 압류를 한다. 보통 시중에 있는 10여개 은행에 채무자 몰래 신청을 하기 때문에 채무자는 자기월급이나 돈을 입금할 수 있는 있어도 압류 후에는 출금할 수 없다.



 2013년에 압류 파트 업무를 했었는데, 전화가 끊이지 않는다. 보통 압류 이후에 채무자에게 시한을 두고 통지를 해주기 때문에 채무자들의 항의전화가 대부분이다. 


"내 통장인데 나한테 알려주지도 않고 내 돈을 못 빼? 여기 동사무소에서 나오는 지원금 받는 통장인데 돈 인출못하면 굶어 죽어!!"





3. 사람들 중엔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지, 당연한 거 아냐? 자꾸 회생이니 파산이니 시켜주니까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는 거야.'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다. 

 이런 경우가 있다. 아버지, 어머니가 교통사고나 질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남겨진 자식들이 한정승인이나 상속포기 절차를 하지 못해 미성년자들이 부모님의 빚을 떠안게 된다. 처음에는 소액이었다가 은행 같은 제도권 금융기관에서 회수가 안되니까 대부회사에 떨이로 채권을 넘긴다. 압류 추심을 하는 신청인 채권자들의 절반 이상이 이런 회사다. 특히 집행사건에 전자소송이 도입된 뒤로 절차가 간이해진 측면도 있고 수십 군데 은행에 일단 압류를 해 놓는다. 소액이던 몇 년간 이자가 붙어 수 천만원으로 불어나 자식들의 목을 조른다. 



 책에도 한 초등학생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이 아이가 파산면책진술서에 '나는 어려서 나에게 오는 편지는 다 반가웠는데, 그게 알고 보니까 아버지 빚을 대신 갚으라는 편지였다'고" 208쪽



제윤경 에듀머니 대표는 "일단 빚을 반드시 갚아야 된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말한다. "반드시 갚아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이전 빚을 갚지 위해 다른 빚을 만듭니다. 갚을 수 있는 능력만큼 갚는 게 빚이고요, 내 능력을 초과해서 우리 삶을 위태롭게 한다 하실 때는 일단 연체를 하셔야 됩니다." 221쪽


"도덕교육에는요, 사실 '빚내지 마라'라 가장 우선이고요. 그리고 저는 능력이 안되는 사람에게 돈 빌려준 사람을 먼저 야단치는 것이 우리가 먼저 가져야 될 도덕적 잣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너무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서 문제점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사회시스템과 제도의 도입 주체가 기득권과 강자이므로 제도의 내용은 한 사람의 약자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90년대 말 김대중 정부 때 많은 은행들이 건 당 몇 만원씩 현금 주면서 신용카드를 발급받으라고 독려했었다. 최근에는 부동산 경기가 부양이 안되니까 빚내서 집사라고 하거 전세가가 폭등하니 월세가 전 세계의 대세니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 한다. 무분별한 신용카드 발급으로 개인 빚이 늘어나 신용카드 대란이 일어나고, 집 없이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가거나, 월급의 상당부분을 월세로 내야 하는 직장인들에게 '그러길래 누가 신용카드 발급받으라고 했어? 억울하면 집 사면 되잖아.'라고 한다면, 그게 나의 일이라면 순순히 수긍할까?




4. 이 책을 읽으면 투표하고 싶어지는 분들 많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곁에 두고 읽는 장자 곁에 두고 읽는 시리즈 2
김태관 지음 / 홍익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곁에 두고 읽는 장자, 김태관, 홍익출판사, 2015

 

1. 제목을 참 잘 지었다. 저자와 출판사 편집자가 상의해서 제목을 정했겠지만 지하철에서, 침대 옆 탁자에 두고 읽고 싶은 욕구를 일으킨다. 정확히 사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우선 제목만 보고 책을 펼치게 만들었다는 것은 반은 성공했다는 의미다. 예전에 사이토 다카시의 '곁에 두고 읽는 니체'를 부담없이 재미있게 보았다. 그 책을 번역한 사람이 저자다. 제목도 아마도 사이토 다카시의 책을 따와 쓴 것 같다. 

 의외로(?) 책이 잘 넘어간다. '곁에 두고 읽는 니체'보다 훨씬 잘 읽히고 와 닿는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말로 장자를 해석한 책이고, 공자, 순자, 연암, 한시들을 장자의 구절과 연계시켜 풀어내고 있어서 사이토 다카시의 책보다 개인적으로는 훨씬 만족스럽게 읽었다. 


2. 우선 저자가 말하는 책소개를 들어보자. 저자의 분류가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한다. 참조하고 어느 장이나 펼쳐서 읽으면 된다. 


- 《장자》33편을 이룬 수만 개의 문자는 거칠게 말하면 도와 무위, 그리고 지락이라는 세 개의 키워드로 인수분해 된다고 할 수 있다. 존재론으로서의 도, 그 실천으로서의 무위, 그리고 가치관으로서의 지락으로 요약할 수 있다는 얘기다. 10쪽

 

3. 메모


- 흥미롭게도 백정이 말한 세 단계는 선승들이 말하는 깨달음에 이르는 단계와 아주 흡사하다. 즉 소가 어떻게 보이는지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가 일깨워주는 단계와 상통한다. 성철 스님에 의해 유명해졌지만, 중국 당나라 청원유신선사가 남긴 원래 화두는 이렇다. 47쪽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보았는데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구나.

산은 물이요, 물은 산으로 보이는데

산은 역시 산이요, 물은 역시 물이로다.

 

山是山 水是水, 山不是山 水不是水. 山是水 水是山, 山是山 水是水.

 

이는 백정의 눈에 처음에는 소가 소로 보이다가, 그 다음엔 소가 소가 아닌 해부학적 물체로 보였다가, 마침내 소와 나의 경계를 초월한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른 것과도 같다. 48쪽

 

- 무위라고 하여 손 놓고 방치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흔히들 은둔이나 회피를 떠올리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무위는 그런 소극적인 개념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무를 실천하는 것이다.

무위는 네잎클로버를 발견했어도 뜯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풀잎을 뜯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즉 욕심의 손길로 풀잎을 뜯어내 들의 수평이 기울고 지구가 흔들거리게 만들지 않는 것을 말한다. 104쪽

 

- 장자, 어부편 111-112쪽

 

어떤 사람이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자기 발자국 소리를 싫어했다. 그는 이것들을 떨쳐버리려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발을 내디딜수록 발자국 소리는 더욱 늘어났고, 아무리 빨리 뛰어도 그림자는 계속 따라왔다. 그는 달리는 속도가 늦어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더욱 빠르게 달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탈진해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늘 속에 들어가면 그림자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멈춰 서면 발자국 소리가 없어진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어리석음이란 이런 것이다.

 

- 중국의 4대 미녀로 꼽히는 월나라의 서시(西施), 한나라 원제의 궁녀 왕소군(王昭君), 삼국지에 등장하는 초선(貂蟬), 당나라의 양귀비(楊貴妃). ‘침어(沈魚), 미인의 아름다움에 넋이 빠져 물고기는 헤험치는 것을 잊어 가라앉음, 沈魚落雁’로 불리는 춘추시대 최고의 미인 서시는 오나라 왕 부차를 구워 삶기 위한 미인계에 이용되었다. ‘낙안’인 왕소군은 멀리 오랑캐 땅으로 시집가 원치 않는 삶을 살았다. 삼국시대의 ‘폐월’ 초선은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계략의 도구였다. ‘수화’ 양귀비는 당나라 현종의 눈귀를 가리고 권력을 농단하다가 자결로 삶을 마쳤다.

 

중국 사람들은 역대 추녀로 막모(嫫母), 종이춘(鍾離春), 맹광(孟光), 완녀(阮女)를 꼽는다. 막모는 황제(黃帝)의 넷째 아내로 덕행과 지혜가 뛰어났고, 종이춘은 제나라 선왕의 과오를 바로잡고 왕후가 된 인물이다. 맹광은 후한시대의 현부였고, 완녀도 삼국시대 위나라의 소문난 양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변신·시골의사, 프란츠 카프카, 전영애 옮김, 민음사, 2015, 1판77쇄
#변신 #카프카



1.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벌레'로 변한 내 모습, 가끔 팔다리와 몸이 내 몸 같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이건 벌레와 인간의 외형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장자'처럼 '벌레와 나도 한낱 미물에 불과하고 사람이 죽으면 흙 속의 벌레에 물어 뜯겨 벌레의 몸의 일부가 될 텐데 무엇을 걱정하는가'라며 달관하기란 불가능하다.




2. 카프카의 변신을 읽으면서 변신의 주체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아니라 그의 가족인 아버지, 어머니, 누이동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레고르가 외판원으로 고된 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동생의 미래를 위해 뒷바라지를 생각하는 상황에서 아버지는 삶의 의욕을 상실한 듯 의자에 앉아 졸았고, 누이도 어머니도 그레고르의 짐이었다. 그런데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제복을 입은 은행 사환으로 취직했고 동생도 취직을 위해 불어를 배우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레고르의 입장에서는 배신감이 느끼지 않았을까. 그레고르 없이 유유히 외출을 하는 가족들을 보면서 서글픔을 느꼈다.




- 가장 큰 탄식은 그러나 언제나, 그레고르를 어떻게 옮겨야 될지 아무리 궁리를 해도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아 지금의 형편으로서는 너무도 큰 이 집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레고르는 자기야 적당한 상자에 공기 통할 구멍이나 몇 개 내면 쉽게 수송할 수 있는 만큼 이사를 가로막는 것이 그에 대한 고려 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간파했다. 식구들로 하여금 집 바꾸기를 망설이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여지없는 절망과, 일가친척들 중에서 그 누구도 예가 없을 만큼, 자신들이 불운에 아주 져버렸다는 생각이었다. 58쪽



3. 카프카의 '변신'외에도 다른 작품 '판결'에서는 게오르크의 아버지가 '내가 너를 지금 익사형에 처하노라'고 말하고 '시골의사'에는 병을 고치지 못하고 하녀 로자를 마부에 맡기는 의사가 나온다. '학술원에의 보고'에서는 5년간 인간화 되어버린 원숭이에게 잃어버린 본성을 실토하라는 인간들의 모습이 나온다. 사랑에 실패하고 인정욕구에 목말라 하면서 인간다움을 잃고 '변신'하는 모습에서 또 한번 서글펐다.




- 판결

게오르크의 아버지의 말
“이제 그럼 너 말고도 이 세상에 뭐가 있는지 알았지, 지금까지는 너는 너 밖에 몰랐다. 너는 본디 순진무구한 아이였지, 그러나 근본을 보면 너는 악마 같은 인간이었어! - 그러니 명심하거라! 내가 너를 지금 익사형에 처하노라!” 94쪽





- 학술원에의 보고

학술원의 고매하신 신사 여러분!
여러분께서 소생에게 원숭이로서의 소생의 전력에 대한 보고를 제출하게끔 스스로에게 명하는 명예를 주셨습니다.
이런 뜻에서는 저는 유감스럽게도 권고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원숭이다움과 지금의 저 사이에는 오 년 가까운 세월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달력으로 재면 짧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해왔듯이, 박차를 가해 달음질치기에는, 무량무변의 긴 시간이었습죠, 구간에 따라서는 탁월한 인간, 충고, 갈채, 그리고 오케스트라 음악이 동반되었습니다만, 근본에서는 혼자였습죠,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이, 경관(景觀)에 머무르기 위해, 멀리 차단 목책(木柵) 앞에 멈추어 있었으니까요. 105쪽

- 제가 제일 처음으로 배운 것은 악수였습니다. 악수라는 것은 솔직함을 증명하지요, 제가 제 생애의 절정에 서 있는 오늘에도 예의 첫 주먹질부터 하고 난 다음에야 솔직한 말도 덧붙여지는 것 같습니다. 10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어라 돼지 문학과지성 시인선 480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혜순 시집, 피어라 돼지, 문학과 지성사, 2016


1. 2016년 3월에 나온 따끈따끈한 시집이다. '피어라 돼지' 제목만 보면 달구어진 불판에 삼겹살의 육즙이 베어나오면서 노릇하게 익어가는 장면이 생각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시집의 제1부를 구성하는 '돼지 연작시'를 읽고 나니 한동안 삽겹살을 먹지 못할 것 같다.자기 몸속으로 간장이 스며드는 순간 어미가 품고 있던 알들에게 '이제 잠잘 시간이야'이라고 달레는 어느 시를 읽고 간장게장을 한 동안 먹지 못했다는 누군가의 글이 이제서야 공감간다.





2. 피어라 돼지 45-48쪽 전문, 조지오웰의 동물농장

훔치지지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재판도 없이/ 매질도 없이/ 구동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 검은 포클레인이 들이닥치고/ 죽여! 죽여! 할 새도 없이/ 알전구에 똥칠한 벽에 피 튀길 새도 없이/ 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가죽이 벗겨져 알록달록 싸구려 구두가 될 새도 없이/ 새파란 얼굴에 금은 안경을 쓴 취조관이 불어! 불어! 할 새도 없이/ 이 고문에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절박한 공포의 줄넘기를 할 새도 없이/ 옆방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뺨에 내리치는 손바닥을 깨무는 듯/ 내 입안의 살을 물어뜯을 새도 없이/ 손발을 묶고 고개를 젖혀 물을 먹일 새도 없이/ 엄마 용서하세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할 새도 없이/ 얼굴에 수건을 놓고 주전자 물을 부을 새도 없이/ 포승줄도 수갑도 없이// 나는 밤마다 우리나라 고문의 역사를 읽다가/ 아침이면 창문을 열고 저 산 아래 지붕들에 대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나에긴 노래로 씻고 가야 할 돼지가 있다/ 노래여 오늘 하루 12시간만 이 몸에 붙어 있어다오// 시퍼런 장정처럼 튼튼한 돼지 떼가 구덩이 속으로 던져진다// 무덤 속에서 운다/ 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 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 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 게 아니에요!/ 부끄러운 거에요!/ 무덤 속에서 복부에 육수 찬다 가스도 찬다/ 무덤 속에서 배가 터진다/ 무덤 속에서 추한 찌개처럼 끓는다/ 핏물이 무덤 밖으로 흐른다/ 비오는 밤 비린 돼지 도깨비불이 번쩍번쩍한다/ 터진 창자가 무덤을 뚫고 봉분 위로 솟구친다/ 부활이다! 창자는 살아있다! 뱀처럼 살아있다!// 피어라 돼지!/ 날아라 돼지!// 멧돼지가 와서 뜯어 먹는다/ 독수리 떼가 와서 뜯어 먹는다// 파란 하늘에서 내장들이 흘러내리는 밤!/ 머리 잘린 돼지들이 번개치는 밤!/ 죽어도 죽어도 돼지가 버려지지 않는 무서운 밤!/ 천지에 돼지 울음소리 가득한 밤!// 내가 돼지! 돼지! 울부짖는 밤!// 돼지나무에 돼지들이 주렁주렁 열리는 밤



: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피어라 돼지;를 읽으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이었다. 공산주의 이념과 극단화된 사회주의와 전체주의의 모순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작품은 시간의 울타리를 넘어 현 시대에 다시 재현된다. 늙은 수퇘지 '메이저'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전략) 자, 동무들, 동물들의 삶이 어떤 겁니까? 우리 똑바로 봅시다. 우리의 삶은 비참하고 고달프고, 그리고 짧소. 우리는 태어나 몸뚱이에 숨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먹이만을 얻어먹고. 숨 쉴 수 있는 자들은 마지막 힘이 붙어 있는 순간까지 일을 해야 하오. 그러다가 이제 아무 쓸모도 없다고 여겨지면 그날로 우리는 아주 참혹하게 도살당합니다. 영국의 모든 동물들은 나이 한 살 이후로는 행복이니 여가니 하는 것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영국의 어느 동물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비참과 노예상태, 그게 우리 동물의 삶입니다. 이건 아주 명백한 진실이오. ... 10쪽... "

그런데 우리는 왜 계속 이 비참한 조건 속에 살아야 합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노동해서 생산한 것을 인간들이 몽땅 도둑질해 가기 때문입니다. 동무들, 우리 문제에 대한 해답은 바로 거기에 있소. 한마디로 문제의 핵심은 〈인간〉이오. 인간은 우리의 진정한 적이자 유일한 적입니다. 인간을 몰아내기만 하면 우리의 굶주림과 고된 노동의 근본 원인은 영원히 제거될 것이오. 11쪽


3. "열심히 했지만, 열심히 안한 것으로",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인 것으로" , 변명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세상에서 화자는 "이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한다. 정지용의 '향수'에서 똑같은 말이 그리운 고향이라면 '피어라 돼지'에서는 몸서리치는 암흑의 땅이다. 똑같은 표현이 다른시('키친 컨피덴셜')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유명한 가곡의 가사와 멜로디가 이렇게 암울할 수 있다니.



김혜순 시인은 '돼지 연작시'들을 돼지들이 살처분 되는 광경을 보고 나서 썼다고 한다. "튼튼한 돼지 떼가 구덩이 속으로 던져지고" 화자는 부끄러워서 운다. 네발이 아닌 두발로 서서 운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지 않다. "네 발은 좋고 두발은 더 좋다"는 동물농장의 양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두발로 걷는 어른들이 네 발로 걷는 아기들과 동물들에게 분명 죄를 짓고 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피어라 돼지! 날아라 돼지!"라고 소망하는 일 밖에 없다. 같이 울고 소리쳐야 한다.
"피어라 사람아! 날아라 사람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