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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아이브 - 위대한 디자인 기업 애플을 만든 또 한 명의 천재
리앤더 카니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평점 :
지난 3월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창의적인 사람들의 습관 18가지'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1. 몽상에 잘 빠진다 : 딴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난데없이 최고의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2. 모든 것을 관찰한다 : 창의성이 기반이 될 수 있는 정보를 지속적으로 습득한다
3. 자신에게 맞는 시간대에 일한다
4.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
5. 고통을 승화한다
6. 새로운 것에 항상 열려 있다
7.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8. 호기심이 많다
9.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이 많다
10. 위험을 감수할 줄 안다
11. 인생을 자신을 표현하는 기회로 삼는다
12. 보상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열정이 있다
13. 자신만의 생각에 갇히지 않는다 : 다르게 생각하는 법을 좋아한다
14. 좋아하는 것에 완벽하게 몰입한다
15. 아름다운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 : 예술적 아름다움에 고도의 감각과 민감함을 보인다
16. 연결점을 찾는다 :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능력이 있다
17. 지속해서 변화한다 : 새롭고 다양한 경험을 원한다
18. 명상을 한다 : 마음을 비우고 집중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이 중에서 몇 가지나 내게 해당될까 체크해 보면서, 과연 조너선 아이브에게는 몇 가지나 그럴까 비교해 보게 된다.
아버지 마이클은 대학에서 은세공을 가르치는 교수였으며, 어머니 패멀라는 심리 치료사였다. 소년 시절부터 조너선은 사물의 작동 원리에 호기심을 드러냈다고 한다. 빌도 그랬고 스티브도 그랬다.
조너선은 데이비드 베컴이 다녔다는 학교인 칭퍼드 공립학교를 졸업하고 디자인의 명문 뉴캐슬 화각기술대학으로 진학한다. 이미 고교 시절 디자인에 두각을 보인 그는 런던 최고의 디자인 회사 로버츠 위버 그룹(RWG)의 후원을 받게 된다.
영국식 디자인 교육은 산업계의 요구에 철저히 부응하는 미국과 달리 "실험적이고 임기응변적인 방식"을 강조했다. 또한 "모험을 장려하고 실패해도 보상하는 분위기"였다.
이후 아이브의 창의성 넘치는 디자인은 회사에서 인정받아 풋내기 인턴 시절에 일본 기업 담당 부서에 배치되었다. 사람들은 어린 아이브가 회사의 '주요 프로젝트'를 도맡은 반면 다른 디자이너들은 '지저분한 프로젝트'에만 지겹도록 매달려야 했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그는 대학시절 일반 전화기에 혁신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왕립예술학회(RSA) 여행 장학금을 최초로 두 번이나 받았다. 당시 RSA 기록보관 담당자 맬러니 앤드루스는 말한다. "아이브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디자인 둘 다에 관심이 많았어요. 두 웨어에 대한 균등한 관심, 그거야말로 애플 제품들의 승리 공식이잖아요."
졸업 이후 RWG를 떠나 탠저린으로 옮겨 전공 공구에서 머리빗까지, 텔레비전부터 화장실 용기까지 회사가 따낸 프로젝트에 빠짐없이 참여하며 실전 감각을 익혔다.
스티브가 인문학 독서를 통해 자신의 제품과 디자인 철학을 다져 나갔듯이 아이브 역시 독서에도 열심이었다. 그는 디자인 이론서는 물론이고 심리학자 스키너의 저서와 19세기 문학 작품까지 탐독했다. 또한 박물관을 종종 찾았다. 또한 자신의 디자이너로서의 롤 모델이었던 아일린 그레이와 미켈레 데 루치에 대한 연구도 병행했다.
아이브는 1991년 당시 애플 산업디자인 팀장이었던 로버트 브러너와 조우하게 되면서 탠저린에서 애플과 계약을 맺어 같이 작업하게 된다. "애플의 제안이 얼마나 황홀했는지, 그리고 내가 일을 그르칠까 봐 얼마나 초조해했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애플이 맡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낸 아이브에게 브러너가 다가왔다. "시대를 앞서 가는 뭔가를 창조하고 싶다면 애플에 와라." 아이브는 1992년 9월 정식으로 애플에 입사했다.
이어 아이브의 맹활약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처음으로 맡은 뉴턴 메시지패드의 차세대 모델 디자인에서부터 시작하여 훗날 애플의 신제품을 탄생시키게 될 팀원들을 직접 영입하기도 하는 등 리더십을 인정받아 브러너가 떠난 후 디자인 팀을 이끌게 된다.
1997년 7월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 복귀한다. 잡스는 복귀하자마다 제품 포트폴리오를 단순화하는 것과 동시에 분산되어 있는 팀들을 전격적으로 통폐합했다. 애플 최고의 디자이너, 엔지니어, 프로그래머, 마케터들로 구성된 A팀이 혁신적인 제품 고안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일종의 CFT (Cross Functional Team)이다.
잡스는 아이브가 이끌던 산업디자인팀을 유지하기로 결정했고, 팀이 집중할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아이브는 애플 제품의 '디자인 스토리'에 집중했다. 고객의 감성을 자극하는 애플의 스토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스티브 잡스는 1997년 애플에 복귀하자마자 아이브와 각별한 유대 관계를 형성했다. 두 사람은 제품과 디자인에 대한 강렬한 열정을 공유했다.
애플의 마케팅 책임자 필 실러는 말한다. "스티브가 복귀하기 전에는 엔지니어들이 ‘여기 내용물이 있소’라고 말하며 프로세서나 하드 드라이브를 디자인 팀에 건네는 게 관례였지요. 디자이너들에겐 그걸 박스에 담는 작업만이 주어졌던 셈입니다. 항상 그런 식으로 진행했으니 끔찍한 제품들만 나올 수밖에요." 하지만 잡스와 아이브는 무게 중심을 다시 디자이너 쪽으로 돌려놓았다. 이후 아이맥의 대성공으로 “애플이 돌아왔다!”는 찬사가 이어진다.
아이맥에 이어 아이북, 아이팟 그리고 아이폰과 아이패드에 이르기까지 연달아 대박을 터뜨리며 애플의 신화를 창조한다. 물론 그 중심에는 잡스와 아이브가 함께 했다. 직관적 사고와 현실적 구현의 융합은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의 상징적 특징이 되었고, 전 세계를 주도한 창의적 혁신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우리의 미래를 바꾸어 나갔다!
나는 특히 아이폰의 디자인 개발 사례를 흥미롭게 읽었다. 최근에 출시된 신제품이 어떻게 만들어졌나 궁금했고, 삼성전자와 특허 분쟁도 있어 관심이 갔기 때문이었다.
아이브는 운영 체제가 마련되기 전부터 아이폰 디자인을 추진했다. 여기서 아이브의 역할이 잘 부각된다. 아이브는 새로운 운영 체제 개발의 진척 상황을 계속 파악하는 한편, 잡스나 다른 간부들과 끊임없이 소통했다.
이어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디자인 팀원들에게 피드백을 주고 방향을 잡아 나갔다. 이 사례는 아이브가 디자인 감각만 탁월한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과 리더십 역량도 뛰어났음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잡스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성취는 결코 없었을 거라고 인정했다. "나와 내 팀의 아이디어들은 다른 곳에서는 아무 인정도 못 받고 사장되었을 거에요. 만약 스티브가 이곳에서 우리를 밀어붙이고 함께 일하며 수많은 저항을 헤쳐 나가도록 돕지 않았다면 우리의 아이디어 상당수는 제품으로 현실화되지 않았을 겁니다."
스티브 잡스 역시 아이브를 최고라고 인정했다. "나를 제외하고 회사의 운영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조니(조너선의 애칭)에요.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거나 상관 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내가 분위기를 그런 식으로 만들어 놨거든요."
아이브와 잡스, 두 사람은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결실을 안겨 준 창의적 파트너십을 형성했다. 그럼으로써 애플이 하는 모든 일에 디자인을 스며들게 했다. 이제는 세계가 그들이 보여 주었던 창의와 디자인 혁명을 배우고자 열심이다.
내가 언젠가 들었던 창의력 강의에서 우리가 평소 창의적이지 못한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인이 있다고 했다.
1. 우리가 하는 일 대부분이 창의적일 필요가 없기 때문
2. 창의적이 되도록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
3. 사람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념체계가 있기 때문
이 책을 읽으니 조너선 아이브가 디자인 혁명을 이룬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이브는 위에서 지적한 문제점 세 가지를 계속 혁신해 나갔던 것이다.
학창 시절, 아이브는 항상 디자인에 미친 듯이 몰두했고, 글로벌 트렌드를 끊임없이 연구했다. 또한 늘 새롭고 나은 방법을 찾으려는 마음으로 새로운 재료와 제조 방식을 깊이 탐구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어 나가고자 했다. 아이브, 자신이 바로 디자인 혁신의 모범이었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