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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난 도올 김용옥의 학자적 수준이나, 그 사고의 깊이 같은 것은 잘 모른다. 제대로 들어본 적이나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냥 몇 번 TV에 나와서 강의하는 걸 봤는데 발음은 부정확한데다 때때로 소리를 지르고 팔을 허우적허우적거리면서도 뭔가 이슈가 될만한 것들은 쿡쿡 잡아내는 게 연예인하고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래도 컴플렉스의 결과라곤 해도 여기저기서 학위는 많이 땄으니, 암튼 뭐 대단한 말쌈을 하시는가 싶었다.
사실 요한복음 강해에 대한 그의 이번 작업에 눈꼽만치라도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말마따나 현 기독교 교리의 핵심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거니와, 그에 따라 교회 목사들이 자신들의 신학적 깊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자주 인용하는 것이 그 요한복음이었기에 그에 대해서 도올은 어떤 굉장한 해석을 보여줄려나, 하는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내가 돈이 없어서, 뭐 돈이 있다고 해도 굳이 신청할 것 같진 않지만 암튼 언론에서 단편적으로 내보내는 그 요한복음 강의의 내용이란 것이 뭐 그리 색다르거나 처음 들어보는 것들은 아니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익숙하기까지 한 차원의 것들이라는 것이, 뭐 이런 거 가지고 그리 호들갑인가 싶었다.
호들갑. 그렇다. 도올의 내용이 그리 신선한 것은 없지만 어찌되었든 그의 강의가 지금 한국 기독교계를 도발시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아아, 솔직히 말하자면, 어처구니가 없다.
어렸을 적에 주일학교서 (강제로) 기독교 교리공부를 하고 뒤이어 가톨릭에 입문해서 세례명까지 받고선 그 뒤론 노라리가 된 나로선, 그냥 온전히 성서만 읽어도 지금의 교회 시스템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파악하기에 예수는 아나키스트였다. 그의 말들은 명백하게 권위와 허상과 인습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는 숭배할 시간에 실천하라고 말했고 가지고 있을 시간에 베풀라고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이븐 루슈드, 혹은 아베로에스라 불린 아랍철학자의 이성이 꾸란에게 경탄했던 이유와 통하는 바다. 철학의 복잡다단한 썰로는 풀 수 없는 것을 종교는 해낼 수 있었다. 예수는 하늘의 권위(라고 불리던 것)를 인간에게 내려주려고 했고 그 때문에 모욕 받은 이상주의자로 죽어갔으며, 종내는 부활했다. 안타깝게도 좀 뒤틀린 모습으로. 그렇게 기적이 있음에 십자 모양 신화는 성립됐으며 그 환상성을 바탕으로 지탱되는 권위는 위태위태한 기둥 위에 서서 끊임없는 반론자들을 만들어내게 됐다(고고학자, 해석학자, 원본주의자, 물개 JMS 등등).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가톨릭의 의례들, 기독교의 규칙들은 그들이 쓰는 성서에 적힌 예수의 행적과 말 하나하나에 모조리 반하는 것들 뿐이다. 사도 바울 이후로 교리는 거의 식민주의적인 것으로 바뀌어갔다. 그것들은 예수의 말을 핑계 삼아 인간이 만들어낸 권력과의 타협점에서 비롯된 결과들이다. 신이 되고자 한다면 스스로가 신처럼 굴어야 하건만, 똘스또이의 한탄처럼 그의 말과 상징적인 죽음에도 불구하고 기적과 권력의 힘을 빌어서만이 종교가 성립되는 세상이 지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논의는 2000년 넘게 계속 반복되고 있다. 솔직히 나는 요즘 우리나라 교계에서 이뤄지는 논의라는 것이 중세철학의 가장 편협한 시기에 이뤄지던 아집들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세상에, 그것마저도 벌써 1500년도 더 된 이야기다.
사실 도올의 강의에 따른 일련의 시끌벅적함이란 것이, 일반인에게까진 그리 와닿는다는 느낌은 아니다. 이 '문제적 강의'로 인해 벌어지는 이전투구들은 어찌 보면 교회 상층부와 도올의 쇼맨쉽과의 갈등, 더 나아가자면 사학-종교계로 확인되는 2007년 대선 헤게모니의 핵심에 선 세력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기이한 투쟁으로 비추인다. 여기서 기이하다는 것은 그 폼새가 꽤 웃기다는 것으로,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던 날 일군의 개신교인들이 자신들의 교세를 이끌고 가서 권력에 대한 상징적인 종교적 투항을 선언했던 그때만치로, (자칭) 상위 프로테스탄트들의 지식-신학에 대한 우회한 투항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