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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러면 아비규환
닉 혼비 외 지음, 엄일녀 옮김 / 톨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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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제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이 책은 영미권 작가들의 단편 장르소설 스무 편을 싣고 있습니다. 요즘 삐급 문화가 대세인 것 같은데요. 공포, 추리, 범죄, 역사, 로맨스, 판타지를 망라하는 이른바 삐급 소설들을 골라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스티븐 킹, 닉 혼비, 마이클 크라이튼 등 익숙한 작가들의 이름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데요.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스티븐 킹의 단편에는 별다른 감흥을 얻지 못해 아쉽습니다.


    "그냥...... 신경 쓰지 마."
    "뭘요?"
    "난 신경 껐거든."
    "뭘요?"
    (...)
    "왜냐하면 그게 뭘 알 리가 없잖아? 그건 빌어먹을 비디오일 뿐이라고." (닉 혼비, 「안 그러면 아비규환」 ) 중에서 


     세상의 종말을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 작품이 많죠. 최근에 보았던 영화로는 라스 폰 트리에가 감독한 멜랑콜리아(Melancholia,2011)가 기억에 남는데요. 이런 작품들 대부분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된 모티브가 되는 것은 '자연 앞에 선 인간의 태도'입니다. 공통적인 정서 반응은 '공포심'이죠. 공포가 극에 달하면 무기력이 찾아들지만, 어떤 경우에 이 공포심은 이상한 힘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표제작 「안 그러면 아비규환」이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중고 매장에서 구입한 비디오가 미래를 보여준다는 것을 알게 된 열다섯 살 소년은 '빨리감기' 기능을 통해 세계의 끝을 보게 됩니다. 결국 모든 것이 끝장나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이상한 용기가 생긴 소년이 마음에 두고 있던 소녀 마사와 로맨틱한 하룻밤을 보낸다는 이 이야기는 매우 발랄하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종말론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 것은 슬쩍 보기에도 각각의 현실 가닥들이 무한히 가지를 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동소이한 삶을 살고 있는 크리스 오퍼트가 동시에 수백수천만 명이 존재했다. 그 수많은 나의 다른 생들을 알고 나니 지금 이 현실에 나를 붙잡아두던 힘이 사라지고 말았다. 모래 늪에 머리 꼭대기까지 잠겨 발아래 단단히 디딜 곳도 없고 머리 위에 잡을 것도 없는 기분이었고, 쓰지도 못할 정보만 사방에 끊임없이 넘쳐났다. (크리스 오퍼트, 「척의 버킷」 ) 중에서

 

     종말론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평행이론입니다. 크리스 오퍼트의 <척의 버킷>은 타임루프, 즉 다중현실을 갈아타면서 자기 삶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엿보게 되는 '나'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현실들. 그 대안적 현실들은 대안이 되기보다 삶의 의욕을 빼앗고, 급기야 한 사람의 실체를 집어삼키고 맙니다. 다소 충격적인 결말에도 불구하고 극적 긴장감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부엌으로 다시 가서 한 잔 더 들이켜고 담배를 만족스럽게 피웠다. 재니스는 집 안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했지만, 그런 날들은 이제 끝났다. 나는 꽁초를 비벼 끄면서 새하얀 세라믹 싱크대에 시커먼 얼룩이 지는 쾌감을 맛보았다. 창백한 피부에 묻은 권총 화약 같았다. 이제 어머니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 마이클 크라이튼, 「핏물이 빠지지 않는다」 ) 중에서

 

     어머니의 학대 속에서 자란 레이의 마음속 상처가 "새하얀 세라믹 싱크대에 시커먼 얼룩"처럼 번져가는 과정을 잘 표현한 「핏물이 빠지지 않는다」를 스무 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으로 꼽고 싶습니다. 절제된 감정 처리와 매끄러운 구성이 돋보이는 수작인데요. 단편의 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작품의 저자인 마이클 크라이튼은 '쥬라기 공원'의 원작자이기도 합니다. 탈주자와 꼬마의 우정을 통해 잔혹한 전쟁이 순수한 인간성까지를 말살하지는 못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캐럴 엠시윌러의 「사령관」 은 어둠 끝에 쏟아지는 빛줄기처럼 따뜻한 작품이었고요.


    나는 혼자 있을 때가 아니면 절대 노래하지 않았다. 내 노래를 들은 사람은 루가 유일하다. 주문 외듯 노래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늘 궁금했다. 어렸을 때는 다른 게 있을 거라고 믿었다. 탈출은 항상 너무 쉬웠고, 나는 그게 노래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끔은 노래를 잘 부르면 언제든 사람들이 와서 나를 구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준 하비스트 고모가 와줄 거라고 생각했다. 고모는 식구들과 함께 죽었는데. (캐럴 엠시윌러 「사령관」 ) 중에서

 

     스무 편의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공포'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종말론이나 평행이론 같은 SF적 접근부터 어머니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공포, 좀비나 마녀 같은 괴담식 공포까지 매우 광범위합니다. 우리 안의 공포를 끌어내 눈앞에 흔들어대고, 찢어발겨 해체하고... 끝없이 깊고 검은 구멍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은 잠들어 있는 우리 안의 검은 유령들을 흔들어 깨우고 있습니다. 쉬잇. 안 그러면 아비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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