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 심윤경 장편소설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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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심윤경이다. 한국소설도 재미있다는 것을 알려준 작가는 많지 않다. 나에게 그 최전선은 박민규와 김애란이다. 그다음으로 김별아와 권지예가 있다. 그리고 심윤경이 있다. 나는 10년 전 출간된 연작소설 『서라벌 사람들』을 통해 그녀가 한국 소설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의 문학적 진화를 이뤄가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이후 소급해서 읽은 장편소설 『달의 제단』과 『이현의 연애』를 통해 단 번에 심윤경의 포로가 되었다.

 

소설가 심윤경이 일곱 번째 장편소설을 출간했다. 신간 『설이』는 성장소설이다. 그의 처녀작 『나의 아름다운 정원』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지만 당시 못다 쓴 성장소설의 보완 혹은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일정 부분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소설은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 '설이'의 성장을 테마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만 주목하지는 않는다. 한 아이의 성장과정을 통해 발견되는 한국 사회의 들끓는 교육열과 경쟁의식, 그것이 발산해내는 잘못된 가족의 모습과 비인간성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관통한다. 마치 소설판 '스카이 캐슬'이라 할 정도로 신랄하다. '좋은 대학'에 대한 전 국가적·전 가족적 로망에 함몰된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을 소설가 심윤경은 초등학생의 순수한 눈을 통해 가감 없이 고발한다.

 

소설은 함박눈이 내리는 새해 아침 보육원의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설이가 열세 살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렸다. 설이를 구조한 보육원 원장은 설이가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은 훌륭한 교육뿐이라 믿고 우리나라 최고 부유층의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초등학교로 전학시킨다. 설이는 세 번의 입양과 파양을 당하고 함묵증(일부러 말을 하지 않는 내면의 병)을 갖고 있지만 자존감 만큼은 허물어지지 않은 ‘되바라진’ 아이로 성장한다. 그 바탕에는 보육원 ‘이모’의 조건 없는 사랑이 있다. 설이가 흠잡을 데 없는 가정처럼 생각했던 시현이네 집에 들어가 살아보고 나서 얻은 전회와 같은 후회와 깨달음은 흥미롭다.

 

소설의 각 인물은 작가가 말하려는 각각의 캐릭터성을 잘 표상한다. 특히 설이의 이모는 친부모나 친이모가 아니면서도 계산 없는 따뜻한 가족애를 부어주는 진정한 사랑의 정수를 상징한다. 비록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아서 대단한 선물과 지원을 해줄 형편은 못 되지만 소소하고 일상적인 테두리 안에서 설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그녀의 사랑이야말로 자식을 향한 부모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반추하게 한다. 설이가 그토록 흠모하고 부러워했던 시현네 집에서의 가족에 관한 경험은 이모의 조건 없는 사랑과 대비되면서 부모의 역할과 가족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웅숭깊게 질문하게 한다.

 

소설에서 시현의 아빠, 즉 '곽은태 선생'은 가장 모순적인 인물이다. 그는 잘 나가는 소아청소년과 원장으로서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병을 잘 다스리는 최고의 의사다. 돈도 많고 이쁜 아내를 두었고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성공한 중년 남자의 표상처럼 보인다. 설이는 이모와 함께 병원에 갈 때마다 곽 선생의 팬이 되어 그를 흠모하고 그를 아빠로 둔 시현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설이가 그의 집에서 목격한 가족의 내막은 밖에서 자신이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곽 선생의 실상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오직 공부 외에는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이상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설이는 곽 선생에게 질문한다. "시현에게 왜 그러셨어요?" 이에 대한 곽 선생의 답변은 우리 시대 모든 부모들이 겪는 모순과 고민을 함의하고 있다. "내 아이니까"

 

단언하건대 대한민국은 '스카이 캐슬'이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은 가장 단단한 권력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이 학벌의 권위에 종속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자기 자식을 올곧고 자유롭게 키운다는 건 어마어마한 도전이다. 작가 심윤경 자신도 소설 출간을 기념한 기자간담회에서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사촌기 자녀의 격렬한 갈등기를 겪느라 6년간 글을 쓰지 못했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소설가 이전에 현실 부모로서 녹록지 않은 일상의 고충을 털어놓은 것이다. 자식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5살 아이에게 영어와 한문을 주입시키고, 이곳저곳으로 수없이 이사를 다니고, 아빠의 무관심을 미덕으로 여기고, 수백만 원대의 사교육을 집행하는 이 정신 나간 광기의 현상이 과연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라는 숭고한 가치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일까.

 

소설은 부모의 욕망으로 들끓는 용광로와 같은 한국 사회의 모습을 비추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즉 부모로서 자식에게 부어줘야 할 것들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새삼 성찰하게 한다. 설이의 이모는 이 작가적 질문의 소설 속 현현이다.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주어진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예뻐하고 인정하고 수용하는 이모의 모습은 행복한 가족과 부모의 이기심 사이에 존재하는 복잡다단한 함수관계에 경종을 울리는 메신저라 할 수 있다. 결국 작가는 본질적으로 그 어떤 욕망과 이기심도 들어서지 않아야 할 가족의 원형, 참 부모의 진정한 자격, 즉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잘 짜여진 구성, 재미있는 이야기, 예쁜 문체, 쉽게 넘어가는 호흡 등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소설이다. 심윤경의 소설은 모든 작품이 살아있는 개별적인 완결성으로 깔끔한 뒷맛을 남기는 힘이 있다. 개인적으로 초등학생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의 입장에서 더욱 농밀하고 밀접한 시선으로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자녀교육'과 '부모사랑' 사이의 난해한 방정식을 정면으로 관통하고 있는 소설이다. 결코 녹록지 않은 외부의 도전 가운데 자식을 키우는 이 땅의 모든 부모들에게 이 소설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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