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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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고 있다. 읽자 읽자 했던 계획이 2년이나 연기되어 이제서야 읽는다. 1권을 끝내고 2권 첫 장을 열었다. 오래전에 읽은 이 방대한 소설을 다시 집어 든 이유는 '거대한 정신적 크기'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성숙은 인간의 특권이자 의무이다. 성숙한 인간일수록 세상과 씨름하지 않는다. 내면의 크기가 큰 사람은 세상의 여러 고단함과 비루함을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용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큰 사람'은 동요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 전쟁의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인간 본성에 대한 대서사시다. 참혹한 전쟁을 치르면서 주인공들(안드레이, 피에로, 나타샤)이 얼마나 큰 정신적 성숙을 이뤄가는지 톨스토이는 유려한 문체와 거대한 서사로 아름답게 그려냈다. 톨스토이 특유의 전지적 작가 시점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설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안드레이와 피에르가 친구 같고 나타샤가 여동생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들이 여러 우여곡절을 통해 잔잔하고 명징한 영혼의 발전을 이뤄가는 모습은 한없이 찬란하다.

   이제 갓 2권을 넘어가는 시점에서 작품 전체의 총평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과거 범우사 번역(역자 동일 : 박형규 교수)으로 읽은 적이 있지만 아주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의 디테일을 모두 잊었다. 약간의 감상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다. 다른 독서를 제쳐두고 굳이 이 소설을 다시 집어 든 마당에 최대한 느리고 세밀하게 읽고자 했다. 어휘 하나 쉼표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력 있게 탐독 중이다. 완독 후 서평을 남기겠다. 과거 『안나 카레니나』의 서평과 마찬가지로 최대한 진지하게 읽고 생각을 정리하여 특별한 서평으로 이웃들과 공유하겠다. 이 글은 훗날 서평의 프롤로그 정도로 이해해주면 되겠다.

   『전쟁과 평화』와 같은 대작을 완독하기 위해서는 어설픈 계획(다짐)으로는 어림없다는 것을 독서를 꾸준히 해온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사실 2년 전의 계획이 연기된 것은 역자 박형규 교수의 신번역 완간이 늦춰진 측면이 컸다. 또한 당시 회사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건강 문제가 겹쳐 수술 후 병상에서 한 달간 휴가를 보낼 때이기도 했다. 내 인생에서 인간에 대한 환멸을 가장 적나라하게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내가 잡은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었다. 나는 과거 글에서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차이에 대해 가볍게 언급한 바 있는데, 솔직히 나는 톨스토이의 소설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엄밀히 말해 '나와 더 잘 맞는다'라는 표현이 적합하겠다. 물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매우 훌륭한 소설이며 그 작품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로 내 심연에 다가왔다.

   『전쟁과 평화』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는 완전히 다른 소설이다. 내용은 물론 인물, 개성, 문체, 관점, 철학, 향기, 소재, 지향 등 모든 것이 다르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밖에서 안으로, 세계에서 자아로 파고들며 인간 내면의 어두운 디테일에 주목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인간탐구 방식은 나와 잘 맞지 않는다. 묘사보다 대화가 많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인간이 인간 외의 것을 압도한다. 마치 회를 뜨듯이 인간의 내면을 천착한다. 자아가 스스로 묘사되지 않고 항시 타자의 대비로서 비치고 조명된다. 소설이 인물에 짓눌려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의 소설은 피로하고 불편하다. 자아를 자아만으로 담아내고, 더 나아가 자아와 타자를 넘어 세계와 우주에까지 치켜올라가는, 그리고 인간과 배경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톨스토이의 소설이 나는 더 좋다. 

   등장인물의 차이는 가장 대극적이다. 톨스토이는 소설의 스토리에 따라 작위적으로 인물의 개성을 죽이고 꼭두각시처럼 만들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물의 개성을 살리면서 스토리를 물 흐르듯이 이끌어 나간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모든 것을 범상한 인간상을 통해 드러낸다는 점이다.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대부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상식적인 사람들이다. 도스토옙스키와 같이 병적이거나 급진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범상성 안에서 개성을 살리고 생명력을 부여한다.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 개성을 살리는 작가는 별로 없다. 등장인물을 휘어잡고 있을 정도로 전지적이지만 어느 인물 하나 생명력을 파괴시키지 않은 마력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대문호 톨스토이의 위대한 역량인 것이다.

   사실 근래에 주변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내 삶은 크게 세 개의 동선으로 구분된다. 가정과 회사, 그리고 교회. 최근 세 곳 모두에서 모두 인간성의 한계와 회복에 관한 웅대한 주제를 나 자신에게 질문하게 했다. 처음에는 내가 아닌 타자의 문제로 시작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 자신의 문제로 전이됐고 폭발됐다. 나이 마흔에 지나치게 진지 타령하는 것 아니냐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인간 본성에 대한 사유가 점점 더 깊고 많아지는 현상에 어쩔 줄 모르겠다. 인생의 반환점을 돈 지금 시점에서 훗날 내가 죽음 앞에 직면했을 때를 상상한다. 나의 전 일생을 하나의 점으로 축약하여 반추할 기회가 있을 때, 바로 그때 나는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삶의 번민 중 대부분이 사람 사이의 문제이며 그것들 중 대부분이 본질적으로 '크기의 문제'에 연원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이 세계는 어떤 측면에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다. 수많은 사람들의 내적 의지는 내밀한 형태로 가려져 있지만 결국 그것들이 각자의 자아를 뚫고 나오는 과정에서는 상치, 오해, 태만, 격차 등이 발생하고 이로써 인간은 고통받고 상처받는다. 톨스토이는 이것이 바로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라 웅변했지만 그의 입장은 언제까지나 지나가버린 시간(과거)으로서만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는 논증이다. 나는 '마음의 크기'의 내실을 믿는다. 그저 단순한 웅장함이 아닌 실질적인 힘과 내용을 가진 마음의 크기 말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양육하며 과거에 비해 많이 성장해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성장의 새로운 단층을 발견할 때마다 내 실존은 웃음을 짓고 긍정적 미래를 희망한다. 반면 '아직도 멀었다'는 탄식 또한 내 현존을 억누른다. 나는 좋은 남편일까. 좋은 아빠일까. 좋은 성도일까. 내 마음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과연 나는 '큰 사람'일까. 내 사위(四圍)를 감싸고 있는 세계의 다양한 디테일들을 담아낼 수 있을 만큼 내 마음속 항아리는 충분하게 클까. 아니라면 훗날이라도 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다양한 질문과 사유가 용솟음친다. 이 현상의 동기 선상에  톨스토이의 역작 『전쟁과 평화』가 놓여 있다.

   문학작품으로서 소설의 끝장을 보여준 걸작 『전쟁과 평화』를 읽으며 나와 타인, 삶과 세계에 대해 탐구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자세한 서평은 완독 후 특별판으로 남기겠다. 걸작에는 걸작에 맞는 후기가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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