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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평점 :
주체의 추동력 『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후마니타스, 2015. 5.
이 책은 표지에서 한번 멈추고, 서문에서 다시 멈춘다. 우리 모두 불안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불안을 극복하라고 외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근원을 알 수 없는 이 불안이 사회에서 온 것인지, 나의 기질에서 출발한 것인지 파악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 불안에 대한 사회학적, 심리학적 분석이라니,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책은 사회학보다는 심리학에 살짝 치우쳐 있다. 최고의 미덕은 역사적인 사실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를 포함한 예술작품까지 폭넓은 분석을 한다. 현재 우리의 한국 상황에서 읽어볼만한 의미 있는 책이다. 2015년 한국은 존재 자체가 불안이다.
나는 젊은 날, 아주 짧게 서울에 거주했다. 이후, 베이스캠프가 없는 서울에 올라가면 늘 친척과 지인 집에 신세를 졌다. 온전히 혼자였던 경험이 없었던 거다. 늘 사람들과 함께하는 곳이 서울이었다. 약간은 들떠 있고, 일상에서 비켜선 느낌이 있었다. 이 느낌을 살짝 비트는 경험이 이번 여름에 있었다. 전과는 다르게, 여행자적 시선으로 서울을 느껴볼 참이었다. 광화문에 호텔을 잡고, 시간 되는대로 청춘이 얼룩진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과거, 현재를 살아가게 하는 힘
과거, 불안에 휩싸인 새파란 청춘의 ‘나’가 서울에 있다. 이제는 어느새 지방도 서울을 닮아있다. 홍대, 북촌, 서촌은 지리적으로는 서울에 있지만, 유사 문화로써 지방 곳곳에 퍼져 있다. 서울이라고 해서 따로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내게 유일성을 가진 공간으로 존재한다. 지금은 십년 후의 내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다. 퇴직을 원할 때가지 큰 이 이변 없이 가르치는 일을 생업으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이십대 서울에서 나는 1%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다. 연애를 하게 될지, 결혼은 가능한지,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 미래는 열려 있었으나, 손에 쥐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내게 미래에 대해 아주 조금만 팁을 준다면, 어떻게든 힘을 내어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젊은이들이 느낄 불안의 강도를 간접 체험하면서, 그들에게 미래는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레나타 살레츨의 『불안들』은 거기에 맥이 닿아 있다.
저자 레나타 살레츨은 슬로베니아 출신,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마르크스주의적 라캉주의 철학자. 런던정경대학에서 강의했다. 충분히 신뢰를 주는 이력이다. 저자는 불안이 사람을 마비시키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데 매개가 되는 바고 그 조건(40쪽)이라고 말한다. 20004년 출판된 이 책에서 저자는 전쟁, 실패, 성공, 사랑, 모성, 증언과 관련된 불안을 밀도 있게 분석한다.
불안, 억압된 리비도
불안은 내적, 외적 위험으로부터 주체를 보호하려는 심리적 장치다. 불안은 결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원인이기도 하다. 정신분석적으로 불안은 거세 위협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사회적 좌표와 타인과의 관계는 늘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불안에는 불안정서와 불안 신경증이 있다. 불안정서는 외부를 컨트롤할 수 없을 때 나타난다. 하지만 둘은 강렬하게 연결되어 있다. 불안은 개인인 내가 느끼지만, 그 불안을 만드는 메커니즘은 보편적이다. 두려움은 사스보다 빠르게 퍼져(38쪽) 간다. 미디어는 사람들에게 불안을 유발한다. 불안은 근원을 모르기 때문에 공포다. 두려움은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다.
불안과 우울 모두 대상 상실의 서로 다른 반응이다. 불안은 대상 상실로 인한 위험의 신호라면, 우울은 주체가 상실한 대상과 고집스레 동일시한다. ‘애도와 자살’에 대한 분석도 흥미롭다. 애도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과 분리되는 과정(67쪽)이지만, 이를 통해서 주체는 상실한 대상과 잘 이별할 수 있다. 애도하는 주체와 달리 우울증 환자는 상실과 결여를 혼동한다(70쪽).
이 책은 라캉의 ‘주이상스(joissance)’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라캉은 불안이 거세 위협에 대한 주체의 반응이라는 프로이트의 견해에 동의한다. 주체의 형성에서 그런 의미의 불안은 욕망의 형성에 앞서는 무엇으로 여길 필요가 있다. 주체가 말하는 존재가 될 때 언어는 주체를 특정 짓고 주체에게서 어떤 본질적인 주이상스를 빼앗는다. 언어 체계에 들어가는 상징적 거세 과정에서 몸에서 주이상스를 빼내 그것을 단지 가장자리의 부분 충동(partial drives)으로 남겨 놓으면 불안은 이후 이 상실된 주이상스를 지향하는 자극이 된다(68~69쪽). 욕망은 늘 불만족과 연결되어 있는 반면, 주이상스는 주체를, 보통은 아주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대상 가까이 데려간다(108쪽).
환상은 주체의 불안을 막아 준다(71쪽). 대타자의 욕망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체는 환상을 통해서 대타자의 욕망에 가 닿으려고 한다. 현실과 환상의 매개에 예술이 있다. 예술에서 불안이 사라지고 있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예술가들은 서구 문명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며 맹렬하게 비판했다. 전쟁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심리적 외상을 평생 끌어안고 산다. 외적으로 일상생활이 가능할지라도, 전쟁 체험이 삶 깊숙이 자리 잡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불안을 제거하기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지난 일을 극복할 것을 강권한다. 불안을 회피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가 차원에서 불안을 억압한다.
성공 역시 더없이 행복하고 조화로운 상태는 아니다. 성공한 사람에게 불안은 욕망을 계속 살아있게 하는 충동이 된다. 가진 게 많을수록 불안한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은 선택이 많아질수록 이상적인 결과를 끌어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욕망하는 ‘대상’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소비 지상주의의 지배적인 마케팅이 된다. 특정 연애인이 광고하는 제품을 사용하면 그 연애인이 될 것 같은 욕망을 부추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이효리가 떠오른다. 본인이 화장품 광고를 하며 겪었던 심적 고통을 털어 놓은 적이 있다. 그 화장품을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효과를 과대 광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좋은 삶을 나누고 싶었던 그녀의 블로그를 다시 보긴 어려울 것 같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세계화된 자본주의 속에서 개개인은 개별화된 시장으로 존재한다. 제레미 레프킨이 언급했듯이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권리는 소비와의 접속에 있다.
“그 당시에 마케팅은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처럼 보이고 다른 누군가처럼 처신하도록, 즉 권위와 동일시하도록 납득시키고자 했다. 반면 오늘날의 광고는, 사람들이 여전히 역할 모델을 (예컨대 연애 산업에서) 찾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이 그런 모델들 속에서 “과장된” 측면을 발견할 것이고, 시장의 지시에 따르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더 기대고 있다. 그런데 이 새로운 마케팅 전략은 소비자들에게 많은 걱정을 야기하고 있다. 사실 주체에게 불안을 유발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117~118쪽).
사랑 역시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우연히 서재를 정리하다가 오래 전 썼던 편지 묶음을 발견한 적이 있다. 각각의 편지는 수신자가 전제하지만, 수신자를 지운다 해도, 수신자가 동일하다고 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내용들이다. 또한 수신자에게 닿지 못한 편지들이다. 대상 상실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랑받고 싶어 안달하는 주체는 대타자의 욕망에 가 닿기를 열망한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대부분의 사랑은 병적이다. 연애편지는 사랑이 얼마나 정신병적인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병적 증상이지만, 불치병이 아니다. 독감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내성을 키운다. 불안과 우울을 동반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모성 역시 불안과 결부되어 있다. 불안은 때에 따라서 모성의 원인이기도 하고, 결과이기도 하다. 얼마 전 자신의 아이를 죽인 여자에 관한 뉴스를 보았다. 남편과 부부 싸움 후, 배우자에 대한 분노로 아이를 죽였다고 한다. 아이를 죽인 다음 여자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살인에 대해 자백했다. 우리 문화는 자식을 소유물로 보는 경향이 강해서, 생계 비관 자살에서 아이들이 먼저 사례되는 경우가 많다. 서구 문화권에서 일어나는 자살 중에는 여성이 자신에게 벌을 주는 방식으로 친자 살해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유아 살해가 가끔 등장하는 것은 ‘만들어진(혹은 강요된) 모성’에 대해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프로이트는 어머니 신분은 여성들이 결국 중요한 무언가 - 자신을 완벽하게 만들어 줄 아이 -를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결여를 극복하려는 하나의 방법(191쪽)이라고 했다.
아기를 낳은 직후, 출산 우울증을 호소하는 여성이 (생각보다) 많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임신은 내 몸에 이질적인 세포가 자리를 잡고, 임부의 영양을 뺏는 과정이다. 따라서 출산은 임산부를 힘들게 했던 세포가 떨어져 나간 것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에서 아이는 다시 엄마가 집어 삼켜버릴지도 모르는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엄마의 자궁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인간은 아폴론적 시선으로 문명을 건설했다고 한다. 때문에 성장한다는 것은 아이가 어머니와의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심리적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인분 교수’가 실시한 검색어 1위에 올라와 있다. 수년 동안 지도 교수로부터 언어, 신체 폭력 뿐 아니라, 수차례에 걸쳐 인분을 먹였다는 내용이 전 국민에게 전해졌다. 이는 갑질 논란 이상을 고민하게 한다. 교수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현재 기사로 알려진 것은 빙산의 일각이라고도 한다. 한 개인에게는 아우슈비츠와 같은 고통이었을지도 모른다. 악은 그렇게 일상 속에서 조용히 일어난다. 피해 학생이 수감되어 있는 교수를 찾아갔다고 한다. 가해 교수는 “너도 이제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도 하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고, 피해 학생은 “그러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나는 모든 진실을 밝힌 학생이 앞으로도 불안과 우울을 극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가해 교수는 피해 학생의 대타자였을 것이다.
저자는 불안을 주체를 외상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신호로 간주한다. 역으로 외상적 기억은 불안 상태를 극복하는 해결책(227쪽)이 된다. 마지막 6장은 ‘증언’과 관련한 불안을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의 이야기로 풀어간다. 특히 영화 <인생의 아름다워>를 사례로 인상적인 분석을 펼쳐간다. 아들에게 수용소를 놀이터로 만들어 끝까지 살게 만든 아버지의 위대함은 환상 게임(252쪽)에 있지 않다. 아이가 대타자의 욕망과 동일시할 수 있도록 돕고, 죽음으로써 대타자와 분리될 수 있도록 아들에게 자유를 준다. 아들은 침략자뿐 아니라, 대타자인 아버지로부터도 해방(252~253쪽)을 경험한다.
불안 없는 사회의 불안
우리는 자기 계발, 심신수련, 힐링, 멘토, 웰빙, 웰다이가 범람하는 한국 사회에 살고 있다. 이 단어들의 의미는 이미 오래 전 변질되었다. 불안한 사회에서 행복한 개인으로 살기를 강요한다. 모든 불안의 문제를 사적으로 환원한다. 사회적인 문제에 눈감게 한다. 소비를 통해서 좀 더 나은 삶이 가능할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있는 불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는 것, 나와 같은 불안을 경험하는 사람과의 연대를 돕는 것, 불안은 삶의 추동이자, 결과임을 직시하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불안을 암세포로 취급하지 않은 것에서 출발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