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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샹떼 - 세계 영화사의 걸작 25편, 두 개의 시선, 또 하나의 미래
강신주.이상용 지음 / 민음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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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시선, 또 하나의 미래

씨네썅떼강신주·이상용, 민음사, 2015. 5.

 

반가운 책이다. 한번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영화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이 책에 언급된 영화를 다시 찾아본다. 영화관 죽순이로 살았던 세월이 제 값을 한다. 씨네썅떼에 실린 스물다섯 편중에서 두 편,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1972)을 제외하고는 한두 번 봤던 영화들이다. 이 책이 반가운 이유다. 일방적으로 영화에 대하여 기술하지 않고, 한 편의 영화에 대해 철학자와 평론가가 나누는 대화에 나를 초대해 준 느낌이다. 미디어 세대들에겐 대체로 그러하겠지만, 영화는 내게 학습의 장, 사회화의 공간이었고, 힐링이었으며, 때론 팝콘이었고, 예지 몽과 같은 미래의 주문이었다.

 

영화, 그리고 나

 

영화를 귀하게 구해 보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원한다면 언제, 어디에든 손쉽게 영화를 볼 수 있다. 중소도시라면 모를까, 면 동네에 극장이 흔치 않던 시절, 나는 시네마 천국의 토토처럼 영사실을 드나드는 행운을 누렸다. 우리 집은 영화관에 빵과 음료를 제공하는 도매상이었다. 배달 가는 리어카나 차에 실려 영화를 보러 다녔다. 좋은 영화, 나쁜 영화, 성인 영화, 아동 영화 가리지 않고 모든 영화를 섭렵했다. 70년대는 대부분이 반공영화와 무협영화, 호스티스 영화였고, 80년대 들어서서 헐리웃 키드가 되었다. 다른 세계를 엿보면서 인간 군상의 보편성과 고유성에 대해 스폰지처럼 흡수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생과 사회인의 경계선에서, 취업은 유능과 무능의 기준이 되었다. 학생도 아니고, 취업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수년 동안 유지되었다. 책을 읽는 것은 사치였지만, 의지할 것은 책뿐이었다. 책이 읽히지 않는 시간은 거의 비디오를 끼고 살았다. 가끔 가다가 친구를 만나도 꼬여있는 마음은 상처를 주고받았다. 루저는 루저와 연결되는 법이다. 뒤룩 뒤룩 살이 찌고 처져 가는 몸뚱이처럼 정신도 둔해졌다. 그때 내 영혼을 지탱해준 버팀목은 비디오테이프이었다. <스크린> 같은 잡지를 길잡이 삼고, 전작의 취향을 살려 배우 중심, 감독 중심으로 영화를 섭렵했다. 집 앞에 있던 비디오 가게에서 한 번에 세 개씩 빌려다 봤던 비디오들이 오늘날 내가 살아가는 자양분이 될 줄을 그때는 진정 몰랐다. 인생은 그렇게 내리막길로만 이어질 줄 알았던 거다.

 

접근성의 변화로 영화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달라졌다. 한때는 저작권에 대한 의식 없이 영화를 틀어주던 카페들이 더러 있었고, ‘비디오방이 대학 앞에 하나둘 들어서면서 술 마시기 전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정규직이 되어 십 수 년 정도, 휴일 아침 조조영화는 나만의 의례 행위였다. 혼자서, 커피 한잔 들고, 듬성듬성 앉은 드문 익명의 관객과 함께했던 시간 속에서 청춘이 조용히 흘러갔다. 평생 영화와 커피를 책임져줄 것 같은 사람과 짧은 만남을 같기도 했다. 현실의 삶에 서툰 나를 영화 속에서 숱하게 발견했다. 낮은 자존감에 스크래치 내는 일이 적어졌다. 진정한 영화쟁이들, 분석이 소름끼치는 평론가도 여럿 뵈었다. 역시 나는 제대로 읽는 독자, 제대로 보는 관객이 제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 여 년의 영화사 에 수작으로 회자되며 이름을 올린 영화. 대부분의 평론가의 이견이 별로 없을 스물다섯편의 영화 이야기가 이 책에 실려 있다. 일단 영화는 온전히 나와 화면으로 마주한다. 관객의 지평 안에서 읽히는 것과 놓치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함께 본 사람이 있다면 그와의 대화 속에서, 혼자라면 평론가의 평론이 두 번째 대화가 될 것이다. 평론가의 글에 경도될 것은 없다. “끝내 영화를 완성하는 것은 관객들(15)”이듯, 책을 완성하는 것은 독자들이므로. 영화는 감독, 배우, 스텝, 영화사의 입장이 골고루 반영되어 있다. 영화를 읽은 방식은 다양하다. 그럼에도 늘 개인의 판단은 위태하다. 지지든, 철회든, 타인의 생각과 내 생각의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게 마련이다.

 

철학자 강신주 평론가 이상용

 

씨네썅떼는 우리 각자가 영화를 봤을 때의 충격을 함께 분석하고 언어화하여 성찰할 수 있는 책이다, 철학자 강신주와 평론가 이상용이 함께 말하고 쓴다. 영화는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읽는 것이라면 이 책은 메타포 없는 사실로써만 그 의미를 함의한다. 6개월의 시간, 스물다섯편의 영화, 876쪽에 달하는 이 책에 대한 서평은 빙산의 일각이 될 것이다. 저자들의 수고로움이 우주라면, 서평은 운석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당연히 한꺼번에 읽을 책도 아니다. 두고두고 참조할만하다. 철학의 안받침 없는 영화 비평, 영화 문법에 대한 이해 없는 철학적 사유가 가지는 공허함을 최소화한 책이다. 드디어 우리에게 이런 책이 왔다는 기쁨, 철학적 깊이를 가지고 사유할 텍스트로써 영화를 바라본다.

 

영화가 만들어진 물리적 시간과 연대기적 시대의 정신을 결합하였는데, 그것이 그렇게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조에 포함되지 않는 동시성의 비동시성이 존재하겠으나, 여기 수록된 영화들을 네 갈래로 나누는데 특별한 무리는 없어 보인다. 1. 영화라는 테크놀로지(1895~1936), 2. 영화의 사려 깊은 의미(1939~1959), 3. 영화, 욕망을 발산하다(1960~1972), 4. 불안한 영혼, 방황하는 영화(1974~2004)는 각각의 시기를 설명하는데 주제문으로 타당하다. 저자들은 혁명, 전쟁, 운동 등을 오고가면서 사건으로서의 영화’(13)로 네 갈래를 나누었다. 스물다섯 편의 감독(director)이라기보다는 작가(author)’.

 

1. 영화라는 테크놀로지(1895~1936)

 

뤼미에르 형제가 <열차의 도착>을 상영하면서 시작된 영화는 사물을 인지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 놓았다. 영화는 <열차의 도착>과 함께 인류에게 도달했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상 기록은 다큐멘터리로, 멜리에스의 영화는 SF 영화의 시작이 되었다. ‘위대한 무표정(81)’의 버스트 키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실현한 에이젠쉬타인, 인간의 무의식을 그려낸 표현주의 감독 프리츠 랑, 자본주의 잔혹 동화를 그려낸 찰리 채플린이 영화라는 테크놀로지를 완성한다. one scene one cut의 홈비디오가 아니라면, 영화는 조각조각을 이어붙인 누더기 천이다. 두 시간 분량의 영화에는 거의 5천 여 개의 cut이 들어 있다. 수없이 많은 정보가 들어있는 오늘날의 영화를 백 여 년 전 사람들이 본다면, 몇 분 안에 기절할 거라는 가정을 충분히 해볼 수 있다. 편집을 의식하지 않고 영화를 보는 우리를 에이리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2. 영화의 사려 깊은 의미(1939~1959)

 

1, 2차 세계 대전을 통과하면서 인류의 실존이 화두로 등장한다. 복잡해진 인간관계, 관점은 사태를 다르게 드러낸다.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 삶을 진정으로 들여다보게 만들어 준 네오리얼리즘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 뮤지컬 영화의 시작 진 켈리, 가족 해체를 복잡하고 미묘하게 담아낸 <동경 이야기>(1953)의 오즈 야스지로, 서부에 길을 낸 <수색자>(1956)의 존 포드, 금지된 욕망을 그린 로베르 브레송 감독을 다룬다. 2부에 다루어지고 있는 거장 감독들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오마쥬로 인용되고 있다.

 

3. 영화, 욕망을 발산하다(1960~1972)

 

이제 영화는 욕망을 발산한다. 사회에 대한 관심은 개인의 사적 삶과 내밀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는 육체를 탐색한다. 내 안에 자리 잡은 타인, 그것은 나의 욕망이다. 욕망은 자기 안의 분열을 야기한다.

 

look & gaze : 보다와 응시의 사이에서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게하는 히치콕의 <싸이코>, 여기에서 시선은 공포 그 자체이다. 370쪽 두 저자의 대화는 영화 내용에서 뿐 아니라, 영화 자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대하여 사유하게 한다.

 

강신주 : look.의 주체는 나이고, gaze의 주체는 타인입니다. 어머니에게 청소하라고 잔소리를 들으면서 자란 딸들은 결혼하고 독립하고 나서도 집 정리를 열심히 해요.

이상용 : 히치콕 영화는 look보다는 gaze 개념에 가깝습니다. 여러 인물들의 시선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한곳으로 모입니다. gaze는 관음증적 욕망과 동시에 장차 받게 될지 모르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잘 설명해 주는 용어입니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는 자본주의에서 중산층의 속물근성과 단독자로서 그들을 해체시키는 하녀를 보여준다. 쥐를 잡아 죽이는 것과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은 전혀 다르지 않다. 고깃덩이 육체를 지닌 존재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다만 인간에게는 추악한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 <미치광이 피에로>(1965>로 장 뤽 고다르는 (카메라는 펜이라고 외쳤던) 누벨바그의 대표 주자가 된다. <확대>(1966)를 통하여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찍으려는 것과 찍힌 것 사이에 늘 간극이 존재한다.(470)”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이제 인간의 욕망은 좀비를 통해 드러난다. B급 감수성으로 현대인의 군상이 좀비로 형상화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욕망은 전염병처럼 퍼져 나간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물어뜯어 좀비가 되고, 죽은 육체는 다시 살아난다. 관습적으로 그들이 마지막 공격하는 지점은 (백화점 또는 월마트와 같은) 자본주의 생산품이 가득한 장소다. 루이스 부뉴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1972)은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기호와 취향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고급 레스토랑의 메뉴판을 느긋하게 읽고, 와인을 감식할 수 있는 미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 달리 말하면, 생산이 아니라 소비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시대에 살고 있다. 부뉴엘의 바통을 홍상수 감독이 이어받았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4. 불안한 영혼, 방황하는 영화(1974~2004)

 

1970년대 이후, 영혼은 불안에 잠식당한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무한 경쟁과 일을 찾아 떠도는 노마드 속에서 자연스런 현상이다.

 

이제 영화 속 인간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모든 것이 불안했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살아가는 것, 우리 앨런은 말한다. 조증과 울증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느냐고. 인간은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증상을 오고가는 방황하는 존재일 따름이다.(572)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와 같은 뉴저먼 시네마 감독은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는 현실을 기록한다. 파시즘은 전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도처에 퍼져 있다. 일상을 수다로, 현실을 수다로 보여주는 것에 우디 앨런만큼 뛰어난 감독은 없다. 뉴요커는 로마, 파리, 바르셀로나와 같은 대도시를 전 방위로 뛰어다니며 사적 삶의 보편성을 포섭한다. 타르타코프스키의 영상 미학은 한 편의 시()가 된다. 친구에게 노트를 전달해주기 위해 오후를 다 보내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통해서 우리는 불안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불안은 희망과 상반된 관계가 아니라, 상보적 위치에 있다. 중국 5세대 감독 장예모는 <붉은 수수밭>으로 민중의 삶을 보여주며 중국 영화의 자존심을 세웠다.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는 자본주의의 깊은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소수자에 앵글을 맞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생물과 사물의 외형을 빌려 인간을 담는다. 이제는 배우보다는 감독으로 자리매김을 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헐리우드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

 

책날개를 덮으며

 

씨네썅떼는 앉은 자리에서 읽고 정리될 물성은 아니다. 도서관에서 빌려볼 책도 아니다. 서재에 꽂아두고 우울이 찾아올 때마다 영화 한편과 함께 참조할만한 책이다. 나 또한 한꺼번에 읽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한편씩 쪼개어 읽었다. 서평을 쓰는 부담만 없다면, 매주 한편만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봤던 영화 다시 보고, 그들의 토크 콘서트의 관객이 되고 싶었다. 후일 이 책을 가이드 삼아서 다시 한편씩 보고, 읽고, 쓰고 보고를 반복해보고 싶다.

 

인문학 강의가 넘쳐나는 시대다. 매주 시간을 내기 번거로운 이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책은 고맙기 그지없다. 평론가 이동진 · 소설가 김중혁이 함께 쓴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은 팟 캐스트 빨간 책방에서 나눈 이야기를 기록했다.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고, 그들의 대화가 이어진다. 그들의 대화에 초대받은 듯 페이지를 넘긴다. 글 보다 말이 가까운 시대다. 원전보다 주석이 중요한 독서법이기도 하다. 그들은 바쁘게 페이지를 넘긴 독자가 놓칠 수밖에 없었던 숨겨진 보석을 발견하여 빛나게 닦아 놓는다. 두 사람의 신뢰와 호흡이 대화의 질을 결정한다. 6개월 간 강신주와 이상용의 신뢰와 호흡의 결 또한 이에 뒤지지 않는다.

 

http://www.aladin.co.kr/search/wsearchresult.aspx?SearchTarget=Book&SearchWord=%BF%EC%B8%AE%B0%A1+%BB%E7%B6%FB%C7%D1+%BC%D2%BC%B3%B5%E9&x=0&y=0

 

삶과 영화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삶은 영화의 소재가 되고, 영화는 앞선 미래가 되기도 한다. 교육학을 전공한 교수님과 담소 중에 영화 몇 편을 추천해드리고 싶었다.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여쭈었더니, 수년 동안 영화를 본적이 없다고 하신다. 논문, 학회, 수업의 고된 노동 강도를 생각하며 이해하려 해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지점이었다. 소설과 영화를 보지 않고 인간에 대한 연구가 가능한가? 혹시 그래서 이 나라의 인문학은 지식으로만 존재하거나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삶은 정제되어 있지 않지만, 영화는 정제된 삶을 가시화한다.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look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의 gaze. 대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메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통찰이다. 영화를 보는 것, 철학의 시작이다. 철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영화관을 찾아야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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