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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
카롤린 라로슈 지음, 김성희 옮김, 김진희 감수 / 윌컴퍼니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드러낸 존경 혹은 무의식적 카피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
카롤린 라로슈 지음, 김성희 옮김, 김진희 감수
책이 도착한 내내 행복했다. 침대에 두고, 서재에 두고, 차에 가지고 다니면서. 텍스트 보다 그림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시간이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는지 몰랐다. 이 책을 보다가 문득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유화가 없어 집에 있는 아크릴을 꺼내어 캔버스 밑 작업만 해도 하루가 달라진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하면 아는 화가들은 늘 좋아하는 작품을 따라서 그려 보라고 했다. 그게 가장 좋은 그림 훈련(!!)이라고 했는데, 역시나 나를 매혹한 화가의 작품엔 나의 의식. 무의식이 맞닿아 있는 듯하다.
사람도 꽃도 힘들게 했던 꽃샘추위가 지나고 나니, 벚꽃 아름다운 것은 잠시였다. 해마다 봄이 있지만, 그 봄은 모두 달랐다. 자라면서 맞이했던 매 해 봄이 남긴 인상이 내 기억 안에 켜켜이 쌓여 유적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어떻게든 그해의 봄을 고유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여기 저기 아름다운 벚꽃을 많이 보았지만, 이번 봄엔 ‘시간을 함께 보낸 벚꽃’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리는 차안에서, 사람 많은 곳에서 벚꽃을 보는 사람은 하수다. 인적 드문 장소와 시간, 도수 낮은 알콜을 마시며 서너 시간 족히 앉아서 바라보는 벚꽃 그늘은 천상의 세계를 열어준다. 미리 보는 천국. 거기에 우리가 꿈꾸는 삶의 메타포가 있다.
세상 어디에도 새로운 아이디어는 없다. 읽은 책이 늘어갈수록 드는 생각이다. (나를 포섭하지 못하는) 남들의 명품 백 욕망이 내겐 책이었다. 명품백과 책의 차이가 있는가? 탐욕스럽게 책을 쌓아두고, 보며 행복해했던 시간의 도덕적 명분은 저자에 대한 감사함이었다. 책은 매력적인 인간이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주는 선물이었다. 당연히 신간을 가장 먼저 사서 보면서, 나는 이미 그 책을 읽었다는 우월감. 남보다 선점하는 기쁨을 누렸다.
욕망을 적당히 채우고 어느 지점에 도달해보니, 이제 신간의 매력이 조금씩 사라진다. 제목은 새로웠으나, 내용이 새롭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어른들의 구태의연한 말이 틀린 말씀은 아니었다. 신간 열권 보다 원전과 고전을 한 번 더 읽는 것이 더 낫다. 인류의 지적 자산은 선대의 지혜를 새롭게 번역하고 덧입혀 가는 과정인 듯하다. 최근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이 베스트에 올랐다. 책 제목을 기가 막히게 잘 뽑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미움 받을 용기가 없어 현실에 안주해 살아가고 있다는 자괴감이 큰 탓이다. 용기가 필요한 시기에 그것보다 더 ‘hook’할 수 있는 것은 없을 터. 그런데. 책을 사서 읽어보니, 내용은 아들러의 심리학이었다. 아들러를 읽었던 사람에게는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다시 돌아가서 아들러를 여러 번 제대로 읽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면, 후학들은 앞선 학자의 생각을 적당히 가공하여 팔아 치우는 소매상에 지나지 않을까?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는 – 드러내놓고 존경하거나 혹은 무의식적으로 카피하거나 – 이는 모사의 과정이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임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모사는)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가까워. 흑백의 명암에서 느껴지는 인상을 색채의 언어로 풀어내는 거지.(5쪽)”라고 말한다. 어쩌면 베낀다는 표현은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다큐멘터리가 CCTV로 있는 현상을 풀로 찍어내는 과정이 아니라, 편집과 연출을 통하여 예술이 되는 과정에 비교할 수 있다. 유사하나 전혀 다른 새로운 작품의 탄생이며, 원작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기도 하다. 원작의 권위를 파괴(12쪽)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카피의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 표현된 주제, 채택된 형식, 장르의 개념을 지준으로 세 개씩 짝을 이루는 3부작으로 이루어졌다. 읽다(보다) 보면 주제 보다는 소재 중심으로 정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최후의 만찬’, ‘누비 소매 옷을 입은 남자’, ‘시스티나의 성모’, ‘다정한 모자’로 분류하여 분석하다가 나중에는 ‘화가의 작업실’, ‘발코니’, ‘알제의 여인’, ‘유럽의 여다리’ 등 소재 중심으로 선회한다. 시기별로 사조를 나누는 미술사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시대별로 지배적인 장르가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장르는 여러 세기를 가로 질러서 지속되기도 한다. 단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을 뿐이다.
이 서평에 모든 작품을 모두 열거하는 것은 의미 없다. 렘블란트의 자화상, 로비스 코린트의 <삼미신>이 보여주는 나체, 사랑, 죽음, “꿈의 조립공” 구스타브 모로의 <환영>, 프랜시스 베이컨의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에 대한 습작>, 클로드 모네의 <런던, 국회의사당, 안개를 뚫고 비치는 햇빛> 등등 알고 있으나 다시 보면 새롭게 보이는 작품들이 가득하다.
한번 보고 서가에 꽂아두기 아까운 책이다. 그림은 글과 다른 방식으로 말을 건다. 이 책은 그림도 좋지만, 문학적 표현으로 격을 높였다. “말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다(207쪽),”지만, 글은 그림으로 들어가는 열쇄가 된다. 과거는 과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매번 새롭게 해석하고 변주하는 과정 속에서 다시 현재가 된다. 메를로 퐁티의 말처럼 어떤 그림도 회화를 완결할 수는 없고, 어떤 작품도 그 자체로만 완결되지는 않는다.(7쪽). 하늘 아래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다는 것은 아이디어가 convergence의 과정에서 창출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서 과거를 드리우며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가게 마련이다.
책의 서문에 있는 말을 상기해보면, 피카소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 그 작품에 내재해 있는 사유(思惟)라고 믿는다.
“화가란 결국 무엇인가? 남들이 소장하고 있는 마음에 드는 그림을 자기고 갖고 싶어서 직접 그려 소장하는 사람 아니겠는가. 시작은 그러한데 거기서 다른 그림이 나오는 것이다.”
피카소, 19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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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시대를 가로 질러서 사이의 여백을 메우고, 새롭게 나아가는 것, 그것이 누군가가 누군가를 카피하는 이유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