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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체포하라 - 14인 사건을 통해 보는 18세기 파리의 의사소통망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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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촘촘하게 역사 읽기, 현재의 나침반 『시인을 체포하라』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3. 12.

 

미시사학자 로버트 단턴의 18세기, 파리로의 초대는 시종일관 흥미진지하다. 예측불허의 상황이라든지, 반전에 대한 기대 때문이 아니다. ‘시인 체포’라는 사건이 이미 일어난 지점에서, ‘왜’ 혁명을 선동하지 않은 자들을 향하여 노골적인 공권력이 행사되었는지에 대한 해답을 촘촘하게 분석해나가기 때문이다.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 (Midnight In Paris, 2011)처럼 낭만적인 시대의 예술적 만남도 아니고, 리처드 커티스의 <어바웃 타임> (About Time, 2013)처럼 가상현실도 아니지만, 시종일관 독자를 붙잡는 힘이 이 책에 있다. 하나의 지점을 향하여 올곧게 나아가는 집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역사가 잠시 나선형으로 후퇴하면서, 권력이 언론을 장악하여 의제 설정에 개입하기 시작하면, 진실은 보도되지 않았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왜곡된다. 사적인 삶으로 침잠하는 순간, 정치는 우리의 삶의 전혀 무관한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2014년 한국은 공중파에 대한 불신을 넘어서서 ‘뉴스에 관심 두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지식인의 양심처럼 떠돌기 시작한다. 잠시의 움츠림은 힐링일 수도 있고, 패배자들 간의 다독임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은 포복으로 숨을 죽인 가운데에서도 바른 삶,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소극적인 저항이 필요하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독서나 교양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재가 침묵을 요구할 때, 역사는 현실을 읽는 나침반이 되어 준다. 연대기 순으로 기록하는 편년체나 군주 중심으로 기술하는 기전체는 역사적 사실의 인과 관계를 드러내주기는 하지만, 역사를 움직이는 파도를 만들었던 민중의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로서 역사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사건과 사건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변인들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역사를 통해서 단순히 과거의 아니라, 현재로 호출되어 새로운 의미망을 형성해야 하고, 새롭게 읽고 해석하는 관점과 문장력을 겸비한 사학자가 절실하게 필요한 까닭이다. 사건과 사건 사이의 빈 공간을 채우고, 숨겨진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구전(口傳)되는 이야기의 힘은 놀랍다. 전(前)세대는 후(後)세대에게 이야기 방식으로 축적된 자산을 전수했다. 전달의 과정에서 이야기는 풍부해지고, 약간의 간극 속에서 의미는 심도가 깊어졌다. 여기에 기억력의 한계를 이겨내는 장치가 바로 음악이다. 시(詩)처럼 만들어진 이야기가 음악과 만나면 암송은 더 쉬워져서 더 많은 사람이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시를 강력하게 단속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인을 체포하라』는 프랑스 혁명 직전인 18세기 중엽, 14인 체포 사건을 문화사가 로버트 단턴이 연구한 결과물이다. 당시 “시인을 체포하라”는 왕명이 내려지자, 경찰의 14명을 추출하여 바스티유 감옥에 감금한다. 물론 14명은 대부분 법률가와 성직자였으나, 시를 유통한 민중의 절반 미만의 사람만이 글을 읽을 수 있었다. 당시 문맹률이 50%가 넘었음에도 어떻게 민중들은 정보를 유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이다. 기록보다는 기억과 암송으로 인류의 유산을 지켜왔던 시대가 훨씬 더 길었다.

 

시인(詩人)은 단독자일 수 없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투박한 구어에 시적 형태와 운율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내용 또한 단순한 분노의 표출에서 정치적 신념으로 깊어졌을 것이다. 파리 정부가 14인을 체포해서 처형했다고 해서 지은이를 색출해서 제거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는 불리는 과정에서 계속 변주되고 있었다. 이 사건은 “집단 창작의 한 사례였다. 최초의 시는 다른 여러 시와 합쳐지거나 그 속 포함되고 한데 어우러져, 시적 자극의 장을 만들어냈다.(18쪽)” 다만 당시 사람들은 떠도는 시(詩)의 의미를 알고 있었고, 자신의 분노, 신념, 소망을 슬쩍 시에 섞어 넣었을 것이다. 대중에 관한 다음의 묘사가 시를 쓴 ‘글쓴이’에 대한 정확한 지명이 될 것이다.

 

【대중이라는 분】(153쪽)

 

그것은 규정할 수 없는 하나의 합성체다. 어던 화가가 그 진정한 특색을 모두 갖춘 모습으로 대중이라는 분을 그려내고자 한다면, 그는 아마도 이렇게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농부의〕 긴 머리칼, 〔신사의〕레이스로 장식된 코트, 〔성직자의〕모자를 머리에 쓰고, 〔귀족의〕검을 차고, 〔노동자의〕짧은 망토를 입고, 〔귀족의〕빨간 힐을 신고, 손에는 〔의사의〕문장이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장교의〕견장을 차고, 왼편 단춧구멍에는 십자가를 꽂고, 오른팔에는 〔수도사의〕망토를 들고 있다. 당신은 이분이 차림새만큼이나 멋진 이성적 판단을 할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미셸 푸코(M. Foucault)와 위르겐 하버마스(J. Habermas)의 접점에서

 

모든 권력자는 여론이 형성하는 담론을 규제하기 위해서 언론을 장악하여 적극 활용했다. 물자체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발화하는 순간 사건이 만들어진다. 푸코는 여론을 권력과의 관계로, 하버마스는 합리적 의사소통 과정으로 파악한다. 푸코는 미시 권력이 어떻게 개인을 통제하고 관리하게 되었는지의 역사적 과정을 탐색하였다는 점에서 담론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데 큰 통찰을 제공한다. 니체 『도덕의 계보학』의 연구 방법을 차용한 푸코의 『지식의 계보학』은 시대를 지배하는 담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고고학자의 탐사처럼 치밀하게 파헤친다. 다만 수동적으로 형성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의 능동성을 간과하였다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푸코는 죽기 직전까지 『성의 역사 3』에서 미학적으로 삶을 형성하는 자기 테크놀로지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하버마스는 합리적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다. 근대적 기획이었던 계몽주의가 실패했다는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서 토론할 수 있는 인간의 수용 능력을 토대로 공론장 개념으로 이론을 정립한다. 이성적이고 비평적인 의사소통 잠재력과 이성이 하버마스 이론 체계의 핵심이다. 로버트 단턴은 푸코와 하버마스의 중간 지점에서 자신의 연구 방법을 설정한다.

 

푸코에 따르면 담론은 특정의 제도적이고 물질적인 실천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재생산될 수 있다. 푸코의 담론이론은 담론이 순수한 언어 내적인 것도, 언어외적인 것도 아닌 의미생산체계로 보아 담론적인 것과 교육, 법제도, 감옥같은 비담론적인 것의 복합적인 관계에서 산출되는 효과를 사고할 수 있게 한다. 더 나아가 푸코의 관점은 담론을 자율적인 사회실천으로 보기 때문에 존재와 의식이라는 철학적 구분 속에서 사회적 의식을 사회적 존재의 반영 또는 표현으로 보는 관점과 대립된다. 푸코에 따르면 담론 실천은 일종의 독자적인 사회적 실천이기 때문에 비담론적 실천과의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비담론적 실천은 담론구성체의 규칙성에 영향을 줌으로써 특정한 담론이 출현하게 되는 조건들에 관계하고 그것의 기능 작용에 영향을 미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담론 형성과 대화를 통한 수용가능성은 의사소통 참여자의 참여적 태도로부터 규정된다. 객관주의적 의미의 관찰자의 시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버마스는 근대사회에서 공공영역의 발전을 화용론적 합의를 지향하는 탈억압적 의사소통 공간으로 규정하였다. 공공영역이란 "쟁점이 토론되고 의견이 형성되는 공공 토론의 장"이며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로버트 단턴은 그러한 공공영역의 출현이 18세기였다고 본다.

 

촘촘하게 역사 읽기

 

역사와 관련한 역설은 항상 존재한다. 국가가 역사 교육을 강화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역사주의와 국가주의가 보수의 무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소치 올림픽에 출전한 김연아 선수를 겨냥해서 만들어진 “김연아 당신은 대한민국입니다.”는 개인의 삶을 국가로 환원하는 심각한 해프닝을 연출했다. 역사를 바로 읽는다는 것은 거대담론 속에 묻혀서 드러나지 않는 잔가지를 들추고 빈틈을 메워서 새로 쓰는 작업이다. 열린 해석과 가능한 상상을 통해서 역사는 이야기를 품고 무한대로 펼쳐질 수 있다. 푸코가 염려했듯이 의사소통과 관련한 역설도 존재한다. 올바르지 못한 정보가 사실처럼 유통되면서 ‘합리적인’ 의사소통 체계가 무너지는 디스토피아가 될 수도 있다. 정보화, 세계화 속에서 우리가 지금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시인을 체포하라』 는 그 역설에 대한 고민을 제공한다.

 

우리는 정보기술 자체의 문제가 아닌 ‘정보기술의 발전과 확산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결국 어떤 정보화 사회로 나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기술의 차원이 아니라 정치의 차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보사회가 가져오는 편익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동시에 더욱 민주적이고 더욱 인간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메커니즘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최근 정보사회에 따른 새로운 움직임들은 희망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노동자 정보화 사업단이 발족하여, 정보통신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을 추진하고 있으며 통신이용자와 노동자의 연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정보사회에서 ‘기계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불평등의 구조에 대한 도전은 많은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연대를 통해서 현재의 정보 불평등을 당연시하는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시를 추적하는 일에 공권력을 동원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그 시대의 의사 소통망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단초를 제공한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절반 넘는 시대의 소통방식을 알아볼 수 있는 책이 될 것이다. 단선적이지 않았을 인과 관계를 그려내는 일, 사건의 원인과 영향, 우연과 필연 사이의 결정 인자일 수도 있는 사건을 밝혀내는 연구를 통해서 현대 사회 의사소통의 문제점과 대안을 탐색하는 계기를 마련한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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